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전주교구 주교좌 성당. 주보는 예수성심. 전주는 한국 천주교회와 관계가 깊은 곳으로 부근에 수많은 교우촌들이 산재해 있고, 순교지 숲정이가 있다. 1933년 12월 당시 교구장인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가 여러 교우들의 청원에 의하여 전주 전동본당(殿洞本堂)에 있는 한옥 사무실을 철거하고 그 곳에 ‘비성거리’[현 전주시 고사동] 공소를 신축, 이후 1947년까지는 공소시기로 있다가 그해에 비성거리성당을 성립, 초대 주임으로 김재덕(金在德, 아우구스티노)신부가 부임하였다. 김 신부는 장래 순교자 기념성당을 건축하고자 하는 포부와 함께 전주시내에 전동본당 하나로써는 너무 복잡하고 또한 비성거리성당이 협소하므로, 전주시 대동(大洞)[현 전주시 다가동] 소재 일산 가옥 2층을 임차하여, ‘대동성당’(大洞聖堂)을 개설하였다. 이리하여 대동성당 시대로 접어들어 2대(1951∼1952) 이대권(李大權, 바오로), 3대(1952∼1954) 김종택(金鍾澤, 요셉) 신부를 거치는 동안, 1950년 6.25전쟁 당시는 김재덕 신부와 이대권 부제가 북괴 내무서원에서 체포 투옥되었고, 1952년 2월 1일 임대 사용 중이던 대지 및 건물을 매입하여 구내에 성모당, 성모유치원을 설립하였다.
1955년에 와서 당시 교구장 김현배(金賢培, 바르톨로메오) 주교는, 교구에서 경영하던 ‘전북제사’ 부지에 새 성당을 건립하기로 결정하고, 역사적인 기공식을 가진 뒤, 박성운(朴聖雲, 베네딕토) 신부의 지휘 아래, 건평 290여평의 전주 ‘중앙본당’(中央本堂)을 준공하여 1956년 8월 6일 주교좌(主敎座) 성당으로 축성하였다. 초대(1956∼1958년) 박성운(朴聖雲, 베네딕토), 2대(1958∼1961년) 이약슬(李若瑟, 요셉), 3대(1961∼1962) 김재덕 신부, 4대(1962∼1963년) 김이환(金二煥, 스테파노), 5대(1963∼1966년) 김재덕 신부의 재부임, 6대(1966∼1969년) 박영규(朴永圭, 바르나바), 7대(1969∼1974년) 안복진(安福瑱, 요셉), 8대(1974∼1976년) 이대권 신부, 9대(1976∼1980년) 서용복(徐龍福, 토마스), 10대(1980∼ 현재) 문정현(文正鉉, 바르톨로메오) 신부 등 역대 주임신부들의 업적이 이어졌다.
그 중에서도 1958년 ‘성가수녀원 분원’의 완공, 1958∼1960년의 사제관 완성[현 수녀원], 1963∼1965년의 새 사제관(3층) 및 강당신축, 1966년 본당 사무실 신축, 1967년 프랑스제 헌종(獻鐘) 설치와 성모상 건립, 1969년 ‘상가’건립, 1969년 성 바오로서원 유치, 1975년 성모유치원 신축 개원, 1977년 노인학교 개설, 1978년 양로원 설치운영, 1981년에는 ‘중앙성당 건립 25주년 기념성당’ 신축계획을 세웠고, 1982년에는 금암동본당의 착공을 보았다. 한편 성당 신설 분립 업적만 하더라도, 1965년 4월 지역안배로 덕진본당이 신설 분리됨으로써 금암동 일부, 덕진, 호성, 전미 전당리 공소, 팔복동, 조초면, 송천동의 관할권을 이양하였고, 1965년 12월 16일에는 순교자 정신 앙양과 복자 시복일을 기념하는 복자성당이 건립됨으로써 다가동, 태평2가 일부, 중앙동 일부, 고사, 진북, 화산동 지역의 관할권을 이양하였다. 1969년 12월 2일에는 노송동본당이 건립됨에 따라 중노, 남노, 인후, 우아동과 소양면, 용진면 공소 일부의 관할권을 이양하였으며, 1976년 12월 15일에는 숲정이본당이 신설됨에 따라 서신동, 태평 1, 2동 일부, 금암, 진북 2동의 관할권을 이양하였다.
전주교구 주교좌 성당인 중앙본당은 전북 전주시 서노송동 639의 40에 소재하며, 1984년 6월 현재 총신자수 5,163명이다. 중앙본당이 주교좌 성당이 된 1956년 8월 이전까지의 전주교구 관내의 주교좌 성당은 ‘전동본당’이었다.
② 부산교구의 주교좌 본당. 주보는 성 십자가. 항도 부산의 도심인 부산시 중구 대청동(釜山市 中區 大廳洞) 1가 48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부산시내에서 세 번째로 설정된 이 본당은 1948년 8월 1일 이명우(李明雨, 야고보) 신부를 주임으로 맞아 창설되었다. 8.15광복 후 이 본당이 창설되기 전에는 부산 도심지에 본당이 없어, 일본인 신자들이 쓰던 작은 공소를 인수하여 범일동본당의 사제를 모셔다 주일미사를 보았다. 당시 공소에는 중구, 서구, 동구 등 중앙지대의 신자들과 영도(影島)의 봉래동, 신선동 신자들이 모였다. 신자수가 늘어감에 따라 청학동과 범일동 본당의 중간 도심지에 본당의 창설이 절실히 요망되었다. 그래서 지도적인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우선 지은사(至恩寺)라는 절은 대상으로 스님과 협의가 성립된 뒤 당국에 인수절차를 마쳤다.
그러나 현 사제관 자리는 당시 불교계통에서 사회사업을 하는 곳인 데다 적십자사가 들어 있고, 또한 재일 한국인 청년단이 건물의 일부를 쓰고 있었는데 일부 횡포한 청년들이 일본도를 휘두르며 신부를 위협하는 사태까지 벌였다. 이런 험난한 정황 속에서 절의 정면과 내부를 보수하여 1948년 6월 20일 축성식을 올리고 오늘의 기초를 닦았다. 그 무렵 이 본당의 관할구역은 북으로 초량에서부터 남으로는 영도구 신성동, 서쪽은 서구 하단동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었다. 하지만 교세는 아직 5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 뒤 신자수는 계속 늘어 1951년 5월 초량본당(신자 3,100명)을 분리시키고, 1951년 6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수녀회의 분원(分院)을 개설하였다. 1952년 3월 유년부(유치원)를 설립하고, 1954년 4월에는 성당 개축공사에 착수하여 1956년 새 성당의 축성식을 올렸다. 그 동안 1955년 1월 신선본당(신자 700명)을 분할하고, 그 해 2월 서대신본당(신자 2,500명)도 독립시켰다.
부산교구가 대구교구에서 분리되면서 중앙본당에는 주교좌가 설정되어, 1957년 5월 30일 초대 교구장 최재선(崔再善, 요한) 주교의 착좌식이 거행되었다. 1959년 10월 초장본당(신자 2,000명)을 분할하고, 1960년 5월 1일에는 성가 신용협동조합이 설립되었다. 1961년 12월 송도본당(신자 200명)을 분할하고, 1963년 3월 30일에는 본당주임인 장병화(張炳華, 요셉) 신부가 주교로 서품되었다. 1964년 5월 교구청이 현 대청동 4가 81의 1번지로 이전하였다. 1964년 11월 동대신동본당(신자 2,400명)을 분할하고, 1970년 9월 영주본당(신자 2,600명)을 분리시켰다. 1973년 8월 5일에는 현 대성당의 축성식이 봉헌되었다. 1974년 3월 성년행사 서부 순례 성당으로 지정되고, 1975년 7월 17일 제2대 교구장 이갑수(李甲秀, 가브리엘) 주교의 착좌식이 거행되었다. 1975년 12월 성모 동굴의 축성식을 올리고, 1980년 5월 루치아노 안제로니((Luciano Angeloni) 교황대사의 방문을 받았다. 1983년 말 현재의 신자수는 9,948명이다.
그동안 이 본당을 맡았던 주임은 초대(1948. 8∼1950. 6) 이명우 신부를 비롯하여, 2대(1950. 6∼1957. 5) 장병룡(張丙龍, 요한). 3대(1957. 5∼1968. 10) 장병화, 4대(1968. 11∼1972. 10) 제찬규(諸燦奎, 시메온), 5대(1972. 1∼ 1972. 3) 이철우(李喆雨, 바오로), 6대(1972. 3∼1972. 11) 이철희(李哲熙, 바오로), 7대(1972. 11∼1976. 11) 김유재(金有宰), 8대(1976. 11∼1978. 1) 이갑수(李甲秀, 가브리엘) 신부였고, 현재는 이경우(李慶雨, 가브리엘) 신부가 주임을 맡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