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hanus 1세(?~257). 교황(재위 : 254~257). 성인. 로마 태생. 교황 취임 직후에 로마 사제 노바시아노(Novatianus)의 교리를 신봉하는 프랑스 아를(Arles)의 주교 마르치아누스(Marcianus, 후에 동로마 황제)의 문제로 남(南)갈리아에 대해 간섭하였다. 이어서 데치우스 황제의 박해로 인한 논쟁이 일어나 스페인의 교회에 대해서도 개입하였다. 그 후 이단자가 행한 세례의 유효성 여부를 둘러싼 논쟁에 말려들어서 툴롱의 주교 치프리아노(Cyprianus)와 대결하였다. 치프리아노는 아프리카의 3개 회의와 카파도치아의 카이자리아 주교 피르밀리아노스(Firmilianos)의 지지를 얻어, 이단자가 행한 세례는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성 스테파노 1세는 베드로와 바울로에 입각한 로마의 전통을 고집하여, 이단자나 분파(分派)에서 교회로 복귀하는 자는 그 세례의 유효성을 인정해서 재세례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카르타고 대표단과의 회견을 거부하였다(256년). ≪Liber Pontificalis≫에 의하면, 성직자는 직무를 할 때 특별한 의복을 착용한다는 규칙을 정했다고 전해지며, 또한 일반적으로 순교(殉敎)를 했다고 전해지지만, 이것은 모두 확실치 않다.
Stephanus 2세(?~757). 교황(재위 : 752-757). 교황 취임 후 4일만에 죽은 다른 교황 스테파노 2세를 계산에 넣는다면 그는 3세가 된다. 그의 치하에서 교황청은 비잔틴 제국의 권력에서 해방되어 신흥세력인 프랑크 왕국과 협력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후 몇 세기에 걸치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후에 롬바르드왕 아이스툴프(Aistulf, ?~756)가 그와의 사이에 체결한 조약을 무시하고 로마를 포위하자, 그는 동로마제국 황제의 원조를 요청했다가 실패하고, 프랑크왕 피핀에게 원조를 부탁하였다. 로마는 피핀의 두 차례의 원정으로(754, 756년) 마침내 롬바르드의 위협으로부터 구출되었다. 이로써 로마 교황령이 비로소 성립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