徐相燉(?-1913). 대구교구의 초대회장.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그는 조부 때부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일찍이 박해를 피해 서울에서 충청도 제천(堤川)으로, 다시 제천에서 경상도 상주(尙州)로 피신하였다가, 그가 10세 때 대구로 옮겨 살게 되었다. 그 당시 대구에는 가톨릭 신자라고는 몇 집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는 상업으로 재산을 모으기 시작하여 대구에서 손꼽히는 부호가 되고, 더구나 그의 독실한 신덕과 인격은 많은 사람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의 권면으로 교인이 되었다. 더욱이 그는 자선사업에 헌신하여 봄과 가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수백 석의 식량을 희사하였는데, 그의 이런 자선에 감읍하여 입교하는 자가 많았다. 그는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가 처음으로 대구본당을 개척하자,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 대구교구 설정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큰공을 세웠다. 1911년 조선교구가 둘로 나뉘게 되자, 그는 남조선교구의 주교 소재지를 대구로 유치하기 위하여 맹렬히 운동하여 뜻을 이루었다. 드망즈 주교가 대구로 부임하자, 그는 대성당 앞의 매씨(妹氏)의 집을 주교의 사택으로 제공하는 동시에, 자기 소유인 수만 평에 달하는 남산화원 전부를 교구사업에 희사하였다. 여기에 대구교구의 중추기관인 주교관 · 신학교 · 수녀원 · 고아원 · 성모의 루르드 마사비엘 동굴 등이 들어서니 대구교구는 반석같은 기반을 다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평소의 소원이던 성모의 루르드동굴이 이 화원 언덕에 건립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13년에 선종하였다.
한편 그는 교회와 관계된 활동 이외에도 1907년 1월부터 국채보상운동을 주창, 각종 신문의 보도를 통해 전국에 확산되고 국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으면서 전개시킨 바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