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한 행위가 도덕적으로 정당성을 갖는가, 갖지 않는가 하는 의문에 부딪혔을 때, 법에 규정된 대로 따르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양지(良知)와 양심(良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 때 법에 반하는 행위가 개연성을 가질 때 그 행위는 허락되어야 한다는 입장이 이완주의이다. “만약 어떤 견해가 개연성을 갖는다면 여기에 반해 더 큰 개연성을 갖는 견해가 있다고 할지라도 전자를 따르는 것이 허락되어야 한다”(Si est opinio probabilis, licitum est eam sequi, licet opposita sit probabilior)라고 주장하는 이완주의는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경우, 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견해가 한층 더 많은 이유가 있다고 할지라도 자유롭게 행위하는 것이 허락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완주의는 교회에서 명백히 배척당한다.
이영희 [한] 李英喜
이영희(1809~1839).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동정녀(童貞女). 세례명 막달레나. 성녀 허계임(許季任)의 딸. 성녀 이정희(李貞喜)의 동생. 경기도 봉천(奉天)에서 태어났다. 과부가 되어 집에 돌아온 고모 이매임(李梅任)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어려서 어머니, 언니와 함께 입교하여 열심히 수계(守戒)하였다. 성장하면서 수정(守貞)을 결심하고 혼기에 이르자 호랑이에게 물려간 것처럼 꾸민 후 상경, 뒤이어 상경한 이매임과 함께 살며 수계하였다. 1839년 4월 초 남명혁(南明赫)과 이광헌(李光獻)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한집에 같이 살고 있던 이매임, 이정희, 김성임(金成任), 김 루시아(金累時阿) 그리고 성사를 보러 상경한 어머니와 함께 4월 11일 남명혁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포청과 형조에서 모두 7차의 신문과 형문을 당했으나 한결같은 신앙으로 이를 이겨내고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7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동정의 몸으로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이영덕 [한] 李榮德
이영덕(1812~1839).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동정녀(童貞女). 성녀 이인덕(李仁德)의 언니. 세례명 막달레나.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외할머니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모친 조 바르라라, 동생과 함께 입교했는데, 부친이 천주교를 몹시 싫어하므로 부친이 지방으로 여행간 사이 나머지 식구들과 함께 성세성사를 받았다. 혼기에 이르러 부친이 외교인과의 결혼을 강요하자 수정(守貞)할 생각으로 꾀병을 앓기도 하고 혈서를 써서 부친에게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친의 완고한 고집을 꺾을 수 없어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에게 가출할 수 있도록 청원했고 주교가 허락하지 않자 모친, 동생과 함께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서 숨어 살았다. 이 사실을 안 주교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다가 조선 풍습에 가출했던 부녀자들이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집 한 채를 마련하여 세 모녀가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모친과 동생, 그리고 함께 살고 있던 이 가타리나, 조 막달레나 모녀와 함께 서로 위로하며 격려하며 순교를 결심하고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면 자수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미처 자수할 사이도 없이 6월에 체포되어 6개월 동안 포청과 형조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12월 29일 서소문밖 형장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이연희 [한] 李連熙
이연희(1804~1839).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마리아. 성인 남명혁(南明赫)의 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남명혁과 결혼한 후 28세경 남편과 함께 입교하였다. 그 후 남편과 함께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는 한편 회장의 직무를 맡은 남편을 도와 공소(公所)를 세워 예비자와 교우들을 가르치고 권면하여 성사를 예비시키는 등 열심히 교회일을 도왔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4월 7일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12살 된 어린 아들이 고문을 당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이는 천주의 영광입니다”라고 말한 뒤 자신도 혹형과 고문을 달게 받았고 형조로 이송되어서도 한결같은 신앙으로 모든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9월 3일 서소문밖 형장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이연식 [한] 李連植
이연식(1814~1866). 대원군(大院君)의 하인으로 1866년 병인(丙寅)박해 때 체포되어 배교했으나 이해 9월 10일 김면호(金勉浩, 일명 계호), 김문원(金文遠)과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