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보장 [한] 社會保障 [영] social security [독] Sozialversicherung

근대 산업국가에서는 경제적 안녕과 복리증진을 위하여 개인과 가족을 각종 재해와 빈곤으로부터 보호할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데, 이 방법을 보통 사회보장, 혹은 사회보장제도라 부른다. 19세기말까지만 하더라도 경제적인 보장이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졌으나, 구조적 실업에 의한 개인의 직장박탈, 공황에 의한 산업파탄 등과 같이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빈곤에 직면하게 됨으로써, 이의 개선을 위한 요구가 크게 일어나게 되고, 이에 따라 실업보험과 빈민구제책 등의 새로운 제도가 등장하였다. 재해보상에 관한 최초의 제도적 장치는 1789년 스위스 바젤에서 제정되었으나, 사회보장에 대한 현대적 계획이 수립된 것은 비스마르크 집권하의 독일에서 처음 수립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사회보장제도가 나타나게 된 것은 역시 1929년 대공황 이후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서 일련의 사회보장법이 입법되어, 1935년 발효한 미국의 사회보장제도 이후의 일이다.

사회보장은 근로자와 일반 민중의 생활수준의 상대적인 저하를 막고, 사회생활의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실업보험, 산업재해보험, 의료보험, 국민보험 등 다양한 형태로 각국에서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사회 보장제는 국가에 따라 달라서 북유럽의 여러 국가와 뉴질랜드처럼 발달된 국가도 있고, 그렇지 못한 국가가 있지만, 대체로 각국은 사회보장제를 법제화하여 실직자, 고령자, 무능력자, 유자녀, 환자, 작업중 재해를 당한 자들에게 화폐를 지급, 최저의 생활을 보호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보장은 빈곤방지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며, 보험료의 사용자 부담에 따라 사회보장 전체의 비용을 보험료나 대중과세에 의존, 관리 운영이 정부의 손에 집중되어 민주적 성격을 상실함으로써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 각국의 실정이다.

한국에 있어서도 각종 사회보장제도가 마련되어 실시되고 있으나 제도적인 결점과 시행상의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어 구미제국과는 비교할 수 없다.

가톨릭 교회는 사회보장제도가 국가의 전체수입을 정의와 공평의 기준에 의하여 재분배하는 데 유효한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국민 각층의 생활수준의 균형을 회복하는 도구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참고문헌] 요한 23세, 어머니와 교사, 1961 / 요한 23세, 지상의 평화,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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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민주주의 [한] 社會民主主義 [영] social democracy [독] Sozialdemokratie

계급투쟁을 통하여 자본주의 사회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이룩함으로써 계급없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혁명노선(革命路線)을 거부하고, 정치적으로는 의회주의, 경제적으로는 노동조합에의 참여를 통하여 자본주의 사회를 착실하게 개량함으로써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회주의 이론체계가 사회민주주의, 혹은 민주사회주의이다. 사회민주주의는 19세기 후반에 태동하였다. 라살(Ferdinand Lassaele, 1825-1864)은 마르크스주의자의 경우처럼 국가 권력의 타도에 의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신, 노동자 조직을 기반으로 한 정당이 의회에서 다수의 의석을 차지함으로써 노동자들은 가혹한 ‘임금의 철칙'(iron law of wages)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1895년 엥겔스가 죽은 후 베른슈타인(Edward Bernstein, 1850-1932)도 혁명 대신에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이행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카우츠키(K.J. Kautsky)와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는 이들을 수정주의 내지는 개량주의라고 강력히 비난하였다. 그러나 카우츠키마저도 1905년 이후부터는 전제적 폭력에 의한 혁명을 거부하고 평화주의자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그는 총파업 등을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고 노동자의 계급의식이 발전한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참여가 보장된 의회활동에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진출함으로써 의해 내에서 다수당이 되면 정권을 장악하여 광범하고 장기간에 걸친 개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사회민주주의 사상을 강령으로 채택한 최초의 정당은 독일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1901년)의 전신인 독일사회주의노동당(1875년)이다. 그 후 덴마크(1876년), 미국(1876년), 벨기에(1885년), 스위스(1886년), 오스트리아(1888년) 등지에 사회민주당이 구성되고, 영국에서는 사회민주당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노동당이 구성되었다. 이들 정당의 대표자들이 1889년 파리에서 제2 인터내셔널을 구성하였다. 이로부터 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사회주의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노동자의 국제적 연대를 맹세한 각국의 사회민주당이 제국주의 전쟁에 노동자를 동원함으로써 자국의 이익을 노동자의 전체이익에 우선시킴에 따라 제2 인터내셔널은 붕괴된다. 그 후 러시아 혁명과 함께 제3 인터내셔널, 즉 코민테른이 구성되어 (反)파시즘 전선(戰線)을 펴 나가면서 사회주의 운동의 주류는 볼세비즘으로 이행한다. 코민테른은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개량주의적이며 노동자의 국제적 연대를 붕괴시킨다고 비판을 가하고, 사회민주주의의 설립기반을 식민지 초과이윤이 존재하여 노동귀족의 육성이 가능한 서구 선진자본주의제국에서 찾고 있다. 이와 아울러 또 하나 사회민주주의를 가능케 한 것이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대응한 노동자의 존재형태의 변화, 즉 노동자의 선거권 획득, 광범한 의무교육, 사회보장으로 노동자의 생활양식이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사회민주주의를 공산주의에 대하여 ‘수정된 사회주의, 개량주의, 우익사회주의’라고 일반적으로 정의한다. 한편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또 다른 정의는 영국을 비롯한 서구 자본주의 사회민주당에서 내려지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사회민주주의란 자본주의체제의 전면적 부정이 아니고 자본주의의 모순과 부정적 측면을 개량해서 복지사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이념체계이다. 가톨릭 교회는 어떠한 특정의 정치제도나 정치이념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가 아니라 사회정책적 의미에서 사회민주주의를 배격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참고문헌] G.D.H. Cole, History of Socialist Thought, London 1953-1960 / Bernstein, Die Voraussetzungen des Sozialismus und die Aufgaben der Sozialdemokratie, 1899 / Gustav A. Wetter, Il materialismo dialettico Sovietico, Torino 1948, 강재륜 역, 변증법적 유물론비판,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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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한] 社會 [라] societas [영] society

1. 사회학에서의 사회론 : 사회라는 말은 대단히 모호하면서도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이다. 상식적 수준에서는 모든 사회현상이나 사회적 사실들을 의미하지만, 학문적으로는 개념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대부분의 사회학자들은 사회를 “공통된 문화와 지역적 토대를 갖고 있으며, 상호작용하는 개인들과 상호관련된 집단들로 구성된 거대하고 지속적이며 조직화된 인간집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사회학자들이 정의하는 사회의 개념에서 공통된 특성은 다음과 같다. ①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단위는 인간의 사회적 행위이다. ② 사회는 경제적 자원이나 기타의 모든 자원을 획득하고 배분하는 절차와 방식을 제공한다. ③ 사회는 의사결정 과정과 성원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최종적인 권위를 갖는다. ④ 사회는 그 성원이 충성을 바치는 최고의 조직체이다. ⑤ 사회성원들은 특수한 문화와 언어를 공유한다. ⑥ 다른 사회와의 관계는 엄격히 통제되어 있다. ⑦ 사회는 모든 집합체 가운데 가장 높은 자기충족성(self-sufficiency)을 갖는 집합체이다.

사회에 대한 인식이나 지적 탐구는 근대 이전까지는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사화라는 개념은 국가라는 개념과 거의 구별되지 않고 있었다. 이 두 가지 개념이 구별되면서 사회에 대한 지적 관심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나타난 절대주의 국가에 대한 시민계급의 투쟁과, 그 후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성장으로 인한 전통 사회질서의 붕괴에 직면하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서구 지성계는 혼란된 사회질서와 급증하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으며, 사회와 국가는 별개라는 인식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의 구조와 변동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사회학의 성립을 가져왔다.

사회학이 발전됨에 따라 사회에 대한 인식은 두 가지로 구분되었다. 그 하나는 ‘사회명목론'(社會名目論, social nominalism)으로서, 사회의 기본 단위는 인간의 사회적 행위이며 집단이나 사회는 사회적 행위의 단순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에서는 사회란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단지 사회적 행위를 분석하기 위한 추상적 개념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한다. 즉 개인만이 실재하는 것이며, 사회보다도 개인이 우월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관점은 자연법 사상, 공리주의, 사회원자론 등에 연유한다. 다른 하나는 ‘사회실재론'(社會實在論, social realism)으로서, 사회는 개인의 사회적 행위로 구성되지만, 개인을 초월한 그 자체의 속성을 갖는다는 입장이다. 즉 집단이나 사회는 개인에 외재(外在)하면서 개인을 구속하는 나름대로의 속성과 유형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입장에서는 사회란 실재하는 실체이며, 개인보다도 우월성을 갖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 관점은 사회유기체설, 집단심설과 맥락을 같이한다. 현대 사회학자들의 상당수는 사회실재론적 입장을 취한다.

사회질서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사회학은 사회질서나 사회체계를 어떠한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두 가지의 사회론으로 대별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초반 대부분의 사회이론가들은 사회질서는 고전경제학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손'(the invisible hand)에 의해 스스로 유지되어 나아갈 것으로 낙관하면서, 사회는 생물계에서와 같이 적자생존의 원칙에 의해 보다 나은 방향으로 진화 · 발전될 것으로 전망하였다[사회진화론]. 그러나 19세기 후반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발달이 기존 사회질서를 크게 붕괴시키면서 도덕적 사회적인 문제들을 보다 심각하게 나타내자, 이에 대한 원인과 대책은 다양하게 모색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뒤르켐(Emile Durkheim)은 사회질서의 해체 원인을 공리주의적 원리의 확대와 함께 공동체적 연대가 약화되는 가치붕괴에서 찾으면서 규범혼재상태(Anomie)에 주목하였고, 마르크스(Karl Marx)나 베버(Max Weber)는 권력의 편재에서 나타나는 인간소외현상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와 같은 튀르켐의 가치합의와 마르크스의 권력관계에 대한 주목은 현대사회학에 전승되어 구조·기능주의(structural-functionalism)와 갈등이론(conflict theory)이라는 두 개의 경쟁적인 사회론으로 정착되었다.

구조 · 기능주의는 사회도 생물유기체와 같이 특정한 구조 내지는 조직을 가지며, 사회의 각 부분은 서로 연관성을 맺을 뿐만 아니라, 각기 자기의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전체의 유지에 기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 사회론에서는 사회질서는 성원간의 가치합의에 의해 유지되며, 사회는 필요로 하는 것[기능]을 충족시킬 수단[구조]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균형과 안정을 찾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이 입장에서는 사회의 질서, 조화 및 균형(equilibrium)에 주목한다. 반면, 갈등이론은 사회의 기본구조는 통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갈등상태, 특히 이익의 갈등상태에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사회론에서는 사회의 기본특성을 성원간의 불합치에서 찾으려 하면서, 이 불합치는 권력과 부의 편재 때문인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이 입장에서는 사회의 질서가 가치합의가 아닌 지배와 복종이라는 힘과 강제의 권력관계에 토대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현대사회학에서의 사회에 대한 정의나 관점은 사회학의 수효가 사회학자의 수만큼 있다고 할 정도로 다양하다. 그러나 공통된 것은 사회를 보는 동기나 관점이 사회질서의 회복이나 개편, 또는 사회문제의 해결에 있다는 점이다.

2. 그리스도교 사회론 : 사회학에서의 사회론이 사회질서와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연유하는데 비해, 그리스도교 사회론은 그리스도교적 인간론의 한 부분으로서 출발한다. 즉 그리스도교 사회론은 사회문제의 해결을 위한 새로운 실천강령이나, 또는 그리스도교적 사회학 교육을 위한 현대사회학에서의 유용한 지식의 선택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인간론의 불가결한 한 부분인 것이다(어머니와 교사). 따라서 그리스도교 사회론은 초기부터 교회의 주요 관심사가 되어 왔다. 그러나 이 주제가 크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 산업사회의 등장에 따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간의 대립과 함께 인간 실존의 문제가 크게 제기되면서부터이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리스도교 사회론이 교리의 발전만이 아니라 그 교리의 올바른 적용에 있어서도 자기 몫을 다할 수 있도록 그 가르침을 연구하라고 신자들에게 촉구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사회론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였다(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31). 그리스도교 사회론에 대한 교회의 지침은 여러 사회회칙, 즉 <노동헌장>(1891), <노동헌장 40주년>(1931), <어머니와 교사>(1961), <지상의 평화>(1963), 그리고 <민족들의 발전>(1967)이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에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교 사회론의 신학적 토대는 다음과 같다. ① 인간의 신의 모상으로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구원되고 신과의 영원한 공동체로 부르심을 받고 있다. 또한 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신약의 큰 계명이다. 따라서 인간은 국가적 사회적 경제적인 처리과정의 대상과 수단으로 전락되어서는 안 된다. 사물의 질서는 인간의 질서에 종속되어야 하며,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② 그리스도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인간을 구원하였다. 따라서 개별적인 영혼만을 구원의 대상으로 한정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인간관을 위축시키며 기형화하는 것이다. ③ 그리스도교 사회론은 공동생활에는 신의 의지에 기인하는 질서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사회적 질서와, 복음의 구원계획에 따른 그 회복과 완성(노동헌장 40주년),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의한 그 구성(어머니와 교사)은 그리스도교 사회론의 대상이다. ④ 인간이 그 속에 살고 있는 사회적 제 관계는 인간을 자주 탈선시키고 악행으로 유인함으로써 영원한 인간 구원의 실현을 곤란하게 만든다. 구원에 역행하는 상황에 대한 대처는 단순한 사회비판이나 자선의 형식만으로써가 아닌, 그리스도교 사회론의 제 원칙에 근거한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는 형식을 취해야 한다. 빈곤 · 기아 · 질병 · 재해를 물리치는 일은 그리스도교적 의무이다.

⑤ 그리스도교 사회론이 그리스도교 인간론의 한 부분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강생에 근거한다.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인해 교회는 인간사회의 생명원리가 되었다. 따라서 교회와 세계는 분리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융합된 실체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는 구원을 힘을 지닌 채 ‘누룩’과 ‘소금’과 ‘씨앗’과 ‘빛’으로서 세상 한 가운데 현존한다. 그리스도의 공현을 통해서 전 인류의 역사는 신의 구원사업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신학적 토대를 통해 볼 때, 그리스도교 사회론은 “인간사회의 본질과 질서, 그리고 거기에서 생겨 각 시대의 사회적 관계에 적용될 규범과 질서의 과제에 관해서 사회철학적으로(본질적으로 사회성을 지닌 인간본성에서), 그리고 사회신학적으로(그리스도교적 구원질서에서) 획득된 지식의 총체”라고 정의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사회론의 대상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비추어 사회질서를 형성하고 쇄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사회론은 존재과학적인 내용과 규범과학적인 내용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사회철학적인 방법과 사회신학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이 사회론은 자연법의 제 원칙과 계시의 제 진리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신 앞에 공통적인 원천을 갖는다는 것과, 이 양자는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된 인류 안에서 합치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즉 자연과 초자연을 포괄하는 구원질서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 사회론에서 보면, 자연법적으로 정당한 것은 그리스도교적인 것이며 구원경륜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 사회론이 인간사회의 모든 현실을 종교중심으로 만들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사회론은 국가 · 경제 · 신학 · 예술 등 문화의 전통분야가 갖는 나름대로의 상대적인 독자성을 인정한다.

창조와 구원에서 출발하는 그리스도교 사회론은 모든 피조물이 그러하듯이 사회적인 것도 구원을 필요로 하고, 또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사회론은 자연법을 초월하여 신학적 범주를 전개시킴으로써 사회에 대한 관심이나 이론을 발전시키고자 한다. 예를들면, 모든 인간의 근원적인 결합성과 연대성의 사회적 의미를 상세히 검토하여 그것이 어떻게 하여 창조에 대한 가르침과 남녀의 창조,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과 신에 대한 자녀관계,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비체로부터 밝혀지는가를 연구하는 것이 이 사회론의 주요 관심사이다. 또한 죄의 사회적 영향과 그 결과, 그리고 반 그리스도론과 그리스도에 의한 세계역사의 구원론이 갖는 역사신학적 의의도 주요과제가 된다.

한편, 사회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 사회론에는 18세기 이후 계속 등장하는 모든 공상적 사회론을 경계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부각되고 있다. 현세의 낙원을 약속하는 각종 신흥종교와 이단종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산업화나 과학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은 그리스도교 사회론이 경계해야 할 중요한 대상인 것이다. 그리스도교 사회론의 목적은, 특히 그 사회정책적 · 사회윤리적 · 사회교육적 측면에서의 목적은 현세적 낙원이나 세속적 세계가 승리하는 영광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신의 뜻을 실현하고 그리스도교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질서의 형성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비추어 사회질서를 형성하고 쇄신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사회론의 대상이라고 할 때, 사회형이상학적 · 사회윤리적 · 사회신학적 기초를 연구하는 것이 주요 과제가 되겠지만, 신이 세운 불변의 가치와 질서는 이 기본 원칙 안에서 현실의 시대상에 대한 분석과 결부되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일반론이든 특수론이든 그리스도교 사회론에 내포된 모든 문제들은 해명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기본명제 자체에는 잘못이 없더라도 자칫 추상론에 빠질 위험성이 있게 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교 사회론은 경험적 체계적 사회학, 사회사, 사회심리학, 인구학 등의 성과를 받아들이고 활용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이것은 급격한 기술적 경제적 발전이 인간의 생존양식과 생활형태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는 현대에 와서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의 그리스도교 사회론은 신적인 것과 역사적으로 가변적인 것, 특전(特典)된 것과 부과된 것, 그리고 필연성과 자유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려고 고민하고 있다. (盧吉明)

[참고문헌] David L. Shills, ed.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Social Science, The Macmillan Company & The Free Press, 1974 / 吳甲煥, 社會의 構造와 變動, 博英社, 1974 / Jonathan H. Turner, The Structure of Sociological Theory, The Dorsey Press, 1978 / Jeseph Kardinal Hoffner 著, 朴永道 譯, 그리스도교 社會論, 분도 出版社, 1979 / 飯島幡司 著, 趙基勳 譯, 그리스도교 사회관, 가톨릭출판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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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향가 [한] 思鄕歌 [관련] 천주가사

대표적인 천주가사(天主歌辭)의 하나. 저작자는 최양업(崔良業) 신부. 4 · 4조(調)의 기본운율에 총 833행(行)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영원한 본향(本鄕)인 천국을 생각하고 현세의 박해를 이겨내자는 것으로, ≪신명초행≫(神命初行, 1864)의 내용에 영향을 받아 작사되었다. 저작 연대는 ≪신명초행≫이 간행되기 이전 이미 그 내용이 교우들에게 교육되던 시기, 즉 최양업 신부가 활동하던 시기(1850-1860년)이다. (⇒) 천주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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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문서 [한] 死海文書 [영] Dead Sea Scrolls

1947년 초여름, 무리에서 떨어져 사해가 내려다보이는 벼랑으로 기어오르고 있는 한 마리 산양을 쫓고 있던 베두인족(族) 양치기 소년에 의해 한 동굴(쿰란동굴 1)에서 오래된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두루마리 등의 문서가 발견되었다. 그 지역은 1948년 5월 이후 이스라엘 공화국과 요르단 왕국으로 분열된 팔레스타인의 요르단 왕국쪽에 속하며, 사해의 북서쪽, 예루살렘의 동남쪽에 펼쳐지는 ‘유다의 황야’의 일부이다.

‘사해문서’는 한 개의 문서가 아니고, ‘유다의 황야’에 있는 ① 쿰란(Wadi Qumran) 동굴, ② 무라바트(Wa야 Murabbaat) 동굴, ③ 미르드(Khirbet Mird) 폐허, ④ 하브라(Wadi Habra) 동굴, ⑤ 세이얄(Wadi Seiyal) 동굴 등에서 이미 발견되었고 현재까지도 계속 발견되고 있는 수많은 고문서의 총칭이다.

1. 쿰란동굴 : 1947년에 쿰란동굴 1(1Q)이 발견되면서 그 부근 일대에 대한 탐사가 시작되어, 200개 이상의 동굴이 시굴(試掘)되었으며, 그중 11개 동굴에서 문서가 출토되었다. 동굴 1에서 발견된 두루마리들은 아마포에 싸서 항아리에 넣어져 있었기(예레 32:14) 때문에 보존상태가 가장 좋았다. 동굴 1에서 최초로 발견된 두루마리는 이사야서(1Q Isa,b), 하바꾹서 주해(1Q p Hab), 교단교규계율(敎團敎規戒律, 1Q S), 아람어의 외전적 창세기(1Q Apocry), 빛의 자식과 어둠의 자식의 싸움(1Q M), 감사의 시편(1Q H) 등이며,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에 소장되었다. 이들 문서의 연대는 대체로 기원전 2-1세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그후 1949년 봄의 동굴 1의 또 다른 과학적 탐험 발굴에서 수백 개의 구약정전, 외경, 위전(僞典) 사본의 단편(斷片), 경찰(經札), 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그밖에 수확이 풍부했던 동굴은 동굴 4(4Q)인데, 동굴 11(11Q)에서 나온 문서는 동굴 1의 것에 못지않게 보존상태가 양호해서, 완전에 가까운 몇 권의 두루마리가 얻어졌다. 동굴 4에서는 판독(判讀)이 가능한 것만도 382개의 사본군(寫本群)에 속하는 수천 개의 단편이 발견되었다. 예루살렘의 고고학 박물관에는 쿰란동굴의 것만도 대소 400개 이상의 사본 또는 그 일부, 4만 개 이상의 사본단편이 구입, 소장되어 있다. 동굴 3에서는 보물의 매장 장소가 기록되어 있는 2개의 동판 두루마리가 발견되었다.

2. 쿰란 폐허 : 예리코(Jericho)의 남쪽 12km, 사해의 서북 연안에서 1.3km, 사해 수면에서 약 300m 높이에 위치한 이 폐허는 1951년부터 5차에 걸쳐(1951, 1953, 1954, 1955, 1956년) 드보(Roland de Vaux)와 하딩(G.L. Harding)에 의해 처음으로 조직적 발굴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건물내를 종횡으로 달리고 있는 수로(水路), 몇 개의 저수지가 달린 수도원풍의 커다란 석조건물의 윤곽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 석조건물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고, 그중의 큰 방 하나는 사경실(寫經室)이다. 그리고 집회실 또는 식당으로 보이는 넓은 방, 약 1,000개의 식기류가 저장되어 있는 방, 다수의 화폐도 발견되었고, 부근에는 1,100개의 묘가 있는 묘지가 위치하고 있다. 이 주거지(住居址)는 기원전 100년경에 건립되고, 제1차 유대반란(67-70년) 때 파괴되었다고, 드보는 결론지었다.

3. 무라바트 동굴 : 2개의 동굴에서 1951년에 많은 출토품이 얻어졌는데, 쿰란 동굴 출토품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다.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 라틴어로 되어 있고, 로마시대와 그 이후의 날짜로 된 이 출토품 중에는 유다 제2차 반란 즉 바르코크바(Bar Kokhba)의 난(132-135년)에 관계되는 문서와 바르코크바 자신의 편지도 포함되어 있다.

4. 미르드 폐허 : 요르단의 Wadi en-Nar 부근에 위치하며 비잔틴 시대의 수도원 자리였던 이 폐허에서 1952년에 다량의 출토품이 얻어졌다. 그리스어, 아람어, 아랍어로 쓰여져 있는 이 문서들의 기록연대는 5세기에서 8세기에까지 이른다. 여기에는 구약 및 신약성서 사본, 서한, 그리고 5세기 그리스의 극작가 유리피데즈(Euripides)의 작품 ≪Andromache≫의 단편(斷片)도 포함되어 있다.

5. 하브라 동굴 : 이스라엘에 있는 이 동굴에서 1960년과 1961년의 2회에 걸쳐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은 일련의 고문서들을 발견하였다. 1960년의 출토품에는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로 된 바르 코크바의 15통의 서한이 포함되어 있었고, 1961년에는 50내지 60개의 문서가 추가 발견되었다.

6. 세이얄 동굴 : 1952년 베두인족에 의해 ‘미상(未詳)의 장소’에서 일련의 고문서가 발견되었는데, 후에 그 고문서가 이스라엘에 있는 이 동굴에서 나온 것임이 확인되었다. 히브리어, 아람어, 아랍의 나바타이어(Nabataean), 그리스어로 된 이 문서들은 2세기 바르 코크바 시대의 서한과 약정서, 그리고 구약성서에 나오는 소예언자(小預言者)들의 예언서 그리스어본을 포함하고 있다.

7. 쿰란 사본 및 단편의 내용 :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모든 사본은, 쿰란 폐허에 있었던 건물에서 거주하던 쿰란 교단(敎團)에 관계가 있는 것들로, 그 모든 문서는 성서 또는 성서와 관계가 있는 것, 묵시문학(默示文學) 또는 그 교단의 조직과 생활에 관계되는 것들이다. 그 사본 및 단편 속에는 에스델기 이외의 구약성서의 각서(各書)가 포함되어 있고, 그밖에 위경(僞經) 및 성서 이외의 문서도 포함되어 있다. 구약 정경(正經)의 사본 · 단편 주에서는 신명기(申命記), 이사야서, 시편, 다니엘서 등이 가장 많고, 또한 정경 이외의 문서 속에 나오는 인용구(引用句)에도 이들 4개의 서(書)로부터의 인용이 많다. 12족장의 유훈(遺訓), 요엘서의 단편 등은 신약성서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8. 쿰란 교단 : 엄격한 계율에 따라 수도원적인 공동생활을 하고 있던 이 교단의 조직과 생활에 관해서는 교단교규계율(1Q S), 회중규정(1Q Sa), 감사의 시편(1Q H) 등 이외에 1910년 카이로에서 발견된 다마스코서 등이 주요 자료이다. 많은 학자들은 쿰란 교단을 예수 시대의 유태교 3대 종파의 하나인 에세네파(派)와 동일시하고 있으며, 사해문서가 신약성서의 진정하고 분명한 배경을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는 에세네파의 일원은 아니었고, 교회는 쿰란 교단의 일파도 아니다. 이 교단은 이방세계 사람들을 획득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증오했으며, 율법의 사슬 밑에서 떠날 수도 없었다.

9. 사해문서의 공헌 : 첫째로, 구약본문 비평학(舊約本文批評學)에 대한 공헌을 들 수 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히브리어 성서 사본보다 근 1천년이나 더 오래된 이 사본의 발견이 가져다 준 공헌은 크다. 마소라 본문(本文)과의 비교, 또는 70인역(七十人譯, Septuaginta)의 평가문제에서 구약비평학은 새로운 전개를 보이고 있다. 둘째로, 히브리어 학자에게 새롭고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셋째로, 종래에 자료가 빈약했던 구 · 신약 중간시대사, 특히 에세네파 또는 그들의 사상 · 교의 · 생활 등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제공하고 있다. 넷째로, 신약성서와의 관련에서 많은 연구과제를 제시한다. 초대교회와의 유사점(類似點)과 상위점, 목욕재계의식과 초대교회의 세례, 메시아 사상, 세례자 요한과 에세네파 또는 쿰란교단과의 관계, 하느님과 벨리알(Belial, 타락한 천사), 빛과 어둠의 항쟁 등 문제에 대한 연구자료로서의 공헌도 빼놓을 수 없다. 구미 각국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사해문서의 연구에 종사하고 있다.

[참고문헌] W.S. La Sor, Bibliography of the Dead Sea Scrolls 1948-1957, Fuller Theological Seminary Bibliographical Series 2, Pasadena 1958 / C. Burchard, Bibliographie zu den Handschriften vom Thten Meer, ZATWiss Beiheft 76, Berlin 1959 / F.M. Cross Jr., The Ancient Library of Qumran and Modern Biblical Studies, Garden City, N.Y.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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