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라델라 [원] Stradella, Alessandro

Stradella, Alessandro(1642~1682). 이탈리아 가수, 작곡가. 몬테페스티노에서 태어나 제노바에서 죽었다. 그의 생애는 많은 수수께끼와 전설로 둘러싸여 있다. 아마도 모데나에서 음악공부를 한 것 같고, 로마, 베네치아, 토리노, 제노바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꾸준히 한 직장에 붙어 있는 적은 없었다. 1677년에는 밀론(密論)사건으로 여자쪽 가족에 의해 상해(傷害)를 입었고, 그 후 제노바에서 암살당하였다.

바로크시대의 오페라 및 종교음악 작교가인 그는 다산(多産)이고 진지했으며, 카발리(Francesco Cavalli)의 베네치아악파와 스카를라티(A. Scarlatti)의 나폴리 악파를 연결하는 입장에서 17세기 중엽의 가장 진보적인 오페라 작곡가로 간주되고 있다. 작품에는 오페라, 오라토리오, 실내악, 교회음악, 기악곡이 포함되어 있고, 최고 걸작품은 오라토리오 (제노바 1678)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연애사건을 주제로 작곡가 플로토(Friedrich von Flotow)는 오페라 (1844)를 작곡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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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트 [원] Stewart, Thomas

Stewart, Thomas(1925~1994). 아일랜드 성 골롬바노 외방전교회원. 주교. 3대 춘천(春川) 교구장. 한국명 박(朴), 세례명은 토마스. 에이레에서 출생, 1944년 에이레 성 골롬바노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950년 동(同)회의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서품을 받았다. 1951년 로마 성 그레고리오 대학원을 입학하여 교회법을 전공, 1955년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했고 입국 후 강원도 횡성본당 보좌신부, 1957년 원주 학성본당 주임신부, 1958년 횡성본당 주임신부, 1959년 춘천교구 총대리 겸 사목국장을 거쳐 1966년 춘천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이해 5월 11일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현재 춘천 교구장으로서 춘천교구의 사목과 행정을 총괄하고 있으며 그밖에 평신도사도직 전국단체인 ‘한국 행복한 가정운동’과 ‘한국 메리지엔카운터’의 담당주교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 : 스튜어트 주교는 1994년 7월 16일 본국으로 돌아가 나반(Navan)의 달간 파크(Dalgan Park)에 있는 골롬반 외방선교회 본부에서 휴양하던 중, 그 해 10월 30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그곳에 묻혔다. 현재 춘천교구 교구장은 1994년 착좌한 장익 십자가의 요한 주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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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노2 [라] Stephanus

Stephanus 1세(?~257). 교황(재위 : 254~257). 성인. 로마 태생. 교황 취임 직후에 로마 사제 노바시아노(Novatianus)의 교리를 신봉하는 프랑스 아를(Arles)의 주교 마르치아누스(Marcianus, 후에 동로마 황제)의 문제로 남(南)갈리아에 대해 간섭하였다. 이어서 데치우스 황제의 박해로 인한 논쟁이 일어나 스페인의 교회에 대해서도 개입하였다. 그 후 이단자가 행한 세례의 유효성 여부를 둘러싼 논쟁에 말려들어서 툴롱의 주교 치프리아노(Cyprianus)와 대결하였다. 치프리아노는 아프리카의 3개 회의와 카파도치아의 카이자리아 주교 피르밀리아노스(Firmilianos)의 지지를 얻어, 이단자가 행한 세례는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성 스테파노 1세는 베드로와 바울로에 입각한 로마의 전통을 고집하여, 이단자나 분파(分派)에서 교회로 복귀하는 자는 그 세례의 유효성을 인정해서 재세례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카르타고 대표단과의 회견을 거부하였다(256년). ≪Liber Pontificalis≫에 의하면, 성직자는 직무를 할 때 특별한 의복을 착용한다는 규칙을 정했다고 전해지며, 또한 일반적으로 순교(殉敎)를 했다고 전해지지만, 이것은 모두 확실치 않다.

Stephanus 2세(?~757). 교황(재위 : 752-757). 교황 취임 후 4일만에 죽은 다른 교황 스테파노 2세를 계산에 넣는다면 그는 3세가 된다. 그의 치하에서 교황청은 비잔틴 제국의 권력에서 해방되어 신흥세력인 프랑크 왕국과 협력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후 몇 세기에 걸치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후에 롬바르드왕 아이스툴프(Aistulf, ?~756)가 그와의 사이에 체결한 조약을 무시하고 로마를 포위하자, 그는 동로마제국 황제의 원조를 요청했다가 실패하고, 프랑크왕 피핀에게 원조를 부탁하였다. 로마는 피핀의 두 차례의 원정으로(754, 756년) 마침내 롬바르드의 위협으로부터 구출되었다. 이로써 로마 교황령이 비로소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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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노1 [라] Stephanus

① 최초의 순교자(protomartyr, ?~35?). 성인. 축일은 12월 26일. 중세의 특히 유럽대륙에서 가장 널리 존경받던 성인의 한 사람이다. 전승에 의하면, 최초의 부제(副祭)라고 한다. 사도행전 6:1-8:2에 그의 임명과 연설, 그리고 순교에 대한 내용이 있다. 그는 디아스포라에 살던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태인으로 추측되며 사도들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식량 배급을 할 7인중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사도 6:5). 또한 설교하고 기적을 행하는 일을 하였으므로(사도 6,8-9), 유태인들의 미움을 사서 산헤드린에게 고발되었다.

사도행전 7:2-53에는 박해자들 앞에서 행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연설이 실려 있는데, 이에 화가 난 유태인들은 모세법에 따라 그를 돌로 쳐 죽였다. 이 때 뒤에 성 바울로가 된 사울이 있었다. 스테파노는 그리스도에게 박해자들을 용서할 것을 청하며 순교하였는데, 이런 태도는 후세에 여러 순교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무덤은 415년 사제 루시안(Lucian)에 의해 발견되기까지 알려지지 않았었다. 축일은 4세기말부터 12월 26일로 지켜졌으며, 2년에 한 번씩 그의 유해를 발견한 것을 기념하는 ‘성 스테파노 유해발견 축일’(Inventit St. Stephani)이 8월 3일에 지켜졌다. 그러나 발견 기념일이 1955년 이후로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지켜지지 않는다. 455~460년에 에우도키아(Eudoxia) 여황제는 다마스커스 성문밖에 그를 기념하는 교회를 세웠는데 그 유적지가 1882년에 도미니코회에 의해 발견되어 새로운 그의 교회가 세워졌다.

② 헝가리의~(S. Hungariae, 975~1038). 성인. 축일은 8월 16일. 헝가리왕(재위 : 1000~1038). 부다페스트 근교의 에슈테르곰(Esztergom)에서 태어났다. 헝가리명은 바이크(Vajk). 스테파노(헝가리어로는 Istvan)는 세례명이다. 부친 게사(Gaza)는 헝가리의 통치자였다. 995년 프라하의 성 아달베르토(Adalbertus)에 의해 견진성사를 받았고 이어 같은 해 바바리아공(公) 하인리히 2세의 누이동생 기젤라(Gisela)와 결혼했으며, 이 때문에 헝가리 내에서의 그리스도교 및 독일 세력이 증대하게 되었다. 997년에 그의 요청으로 교황 실베스테르 2세가 보내준 왕관을 스스로 쓰고 헝가리 최초의 왕이 되었다. 그는 프랑크왕국을 모범삼아 공정하고 엄격한 정치를 했으며, 포교활동에 있어 사도적 지배자의 귀감이 되었었다. 마르틴스베르크(Martinsberg) 등 수도원 설립을 완성, 2개 대주교와 8개 주교구를 설치,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법제(法制)를 선포, 이교의 반동을 억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유해는 슈툴바이센부르크(Stuhlweissenburg)의 성당에 있는 아들 에메리히(Emerich, 1007-1031)의 무덤 곁에 안장되었으며, 1083년 교황 우르바노 2세에 의해 부자(父子)가 동시에 시성(諡聖)되었다. 부패되지 않은 그의 오른손은 헝가리의 국민적 성물(聖物)로 존숭되며, 부다페스트성내의 경당에 보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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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니슬라오 [라] Stanislaus

Stanislaus(1031-1079). 성인. 축일은 4월 11일. 폴란드의 보호성인. 슈체파노우(Szczepanow)에서 태어나 크라카우(Cracow)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에 수도 그네즈노(Gniezno) 대성당 부속학교를 마치고 파리에 유학, 후에 크라카우 주교좌 성당 참사회원 및 설교자가 되었다. 1072년 교황 알렉산데르 2세에 의해 크라카우 주교관구 주교로 임명되었다. 당시 폴란드왕 불레슬라우스 2세는 키예프 대공(大公)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원정 때문에 정치적 불안을 조성하고 있었다. 스타니슬라오는 왕제(王弟) 라디슬라우스가 영도하는 반대파에 가담, 왕을 탄핵하였다. 왕은 그를 반역죄로 몰아 능지처참형을 선고, 스타니슬라오는 크라카우의 성 미카엘 성당에서 왕으로부터 직접 척살(刺殺)당해 순교하였다. 이 행위로 인해 왕은 실권하고 헝가리로 도망, 오시아크(Osiak)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회오(悔悟)로써 여생을 마쳤다. 1088년 스타니슬라오의 유해는 크라카우의 대성당에 이장되었다. 1253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 의해 시성(聖)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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