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몰례 [한] 徐沒禮 [관련] 볼리외

볼리외(Beaulieu) 신부의 한국명. ⇒ 볼리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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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만자 [원] Sivang [한] 西灣子

중국 내몽고(內蒙古)에 있는 마을. 북경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 고을에는 일찍이 프랑스 계통의 라자리스트(Lazaristae)회가 진출하여 전교함으로써 주민의 거의 다수가 가톨릭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에 입국하고자 하는 선교사와 조선 교우와의 연락이 이곳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가 조선 입국을 시도하기에 앞서 1834년 10월 이 곳에서 모방(Maubant, 羅) 신부를 만난 후 조선으로 향하던 중 펠리쿠(哵唎溝, Pie-li-Koou)에서 선종하였고,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도 조선 입국에 앞서 1837년에 이곳에 들러 조선 교우와의 연락을 취한 뒤 조선에 입국하였으며, 페레올(Ferreol, 高) 신부도 1840년에 여러 차례 이곳에 들러, 앞서 이 곳을 경유하여 조선에 입국한 앵베르 주교의 서신을 받은 바 있으며, 1842년에야 조선 교우들과의 연락이 이루어져 기해(己亥) 대박해의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이어 1843년 제3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그는 1845년 드디어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이와 같이 서만자는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에서 3대 교구장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성직자가 이곳에서 조선교회와의 연락을 가져, 그 곳으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에 입국한 초기 조선교회와는 매우 인연이 깊은 곳이다.

[참고문헌] Ch.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Paris 1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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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본당 [한] 西歸浦本堂

1898년 제주도 중문면(中文面) 색달리에 사는 양(梁) 베드로가 선교사를 맞을 터전을 마련하고 뮈텔(Mutel, 한국명 閔德孝) 주교에게 요청하여, 다음해인 1899년 뮈텔 주교는 제주도의 선교사로서 페네(Jean-Chales Peynet, 裵嘉祿) 신부와 한국인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를 임명, 부임케 하였다. 제주본당(濟州本堂)을 제주 성내에 설치, 발족한 이후 두 신부는 성당이 비좁아 1900년 9월 정의군 서홍리(旌義郡西烘里) 한논[大畓] 즉 서귀포부근에 또 하나의 본당을 분리독립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서귀포본당’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1901년 제주도 신축(辛丑)교난 사건으로 한논본당으로 지칭되던 이 본당의 초대(1898. 12. 1~1922. 5. 30) 신부인 타케(Emilius J. Taquet, 嚴) 신부는 사실상 난동사건이 타결된 뒤인 1902년 4월 23일 부임하였고, 그는 뒤에 이 본당을 서흥리로 옮겨(현 복자수도원 소재지) 한때 ‘서홍리 본당'(西烘里本堂)으로 불리게 되었다. 1934년 당시 신자수는 150명, 예비신자 20명이었다. 페네 신부는 본디 식물학자였으므로 벚나무의 원종(原種)을 발견하고, 밀감나무를 많이 재배하여 제주도의 산업발달에도 많은 공헌을 남겼다. 1차 세계대전 때인 1917년 소집응소되었다.

2대(1922. 6. 1~1923. 3. 17) 이경만(李景滿, 요한) 신부, 3대(1923. 3. 17~1926. 2. 21) 이필경(李弼景, 안드레아) 신부, 4대(1926. 3. 1~1929. 4. 4) 최덕홍(崔德弘, 요한) 신부, 5대(1929. 4. 5~1931. 12. 25) 허일록(許日祿, 다두) 신부, 6대(1932. 1. 1~1932. 7. 24) 최덕홍(崔德弘, 요한) 신부, 7대(1932. 9. 25~1936. 5. 1) 김창현(金昌鉉, 바오로) 신부, 8대(1936. 5. 2~1952. 4. 22) 라이언(Tomas Ryan, 羅) 신부 때는 8.15광복과 6.25전쟁을 겪었다. 그리고 1937년 8월 5일 서귀포 서홍리본당은 현 서귀포시 서귀포동 586번지의 서귀포 성당으로 이전하였으며, 주보성인을 바드리시오 성인으로 하여 새 명칭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9대(1952. 4. 23~1953. 4. 4) 새비지(John Savage, 元) 신부, 10대(1953. 4. 5~1956. 4. 13) 로한(Patrick Lohan, 韓) 신부, 11대(1956. 4. 14~1960. 12. 30) 브래디(Robert Brady, 牟) 신부, 12대(1961. 1. 1~1963. 10. 18) 로셰(John Roche, 廉) 신부, 13대(1963. 10. 18~1969. 12. 15) 애젤(Howard Eisel, 梁) 신부, 14대(1969. 10. 20~1971. 9. 20) 퀸(John Quinn, 高) 신부, 15대(1971. 9. 20~1972. 10. 24) 김병준(金丙準, 요한) 신부, 16대(1972. 10. 25~1975. 2. 3) 새비지 (John Savage, 元) 신부, 17대1974. 4. 10~1979. 5. 23) 매귀어(Desmond Maguire, 梅) 신부를 거쳐 18대(1979. 5. 29~1983. 2. 9) 러셀(John Russell, 薛) 신부 때인 1980년 9월 16일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분원을 설립하였다. 19대(1983. 2. 9~현재) 주임신부는 고승헌(高升憲, 마르코) 신부이다. 현재 제주교구 관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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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국기법 [한] 西國記法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리치(Matteo Ricci, 중국명 利瑪竇)의 저술로 1595년 중국 남창(南昌)에서 간행되었다. 내용은 서양의 기억법(記憶法)을 소개한 것으로 원본(元本) · 명용(明用) · 설법(說法) · 입상(立象) · 정지(定識) · 광자(廣資) 등 6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간행되자마자 중국의 지식층들에게 호평을 받아 ‘기법'(記法)이란 약칭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1831년 사은사(謝恩使)로 북경에 갔다 온 홍석주(洪奭周)에 의해 전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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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대이교 [한] 西歐大離敎 [라] Schisma magnum Occidentale [영] Western Schism

1378년에서 1417년에 걸쳐 대립교황의 출현으로 서구 교회를 크게 분열시킨 사건. 1378년 최후의 아비뇽 교황 그레고리오(Gregorius) 11세가 사망하자 같은 해 4월 8일에 추기경단은 75년만에 처음으로 로마에서 바리(Bari)의 대주교를 우르바노(Urbanus) 6세 교황으로 선출하였는데 그는 추기경단 밖에서 선출된 최후의 교황이 되었다. 비록 선거환경이 최상은

아니었으며 혼돈이 있었으나 분명히 교회법에 의거한 것으로 나폴리 태생에 프랑스적 교양을 갖춘 새 교황은 그 동안 쌓여 온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긴장을 훌륭히 극복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그러나 우르바노 6세 교황의 개혁 중에 나타난 압제적 성격과 무엇보다도 정신병의 징후로 인해 추기경단은 아나니(Anagni)에 모여 같은 해 9월 20일 제네바의 로베르토(Robert) 추기경을 글레멘스(Clemens) 7세(대립교황)로 옹립하고 우르바노의 선거가 로마 지방민의 압력에 의한 것임을 주장, 이들은 아비뇽(Avignon)으로 거처를 정하였다. 이로써 서방 교회는 로마와 아비뇽에 두 명의 교황을 두게 되었다. 이 결과로 교회의 분열은 명백히 국가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는데 서로마제국 · 영국 · 헝가리 · 스칸디나비아 · 이탈리아의 대부분 등은 우르바노 6세 측을, 프랑스 · 나폴리 · 사보이 · 스코틀랜드 · 스페인 · 시칠리아 등은 글레멘스 7세 측을 지지하였다. 이들 교황들은 상대편을 서로 파문하였으며 그 권위는 실추되었다.

성직자들은 각 교황청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이중과세를 감당해야 했으며, 이단이 발생하고 교회는 혼돈에 빠졌다. 이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공의회 수위설이 등장하여 교황까지도 공의회의 최종 결정에 승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세력을 얻었다. 특히 파리대학에서 낸 세 가지 제안(① 양보 : 양 교황이 자발적으로 사임하거나 ② 절충 : 독립된 교회재판소에서 어느 한쪽 교황을 폐위시키거나 ③ 공의회 : 대공의회를 통하여 해결책을 모색하는 안) 중 마지막 방법에 따라 1409년 3월 피사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양 교황은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고 이 공의회가 교회법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자 1409년 공의회는 제3의 교황 알렉산데르(Alexander) 5세(대립교황)만을 선출한 채 폐회되었다.

그 후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Sigismund)의 노력으로 알렉산데르 5세를 이은 요한(Joannes) 23세(대립교황)는 1414년 11월 1일 콘스탄츠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이 공의회에서 요한 23세는 1415년에 폐위되었고, 그레고리오 12세도 같은 해에 사임하였으며, 베네딕토(Benedictus) 13세 자신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공의회에 의해 폐위되었다. 1417년 공의회는 마르티노(Martinus) 5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함으로써 서구교회 최후의 이 이교는 정식으로 종결되었다. 이교 동안의 교황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① 로마 계열 : 우르바노 6세(1378-1389), 보니파시오(Bonifatius) 9세(1389-1404), 인노첸시오(Innocentius) 7세(1404-1406), 그레고리오 12세(1406-1415) ② 아비뇽 계열 : 글레멘스 7세(1378-1394), 베네딕토(Benedictus) 13세(1394-1423) ③ 피사 계열 : 알렉산데르 (Alexander) 5세(1409-1410), 요한(Joannes) 23세(1410-1415).

[참고문헌] S.L. Greenslade, Schism in the Early Church, London 1953 / G.J. Jordan, The Inner History of the Great Schism, London 1930 / S. Steinherz, Dokumente zur Geschichte des grossen Schismas, Prag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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