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론 [한] 一元論 [라] Monismus [영] monism [독] Monismus

어원은 그리스어 ‘monos’ 즉 ‘단독의’, ‘유일한’ 등의 뜻의 말에서 찾을 수 있는데, 넓은 의미에서 풀이하자면, 다양한 현상을 하나의 통일적인 근본실재(根本實在)에서부터 설명하려고 하는 형이상학적인 입장을 ‘일원론’이라고 한다. 우주에 있어서의 질서의 통일 대신에 실체(實體)의 통일을 내세워 채택하는 철학체계를 지칭하며 실재는 유일하며 다양성은 환상이라고 보는 특징이 있다.

여러 철학자의 유형에 따라서 이 유일한 실재를 각양각색으로 해석하게 되는데, 어떤 사람은 정신과 물질, 또 다른 사람은 물질에서 파생하는 정신, 아니면 물질이 진화해서 정신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유물론’(唯物論), ‘유심론’(唯心論) 같은 것은 모두 일원론이며, 이는 오직 물질 아니면 정신만을 인정하는 하나의 실체를 주장하는 경우이고, 신(新) 플라톤학파(N대-platonic school)나 헤겔(G.W.F. Hegel, 1770~1831)의 입장은, 세계의 근본에 있어 하나의 것으로 파악하여 모든 것을 거기서부터 전개시키며, 따라서 대립과 다양성은 그런 통일로의 환원이 가능하다는 세계관인데, 역시 일원론에 속한다. 이밖에 일원론의 특수한 용법으로서는 헤켈(E. Haeckel), 오스트발트(W. Ostwald) 등의 철학을 들 수 있다.

일원론은 통일적인 세계상(世界像)을 찾으려고 하지만, 이 문제는 영적이고 인격적이며 창조적인 세계 원인의 가정 아래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일원론이 종교적으로 적용될 경우에는 존재라는 입장에서 고찰한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임은 물론이며, 근본실재를 둘 또는 여럿으로 보는 ‘이원론’(二元論, dualism), ‘다원론’(多元論, pluralism)에 대립한다.

[참고문헌] H. Schell, Gott und Geist, vol. 2, 1895 / A. Drews, Monismus, vol. 2, 1908 / John A. Hardon, S.J., Modern Catholic Dictionary, New York 1980.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일신론 [한] 一神論 [라] monotheismus [영] monotheism

세계 모든 사물의 원인이 초자연적인 유일(唯一)의 신에 있고, 세계의 존재 · 변화 · 발전도 그 신의 계획에 의해 발생된다고 믿는 사상, 혹은 주장을 일신론이라 하며, 일신론에 근거하여 성립된 그리스도교, 유태교, 이슬람교 등을 일신교라고 한다. 다신론(politheismus)이나 이원론(dualismus)과 대비된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일시경 [한] 一時經 [라] prima

아침 6시경에 바치던 성무일도(聖務日禱)를 말한다. 이 시각은 전례적인 시간으로 제1시에 해당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개혁에 따라 폐지되었다(전례헌장 89, d).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일본교회의 한국인 순교자 [한] 日本敎會~韓國人殉敎者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의 결과 많은 한국인이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다. 일본은 1587~1687년에 이르는 약 100년간 막부(幕府)에 의한 그리스도교 박해가 계속되어 많은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그 후 1867년 7월 교황 비오 9세는 순교자 205명을 시복(諡福)하였는데 그 205복자 순교자 중에는 9명의 한국인과 3명의 그 일본인 아내가 포함되었다. 이들은 모두 규우슈우(九州)의 나가사끼(長崎)에서 순교했으며, 이 밖에도 복자 아닌 한국인 순교자 9명이 기록에 남아있다. 한국인 복자 순교자들은 다음과 같다. ① 복자 고스마 다께야(Cosmas Takeya, 1619년 11월 18일 화형, 로자리오 회원) ② 복녀 아녜스 다께야(Agnes Takeya, 복자 고스마 다께야의 부인, 일본인, 42세, 1622년 9월 10일 참수, 로자리오 회원) ③ 복자 프란치스코 다께야(Franciscus Takeya, 복자 고스마 다께야의 아들, 12세, 1622년 9월 12일 참수), ④ 복자 안토니오(Antonius, 1622년 9월 10일 화형, 로사리오 회원), ⑤ 복녀 마리아(Maria, 복자 안토니오의 부인, 일본인, 1622년 9월 10일 참수) ⑥ 복자 요안(Joannes, 복자 안토니오의 장남, 12세, 1622년 9월 10일 참수) ⑦ 복자 베드로(Petrus, 복자 안토니오의 차남, 3세, 1622년 9월 10일 참수) ⑧ 복자 카이오(Caius, 53세, 1624년 11월 5일 화형, 예수회 전도사) ⑨ 복자 권 빈첸시오(Vincentius Kaun, 1626년 6월 20일 화형, 예수회 회원, 신학생) ⑩ 복자 카이오 지에몬(Caius Jiyemon, 1627년 8월 17일 화형, 로자리오 회원) ⑪ 복자 가스파 바즈(Gaspar Vaz, 1627년 8월 27일 화형, 프란치스코 제3회원) ⑫ 복녀 마리아 바스(Maria Vaz, 복자 가스파 바즈의 부인, 일본인, 1627년 8월 27일 참수, 프란치스코 제3회원).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일본교회사 [한] 日本敎會史

일본에 그리스도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1549년 8월 15일 예수회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란치스코 사비에르(Francisco Xavier)가 말리카(Malaca)에서 만나 고아(Goa)에서 입교한 일본인 ‘안지로’의 안내를 받아 가고시마(鹿兒島)에 입국한 뒤부터였다. 일본에서는 이때부터 그리스도교를 믿는 신자는 물론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을 포르투칼어의 발음을 따라 ‘기리시땅’이라고 불렀다.

1. 기리시땅(切支丹 또는 吉利支丹, 鬼理志端) 시대 : 스페인의 명문출신인 사비에르는 2년반(1549~1551년) 동안 일본에 있으면서 히라도(平戶), 야마구찌(山口), 후나이(府內) 등 주로 규우슈우(九州)와 혼슈우(本州) 서부지역 포교에 힘썼다. 그리스도교를 처음 포교할 때 불교에 젖은 일본인들은 사비에르 일행을 인도에서 온 천축승(天竺僧)으로 알았기 때문에 사비에르 역시 불교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일본인들이 교리를 알기 쉽게 받아들이도록 노력하였다. 그는 또 유럽의 새로운 자연과학을 일본에 전달하여 큰 영향을 주었다. 선교사들이 전해 주는 복음과 유럽의 새 문물(文物)은 전란에 시달린 일본사회에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 사비에르는 영주(領主 = 大名)를 포함하여 무사들 가운데서 많은 개종자를 얻었는데 불교로부터 개종한 비파법사(琵琶法師) 라우렌시오의 세례는 일본의 전교사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인의 특성을 잘 파악한 사비에르는 포교방향을 제시한 뒤 중국대륙 전교를 위해 일본을 떠났다.

그의 뒤를 예수회의 장상인 토레스(Torres)가 이어, 새로 입국한 선교사들과 함께 열심히 포교한 결과 유력한 영주인 오오무라(大村純忠)와 다까야마(高山右近), 고니시(小西行長), 아리마(有馬晴信) 등을 개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전란이 차츰 진정되어감에 따라 붕고(豊後)의 후나이와 교오또(京都)를 거점으로, 당시 일본집권자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보호 아래 교세는 발전을 거듭하여 1580년에는 신자수가 10만명에 달하였다. 오다 노부나가는 서양문화를 환영하고 불교세력을 억누르기 위하여 기리시땅을 지원하였다. 1556년 후나이에 최초의 병원을 개설하고 외과치료(外科治療)를 시행한 이래 의료사업을 계속 확장시킨 결과 구호를 받은 가난한 서민층에서 많은 입교자가 생겨났다.

1579년 예수회의 동양 순찰사(東洋巡察使) 발리냐노(Valignano)의 입국은 일본 포교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왔다. 그는 1580년 나가사끼(長崎)를 영주로부터 이양받아 예수회의 근거지로 만들고, 일본인에 대한 편견으로 물의를 자아내고 있던 포교장(布敎長) 카브랄(Cabral)을 출국시키는 한편 일본의 사정을 감안한 전교지침서(傳敎指針書)로 <일본의 풍습과 기질에 관한 주의와 조건>이라는 책자를 저술하여 교세를 크게 신장시켰다. 발리냐노는 또 덴쇼오 소년사절단(天正少年使節團, 규우슈우의 새 영주가 파견한 사신)을 이끌고 로마에 들어가 1585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를 알현케 함으로써 일본교회의 존재를 서양에 알렸다. 발리냐노는 또 인도관구(印度管區)에 속해 있던 일본교회를 분할하여 1580년 대목구(代牧區)로 승격시키고, 세 포교구(府內, 京, 下의 세 구)로 나누어 포교체제를 정비케 하였다. 초대 감목대리(監牧代理)에는 코엘료(Coelho)가 임명되었다.

도요또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얼마동안은 무역의 이득을 위해 기리시땅의 보호책을 썼으나 1587년에 태도를 돌변,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다. 그가 규우슈우 정벌을 위해 출병하였을 때 나가사끼의 교회령(敎會領)과 많은 기리시땅의 영주와 그들의 영지민(領地民)의 대다수가 기리시땅이라는 사실에 놀라 장차 큰 세력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박해의 돌풍이 한때 일본 전국을 휩쓸자 파괴당한 교회도 많았으나 코엘료의 슬기로운 대책으로 난국을 극복하고 얼마 뒤부터 교세는 오히려 상승세를 보였다. 거기에 일본의 실정에 밝은 순찰사 발리냐노가 1590년 인도부왕사절(印度副王使節)의 자격으로 다시 입국하여 도요또미 히데요시를 예방하고 기리시땅의 현상유지를 묵인받는 한편 활판(活版)인쇄기를 들여와 ‘기리시땅서(書)’라고 불리는 여러 교리서를 비롯하여 ≪나포일사전≫(羅葡日辭典) 등을 출판하였고, 초등학교와 신학교를 설립하여 유럽의 근대교육을 베풀게 하였다.

그러나 금교(禁敎)의 제약 속에서 예수회는 조심스러운 활동을 이어갔는데 1593년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은 필리핀 총독 사절단의 자격으로 일본에 입국한 뒤 공공연히 선교활동을 벌인 결과,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비위를 상하게 하였다. 거기에 또 1596년 도사(土佐)에 표착(漂着)한 스페인 선박 산 펠리페(Sun Felipe)호 사건까지 겹쳐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부채질함으로써 1597년 2월 5일 프란치스코회 수사 6명을 비롯하여 3명의 예수회 수사와 미끼(三木, 바오로) 등 일본인 17명이 나가사기의 니시사까(西坂)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이들은 그 후 1862년에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일본 26성인’이 되었다.

1598년 도요또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도요또미 정권은 무너지고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일본의 실권을 잡고 에도(江戶, 오늘의 東京)에 막부(幕府)를 베풀고 일본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 역시 무역과 채광(採鑛), 조선(造船) 등의 기술도입을 위하여 처음에는 기리시땅의 활동을 묵인하였으나 프로테스탄트인 네덜란드인들이 들어와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헐뜯으며 무역의 이를 앞세워 적극적으로 도꾸가와 정권에 접근하고, 그의 측근에서도 기리시땅 신자가 늘어가자 기리시땅 금교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한편 로마교황청은 1585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의 교서(Ex pastorili officio)에 의하여 일본의 선교를 예수회에 일임하였는데 1600년에 글레멘스 8세가 다른 수도회도 포교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고, 나아가 1608년 바오로 5세는 일본의 선교활동에 모든 제한을 철폐하였다. 한편 붕고의 후나이에 주교좌를 설정하고자 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하다가 1591년 인도관구장인 마르티네스(Martinez)를 주교로 임명함으로써 1596년 나가사끼에 처음으로 주교좌가 설정되었다. 그런데 1614년 3대 일본주교인 세르케이라(Cerqueira)가 선종한 뒤 일본에서 활동하는 예수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등 선교단체들은 포교에 통일성을 잃어 일본 기리시땅 교회는 난맥상(亂脈相)을 드러냈다.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이때에 1614년 기리시땅의 전면적인 금교령을 선포하고, 성당을 파괴시키는 한편 신자명부를 작성케 하며 단속을 강화하는 한편 외국인 선교사를 마카오와 마닐라로 추방하였다. 이런 박해 속에서도 일본교회는 수난을 이겨내며 신앙을 고수하였다. 신자들은 규우슈우, 교오또, 오오사까, 에도 등지에서 가혹한 박해를 받아 많은 순교자를 내며 쓰가루(津輕) 등 변경으로 유형당하는 수효가 늘어가자, 그들은 그곳 도오호꾸(東北) 지방으로 전교활동을 확대해갔다. 그 중에서도 대영주인 다데마사무네(伊達政宗)는 그리스도교에 호의를 보이고, 영내의 광산개발 등을 위하여 기리시땅의 이민을 환영했기 때문에 센다이(仙臺)는 한때 기리시땅의 안식처가 되었다.

마닐라 등지로 추방되었던 선교사와 그곳에서 성직자가 된 일본인들이 다시 잠입하자 신자들은 목숨을 걸고 성직자를 보호하였다. 목자(牧者)를 잃는 경우에도 신자들은 신심회(信心會)를 조직하여 신앙을 굳게 지키고 붙잡히면 고결한 순교자가 되었다.

1623년 도꾸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가 3대 장군으로 등장하자 기리시땅 탄압을 철저히 제도화하였다. 그 해 10월 두 선교사를 체포하는 한편 에도에서 이름있는 기리시땅 46명을 잡아들여 세 조(組)로 나누어 거리에 조리돌리다가 가장 번화한 곳에서 화형(火刑)에 처하는 등 기리시땅 말살정책을 강행하였다. 12월 4일에 처형당한 이 사건을 ‘에도의 대순교’라고 한다. 이어 전국적으로 기리시땅 수색을 강화하여 신자를 숨겨준 사람까지 사형에 처하였다. 규우슈우에 잠복해 있던 외국인과 일본인 사제는 모두 색출되어 사형을 받았다. 일반 신자에게는 세뇌(洗腦)공작과 잔인한 고문으로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였다. 그 결과 1630년에는 일찍이 ‘소(小)로마’로 불리던 나가사끼에도 신자가 거의 전멸된 상태였다.

1633년에는 지도급의 기리시땅에 대하여 ‘생매장’이라는 잔인한 고문방식이 채용되었는데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여 예수회 관구장 대리이며 주교대리인 페레이라(Ferreyra)가 배교하였다. 그러나 예수회의 수사인 나가하라(永原, 니콜라오) 같은 이는 나흘간의 생매장에도 굴하지 않고 고결하게 순교하였다. 1637년 시마바라(島原) 등지에서 기리시땅과 연계된 농민폭동이 일어났다. 영주의 폭정에 대한 반항이었으나 농민과 어민이 대다수가 기리시땅이고, 그 지도자가 일찍이 기리시땅 영주를 모시던 낭인(浪人)들이기 때문에 폭동은 은연중 기리시땅의 단결된 저항으로 발전하였다. 만만치 않았던 시마바라의 난을 진압하며 많은 교인을 학살한 도꾸가와 정권은 기리시땅을 국적(國敵) 제4호로 삼고, 쇄국정책을 강화하는 구실로 이용하였다.

도꾸가와 정부는 또 기리시땅을 뿌리뽑기 위하여 모든 사람을 일정한 절[寺]의 소속이 되도록 의무화 시켜 출생, 결혼, 사망, 이전(移轉) 등 가족의 모든 동태를 신고하게 함으로써 신자들을 철저히 감시하는 일종의 불교국가를 형성하였다. 그들은 오인조제도(五人組制度)라는 것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다섯 가구를 한단위로 편성하여 서로를 감시케 하고, 상금제도와 각처에 게시판을 세워 기리시땅 밀고를 장려하였다. 기리시땅을 색출하는 방법으로 성모 마리아 화상(畵像)을 밟고 가게 하여 주민의 표정으로 신자를 가려내는 ‘후미에’(踏繪)라는 악랄한 수법까지 사용하였다. 그래서 17세기 후반기에 이르자 일본 기리시땅 교회는 공적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그렇게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메이지(明治) 시대를 맞이하기까지 2세기 반이란 세월에 걸쳐 규우슈우 도서지방에서 대를 물려 은밀히 신앙을 지킨 신자들이 있어 전세계의 교회를 경탄케 했다. 그들은 10가구 내지 20가구의 교우촌 점조직(點組織)을 이루어 겉으로는 불교를 믿는 듯이 가장하여 은밀히 신앙생활을 고수하였다. 이들은 ‘가꾸레 기리시땅’(隱れ切支丹)이라 한다.

2. 메이지 시대 이후 ∼ 현대 : 유럽의 선교단체들은 수많은 순교자를 낳은 일본에 대하여 오랫동안 동경의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동양 각지에서 포교사업을 활발히 전개해온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는 1820년대부터 해외진출에 뒤지지 않으려는 프랑스 정부의 강력한 원조에 힘입어 일본에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서둘렀다. 1831년 조선에 대목구(代牧區)가 설정되자, 그들은 조선을 일본포교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조선왕조의 박해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당시 동양전도의 거점이던 마카오로부터 1844년 포르가드(Forcade) 신부를 프랑스 군함에 태원 류우뀨우(琉球)에 상륙시켰다. 그러나 철저한 감시로 포교가 불가능하였으나 장래의 일본전교에 대비하여 ≪유불사전≫(琉佛辭典)을 만들어 냈다. 한편 교황청은 일본교회의 부활을 낙관한 듯, 1846년 일본을 대목구로 정하고 초대 대목으로 포르가드 신부를 임명하였다. 그 뒤 1858년 일본이 프랑스와 우호 · 통상 조약을 맺고 외국인의 거주와 신교의 자유를 인정함에 따라 당시 류우뀨우에 체류하고 있던 지라르(Girard) 신부를 일본의 대목으로 임명하였다.

지라르는 초대 주일(駐日) 프랑스 총영사의 요청으로 통역관 겸 영사관의 사제로서 1859년 8월 에도에 도착하였다. 이것은 1614년 도꾸가와 정권의 금교령 이후 가톨릭 선교사가 공식으로 일본 땅을 밟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1862년 1월 요꼬하마(橫濱)에는 서양의 고딕식과 일본의 사원식(寺院式)을 조화시킨 성당이 완성되었다. 한편 1864년에는 프티잔(Petitjean) 신부가 기리시땅 교회의 중심거점이던 나가사끼에 진출하여 이듬해 2월 고딕식 성당을 세우고 축성식을 봉헌하였다. 3월 그해 세 여인이 조용히 신부를 찾아와 “여기 저희들도 모두 신부님과 같은 신앙입니다”하면서 은밀히 신자임을 고백하였다. 그 뒤 우라까미(浦上) 등에 잠복해 있던 기리시땅 가운데 약 1만명이 교회에 복귀하였다. 1866년에 프티잔 신부는 일본주교로 임명되었다.

1868년 6월 메이지 신정부는 전통적인 국금(國禁)을 어겼다는 이유로 나가사끼와 고지마(五島)의 ‘복귀(復歸)신자’들에게 박해를 가하고, 우라까미의 신자 약 4,100명을 각 지방으로 분산, 유배하여 배교를 강요하였다[浦上崩れ]. 그러나 일본의 근대화가 진전되면서 1873년에 금교의 제약이 풀려 다시 고향 땅을 밟게 되었다. 신자가 늘어가자 프티잔은 일본인 사제양성에 힘쓰는 한편 옛날 ‘기리시땅판’의 여러 교리서를 다시 편집하여 출판하였다. 1873년 말의 일본 신자수는 약 1만 5,000명으로 나가사끼 일대 주민의 9할 이상을 차지하였다.

1876년 일본 대목구는 남북으로 양분(兩分)되고, 1889년에는 남부의 대목구가 두 교구로 되어 깅끼(近畿) 지방 등 중부(中部) 대목구는 오오사까에 주교좌가 설정되었다. 1890년 메이지 헌법에 의하여 그리스도교는 묵인시대로부터 공인시대를 맞게 되었다. 1892년에는 북부의 대목구도 분할되어 일본은 네 교구가 된 동시에 대목구로부터 주교구로 승격되어 도오꼬(東京)는 대주교구가 되고, 나가사끼, 오오사까, 하꼬다데(函館)는 주교구로 되었다. 1903년 신자수는 약 6만명에 달하였다. 그때까지 일본의 포교는 아직 파리 외방전교회에 일임되어 있었으나 1904년 시고꾸(四國)가 오오사까 주교구로부터 분할되어 지목구로 되면서 필리핀 관구의 도미니코회에 맡겨져 프랑스인 이외의 선교사들이 일본의 전교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뒤 독일의 선교자들도 입국하여 나고야(名古屋)와 히로시마(廣島)의 지목구를 담당하게 되었다. 교회는 정기 간행물과 단행본도 많이 출판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사용된 용어는 파리 외방선교회가 전하여 준 중국식의 한문 천주교 용어였다. 그런데 다이쇼(大正) 시대에 들어와 어문일체화(語文一體化) 운동이 일어나 일본의 천주교 용어도 현대적인 변화를 가져와 천주교라는 명칭 대신 가톨릭으로 불리게 되었다.

메이지 말기부터 다이쇼시대에 일본에는 세계 각국의 수도단체에서 많은 선교사가 파견되어 고등교육기관의 설치에 대한 열의도 고조되었다. 그래서 1913년에는 조오찌(上智)대학이 창립되고 1916년에는 여자고등전문학교도 세워졌다. 조오찌대학의 설립은 예수회에 위촉되어 독일관구에서 그 임무를 맡았다. 이 대학은 일본 가톨릭을 위하여 학문적으로 많은 공헌을 하였다. 메이지 시대에 부활한 가톨릭교회는 서민 가운데 일부 뿌리를 내리기는 하였으나 지식층을 끌어들이지는 못했다. 그런데 다이쇼 시대에 이르러 가톨릭시즘의 학문적 심화(深化)에 힘써 학생과 교양인들에게 깊은 감화를 준 것은 이와시다(岩下壯一) 신부였다.

교세의 확장에 따라 일본정부와 교섭이 잦아지자 1919년 로마 교황청은 일본에 교황사절을 주재시켰다. 1927년에는 일본 가톨릭 사상 처음으로 일본인 주교가 탄생되었다. 로마에서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성성된 하야사카(早坂久之助) 주교는 나가사끼 교구의 사목을 맡았다. 1932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터진 뒤 일본 가톨릭에는 ‘신사참배’(神社參拜) 문제가 제기되어 어려운 국면에 놓였으나 교구장회의는 공동교서를 발표하여 정부와의 마찰을 피하였다.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여 교황청은 1937년 도오꾜오 대교구장에 도이(土井辰雄) 대주교를 임명, 일본의 20만 신자를 이끌게 하였다. 교황 비오 11세의 종용으로 1940년 조오찌 대학에서 ≪가톨릭대사전≫ 제1권을 발간한 뒤 전쟁의 어려운 시기에도 편찬을 계속하여 1960년 전5권의 완간(完刊)을 보았다.

1945년 8월 일본제국의 패망과 함께 민주주의 일본의 재건운동이 활기를 띰에 따라 신앙의 자유,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이 확립됨으로써 가톨릭 교회에도 새 시대의 사명이 요청되었다. 전재(戰災)를 입어 파괴된 교회들을 재빨리 일으켜 세우고 전지에서 돌아온 사제들을 맞아 활발한 전교활동이 전개되었다. 1945년 11월 임시 교구장 회의를 열고 천주공교(天主公敎) 교구연맹을 결성하여 이사장에 도이 대주교가 취임하였다. 각 교구간의 연대성을 강화하고 연맹안에 교학부, 출판부, 사회사업부, 가톨릭 액션부를 설치하였다. 1946년에는 해외의 교회들로부터 거액의 경제원조가 도착하여 패전 뒤 어려운 시기의 일본사회에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빈첸시오 바오로회와 성심 애자회, 일본 가톨릭회가 오오사까에 설치한 전재민과 귀국자와 수용기관은 큰 역할을 하였고, 성모의 수도회와 나가사키 애기 예수회는 전쟁 고아 구호활동으로 업적을 남겼다.

1947년 2월 나가사키에서는 일본 26성인 순교 250주년 기년행사가 성대히 베풀어졌다. 1949년 교오또오에서 900명이 한꺼번에 가톨릭으로 집단 개종하는 바람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로마 교황청은 1952년 일본 교황사절을 공사관으로 승격시키고, 초대 공사에 푸르스덴베르크(Furstenberg) 대주교를 임명하였다. 4월에는 비오 12세가 방송을 통해 일본 국민에게 부활절 메시지를 보냈다. 이 해에 일본의 모든 지목 · 대목구는 주교구로 승격되었다. 1949년에는 교황특사 가르로이 추기경이 참석한 가운데 사비에르 일본전교 400년제가 개최되었다. 1950년 중공에서 추방된 수많은 선교사들이 일본으로 몰려와 전교에 협력하였다. 1953년 오오무라(大村) 교회건물이 국보로 지정되고, 1954년 히로시마(廣島)의 평화기념 성당이 봉헌되었다. 원폭의 참화를 쓴 나가이 다까시(永井陸)의 저서 ≪나가사끼의 종≫, ≪로자리오의 쇠사슬≫ 등은 패전 후의 일본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안겨 주었다. 엔또오 슈유사꾸(遠藤周作), 미우라 슈몽(三浦朱門), 소노 아야꼬(曾野綾子), 다나까 스미에(田中澄江) 등 가톨릭 작가들의 작품도 활발하다.

현재 일본은 16개 교구와 781개 본당으로 나누어져 도오꾜오, 오오사까, 나가사끼는 대교구로 대주교에 의하여 관할되고 나가사끼의 사또와끼(里脇淺次郞) 대주교가 추기경이 되었다.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 후 일본 가톨릭에는 새로운 활기가 일고 있다. 그러나 1982년말 현재 일본의 신자수는 41만 3,000명에 불과하다.

[참고문헌] カトリック大辭典, 富士房, 東京 1960 / キリスト敎史, 講談社, 東京 1982.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