한국가톨릭병원협회 [한] 韓國~病院協會 [영] Catholic Hospital Association of Korea

국내 가톨릭이 설립, 운영하는 병원들의 협의체로 1967년 7월 30일 발족되었다. 1981년 말 현재 전국의 28개 종합병원, 24개의 병원 및 진료소가 협회에 가입되어 있다. 서울시 강남구 반포동 505번지 가톨릭대학의 학부 건물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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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톨릭미술 [한] 韓國~美術

한국에서의 가톨릭 미술의 자생적 시초는 1784년의 한국 천주교회 창설 및 교인들의 천주 경배의식과 더불어 비롯되었다. 시각적 경배 대상으로서 천주상과 그 밖의 상본(像本) 그림이 사실적인 서양화법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곧 한국에서의 서양미술 수용의 시초이기도 하였다. 교인 중의 화가가 독실한 신앙심으로 교우들을 위해 그린 초기의 상본화는 이승훈(李承薰)이 1783년에 중국 북경(北京)에 가서 그 곳 천주당(天主堂)의 프랑스인 신부에게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고 이듬해 돌아올 때에 가져온 상본(유채화였을지도 모른다) 등을 먹붓과 전통적 채색기법으로 모사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1784년 3월(음력)에 북경에서 귀국하면서 이승훈은 각종 교리서와 상본화(像本畵), 십자고상(十字苦像), 묵주 등을 조선에서의 전교를 위해 받아 가지고 왔던 것이다. 1785년에는 서울 명례방 집회장에서 그리스도의 상본이 형조(刑曹) 기관에 압수된 적이 있었다. 그 뒤 서울에서 상본을 그린 확실한 기록의 교인 화가는 1801년의 신유(辛酉)박해 때에 이승훈, 정약종(丁若鍾) 등에 뒤이어 처형당한 이희영(李喜英, 루가)이다. 여주(驪州)와 서울에서 직업화가로 생활하다가 천주교인이 된 그는 상본화를 맡아 그리며 전교에 이바지하다가 같은 해에 순교한 황사영(黃嗣永)에게 천주상[耶蘇像] 세 폭을 그려 보냈던 사실이 밝혀져 목베임을 당하였다. 이희영이 그린 천주상이 전해지지는 않으나, 한국 가톨릭 미술사의 뚜렷한 첫 화가인 그의 회화역량을 확인시키는 자유로운 작품으로는 <앉아 있는 개>(숭전대학교 박물관)가 있다. 늘씬한 서양개의 표정을 깔깔한 가는 먹붓으로 마치 연필 스케치처럼 묘사한 근대적 양풍(洋風) 그림이다. 그렇듯 그는 양풍 화법에 익숙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서울에는 북경에서 구해온 서양 그림이 꽤 있었고, 이희영도 그것을 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가까운 인척이며 교우였던 김건순(金健淳)은 여주의 어느 교우집에서 성 미카엘 천사의 상본을 본 적이 있었음이 기록으로 나타난다.

한국인이 서양 화법의 특이한 실상을 처음 접한 것은 17세기의 일이었다. 중국에 갔던 정부 사신(使臣)과 그 수행원들 중에 북경의 서양인 선교사를 접촉하거나 천주당을 구경하며 서양문화의 특이한 화법과 건축양식 등을 보고 감동한 일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1630년에 명(明)나라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鄭斗源)은 이듬해 귀국할 적에 화포(火砲)와 망원경, 시계 등 서양문물을 얻어 왔고, 그때 그는 북경의 이탈리아인 신부 로드리게스(J. Rodriguez, 중국명 陸若漢)와도 접촉을 가졌다. 그 뒤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637년) 때 청(淸)나라에 볼모로 잡혀 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는 1644년에 북경에서 아담 샬(Adam Schall, 중국명 湯若望) 신부와 자주 만나 천주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음 해에 귀국하면서 그는 신부에게서 각종 서양문물과 함께 천주상 그림 한 폭을 선물로 받아 갖고 왔다. 그 상본이야말로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사실적인 서양그림이었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는 서양문화와 천주교에 관심이 있던 학자로서 북경에 갔다가 천주당의 성화와 조각상에 감명한 사람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그 대표적 인물은 1766에 북경에 갔던 홍대용(洪大容)과 1780년에 다녀온 박지원(朴趾源) 등이다. 특히 박지원은 그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천주당기’(天主堂記)와 ‘양화’(洋畵) 항목을 설정하고 북경 천주당의 벽화와 천장화에서 본 서양 화법의 경이로운 표현미와 생동감에 너무도 감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상세히 적음으로써 국내에 양화 지식을 넓이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다가 1784년에 북경에서 돌아온 이승훈을 중심으로 한국에 마침내 자주적 천주교회화가 생기며 전교와 미사에 필요한 그리스도상과 그 밖의 상본화가 한국인 화가에 의해 그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회가 탄생한 이듬해인 을사(乙巳) 박해로부터 이미 시작된 정부의 가혹한 천주교 박해로 인해 그 상본들의 역사적 전래 혹은 보존은 불가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희영의 기록 말고는 그 시기의 다른 상본 혹은 상회 제작 내막을 일절 알아볼 수가 없다.

1882년부터 구미(歐美) 여러 나라와 국교관계를 맺기 시작하며 신앙의 자유가 드디어 용인되고, 특히 1886년에 한불수호조약(韓佛修好條約)이 체결되자 천주교는 전멸상태에서 광명과 회생의 활기를 얻게 되었다. 한국 가톨릭 미술의 분명한 전개도 사실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와 처음부터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그들 자신 한국에서 여러 명의 순교자를 낸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서울에서 즉각 성당과 그 부속건물을 서양의 교회건축 양식으로 짓게 되었다. 1890년과 1892년에 준공된 종현(鐘峴, 현 明洞)의 주교관(主敎館)과 약현(藥峴, 현 中林洞)성당, 그리고 1898년에 낙성된 명동성당 및 같은 무렵에 세워진 그 뒤편의 성바오로 수녀원 건물은 한국 가톨릭 건축미술의 역사적 효시일 뿐 아니라, 한국근대건축사의 견지에서도 현존하는 대표적 기념물들이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프랑스인 신부들은 한국에서의 성당 건축을 높은 뾰족탑과 수직적인 구조를 갖는 유럽의 고딕 양식으로 지었다. 두세(Camille-E. Doucet) 신부의 설계로 여겨지는 중림동성당은 한국에서 처음 세워진 고딕 양식의 벽돌건물이면서 부분적으로 로마네스크풍의 수법을 절충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고딕 양식의 초기 성당 건축 중에서 가장 명쾌한 구조와 아름다운 세부설계의 걸작은 명동성당이다. 여기서 프랑스의 투르(Tours)에서 만들어온 화려하고 엄숙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처음으로 장식되었는데, 곧 뒷벽의 <로사리오 15현의도(玄義圖)>, 동쪽 윗벽의 <동방박사의 경배>, 그리고 서쪽 윗벽의 <천국의 열쇠를 받아 든 성 베드로>이다. 붉은 벽돌구조의 이 대성당과 유럽식 2층 주거양식의 주교관 및 수녀원은 모두 부주교였던 코스트(Coste, 高宜善) 신부가 설계 · 감독하였다. 1892년에 세워진 서울 용산 성심신학교 건물인 지금의 성심수녀원과 그 안의 작은 고딕양식 성당(1902년에 준공) 역시 그의 설계로 이루어졌다. 그 밖의 고딕풍 성당으로는 1918년에 건립된 대구(大邱)성당과 1937년에 세워진 인천(仁川) · 전주(全州)성당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가톨릭 교세의 급속한 발전과 함께 독일 베네딕토회, 미국 메리놀회, 아일랜드 골룸바노회 등이 한국에 진출해 오면서 성당 건축과 그 밖의 교회 미술에도 각기 특색을 갖는 다양성을 보게 되었다. 1927년에 함경남도 덕원(德源)에 건립된 베네딕토회 수도원 성당은 바실리카 양식을 곁들인 로마네스크풍의 당당하고 본격적인 설계였다. 반면, 메리놀회 신부들이 지은 성당건축은 유럽의 전통양식을 한국에서의 형태로 지방색화 하려고 들었다. 그 대표적인 본보기는 1924년경에 세워진 신의주(新義州) 성당이었다. 그것은 바실리카 양식에 한국 고유의 합각지붕을 갖는 독특한 설계였다. 오늘날 북한 지역의 그 성당들이 어떤 상태로 남아 있는지, 혹은 없어져 버렸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앞의 성당들은 말할 것도 없이 내부의 여러 성상(聖像) 그림과 그 조각 그리고 각종 성기(聖器) 공예품을 갖추게 되었으며, 그것들은 거의가 중국, 프랑스, 독일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한국 미술가가 제작한 것은 1920년대에 가서야 보게 되었다. 인천의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난 화가 장발(張勃)은 유채로 많은 상본화와 성화를 그린 가장 대표적인 미술가이다. 현존하는 그의 초기 그림의 하나는 그가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던 1920년에 그린 서울 대교구 소장의 <김대건 신부상>이다. 여러 증언을 토대로 그렸을 이 초상화는 자연스런 유화 작품으로 시도돼 있다. 그러나 그 뒤 그는 독일의 엄격한 보이론(Beuron) 성미술 화법에 감화를 받게 되었다. 그는 서신 연락으로 뮌헨의 그리스도교 미술협회 회원이 되어 그 협회의 월간 <그리스도교 미술>(Die Christich Kunst)을 구독하고 있었으며, 주위의 몇몇 성직자는 그에게 보이론 유학을 권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장발은 동경미술학교 재학 중에 뉴욕으로 가서 1925년에 컬럼비아대학 미술과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그해 바티칸에서 거행된 한국 순교자 시복식(諡福式)에 형 장면(張勉)과 치명복자 친족 대표로 뉴욕에서 직행하여 참석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가 귀국하자 명동성당에서는 그에게 제단(祭壇) 뒷면을 장식하게 <14종도상(宗徒像)>을 위촉하였다. 경주(慶州) 석굴암(石窟庵)의 내벽 원형구조와 본존불(本尊佛) 배경의 10대제자(大弟子) 입상부조(立像浮彫) 배열을 가보고 참작한 장발의 그 첫 본격 상본화는 보이론 화법의 엄숙한 양식으로 제작되었다. 그 때 종도들의 순위 등을 지도한 김 요셉 보좌신부는 김 골룸바와 아녜스 성녀의 인척이었다. 그 관계로 장발은 김 신부의 개인적 요청을 받아 <김 골룸바와 아녜스 자매>(절두산순교자기념관)도 그리게 되었다. 역시 김 신부의 지도를 받은 이 성스러운 표정과 엄격한 상본 양식의 성녀 자매상은 화면 밑의 주제 설명 글자들의 장식성과 더불어 보이론풍의 전형이다. 반면, 1928~1929년에 그려진 <복자 김대건 신부상>(절두산순교자기념관)의 갓을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은 전신상의 한결 자연스런 표현과 밝은 색채 구사는 프랑스의 나비파(Nabis) 화가 드니(Mauris Denis)의 종교화에서 영향을 받은 수법이다. 장발의 다른 성화 기록으로는 1933~1934년의 신의주 성당 벽화 <성신강림>(聖神降臨), 1935년의 평안북도 비현(批峴)성당 <예수 성심상(聖心像)>, 1940년 무렵의 평양(平壤) 서포성모회(西浦聖母會) 수녀원 <복녀 골룸바와 아녜스 치명(致命)>, 1945년의 서울 가르멜 수녀원 제단화 <성모영보>(聖母領報)와 가르멜 성당 <성모대관>(聖母戴冠) 등이 대표적 제작이었으나, 북한 지역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에서도 6.25전쟁의 재난 등으로 거의 파괴돼 없어졌다. 다만 가르멜 수녀원에 1941년 제작된 장발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와 <성모영보>가 보존되고 있는데, 매우 회화적 표현으로 그려져 있다. 장발 외에도 이순석(李順石)이 19세의 미술학도로 1923년에 중림동 성당을 위해 그린 <성 베드로>와 <성 바울로>가 있었다. 반신상의 그 두 상본화는 성당 안 양 벽에 걸려 있다가 6.25전쟁 때 없어졌다. 반면, 유럽에서 그려져 온 성화로 현존하는 대표적인 것은 명동성당에서 특별히 주문 제작한 대작 <순교복자 79위>와 <그리스도와 죄인>이다. 앞의 것은 1924~1925년에 벨기에에서 그려 온 탓으로 인물 표정 등이 거의 서양인상이며, 뒤의 것은 프랑스에서 가져왔다고 하는 고전적 화법의 성화이다. 그리고 광복 전까지 북한의 덕원성당에는 독일 화가가 그린 등신대의 <12종도상>이 있었다. 성상 조각으로서는 동경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한 윤승욱(尹承旭)이 1939년에 동경에서 개최된 로마 전시를 위한 가톨릭미술 공모전에 <그리스도 입상>을 출품했던 기록과, 그 뒤 서울에서 대리석 조각의 전신상으로 <복자 김대건 신부상>을 제작했던 사실이 확인되나, 그 작품들이 전해지지는 않는다.

1945년의 민족 해방은 동시에 국토의 남북분단을 가져오고,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는 이윽고 모든 종교를 말살시켰다. 그간 북한 지역에 뿌리내려 졌던 가톨릭 성당과 수도원, 수녀원은 건물만이 남아 병원 혹은 다른 용도로 전용되었다고 한다. 그 상황에서 성화와 성상 등이 온전할 리가 없다. 모두가 파괴되고 불태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자유로운 종교 활동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은 장발 학장을 중심으로 이순석, 윤승욱, 김종영(金鍾瑛) 등이 교수진을 구성함으로써 한국 가톨릭 미술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 서울미대 교수진 가톨릭 미술가와 졸업생 중의 신진 가톨릭 화가들은 공산군 남침의 6.25전쟁을 치른 직후 1954년 10월에 종합적인 성미술전(聖美術展)을 조직하여 가톨릭 미술을 폭넓게 추구하였다.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열린 그 전람회의 출품내용은, [그림] 장발 <십자고상>, 정창섭(丁昌燮) <삼왕내조>(三王來朝), [조각] 김종영 <마돈나>, 김세중(金世中) <복녀 골룸바와 아녜스 자매>, [공예] 이순석 <십자가와 촛대>, 백태원(白泰元) <성서대>(聖書臺) 등이었다. 그 뒤 1970년에는 역시 서울 미대 계열이 주축이 된 ‘서울가톨릭미술가협회’가 창립되고, 다음해부터 정기적으로 회원작품전이 개최되어 1982년에 10회전을 기록하였고 출품회원도 여러 분야로 증대하였다. 앞에 나온 작가들 외의 그간의 중요 출품자는, [그림] 박득순(朴得錞), 김원(金源), 박세원(朴世元), 나희균(羅喜均, 입체작품도 병행), 이남규(李南奎), 김태(金泰), 방혜자(方惠子), 윤명로(尹明老), [조각] 최의순(崔義淳), 최종태(崔鍾泰), [공예] 권순형(權純亨), 김교만(金敎滿), 강찬균(姜燦均), 민철홍(閔哲泓), 김희진(金喜鎭) 등이다. 대구와 부산에도 1965년과 1983년에 ‘가톨릭미술가협회’가 각각 발족하여 작품전을 갖고 있다.

1950년대 이후,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각처에 새로이 건립된 성당 · 수도원 · 수녀원에서는 가톨릭 미술가들에게 벽화와 각종 성화 및 성상 조각을 의뢰하였다. 그로 인해 상당수의 실적을 보게 되었는데, 전통화법으로는 장우성(張遇聖), 장운상(張雲祥), 방오석(方五錫), 유화로는 박득순, 정창섭, 그리고 조각에서는 김세중, 최의순 최종태 등이 많은 제작을 맡았다. 한편 작품으로서 평가의 대상이 된 성당건축으로는 이희태(李喜泰)의 서울 혜화동성당(1958)과 절두산성당(1967), 김수근(金壽根)의 마산성당(1979)과 서울 불광동성당(1983), 김원(金洹)의 서울 한강성당(1980)과 성 바울로 성당(1983), 유희준(劉熙俊)의 서울 반포성당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1957년에는 벨기에 만국박람회 종교미술전에 한국 가톨릭 미술가들의 작품도 출품되었는데, 곧 장발, 장우성, 박순득 등의 성화와 김종영, 김세중, 송영수(宋榮洙), 정기은(張基殷), 차근호(車根鎬)의 성상조각이었다. (李龜烈)

[참고문헌] 柳洪烈, 增補한국천주교회사, 上 · 下, 가톨릭출판사, 1981 /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方五錫, 現代 韓國가톨릭 美術에 관한 硏究, 敎會史論叢,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張勃, 朝鮮 カトリツク藝術, カトリツク大辭典, 富山房, 東京 1940 / 尹一柱, 韓國現代美術史-建築, 국립현대미술관,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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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톨릭문화연구소 [한] 韓國~文化硏究所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를 비롯한 한국 천주교회사의 사료보존 및 정리를 위하여 설립된 연구소. 1978년 9월 한국순교복자수녀회의 김옥희(金玉姬) 수녀에 의해 설립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 관계된 연구활동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사상과 철학이 한국문화에 끼친 영향, 유교문화와 가톨릭문화와의 연관관계 등에 대한 연구활동도 하고 있다. 현 대표자는 김옥희 수녀로서 부산 동래구 오륜대순교자기념관과 서울 용산구 한국순교복자수녀원 내에 소재하고 있다. 간행물로는 ≪광암(曠庵) 이벽의 서학사상≫, ≪제주도 신축년 교난사≫(濟州島辛丑年敎難史), ≪최양업 신부와 교우촌≫ 등이 있고, 한국가톨릭문화문고를 발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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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톨릭문학 [한] 韓國~文學

한국 가톨릭 문학은 1860년대초에 조선조 실학파(實學派) 계열 학자들이 스스로 중국 북경(北京)에 왕래하며 당시 그곳에 이미 들어와 있던 가톨릭(Catholic)교, 동양에 번역된 이름으로는 천주교(天主敎)를 배워 들여온 데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 민족은 고대에 토착신앙으로 샤머니즘을 지녀 왔으며 뒤에 불교(佛敎)와 유교(儒敎)가 외국으로부터 들어와 한국 민족의 생활풍토에 융합되어 문화와 사상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에 이바지하였다.

천주교 신앙은 이 재래의 문화에 소통되고 접합(接合)되는 양상 안에서 존재 의의가 드러나게 된다. 샤머니즘은 나름대로 천신계(天神系) 국조(國祖) 의식과 제천(祭天) 행사를 통해 천심과 민심의 만남을 의식하였다. 불교는 영겁(永劫)의 사상을, 유고는 이기설(理氣說)로써 본체론적 형이상학을 전개한 면이 있다. 조선조 천주교회 창설운동의 지도자였던 이벽(李檗)은 유교에 통달한 학자로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는 “유교가 천주교의 신관(神觀) 내지 우주관과 대립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유교는 성리학(性理學)의 이기설을 통해 ‘보편’과 ‘영원’을 인식하고 인정하며, 일반윤리로 충효(忠孝)를 중시하는 바, 이러한 요소들이 천주교의 교리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조선조 시대에 종교들이 민중 속에 소통되는 양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불교는 그 진리를 이해함에 있어 높은 수준의 달관(達觀)과 어려운 선문답(禪問答)이 개재되어야 하였다. 유교 그리고 실학까지도 한자(漢字) 대한 이해력이 있는 사대부(士大夫) 즉 양반계층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천주교에 이르러 진리는 대중 속에 소통되어 들어갔다. 위로는 국왕(國王)을 초월하여 ‘만물(萬物)을 내신’ 한 분 창조주를 사랑하고, 아래로는 모든 사람을 자기같이 사랑하며, 국왕으로서는 헤아리지 못하는 양심법(良心法)을 명시하며, 미신적 뭇 역신(疫神)에 의한 공포를 배제하고 악의 유혹을 극복하도록 가르쳤다.

여기서 우주의 참된 진리와 인간 구령(救靈)의 길이 학자와 평민 일반 속에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진리의 생활화가 계급을 초월하여 대중의 바닥에 침투되었을 때 정치 세력들 사이의 분쟁과 편견에 의한 신앙 박해에 맞서 무려 1만여명의 순교자를 내는 역사적 이변이 생길 수 있었다.

이 천주교 신앙의 전파 과정에서 한국 문학사(文學史)에 한 장르를 차지할 만한 천주가사들이 나타났다. 이벽의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 정약전(丁若銓)의 <십계명가>(十誡命歌), 이가환(李家煥)의 <경세가>(警世歌), 최양업(崔良業)의 <사향가>(思鄕歌), <천당이라>, 조호식(趙顥植)의 <금침가>(金鍼歌), 김낙호(金樂浩)의 <자신책가>(自身嘖歌)를 비롯하여 많은 작품들이 있다. 최양업 신부 개인의 작품만도 20여 편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 4조(調) 2음보(音步)로 조선조 후기가사(後期歌辭) 형식에 한글로 된 이 천주가사들은 서민 대중 속에 쉽게 소통되어 들어갔다. 그 내용은 교회 개척기와 박해기에는 호교(護敎)와 순교의 정신을 내포하면서 정돈되고 세련된 언어 구사를 보여 준다. “어화우리 벗님네야 우리본향 찾아가세 / 동서남북 사해팔방 어느곳이 본향인고” 이렇게 시작하는 <사향가>와 “가사이다 가사이다 천당으로 가사이다 / 천당은 어디던고 만복지소 여기로다” 이러한 능란한 표현을 담고 있는 <천당이라> 등이 교리 · 묵상 · 노랫가락인 동시에 시로서 대중 속에 전파되었다. 천주가사는 1910년대 이후까지도 창작되고 소통되었는데, 개항(開港)과 더불어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후에는 천주가사의 내용이 호교정신을 벗어나 사회 대중 속에서 자신의 신앙 자세를 반성하는 데까지 이른다. “외교인중(外敎人中) 어떤사람 / 천주도리 모르건만 / 하는행위 살펴보면 / 내게비겨 초월하다”(<자신책가>). 이와 같은 자아비판 의식까지 이르면 천주가사가 오히려 사회 안에 활성화될 가능성도 지녔던 것이다. 박해시절의 산문문학 유산으로는 이 루갈다의 ‘옥중서한’(獄中書翰)이 조선의 세련된 규방문학(閨房文學) 문체로 평가되기도 한다.

1900년대 초에는 일본을 통해 서구의 문예 장르와 기법들이 밀려 들어와 재래 한국문학 장르들이 외형상 변모를 치르게 되었다. 이때에도 한국 천주교회는 1906년에 <경향신문>을, 1909년에는 <경향잡지>를 창간하여 천주가사류를 계속 게재 발표하였으며, 윤의병(尹義炳) 신부 작으로 박해시대 르포소설 형식인 ≪은화≫(隱花)을 연재하였다. 1933년에는 천주교회의 대사회(對社會) 문화매체로서 <가톨릭 청년>이 창간되는데 이 잡지의 문예란을 통해 정지용(鄭芝溶) · 최민순(崔玟順) · 윤형중(尹亨重) · 이효상(李孝祥) 등이 시 · 소설 · 수필을 발표하고, 이동구(李東九)가 가톨릭 문예비평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지용은 당시 문단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임종>(臨終), <은혜>, <갈닐레아 바다>, <또하나 다른 태양>을 비롯하여 가톨릭 신앙을 주제로 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나의 임종하는 밤은 / 귀또리 하나도 울지 말라. / 나종 죄를 들으신 신부(神父)는 / 거룩한 산파(産婆)처럼 나의 영혼을 갈르시라. / 나의 평생이요 나종인 괴롬! / 사랑의 백금(白金) 도가니에 불이 되라”(<임종>에서). 이러한 정치용의 시는 그가 종래에 향토적 서정시인이었다가 모더니즘 시로 자리를 옮기는 변모에 일치된다. 그는 <가톨릭 청년>의 편집자로서 유치한(柳致環) · 신석정(辛夕汀) · 김기림(金起林) · 이상(李箱) 등 비신자 시인들에게도 작품 발표지면을 많이 제공하여 교회로 하여금 일반 문화계에 기여케 하였다. 정지용 · 김기림 등이 중심이 된 당시의 모더니즘 운동은 세계 문명의 장래가 개선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가톨릭 창년>지는 독일의 히틀러 정권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독일, 일본의 파시즘 동맹권이 2차 세계대전으로 자유에 대한 폭압을 가중하자 1930년대 모더니즘의 시에는 언어의 세련만이 남고, 시에 역사상과 대중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각성에 이르게 된다.

이 무렵의 가톨릭 문예비평으로는 이동구의 <가톨릭 문학을 어떻게 취급할까>, <종교와 시 - 뿔 끌로뗄>, 최민순의 <프랑소아 모리악의 소설론> 등이 발표되었다.

이 일제시대부터 <경향잡지>와 <가톨릭 청년>지에 글을 발표해 오던 윤형중, 최민순 두 신부는 뒤에 자신들의 시집을 묶어 내게 된다. 윤형중의 <사말(四末)의 노래>는 신앙 도리를 읊은 것이지만 한국 민요의 3음보 율격(律格)에 의탁한 것이 이채롭다. 최민순의 시집 ≪님≫, ≪밤≫ 등은 또한 자유시 형식으로 다채롭게 쓰여졌다. 두 성직자가 모두 광복 이후의 한국 문화계에서 활동한 문학인이기도 하였다.

1945년의 8.15광복 이후 1980년대 초까지의 한국문단에서 가톨릭 신자 문학인의 수는 가톨릭 인구의 대폭적인 증대에 따라 전국적으로 100여명을 넘게 되었다. 이 중에서 비교적 두드러지게 작품 활동을 해 온 이들을 보면, 시 부문에서 구상(具常) · 김남조(金南祚) · 홍윤숙(洪允淑) · 성찬경(成贊慶) · 김지하(金芝河), 소설에서 한무숙(韓戊淑), 아동문학에서 마해송(馬海松) · 박홍근(朴洪根) 등이다.

시인 구상은 한국 현대 문단에서 거의 독보적으로 존재론과 인식론의 경지를 숙고하며, 한국 재래의 시가 자연서정(自然抒情)과 생활감정을 중심으로 함에 비해 회의와 고뇌를 통한 존재 인식에 이르고자 한다. “영혼의 눈에 끼었던 / 무명(無明)의 백태가 벗겨지며 /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萬有一切)가 /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 노상 무심히 보아 오던 /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 이적(異蹟)에나 접하듯 / 세삼 놀라웁고 / 창밖울타리 한구석 / 새로 피는 개나리 꽃도 / 부활의 시범을 보듯 / 사뭇 황홀합니다. / 창창(蒼蒼)한 우주, 허막(虛漠)의 바다에 / 모래알보다도 작은 내가 / 말씀의 신령한 그 은혜로 / 이렇게 오물거리고 있음을 / 상상도 아니요 상징도 아닌 / 실상으로 깨닫습니다”(<말씀의 실상>).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말씀이 그리스도가 되어 세상에 왔다는 성서의 화법을 연상케 한다. 또한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가 “말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므로 이 말을 다루는 시인은 사제(司祭)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말한 것을 연상케 한다. 마치 사제와 같은 견지에서 시인 구상은 세속의 관념들이 원수 또는 죄인으로 규정하는 대상들에 대해 개방적으로 사랑을 표시한다. 그는 유물론적 사회주의 체제를 반대하지만 6.25전쟁이라는 민족상잔의 현장에서 공산군 전사자들의 무덤을 만들어 주며 통곡한다(<초토의 시> 7). 그러면서도 또 때때로 ‘무명(無明)과 허무(虛無)’에 갇혀 회의하고 고뇌함은 그의 사유(思惟)가 단순할 수 없으며 특히 동양적 사유의 심원(深遠)한 경지에도 눈길을 주고 있는 때문으로 보인다. 아울러 이러한 고뇌가 궁극적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데에 어떻게 일치하게 되는지는 현대 가톨릭 문학의 탐구 주제로 대두된다.

소설 부문에서 한무숙은 가톨릭적 사유의 외형은 드러내지 않으나 인간구원의 주제와 예술가적 장인의식(匠人意識)을 가지고 정신적 깊이가 담긴 소설들을 쓴다. 이 작가가 <감정이 있는 심연(深淵)>에서 섬세하게 추구한 어떤 ‘의미’의 문제, <어둠에 갇힌 불꽃들>에서 맹인 소녀 안나가 곁에서 악다구니를 하며 싸우는 사람들을 가리켜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도 불평이 있어요?”한 발언에서 독자가 삶과 구원에 관한 어떤 충격적인 일깨움을 받는다. 이러한 요소들은 단순한 감각이라든가 감수성과 차원을 달리하는 깊이에서 한국 현대문단에 기여하는 바가 있다.

현대 한국인의 삶의 자리인 사회현실은 종래의 서구 가톨릭 문학이 지녔던 주제와 성과로써 충족되지 못한다. 여기에는 독특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이 있다. 그것은 민족 공동체로서의 수난의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는 문학에 가톨릭의 정신과 원리들이 문예 원리로 대입할 수 있다면 여기에서 현대 한국 가톨릭 문학의 새 지표가 형성될 수 있다.

이러한 지향에서 이미 지표 형성 노력은 시작되어 있다.

① 예술의 공리성(功利性) 시비에 대해 : “문학과 예술은 인간 본연의 자질과, 자신 및 세계를 이해하고 완성시키는 데에 요구되는 인간의 과제와 체험을 표현하며, 역사와 세계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발견하고, 인간의 보다 나은 운명을 개척하려고 노력한다”(현대세계의 사목헌장, 62). 여기에서 창조와 완성의 의도로서 공리성이 인정된다.

② 분석주의 이론의 한계 : “현대의 분석주의 인문학은 학문을 빙자하여 인간전체를 이해할 수 없게 한다”(행동에의 부름, 38). 여기에서 분석주의 비평, 예로서 뉴크리티시즘과 더 나아가서는 구조주의까지도 일정한 한계를 지님이 지적된다.

③ 가치의 순위의식 : “언제나 가치의 차례에 대한 인식을 명백히, 생생하게 가져라”(어머니와 교사, 245). 창작과 비평의 실제에서 작중 인물들과 가치관에 있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점을 판별하도록 일깨운다.

④ 개발도상국의 정신적 가치 : “경제적 개발도상국 국민들은 묵은 전통으로 말미암아 무엇보다도 중요한 ‘인간 가치’를 아직도 생생하게 인식하며 보존하고 있다. 우리는 이 요소가 장차 진정한 문명의 기초가 되게 해야 한다”(어머니와 교사, 176). 이러한 지적은 현대 제3세계 문화운동 및 문예 작업을 고무하고 높이 평가하게 한다. 이러한 관찰은 1970년대의 한 문학평론을 통해 제시되었다(구중서, <한국사회 속의 가톨릭 문학인>에서).

1980년대의 한국 문학 안에서는 이른바 사회참여와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계열로부터 신기할 만큼 ‘화해’와 ‘구원’의 목표가 제기되었다. 이 목표들까지가 진정한 리얼리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화해’와 ‘구원’의 원리에 배우 일치해 있는 것이 또한 가톨리시즘이다. 이 점에서 한국 현대 가톨릭 문학은 새로운 과제와 사명을 맡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보게 된다. (具仲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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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톨릭농민회 [한] 韓國∼農民會 [영] Korean Catholic Famers’ Movement [관련] 가톨릭농민회

1966년에 창립된 한국의 가톨릭 농민운동단체. 가톨릭 농민운동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 믿음으로 깨어나는 농민들이 ‘스스로’ 그리고 ‘함께’, 농민 자신과 사회를 누룩처럼 변혁시켜 감으로써, 농민구원 · 겨레구원 · 인류구원을 지향하는 생활공동체 운동이다. 따라서 가톨릭 농민운동은 농민 안팎에 온갖 반(反)인간적 · 반공동체적 · 반생명적인 ‘세상의 죄’와 지속적이고 단계적인 대결을 벌이면서, 인간답고 공동체다운 세계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 가는 농민들의 삶의 표현이다. “한국가톨릭농민회는, 농민 스스로의 단결과 협력으로, 농민권익을 옹호하고, 인간적 발전을 도모하며, 사회정신의 실현을 통한 농촌사회의 복음화와 인류공동체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회칙 제3조).

1. 활동과제 : ① 현장활동 : 삶의 현장인 마을에서 부락민의 일상적 요구에 응답하면서, 마을을 생활공동체로 변화시킨다. 경제적 협동활동(생산, 소비, 유통, 신용, 이용 등의 협동화), ② 문화활동(생산과 문화, 일과 놀이와 전례의 일치를 시도함으로써 인간다운 공동체문화의 회복 및 창조), 봉사활동(특히 소외된 이웃과 고락을 나눔), 권익활동(반농민적 지배 등에 저항하며 농민 권익 옹호에 앞장섬), 마을민주화활동(평등구현 및 마을자치역량을 키움), 건강활동(무공해 농사 실천으로 땅과 식탁 살리기, 자연요법 개발 및 보급, 반공해활동 등), 연대활동(농촌 및 도시공동체와의 생활연대) 등을 추진한다. ③ 정책활동 : 농민을 비인간화시키는 구조적 모순을 없애는 활동을 통해, 공동선(共同善)을 확장시킨다. 농지제도 개선 활동, 농축산물 가격보장 활동, 농민조합의 민주화활동, 부당한 농업세제시정활동 등을 추진한다. 현장활동과 정책활동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운동의 저항성과 공동체성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2. 조직 : 조직 형태는, ‘분회’(마을, 공소단위) ⇒ ‘지역협의회’(생활권, 본당단위) ⇒ ‘연합회’(도, 교구단위) ⇒ ‘전국본부’(대의원총회, 회장단, 이사회, 감사회, 사무국)이다. 조직 운영은 다음과 같다.

3. 활동약사 : ① 태동기(1964. 10∼1971년) :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J.O.C.)의 농촌청년부로 출발해서 1966년 10월에 창립된 ‘한국가톨릭농촌청년회’(J.A.C)는, 농촌청년 중심으로 모범생활, 모범농사 등을 통한 마을 환경의 변화를 추구했으며, 주로 생활교육을 통한 계몽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농업 희생이 강요되기 시작한 1, 2차 경제개발계회(1962∼1971년)의 추진, 3선 개헌(1969년), 비상사태 선포(1971년) 등으로 나타남 권력독점의 심화, 농민개인과 정치경제 사회구조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한, 모범농촌청년, 모범농장도 불가능함을 인식, 농촌청년만으로는 농민문제 해결이 불가능함을 인식하여 운동의 새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70년 ‘가톨릭농민국제연맹’(M.I.J.A.R.C)에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② 성장기(1972∼1980. 5. 17) : 자본주의의 농업 · 농민문제를 발견하고, 농민 스스로 그리고 함께 농업 · 농민문제를 해결하는 새 운동방향을 확정, 1972년 1월 ‘한국가톨릭농민회’로 개칭하면서 범농민운동체로 새출발하였다. 유신헌법(1972년) 긴급조치시대, 저노임 · 저곡가를 강제한 경제정책 강행 등으로 대외 의존이 심화되면서 기층국민은 생존의 위협에 직면하였다. 2차 경제개발계획에는 명목상으로나마 ‘식량자급’ 정책이 있었으나, 3차에는 ‘주곡자립’으로, 4차에는 ‘생산기반확충’으로 뒷걸음질 쳐 적자농사, 농가부채의 급증, 대량이농 등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1974년 민간단체로서는 최초의 ‘농지임차관계조사’를 통해 토지문제를 제기했으며(소작농 29.1%, 부재지주 39.8% 등), 1975년부터 쌀생산비 조사를 통한 농산물 가격 보장활동을 하였다. 현장에서 또는 전국단위로 외곡수입 반대운동, 강제농정 시정활동, 부당농지세 시정활동, 농협민주화활동 등을 끈질기게 추진하였다. 농협이 고구마 계약수매를 이행치 않음으로써 발단된 ‘함평 고구마사건’(1976∼1978)은, 사건 발생 2년 만에 농민의 승리로 끝났고, 이를 계기로 농협의 고구마 수매 80억원 부정이 폭로되었다. 또한 감자 계약수매 불이행으로 발단된 ‘안동 농민회사건’(세칭 오원춘사건, 1979년)은 숱한 수난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농민운동이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 두 사건은, 농민운동사에 길이 기억될 사례이다. 10.26사태 후, ‘민주농정실현을 위한 전국 농민대회’, ‘농민관계법령공청회’를 개최하였다. 1972년 ‘국제가톨릭농촌단체연합회’(I.C.R.A)에 가입하였고 1976년 가톨릭농민회 10주년기념 전국대회를 개최하였다.

③ 성숙을 지향하며(1980. 5.17 이후∼1983년) : 농민의 복리를 위한 국내유일의 농민운동체로서 1970년대의 역할을 부인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운동의 미성숙함을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가톨릭농민회는 운동의 역사성, 운동의 생명성의 결함을 깊이 성찰하면서 농민구원 · 겨레구원 · 인류구원 · 우주구원을 하나로 꿰뚫는 성숙한 운동방향을 모색하고, 그 새 출발을 시도하였다. ‘농촌사회의 민주화’, ‘공동체 삶의 실천’이 활동목표이다. 1981년 대전에 농민회관이 건립되었고, 1982년 충북 음성에서 ‘부당농지세 시정을 위한 농민대회’가 개최되었으며, 농지임대차양성화 저지활동(1982년), 전국 천주교 농촌공소실태조사(1982∼1983년), ‘농협조합장 직선제실시를 위한 100만 서명운동’(1983년) 등을 추진하였다. 한국가톨릭농민회는 이 땅 이 겨레에 빛과 소금과 누룩이 되고자, 그리하여 모두가 하나 되고자, 공동체적 삶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대결과 건설의 길을 앞서 가신 예수를 따르고자 전력하고 있다. (⇒) 가톨릭농민회 (鄭鎬庚)

[참고문헌] 한국가톨릭 농민회 보고서, 1966∼1983 / 농촌청년, 회지, 1968∼1974 / 농민회활동 사례집, 1, 2회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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