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 안젤리코 [원] Fra Angelico, Giovanni

Fra Angelico, Giovanni(1378∼1455). 이탈리아의 저명한 화가. 피에졸레의 프라 지오바니(Fra Giovanni da Fiesole)라고도 부른다. 속명(俗名)은 구이도(Guido) 혹은 구이돌리노(Guidolino)라고도 하였다.

피렌체의 근교인 비키오에서 태어났다. 20세 때 성 피에졸레의 성 도미니코 수도원에 들어가 수사가 되었으며 이어 포리뇨로, 그 후에는 코르토나로 갔다가 1418년 피에졸레로 돌아왔다. 1436년부터 피렌체에서 활동(산 마르코 수도원), 1445년에는 로마로 초청되었다.

그의 그림은 종교적인 내면성을 표현하는데 그지없이 정교했으며 세밀화를 방불케 하는 수법을 사용하였다. 그의 필력의 근원에는 중세의 종교성에 있으며 조트와 그의 계승자의 벽화를 모범으로 삼았다. 음악을 연주하는 아름다운 천사에 둘러싸인 유명한 <아마상인(亞麻商人)의 성모상>(1433)은 중세적인 기반 위에 서서 그린 그림이지만, 성호의 특징은 이미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

산 마르코 수도원 대제단의 성모상은 그 이상으로 훨씬 분방하게 보인다. 그의 최대 걸작인 <마리아의 대관>은 산 마르코 수도원에 있으며, 가장 유명한 공심판(公審判)의 여러 그림은 산 마르코 수도원 및 베를린 박물관 등에 있다. 피렌체의 수집품에서 빠진 모든 그림은 오늘날 산 마르코 수도원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곳에 있는 벽화는 이 수도원을 다른 모든 수도원 중에서 가장 신성한 것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이 수도원 복도에는 그가 그린, 그리스도에게 인사하는 2명의 도미니코 수도사가 있으며 회의실에는 수도회의 17명의 성인에 둘러싸인 숭고한 책형(磔刑)의 큰 그림(미완성)과 또한 작은 개인방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의 그림이 있다.

1447년 오르비에토(Orvieto)의 대성당에 천사의 합창단에 둘러싸인 그리스도와 예언자의 합창단을 그렸으며, 로마에서는 1447∼1470년에 바티칸의 니콜라오 소성당을, 성 스테파노와 성 라우렌시오의 생애와 죽음에서 취재한 갖가지 장면을 가지고 장식하였다. 그는 성품이 본래 겸손하고 너그러워 사람들부터 칭송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소득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또한 기도를 드리고 난 후가 아니면 결코 붓을 들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도미니코회에서는 일찍부터 복자로서 존경을 받았으며 1904년 동회 총회는 그에 대해 존경의 공인을 교황청에 요청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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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네우마토마키 [라] pneumatomachi

성령 피조설파(聖靈被造說派). 성령의 완전신성(完全神性)을 부정한 4세기의 이단자들을 가리키는 말. 마체도니오스파라고도 불리지만, 마체도니오스 자신과 관련이 있는지 의문시된다. 세바스테의 에우스타시오스가 친구 대(大)바실리오의 결별한(373년) 뒤부터 이 파의 급진적 창도자가 되었다. 그들은 교황 다마소(재위 : 374), 카파도치아 삼교부(三敎父), 디듀모스 등으로부터 자주 논박당하였다. 그들의 전성기는 380년경이었는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에서 철저히 배격당하였다. 이 파 가운데 보수주의자들은 성령의 동질성(신성)은 인정치 않으면서도 성자(聖子)의 동질성은 인정하였다.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이단 박해로 인해 383년 이후 소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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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설 [한] 風水地理說 [관련] 도참설

1. 개념 : 풍수지리설은 도읍(都邑) · 궁택(宮宅) · 능묘(陵墓)에 적합한 장소를 점치는 지상학(地相學)으로서, 지리가 인간생활에 미치는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논하는 이론이다. 즉, 이는 국가나 가문 내지는 개인의 성쇠(盛衰)가 자신의 재질이나 노력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정기를 잘 얻느냐 못 얻느냐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자연정기론(自然精氣論)의 일종으로서, 동양의 전통적 자연관(自然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상이다. 풍수지리설은 지리풍수설, 재래로 풍수설로도 불리고 있으며 음양(陰陽)사상, 도참(圖讖) 사상과도 일정한 관계를 갖고 있다.

풍수지리설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 바, 산 사람의 거소(居所)를 취급하는 양적(陽的) 풍수와 죽은 사람의 거소를 다루는 음적(陰的) 풍수로 구분된다. 이 때 음적 풍수를 보통 음택풍수(陰宅風水)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양적 풍수에는 양기(陽氣)풍수, 양택(陽宅)풍수가 있으며, 국가의 도읍(都邑)과 관련되는 국도(國都)풍수도 넓은 의미로 볼 때에는 여기에 속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양기풍수는 도읍이나 군현(郡縣) 등 취락의 터와 관련된 사상이며, 양택풍수는 개인의 주택과 관련하여 논의되는 풍수설이나, 양기풍수와 양택풍수를 별다른 구별 없이 사용하기도 한다. 풍수설은 산(山) · 수(水) · 방위(方位) · 사람 등 네 가지 요소의 결합에 의하여 성립되며, 이 결합에 근거를 두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풍수지리설에서는 구체적으로 간룡법(看龍法) · 장풍법(藏風法) · 득수법(得水法) · 정혈법(定穴法) · 좌향론(坐向論) · 형국론(形局論) 등의 형식논리를 갖고 있다. 간룡법은 산을 살피는 것인바, 풍수용어로 용(龍)은 산을 뜻한다. 간룡법에서는 조산(祖山)으로 불리는 명산(名山)으로부터 시추어진 정기(精氣)인 용맥(龍脈)을 찾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장풍법은 풍수설의 요체로서 명당(明堂) 주변의 지세(地勢)에 관한 풍수 이론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땅속에서 발생하는 생기(生氣)를 포용하고 음양의 원기(元氣)를 지닌 바람을 잡아 모아서 간수하는 문제를 논하는 이론이다. 득수법은 산과 물의 조화를 논하는 이론이다. 정혈법은 풍수설에서 얻고자 하는 장소인 혈(穴)을 정하는 데 관계되는 이론이다. 혈은 음택의 경우 시신이 직접 땅에 접하여 그 생기를 얻을 수 있는 곳이며, 양기의 경우 거주자가 실제로 삶의 대부분을 보내게 되는 곳으로 설명되고 있다. 형국론은 혈의 형체와 기세를 어떠한 물체의 형상에 대비하여 표현한 말로서, 혈과 대비되는 물체의 정기를 그 혈이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이론이다. 좌향론은 혈의 위치에서 본 방위를 청룡(靑龍 · 北), 백호(白虎 · 南), 주작(朱雀 · 南), 현무(玄武 · 北)로 나누어 설명하되, 이러한 방위 중 그 혈에서 가장 적절한 방위인 좌향(坐向)을 결정하려는 이론이다. 풍수론에서는 이와 같은 형식논리를 종합하여 취락의 입지를 결정하거나 건축물과 묘소의 위치를 정하고 있으므로 양기풍수와 음택풍수는 상호 동일한 발상법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풍수지리설을 주로 연구하고 작업으로 삼는 사람들을 풍수가(風水家), 풍수(風水), 감여가(堪輿家), 지리가(地理家), 지사(地師), 음양가(陰陽家) 등으로 부른다.

2. 전래과정 : 풍수지리설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인 기원전 4∼5세기경에 구체적으로 출현하였고, 남북조(南北朝) 시대와 당대(唐代)에 이르러 종전의 소박한 인문지리적 사고방식과 음양오행사상이 결부되어 그 체계화가 가능하였다. 한국에 풍수지리설이 전래된 과정은 중국적 음양오행사상이나 천문관의 전래와 병행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즉, 풍수지리설은 삼국시대 초에 전래되었는데, 고구려 및 백제의 능묘에 사신도(四神圖)가 등장하고 있으며, 공주(公州 松山里) 무령왕릉(武寧王陵)의 장법이 음양오행사상 및 풍수지리설과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도 신라 탈해왕(脫解王)이 “지리를 겸하고 알고 있었다”(兼知地理)는 구절도 중국적 풍수사상의 전래와 관계되는 사료로 해석된다. 한편, 한국사에 있어서 풍수지리설이 본격적으로 성행하게 된 시기는 신라 말기인 9세기경이었다. 당시에는 중앙 귀족에 대립하여 육두품(六頭品) 계열이 성장하고 있었으며, 호족(豪族)들의 중앙정부에 대한 이반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혼돈된 시대상과 관련하여 풍수지리설이 본격적으로 발전하였고, 도선(道詵, 827∼898)은 풍수지리설의 보급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 풍수지리설은 고려왕조 초기부터도 적극 수용되고 있으며,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이를 자신의 국가통치에 활용하고자 하기도 하였다. 즉 그는 이를 이용하여 사찰의 남설을 막아보고자 하였으며, 왕도지기설(王都地氣說)을 가지고 자신의 북진정책을 합리화시켰다. 그리고 그는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자신의 통일정책에 비협조적이었던 차현(車峴) 이남의 사람들에 대한 탄압을 합리화시켰다. 또한 묘청(妙淸) 일파의 서경천도론(西京遷都論)도 풍수설과 깊은 관련이 있는 주장이다. 한편 12세기경 고려사(高麗史)에 나타나는 기록을 검토해보면, 고려 중엽 이후부터 풍수지리를 전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등장했고, 이들을 통하여 한국의 풍수지리설도 체계화되어 갔던 것으로 파악된다. 고려왕조 이래 조선왕조 시대에 이르러서도 지리업(地理業)은 잡과(雜科)의 일종으로 과거제도 아래에서 존속되어 왔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건국 직후인 15세기경에 이르러 양기풍수에 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된 바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왕조에서 풍수지리설이 가장 성행했던 시기는 17세기 후반기 이후였다. 17세기는 15세기에 확립된 주자학적 학문 전통이 변질되어 가던 시기이며, 예학(禮學)이 성행하던 때였다. 예학이 특히 강조되던 문화풍토와 관련하여 부모에 대한 효(孝)와 조상에 대한 제사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그리고 장술(葬術)의 진전이 이루어지고 장례(葬禮)가 강조됨에 따라 풍수지리설의 음택풍수부와 관련된 구산(求山)의 풍습이 당연시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음택풍수설의 성행은 조선왕조 전기와는 다른 특이한 현상이었다. 조상의 묘를 명당(明堂)에 쓰고자 하는 당시 이와 같은 상황은 조상에 대한 효도의 표시이며,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의미를 지닌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음택풍수설은 충효(忠孝)를 한 맥락에서 강조하던 당시, 효(孝)가 영달의 기본이었기 때문에 조상에 대한 효심을 외적으로 표현하여 유교사회 안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성행하게 된 측면을 간과할 수는 없다. 또한 음택풍수설은 17세기 중엽 이후 가문(家門)의식의 강화와 병행하여 가문의 위세를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쓰여진 사례도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음택풍수설은 구산의 본래 목적인 효심의 표현이라는 측면을 떠나서 자신과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한 방법으로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음택풍수설인 풍수설의 주류를 이루게 된 조선 후기의 사회에서는 주자학을 신봉하던 전근대적 지식인들도 이에 경도되어 갔다. 이는 주자학적 사유방식의 변동과 관련된 현상일 뿐만 아니라, 주자학적 지식인들이 주자학의 입장에서 볼 때 비정통적인 풍수설에 경도된 것은 일종의 자기 타락현상으로도 파악될 수 있다. 한편, 음택풍수설의 성행이 많은 사회적 병폐를 낳게 되자 이에 대한 반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익(李瀷),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한 여러 실학자들은 음택풍수설의 허구성을 예리하게 지적하여 비판해 나갔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 깊이 침투된 풍수지리설이 하루 아침에 극복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개항 이후에도 풍수설은 계속 성행하고 있었으며, 일본의 침략을 받은 직후에도 이 현상은 계속되어, 당시 소송(訴訟)의 대부분을 음택풍수와 관련된 묘송(墓訟)이 차지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일제시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음택풍수에 관한 관념들이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다.

3. 평가 : 풍수지리설은 동양의 전근대적 자연관을 반영하는 사상이며, 소박한 지리결정론적(地理決定論的) 사고방법의 일종이다. 그리고 풍수지리설은 그 전개과정에서 기복적(祈福的) 요소를 띠우게 되었다. 그러나 풍수지리설 가운데 양택풍수설, 양기풍수설 등은 오랜 생활경험의 축적을 통해 얻어진 결론으로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취락의 입지나 그 주택지를 결정할 때 배산임수(背山臨水), 남사면(南斜面), 용호사성(龍虎砂城) 등의 지역을 선호하는 경향은 지구 북반구 중위도(中緯度) 지방의 취락이나 주택의 입지로서는 상당한 타당성을 가진 견해로 평가되고 있다. 반면에 음택풍수설은 죽은 이도 산 사람과 같이 존중하고자 하는 관념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이와 같은 본래의 의미가 잊혀져 갔고 기복적 의미로 전환되었다. 음택풍수설에 혼재되어 있는 이 기복적 요소는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 천주교회에서 풍수지리설을 말할 때에는 흔히 음택풍수설만을 지칭하고 있다. 이는 교회 전래 당시 한국 풍수지리설의 주류가 음택풍수설이었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박해시대 이래 풍수설 즉, 음택풍수설을 배격해 왔다. 교회는 1857년 <장주교윤시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를 통하여 미신행위를 배격한 바 있었고 그리고 이와 같은 태도는 ≪한국천주교지도서≫(韓國天主敎指導書)에서도 계속 드러나고 있다. 또한 1959년에 간행된 윤형중(尹亨重)저 ≪상해 천주교요리≫(詳解天主敎要理)에서도 풍수지리설과 관련된 미신행위를 천주십계 중 제1계명을 범하는 미신행위로 엄격히 금지한바 있었다. 이러한 금지는 음택풍수설에 포함되어 있는 기복적 요소를 배격함으로써 하느님이 인간 화복(禍福)의 주재자임을 선명히 하려는 의도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음택풍수설에서 죽은 이를 명당에 모시고자 하는 데에는 죽은 이에 대한 추모의 정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음택풍수설이 현재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기복적 성격을 상실한 채 민속(民俗)의 일종으로 시행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할 때 풍수지리설에 대한 전통적인 엄격한 배격 태도에는 수정이 가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 도참설 (趙珖)

[참고문헌] 風水地理叢書, 景仁文化社, 1969 / 崔昌祚, 韓國의 風水思想, 民音社,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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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원본당 [한] 豊水院本堂

원주교구 소속 본당. 소재지는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2리 1097이며, 본당주보는 ‘예수성심’이다. 강원도 최초의 본당인 풍수원에 신자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로 더욱 심해진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피난해 오면서부터였다. 곳곳에서 모여들어 마을을 이룬 신자들은 일부는 화전(火田)을 일구고, 일부는 옹기를 구어 팔아 생계를 유지하면서 신앙생활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던 중 1887년 5월 한불조약(韓佛條約)의 비준(批准)으로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자 당시 서울교구장 뮈텔(Mutel, 閔德李) 주교는 안변(安邊)에서 전교하던 파리 외방전교회원 르 메르(Le Merre, 李) 신부를 풍수원에 파견, 본당을 창설하고 초대(1886∼1896년) 본당신부로 임명하였다. 당시 관할지역은 12개 군(郡) 29개 공소로 신자수는 약 2,000명에 달하였다.

르 메르 신부가 본당의 터전을 닦은 뒤 1896년에는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부임하여 1943년 10월 23일 81세를 일기로 선종, 성당 뒤편의 동산에 묻힐 때까지 평생을 이 본당을 위해 바쳤다. 정신부의 부임 당시 관할구역은 화천 · 인제 · 양구 · 홍천 등지로 정기 공소순방에만 3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1896년에는 강원도 세 번째 본당인 원주본당(原州本堂, 현 원주교구 주교좌 園洞本堂)을 분할하였다. 1907년 서양식 벽돌 건물인 현재의 성당을, 1912년에는 사제관을 신축하였다. 한편 1910년에는 교우 유지들과 상의하여 삼위학당(三爲學堂)을 설립, 성당 사랑방에서 학생들을 모아 한글 · 한문 · 수학 · 역사 등 신학문을 가르쳤는데, 이 학당은 뒤에 광동(光東) 국민학교로 발전하였다. 1920년에는 춘천본당(春川本堂, 현 춘천교구 주교좌인 竹林洞本堂)과 양평본당(楊平本堂)을, 1922년에는 대화본당(大和本堂, 현 平昌本堂)을 분할하였다. 1943년 2대 본당주임인 정규하 신부의 별세로 1942년부터 보좌신부로 있던 김학용(金學用, 시몬) 신부가 3대(1943∼1963년)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다. 한편 1926년부터는 매년 성체 성혈 대축일에 성체거동 행사를 거행하여 전쟁 때를 제외하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해오고 있다. 1930년에는 횡성본당(橫城本堂)을, 1948년에는 홍천 물굽이본당(水曲里本堂, 현 陽德院本堂)을 분할하였다. 풍수원본당은 1939년 4월 25일 춘천지목구의 설정으로 서울교구로부터 춘천교구로 편입되었는데, 1937년말 신자수는 1,178명으로 이때까지도 강원도에서는 큰 본당 가운데 하나였다. 1963년 4월 26일 3대 본당주임인 김학용 신부가 선종하여 4대(1963. 4. 26∼1963. 7. 7) 신현봉(申鉉奉, 안토니오) 신부가 잠시 본당주임으로 있다가 5대(1963∼1965년) 이응현(李應鉉) 신부가 부임하였다. 이후 역대 본당신부는 다음과 같다.

6대(1965∼1969년) 강대형(姜大亨, 토마스) 신부, 7대(1969∼1973년) 델라니(Delany, 都) 신부, 8대(1973∼1976년) 켈리(Kelly, 毛) 신부, 9대(1976∼1981년) 조응환(曺應換, 다테오) 신부, 10대(1981∼1984년) 박용식(朴容植, 시몬) 신부, 11대(1984∼현재) 김한기(金漢起, 시몬) 신부.

풍수원본당은 1965년 3월 2일 원주교구의 설정으로 이에 편입되었으며, 현재 신자수는 1,048명으로 5개 공소를 관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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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랭 [원] Poulain, Augustin

Poulain, Augustin(1836∼1919). 프랑스의 예수회 신비신학자. 저술가. 셰르부르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죽었다. 1858년 예수회에 입회하였고, 학업을 마친 뒤 메츠(Mets), 앙제(Angers)에서 수학교사로 근무하였다. 그 뒤 5년간 파리에서 미술가동업조합 간부로 있었다. 1901년 신비신학분야의 저서 ≪기도의 은총≫(Des graces d’oraison)이 출판되자 커다란 호평을 얻어, 그의 생전에 9판을 거듭했으며 수개국어로 번역되었다. 그는 대신학자도 아니었고, 그가 묘사한 순수신비상태를 직접 체험한 것도 아니면서 이 섬세하고도 어려운 문제를 교훈적으로 논술하고 있다. 결국 이 책은 17세기 이래 대체로 소홀히 여겨져 온 신비신학에 대한 흥미를 되살리는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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