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먼 [원] Newman, John Henry

Newman, John Henry(1801~1890). 영국의 추기경이며 옥스퍼드운동의 주창자. 영국성공회 집안에서 태어나 1817년 옥스퍼드대학에 들어가기까지 개신교의 강한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다. 1822년 오리엘대학의 평의원에 선출되었으며, 그곳에서 교회의 신성한 사명을 인식시켜 준 와틀리(Whateley)와 전승의 가치를 가르쳐 준 호킨즈(Hawkins)의 영향을 받아 점차 개신교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케블(John Keble)과 특히 프라우드(Richard Horreli Froude)가 그로 하여금 구(舊)교회적 신앙을 돈독히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824년 부제서품, 1828년 옥스퍼드대학 교회인 성 마리아 교회의 주임신부로 임명되었다. 뉴먼과 그의 동료들은 프로테스탄티즘과 가톨리시즘 간의 중용을 취하려고 노력했고, 아직 분리되지 않았던 초기 교회의 가르침에 기초를 둔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의 설교와 ‘Parochial and Plain Sermons’라는 제목 하의 가르침의 확산과 라는 소책자의 발간으로 그의 이러한 견해들이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소책자의 발간은 ‘39개조’와 가톨리시즘 간의 화해를 시도한 90호가 널리 비판을 받게 되자 곧 폐간되었다. 그 뒤 초기 교회에 대한 연구 논문집 <4세기의 아리우스파>를 냈으며, 그리스도 단성(單性)논쟁을 연구하던 중 1839년에 재건된 영국 교회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되었다. 1843년 그는 성 마리아 교회에서 물러나왔으며 1845년에는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로마 교회에 소속되게 되었다. 로마 교회 내에서 그의 역할은 처음에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는 더블린에 새로 설립된 가톨릭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여 《대학의 사상》(Idea of University)이라는 책을 펴냈으나 별 호응을 얻지 못했으며, 한때 자유주의 신학파의 기관지인 지의 편집장을 지내기도 했으나 이 역시 오래 가지 못했고 옥스퍼드대학의 가톨릭 신자들을 위해 병원을 세우려는 계획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1864년에 찰스 킹즐리에 의한 인신공격에 답변하여 자서전적 스케치로서 《Apologia Pro Vita Sua》를 발표했는데 이로 인해 그는 다시 한 번 유명해지게 되었다. 1870년 그는 그의 신앙을 옹호하는 ‘Grammar of Assent’를 발표하였으며 1879년에는 추기경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신학자이자 설교가이며 또 시인 철학자로서 많은 저서를 남겼고, 사상적으로 오성(悟性)에서 직관을 존중하는 신토마스주의에 반대하였다. 이로써 그는 근대주의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사상과 문장으로도 영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 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에 미친 그의 영향은 막대한 것이었다. 영국 교회에 대해서는 영국의 가톨릭 전승에 대해 영향을 미쳤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에는 교리의 발전에 대한 신학이론에 특히 큰 기여를 하였다. 그의 신학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부터 빛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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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수 [관련] 루도비코

⇒ 루도비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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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갈다 초남이 일기 남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순교한 이경도(李景陶)와 이순이(李順伊) 남매가 남긴 서한과 일기(日記)로, 누갈다는 이순이의 세례명이고 초남(草南)은 전주(全州) 부근의 마을 이름이다. 전체 3편의 서한과 1편의 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첫 번째 서한은 1801년 12월 29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이경도가 순교하기 직전인 12월 25일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낸 위로와 하직의 글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서한은 이순이가 전주옥에서 쓴 것으로 자신의 어머니에게 9월 26일자로 쓴 것 한 통과 친 언니, 올케에게 쓴 것 한 통이며, 마지막 네 번째 글은 1827년 전주에서 옥사(獄死)한 이경언(李景彦)의 체포와 순교 경위를 이경도가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는 죽음을 앞둔 순교자들의 가족에 대한 애끊는 정과 그리스도에 대한 투철한 사랑이 충일되어 있는데 특히 이순이의 빛나는 신앙과 순결의 아름다운 필치가 돋보인다.

[참고문헌] 金九鼎, 敎會史에서 내가 發見한 珍貴한 史料, 가톨릭靑年, 1965년 6월호~1965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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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사목 [한] 農村司牧 [영] rural pastoral work [관련] 농민운동 한국가톨릭농민회

그리스도 교회는 오랜 역사를 통해 민중과 함께 살아 왔고 항상 노동과 직업을 존중해 왔다. 특히 농민과의 관계는 밀접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농민을 존중한 것은 설교에서 어려운 말이나 화법을 사용하지 않고 농민들이 사용하는 단순한 화법을 사용하였으며, 농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사실들을 비유로 설명한 것에서 잘 나타난다. 나무와 열매의 비유(마태 7:15-20, 루가 6:43-44),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 13:1-9, 마르 4:1-9, 루가 8:4-8),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30), 겨자씨의 비유(마태 13:31-32, 마르 4:30-32, 루가 13:18-19), 무화과나무의 비유(마태 24:32-35, 마르 13:28-31, 루가 21:29-33), 자라나는 씨의 비유(마르 4:26-29), 포도나무의 비유(요한 15:1-7) 등에서 그러한 사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농촌사목은 농민의 삶에 동참하여 농민들에게 그리스도교적 삶을 이해시키며 농민들이 축복받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라틴계, 게르만계, 슬라브계의 유럽제국에 있어서 지방교회는 활동영역을 농민의 영혼구원에만 제한시키지 않고, 지방의 민속을 유지 보전하고 향토심을 일깨우며, 농민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 형태의 사목활동을 수행하였다. 즉 농촌이 당면한 곤경 속에서 촌락의 정신적 지주로서 사회 · 문화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농촌경제에서도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포도 · 과수 · 채소의 재배술과 품종개량, 양봉의 장려, 공동조합의 설립 · 운영 등 농촌경제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농업기술의 향상과 서적의 광범한 보급, 국가의 농촌에 대한 관심 등으로 인하여 과거 교회가 담당했던 역할을 농민들은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반면 공업의 급속한 발전에 따른 농업의 상대적인 낙후, 국민경제에서 농업의 비중감소로 인한 소외, 도시자본에 의한 농촌의 수탈 등 농민들은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현대 교회의 농촌사목은 바로 이러한 현대 자본주의의 병리현상의 직접 · 간접의 피해자인 농민을 대상으로 특히 그 병리현상을 치유하는 데 초점이 두어지고 있다. 이러한 농촌사목활동에 있어서는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책임감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한 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지방교구를 중심으로 활발한 농촌사목이 이뤄지고 있으며 평신도 사도로서의 농민들의 활동도 가톨릭 농민회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 농민운동, 한국가톨릭농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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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회관 [한] 農民會館 [관련] 가톨릭회관

⇒ 가톨릭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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