즈가리야서 [한] ∼書 [라] Prophetia Zachariae [영] Book of Zacharia

이사야 예언서와 마찬가지로 즈가리야 예언서 역시 한 사람의 동일한 작품으로 볼 수 없다. 즈가리야서 제1부(1-8장)는 예언자 즈라리야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작품이나, 제2부(9-14장)는 즈가리야보다 훨씬 후대의 어떤 작가 – 일반적으로 제2 즈가리야라고 칭한다 – 가 집필한 작품으로 본다. 따라서 우리는 본 즈가리야서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제1부 : 1-8장] 1. 예언자 즈가리야 : 이또의 손자로 소개되는 즈가리야는 예언자 하깨와 동시대 인물로서, 기원전 520년 8월 또는 9월부터(1:1) 518년 11월까지(7:1) 활동했던 예언자다. 하깨가 종교적인 이상(理想)을 불러일으키는 데 헌신했다면(하깨 1:14), 즈가리야는 성실성에 대한 호소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약속을 통해서 이 이상을 실현시키는데 최선을 다한 예언자로 받아들일 수 있다. 성전의 역할을 그처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나 단식문제에 대한 답변 장면(7:1-3, 8:18-19), ‘거룩한 땅’과 성성(聖性)에 대한 깊은 관심(2:16, 5:1-4.5-11) 등으로 미루어 즈가리야의 신분이 사제였음이 거의 확실하며(느헤 12:16 참조), 또한 옛 예언자들의 정신적 유산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1:3-6, 7:4-14, 8:16-17).

2. 내용 : 1인칭 일기체로써 8개의 현시(顯示)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즈가리야서 제1부는 본 현시들을 당대의 사건들과 연결시켜 주는 복합 신탁(神託)으로 양분된다. 신탁 모음집으로 볼 수 있는 2:10-17절은 이제 유배민들이,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현시(2:1-9)에 명시된 새로운 조건들을 갖춘 그 도시를 다시 맞이하도록 호소하고 있다. 제3장 중 3, 8, 9절은 대사제 여호수아에게 특권을 부여한 데 뒤이어(3:1-7 · 9)그에게 내린 특별 언약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4:6a-10b는 새 공동체의 지도자들에 관한 현시(4장 전체) 안에 삽입된 부분으로서 집정관 즈루파벨에게 용기를 주는 말씀을 담고 있다.

균형 있게 짜여진 본 작품의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현시들은 메시아적 재건을 위한 준비단계를 제시해 주고 있으며, 한가운데 자리 잡은 두 현시들은 새로운 공동체의 통치체제에 관계되며, 나머지 세 현시들은 궁극적인 재건을 위한 조건들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러나 지 중 네 번째 현시가 문학적이면서도 신학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뒤이어 나오는 다섯 번째 현시가 ‘기름부어 성별한 두 사람’을 동등하게 평가하고 있는 반면에 네 번째 현시에서는 사제에게 보다 우월한 자리를 선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다윗 왕가의 즈루빠벨이 그 자취를 감춘 뒤 부상하게 된 사제직의 중요성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부분으로서 뒤에 삽입된 현시로밖에 볼 수 없다. 6:9-14절에서도 원래 면류관은 즈루빠벨을 위하여 마련되었던 것이 아닌가?

3. 메시지 ① 신의론(神義論) : 즈가리야는 하느님께서 이전과는 달리 어떠한 방법으로 인간 역사 안에 개입하시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유배시대 이전에 하느님은 말씀 또는 당신 친히 나타나시는 현시들을 통하여 예언자들과 통교하셨다. 그분은 거룩하시고 초월적인 분이시며 동시에 사건의 흐름을 몸소 주관하시는 분이셨다. 그러나 즈가리야의 하느님은 이 지상과는 좀 멀어지신 분으로 보인다. 현시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해도 더 이상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신다. 그분의 뜻을 설명하는 직책을 맡은 이는 천사이며, 그분의 계획을 실현하는 이도 천사 또는 기사와 같은 중재자들이다. 이러한 현상은 하느님 개념에 대한 영성화(靈性化) 작업의 일면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고도 볼 수 있으나, 그보다는 좀 더 실존적인 체험 즉 “하느님은 부재 중이시다”라는 체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유배 중의 시련과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했던 유태인들은 아직도 하느님께 자신들의 운명 속에 존재하시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경우 신앙은, 부정할 수 없는 공백을 충족시키거나 또는 천상세계와 시련 속의 인간들을 접근시킬 수 있는 매개체들을 배가하면서 이에 답을 보냈을 것이다.

② 메시아론(論) : 즈가리야는 물질적인 가난과 좌절로 수동적인 체념상태에 빠진 이스라엘 공동체에 새로운 희망을 고취시킨다. 성전재건이라든가 종교의식에 대한 질서정립은 바로 구원을 고대하는 구체적인 표시이다. 메시아 시대는 이러한 노력의 대가로 펼쳐질 것이며, 이에 모든 나라들이 합류할 것이다(2:15, 8:20-23). 이 구원은 눈앞에 다가왔으며, 즈루빠벨이 이 메시아시대를 개막할 사람으로 간주된다(6:9-14). 그러나 즈루빠벨과 동등한 자격으로 함께 일해 나갈 제2의 인물인 대사제 여호수아가 등장함으로써(4:14, 6:13) 이제 이 두 인물이 이끌어 나갈 쌍두정치체제(雙頭政治體制)에 대한 기대가 새롭게 떠오른다. 결국 즈루빠벨이 사리진 뒤 이에 대한 기대 역시 변화하여 사제라는 인물 속에 메시아적 희망은 새로운 모습으로 구약성서에 자주 나타나며(예레 33:14-16)[유배시대 이후 작품], 신약의 히브리서는 이 희망이 그리스도 안에 완성되었음을 선포하고 있다(히브 3장).

[제2부 : 9-14장] 1. 내용 : 즈가리야서 제2부를 균형 있게 양분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서 구원사업이 이중작업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볼 수 있다.

① 희망과 환멸(9:1-11:17) : 본 작품 속에서 저자는 하느님의 결정적 개입을 선포하고 있다. 정복된 이웃 백성들은 정화된 다음 신자 공동체에 통합될 것이며(9:1-8), 이어서 이상적인 나라를 건설할 임금 –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다(9:9-10). 또한 수많은 전쟁을 통하여 흩어져 있던 모든 백성들이 다시금 모일 것이다(9:11-17, 10:3-11:3). 이런 준비과정을 거친 뒤 이제 목자로서 등장하는 메시아는 자신의 계획을 실현시키려 하나, 양떼들과 우두머리들의 종교적 타락으로 이 착한 목자는 버림을 받아 파렴치한 양떼들을 무자비하게 잡아 죽이는 악동(惡童)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게 된다(11:4-17).

② 재건(12:1-14:21) : 회복 가망성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 그 때에 ‘가슴이 찔린 자’의 희생제물은 새로운 정신을 불러일으킨다. 외적들에게 넘겨진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정신으로 무장되며(12:1-13:1), 한편 정화사업은 계속 추진, 계약 경신으로 그 끝을 보게 된다(13:2-9). 이제 구원은 온 세상에 두루 퍼져, 모든 백성은 주님의 나라를 고백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합치해야 한다. 즈가리야서 14장이 비교적 후기 작품에 속한다 하더라도 전 즈가리야서에 대한 훌륭한 결론 부분인 것만은 확실하다.

2. 메시지 : 제2 즈가리야서의 최대 관심사는 메시아와 그의 시대에 관한 것이다. 하느님 친히 메시아로 등장하는 부분과 어떤 특정 인물이 메시아로 등장하는 부분과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① 인간적인 메시아가 없는 종말론적인 메시아론 : 9:1-8, 11-17, 10:3-11:4, 14장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사야 묵시록(이사 24-27)의 그것과 유사한 메시아론이다. 하느님 친히 메시아로 등장하며, 모든 구원사업을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그분 한 분뿐이시다. 그분은 우선 원수들을 물리치신 다음 모든 백성들을 불러 모으신다. 이방인들 역시 제식에 관한 사항을 준수하고(9:7), 종교 예배행위에 관한 율법에 오로지 순종함으로써(14:16-19) 유다 공동체에 합류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② 종말론적인 인간 메시아론 : 하느님 한 분께만 유보된 이러한 메시아상을 또한 어떤 한 특정인물 속에서도 발견된다. 9:9-10절의 임금 – 메시아는 우선 다윗과 솔로몬을 연상케 하나, 예언자들의 사상을 따라 ‘가난한 자와 의로운 자’를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메시아는 따라서 ‘주님의 가난한 자들’(스바 2:3, 이사 49:13, 57:15, 시편 22:27 등)에 대한 종교적 이상형으로서의 메시아다. 다음 11:4-17절과 13:7-9절에 나타나는 착한 목자는 그저 일반적인 명칭으로 보이나, 에제 34:11-22 · 31절이 말하는 바와 같이 하느님 자신과 밀접하게 관련된 명칭이다. ‘가슴이 찔린 자’를 예시하고 있는 착한 목자는 버림을 받아 제거될 것이나, 그의 희생(13:7)은 계약을 새롭게 체결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13:9). 끝으로 ‘가슴 찔린 자’(12:9-14)는 이사 53장의 ‘고통받는 종’의 모습과 일치하며, 그의 희생은 회개(12:10)와 정화(13:1)의 원천이 될 것이다. 다윗과 그의 가문을 상기시키면서(12:7-8 · 10 · 12, 13:1) 옛 왕조와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표명하기는 하나, 메시아 시대의 영광보다는 구원의 원천인 실패와 좌절을 우선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제2 즈가리야의 메시아에 대한 깊은 관심은 다음 세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따라서 신약의 복음사기들이 예수라는 인물과 그의 역할을 묘사하는데 본 작품을 그처럼 폭넓게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당연한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마태 21:4-5과 요한 12:15, 마르 14:27과 마태 26:31, 마태 27:9-10과 요한 19:37). (金建泰)

[참고문헌] Th. Chary, O.F.M., Aggee-Zacharie-Malachie, coll. Sources Bibliques, Gabalda, Paris 1969 / La Traduction Oecumenique de la Bible TOB, Cerf, Paris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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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본당 [한] 中和本堂

1927년 평남 중화군 중화읍 초현리(平南 中和郡 中和邑 草峴里)에 창설되어 1949년 폐쇄된 평양 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 바오로. 중화지방은 1864년 경 전교회장 김기호(金起浩, 요한)와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의 전교로 목재리(睦齋里)에 공소가 개설되었으나 1866년 병인(丙寅)박해 때 교우들이 산산히 흩어지면서 공소가 폐쇄되었고 신교(信敎)의 자유가 보장된 후 다시 목재리, 서기리, 갈매리, 매미 등의 공소가 개설되고 그 후 1923년 미국의 메리놀회가 평안도 전역을 관할하게 되고 1926년 가을 메리놀회의 치셤(Chisholm, 池) 신부가 이 지방에 본당을 창설하기 위해 중화읍내에 부임, 이듬해 임시성당을 마련하고 성사를 집전함으로써 본당으로 창설되어 이후 중화군 전역과 대동군(大同郡) 일원을 관할하게 되었다. 1932년 2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콜먼(W. Coleman, 高) 신부는 읍내 중심부에 대지를 마련하여 1934년 11월 29일 성당을 건축했고 이어 4대(1935∼1939년) 주임 강영걸(康永杰, 바오로) 신부는 본당 내에 성심학원과 성심유치원을 개설하는 한편, 성당 경내에 윤창혁(尹昌赫, 비오) 회장을 기념하는 예수 성심상과 루르드의 성모상을 건립하였다. 1940년 6대 주임으로 부드(W. Booth, 夫) 신부가 부임했으나 이듬해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평양 교구내의 동료 메리놀회원들과 함께 일제에 체포 구금되자 중화본당은 대신리(大新里)본당 관할로 되었다가 1942년 6월 박용옥(朴龍玉, 디모데오) 신부가 7대 주임신부로 부임함으로써 본당으로 재출발하였다. 그러나 광복 후 북한 공산정권의 교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1949년 8월 10대 주임 강현홍(康賢洪, 요한) 신부가 월남하고 대신에 평양 주교관에서 휴양 중이던 장두봉(張斗鳳, 안드레아) 신부가 매월 2, 3차례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했으나 이해 12월 12일 장두봉 신부마저 공산정권에 체포되어 그 후로 본당은 폐쇄되었다.

본당 내의 신심단체로 부인회인 성모회, 청년회, 성가대, 가톨릭운동연맹 지회, 그리고 자치단체인 교무위원회 등이 있었고, 본당 운영의 사업체로는 1935년 개설된 성심학원, 1936년 개설된 성심유치원 등이 있었다. 그리고 중화면 하명월리(下明月里)에는 병인박해 때의 묵주, 성패, 십자고상, 첨례표, 필사본 ≪경세가≫(警世歌) 등이 발굴된 유석지가 있다. 폐쇄 직전의 교세는 교우수 660명, 공소 9개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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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재자 [한] 仲裁者 [라] mediator [영] mediator

하느님과 인류 사이를 화해시켜 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 이 칭호는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에서 비롯된다. “하느님은 한 분 뿐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뿐이신 데 그분이 바로 사람으로 오셨던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분은 자기 자신을 모든 사람의 위한 대속물로 바치셨습니다”(1디모 2:5-6). 그리스도는 중재자로서 가장 적합한 자격을 가진 존재이다. 신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인류가 화해해야 될 대상이고,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는 화해를 필요로 하는 인류를 대표한다. 그리스도는 중재의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인류에게 속죄 받은 은총을 공로로써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십자가에서 이미 얻은 은총을 인류에게 전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또 그리스도 이외의 사람도 “인류에게 하느님과 일치하도록 헌신함으로써”(성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제3부 48, 1) 완전히 2차적인 의미로서의 중재자라고 부르게 된다. 가톨릭 교회가 서모 마리아를 비롯하여 성인들도 하느님께 인류를 중재하는데 있어 ‘중재자’라고 부르는 경우를 말한다. 각 개인은 하느님의 은총과 협력함으로써 자신과 하느님과의 사이가 아무리 멀리 분리되어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가교가 확실히 있을 것이라는 신앙을 갖는 것이다.

성서에서는 속죄와 화해라는 말로써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중재적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을 인격적인 신으로 해석하는 것은 ‘화해’라는 표현을 통해 중재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신약성서에서 ‘중재’라는 말이 여섯 번, 구약성서에 한 번 나오고 있다(갈라 3:19-20, 1디모 2:5, 히브 8:6, 9:15, 12:24, 욥기 9:33). 인간이 하느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하느님은 때로는 진노의 손길을 내려 인간을 벌하였다(노아 홍수 등). 그러나 하느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도록 한 것은 하느님이 그의 선민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기 위함에서였다.

모세와 제사장들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중재자적 역할을 하였으나 인간의 계속적인 범죄로 결정적인 화해의 중재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역할을 한 분이 그리스도이며 십자가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즉 유일회적인 희생의 제물이 됨으로써 영원한 화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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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우론 [한] 重友論 [관련] 교우론

⇒ ≪교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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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본당 [한] 中央本堂

① 전주교구 주교좌 성당. 주보는 예수성심. 전주는 한국 천주교회와 관계가 깊은 곳으로 부근에 수많은 교우촌들이 산재해 있고, 순교지 숲정이가 있다. 1933년 12월 당시 교구장인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가 여러 교우들의 청원에 의하여 전주 전동본당(殿洞本堂)에 있는 한옥 사무실을 철거하고 그 곳에 ‘비성거리’[현 전주시 고사동] 공소를 신축, 이후 1947년까지는 공소시기로 있다가 그해에 비성거리성당을 성립, 초대 주임으로 김재덕(金在德, 아우구스티노)신부가 부임하였다. 김 신부는 장래 순교자 기념성당을 건축하고자 하는 포부와 함께 전주시내에 전동본당 하나로써는 너무 복잡하고 또한 비성거리성당이 협소하므로, 전주시 대동(大洞)[현 전주시 다가동] 소재 일산 가옥 2층을 임차하여, ‘대동성당’(大洞聖堂)을 개설하였다. 이리하여 대동성당 시대로 접어들어 2대(1951∼1952) 이대권(李大權, 바오로), 3대(1952∼1954) 김종택(金鍾澤, 요셉) 신부를 거치는 동안, 1950년 6.25전쟁 당시는 김재덕 신부와 이대권 부제가 북괴 내무서원에서 체포 투옥되었고, 1952년 2월 1일 임대 사용 중이던 대지 및 건물을 매입하여 구내에 성모당, 성모유치원을 설립하였다.

1955년에 와서 당시 교구장 김현배(金賢培, 바르톨로메오) 주교는, 교구에서 경영하던 ‘전북제사’ 부지에 새 성당을 건립하기로 결정하고, 역사적인 기공식을 가진 뒤, 박성운(朴聖雲, 베네딕토) 신부의 지휘 아래, 건평 290여평의 전주 ‘중앙본당’(中央本堂)을 준공하여 1956년 8월 6일 주교좌(主敎座) 성당으로 축성하였다. 초대(1956∼1958년) 박성운(朴聖雲, 베네딕토), 2대(1958∼1961년) 이약슬(李若瑟, 요셉), 3대(1961∼1962) 김재덕 신부, 4대(1962∼1963년) 김이환(金二煥, 스테파노), 5대(1963∼1966년) 김재덕 신부의 재부임, 6대(1966∼1969년) 박영규(朴永圭, 바르나바), 7대(1969∼1974년) 안복진(安福瑱, 요셉), 8대(1974∼1976년) 이대권 신부, 9대(1976∼1980년) 서용복(徐龍福, 토마스), 10대(1980∼ 현재) 문정현(文正鉉, 바르톨로메오) 신부 등 역대 주임신부들의 업적이 이어졌다.

그 중에서도 1958년 ‘성가수녀원 분원’의 완공, 1958∼1960년의 사제관 완성[현 수녀원], 1963∼1965년의 새 사제관(3층) 및 강당신축, 1966년 본당 사무실 신축, 1967년 프랑스제 헌종(獻鐘) 설치와 성모상 건립, 1969년 ‘상가’건립, 1969년 성 바오로서원 유치, 1975년 성모유치원 신축 개원, 1977년 노인학교 개설, 1978년 양로원 설치운영, 1981년에는 ‘중앙성당 건립 25주년 기념성당’ 신축계획을 세웠고, 1982년에는 금암동본당의 착공을 보았다. 한편 성당 신설 분립 업적만 하더라도, 1965년 4월 지역안배로 덕진본당이 신설 분리됨으로써 금암동 일부, 덕진, 호성, 전미 전당리 공소, 팔복동, 조초면, 송천동의 관할권을 이양하였고, 1965년 12월 16일에는 순교자 정신 앙양과 복자 시복일을 기념하는 복자성당이 건립됨으로써 다가동, 태평2가 일부, 중앙동 일부, 고사, 진북, 화산동 지역의 관할권을 이양하였다. 1969년 12월 2일에는 노송동본당이 건립됨에 따라 중노, 남노, 인후, 우아동과 소양면, 용진면 공소 일부의 관할권을 이양하였으며, 1976년 12월 15일에는 숲정이본당이 신설됨에 따라 서신동, 태평 1, 2동 일부, 금암, 진북 2동의 관할권을 이양하였다.

전주교구 주교좌 성당인 중앙본당은 전북 전주시 서노송동 639의 40에 소재하며, 1984년 6월 현재 총신자수 5,163명이다. 중앙본당이 주교좌 성당이 된 1956년 8월 이전까지의 전주교구 관내의 주교좌 성당은 ‘전동본당’이었다.

② 부산교구의 주교좌 본당. 주보는 성 십자가. 항도 부산의 도심인 부산시 중구 대청동(釜山市 中區 大廳洞) 1가 48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부산시내에서 세 번째로 설정된 이 본당은 1948년 8월 1일 이명우(李明雨, 야고보) 신부를 주임으로 맞아 창설되었다. 8.15광복 후 이 본당이 창설되기 전에는 부산 도심지에 본당이 없어, 일본인 신자들이 쓰던 작은 공소를 인수하여 범일동본당의 사제를 모셔다 주일미사를 보았다. 당시 공소에는 중구, 서구, 동구 등 중앙지대의 신자들과 영도(影島)의 봉래동, 신선동 신자들이 모였다. 신자수가 늘어감에 따라 청학동과 범일동 본당의 중간 도심지에 본당의 창설이 절실히 요망되었다. 그래서 지도적인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우선 지은사(至恩寺)라는 절은 대상으로 스님과 협의가 성립된 뒤 당국에 인수절차를 마쳤다.

그러나 현 사제관 자리는 당시 불교계통에서 사회사업을 하는 곳인 데다 적십자사가 들어 있고, 또한 재일 한국인 청년단이 건물의 일부를 쓰고 있었는데 일부 횡포한 청년들이 일본도를 휘두르며 신부를 위협하는 사태까지 벌였다. 이런 험난한 정황 속에서 절의 정면과 내부를 보수하여 1948년 6월 20일 축성식을 올리고 오늘의 기초를 닦았다. 그 무렵 이 본당의 관할구역은 북으로 초량에서부터 남으로는 영도구 신성동, 서쪽은 서구 하단동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었다. 하지만 교세는 아직 5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 뒤 신자수는 계속 늘어 1951년 5월 초량본당(신자 3,100명)을 분리시키고, 1951년 6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수녀회의 분원(分院)을 개설하였다. 1952년 3월 유년부(유치원)를 설립하고, 1954년 4월에는 성당 개축공사에 착수하여 1956년 새 성당의 축성식을 올렸다. 그 동안 1955년 1월 신선본당(신자 700명)을 분할하고, 그 해 2월 서대신본당(신자 2,500명)도 독립시켰다.

부산교구가 대구교구에서 분리되면서 중앙본당에는 주교좌가 설정되어, 1957년 5월 30일 초대 교구장 최재선(崔再善, 요한) 주교의 착좌식이 거행되었다. 1959년 10월 초장본당(신자 2,000명)을 분할하고, 1960년 5월 1일에는 성가 신용협동조합이 설립되었다. 1961년 12월 송도본당(신자 200명)을 분할하고, 1963년 3월 30일에는 본당주임인 장병화(張炳華, 요셉) 신부가 주교로 서품되었다. 1964년 5월 교구청이 현 대청동 4가 81의 1번지로 이전하였다. 1964년 11월 동대신동본당(신자 2,400명)을 분할하고, 1970년 9월 영주본당(신자 2,600명)을 분리시켰다. 1973년 8월 5일에는 현 대성당의 축성식이 봉헌되었다. 1974년 3월 성년행사 서부 순례 성당으로 지정되고, 1975년 7월 17일 제2대 교구장 이갑수(李甲秀, 가브리엘) 주교의 착좌식이 거행되었다. 1975년 12월 성모 동굴의 축성식을 올리고, 1980년 5월 루치아노 안제로니((Luciano Angeloni) 교황대사의 방문을 받았다. 1983년 말 현재의 신자수는 9,948명이다.

그동안 이 본당을 맡았던 주임은 초대(1948. 8∼1950. 6) 이명우 신부를 비롯하여, 2대(1950. 6∼1957. 5) 장병룡(張丙龍, 요한). 3대(1957. 5∼1968. 10) 장병화, 4대(1968. 11∼1972. 10) 제찬규(諸燦奎, 시메온), 5대(1972. 1∼ 1972. 3) 이철우(李喆雨, 바오로), 6대(1972. 3∼1972. 11) 이철희(李哲熙, 바오로), 7대(1972. 11∼1976. 11) 김유재(金有宰), 8대(1976. 11∼1978. 1) 이갑수(李甲秀, 가브리엘) 신부였고, 현재는 이경우(李慶雨, 가브리엘) 신부가 주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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