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자를 취조하고 벌하기 위해 가톨릭교회가 설치한 특별재판. 주로 로마법이 미치는 남부 유럽에서 성행하였다. 초기 이단에 대한 처벌은 파문에 불과했고, 교부는 물리적 처벌을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인정된 후 제왕들은 이단을 반역죄로 규정, 4, 5세기 도나티즘과 프리실리아니즘 등 이단에 물든 사람에 대해 재산몰수, 사형 등의 중형을 가하였다. 대체로 교회는 성 베르나르도(St. Bernardus)가 “신앙은 권유되어야지 강제되어서는 아니된다”(Fides suadenda non imponenda)라는 원리를 유추한 12세기까지 초기의 입장을 견지했으나 12세기 후반과 13세기초에 종교뿐만 아니라 당대 사회의 모든 제도를 위협하는 이단 카타리파(派)가 급속히 퍼지자 교회는 세속정권과 제휴, 이단심문을 시작하였다.
흔히 ‘종교재판’이라고 불리는 이단심문은 황제 프레데릭(Frederick) 2세가 전제국의 이단색출은 국가관리에 위임한다는 칙령을 발표한 1232년에 생겨났다. 곧 황제의 정치적 야심을 두려워하는 그레고리오 9세는 이 임무를 교회가 맡을 것을 주장, 교황은 도미니코회나 프란치스코회 등의 탁발수도회원 중에서 심문관을 임명하였다. 심문관들은 이단혐의가 있는 지역의 심문이 시작되기 전, 그 지역을 순회하며 혐의가 있는 자들이 자백할 것을 종용, 이에 응한 자들에게는 단식이나 순례여행 등 가벼운 벌칙만이 주어졌으나 1개월 정도의 은사의 기간이 지나면 재판관, 평신도와 성직자로 구성된 배심원단, 그리고 교구사제에 의해 소환된 피고 등이 참가하는 본격적인 이단심문이 시작된다. 만약 피고가 그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제시된 제증거 앞에서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최후에는 재산의 몰수, 종신이나 일시적 투옥, 속권에 의한 화형 등의 형벌을 받았다. 이같인 이단을 엄중한 단죄한 것은 당시의 이단이 종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무정부주의나 반란으로 이해됐던 사회적 상황 때문이기도 하였다. 1252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대칙서 를 통해 형벌을 허용하였고, 1542년 바오로 3세는 이단심문의 최고법정으로 ‘이단심문성성’을 설치하였다.
스페인 이단심문은 국가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관계로 성격이 조금 달랐다. 1479년 국왕 페르디난드와 여왕 이사벨라에 의해 교황 식스토 4세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음으로써 설립, 처음에는 유태교와 이슬람교부터의 개종자를, 후에는 프로테스탄트 문제를 다루었다. 이단심문이 차츰 교황청을 무시하고 행해졌으므로 그 잔인성은 자주 단죄의 대상이 되었다. 1808년 요셉 보나파르트에 의해 폐지된 후 1814년 다시 부활되었다가, 1820년에야 완전히 폐지되었다. (⇒) 이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