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8월 5일 경성 대목구에서 대목구(代牧區)로 분리되었고, 함경남북도를 관할하였다. 관할권은 독일의 베네딕도회에 위임되었다. 교구 설정 당시 180만 명의 인구 가운데 신자수는 500여명에 불과했고, 본당도 원산(元山)과 내평(內坪) 2개소에 지나지 않았다. 초대 대목(代牧)으로는 베네딕도회의 사우어(Sauer, 1877~1950) 대원장이 임명되었다. 그 뒤 사우어 대원장이 연길(延吉) · 의란(依蘭) 등 간도지방의 지목구(知牧區) 지목(知牧)도 겸임하게 됨으로써 원산교구는 이 지방에까지 확대되었다. 원산교구는 교구 설정과 함께 발전하기 시작하여 1928년에 이르러 신자수가 1만 6,500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에 사우어 지목은 관할지역의 분할을 교황청에 요청, 연길과 의란이 차례로 지목구로 독립되어 원산교구의 관할지역은 다시 함경도 지방으로 한정되었다. 1940년에 원산교구는 함흥대목구로 개칭되고 덕원면속구가 독립되었다.
원불교 [한] 圓佛敎
우주의 근본원리인 법신불(法身佛) 일원상(一圓相)을 최고의 종지로 삼고, 그 진리에 대한 신앙과 도덕의 훈련을 통해서 낙원세계를 이룩하자는 이상을 내세운 ‘생활불교’의 교단. 원불교는 1916년 소태산(小太山) 박중빈(朴重彬)이 창시하였다. 그는 전남 영광(靈光)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우주와 인생에 대하여 번민했는데 서당공부를 하였으나 한문을 배우는 것으로는 번민을 떨쳐버릴 수 없음을 알고, 높은 차원의 어떤 대상으로부터 해답을 구하고자 산상(山上)기도를 하며 진리를 가르쳐 줄 도인을 찾아 헤매었다. 그러나 외부로부터는 끝내 이렇다 할 구도(求道)의 길을 찾지 못하고 독자적 수도고행에 들어갔지만 아무 것도 못 얻은 채 무아의 경지랄까, 침잠(沈潛)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여 폐인인 듯 보였다.
이런 5년여의 고행 끝에 1916년 4월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 깨어난 그에게는 우주와 세계의 새로운 질서가 뚜렷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는 질서를 “만유(萬有)가 한 체성(體性)이며 만법(萬法)이 한 근원”이라고 설명하고 불생불멸, 인과응보의 진리를 친명하였다. 그 뒤 그는 유 · 불 · 선(儒彿仙) 3교의 경전을 비롯하여 그리스도교의 구약과 신약을 두루 연구한 결과 ≪금강경≫(金剛經)에서 자신이 깨달은 진리와 일치함을 발견하고 근본적 진리를 밝히는 데는 불법이 제일이라 하여 석가모니불을 선각자로 존중하는 동시에 불교와의 인연을 스스로 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펴기 위하여는 과거의 불교와는 크게 다른 새 불교, 새 교단을 설립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내걸었다. 동시에 그는 새 교단 창립과 새 세상 구제의 대책을 법어로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수신의 요법(要法), 제가의 요법, 강자 · 약자의 진화상(進化上)의 요법, 지도자로서 준비할 요법 등으로 되어 있다.
그가 설법한 불교의 현대화, 생활화는 신앙의 대상을 불상이 아닌 법신분의 일원상으로 삼고. 시주 · 동냥 · 불공 등을 폐지하는 대신, 각자가 정당한 직업에 종사하며 교화사업을 시행한다는 이른바 생활불교에 그 특징이 있다.
이와 같은 교리를 가지고 1916년 그가 새 교단을 열 의사를 표명하자 마을 사람들을 중심으로 40여명이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서 8명을 선발하고 얼마지나 정산 송규(鼎山 宋奎, 후에 1代 宗法師)를 맞아 9인을 새 교단 창립의 첫 제자로 삼았다. 1917년엔 저축조합을 조직하고, 이듬해에는 바다를 막는 간척 사업을 일으켜 2만 6,000평의 논을 만들고, 이어 엿 공장 · 과수원 · 농축장 · 양잠 · 한약방 등 생산적인 경영을 하여 새 교단 창립의 경제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1919년 9인의 제자와 함께 대기도를 시작하여 100일만의 최종기도에서 백지혈인(白指血印)의 법인성사(法認聖事)라는 기적을 낳았고, 여기에서 무아봉공의 정신적 기초를 확립하여 신성(信誠) · 단결 · 공심(公心)을 더욱 굳게 함으로써 교단 창립의 얼이 되었다.
1924년 이리(裡里)에 ‘불법연구회’를 창설하고, 1938년에는 불교정전(佛敎正典)을 간행하여 본원리인 일원상의 진리를 밝혔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겨우 교단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1943년에 교주가 사망하였다. 송규가 종법사로 교통(敎統)을 이어 광복 후 1947년에는 교명을 ‘원불교’로 개칭, 교육 · 자선 · 교화의 3대 실천 목표를 세워 포교에 힘쓰다가 1962년 1대 종법사가 사망하자 대산 김대거(大山 金大擧)가 2대 종법사로 취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원상의 신앙은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을 표준으로 어느 곳 어느 때나 신앙을 떠나지 않게 하여 천지 · 부모 · 동포 · 법률의 사은(四恩)에 보은하는 것을 불공으로 삼는다.
[참고문헌] 손정윤, 소태산 대종사 일화, 원불교출판사, 1977 / 박정훈, 한 울안 한 이치에,원불교출판사, 1982.
원귀임 [한] 元貴任
元貴任(1819~1839).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동정녀(童貞女). 세례명 마리아.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龍頭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여기저기를 떠돌며 살다가 9세 때 상경하여 친척인 원 루시아의 집에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나갔고, 이때 교리를 배워 입교한 후 15세 때 수정(守貞)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 4월 7일 자신이 살고 있던 집이 포졸들의 습격을 받게 되자 피신했으나 길에서 아는 사람에게 들켜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정신을 잃을 정도로 당황했었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포청으로 끌려갔고 그 곳에서 배교를 강요하며 신문하는 형리에게 “내 영혼을 이미 천주께 맡긴 지 오래니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오직 죽을 따름입니다”라고 배교를 거부한 후 혹형과 고문을 받고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서도 역시 잔혹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이겨내고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7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원경도 [한] 元景道
元景道(1773-l80l). 순교자. 세례명 요한. 경기도 여주(驪州) 출신. 같은 여주에 사는 김건순(金健淳)에게 감화되어 입교하였다. 1800년 3월 예수부활 대축일을 즐기기 일해 모여 있을 때 여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관아(官衙)에 이르러 관장(官長)이 모든 공범자를 대고 배교하라는 강요에, 그는 남을 밀고하는 건 교리에 어긋날 뿐 아니라 천주를 배반하라는 건 더욱 불가능한 것이라고 끝내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특수한 고문을 당해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으나, 기적적으로 곧 상처가 말끔히 가시어 옥리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에 그는 서울 의금부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다시 여주로 환송되던 날, 즉 1801년 4월 25일 여주읍 성 밖에서 참수되었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