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성월의 신심서. 예수회 선교사 조톨리(Zottoli, 중국명 晁德菈)의 한문(漢文) 저술로 1854년 중국에서 간행되었다. 내용은 형식상 서두부분과 본문부분으로 나뉘는데, 서두 부분에는 성모성월에 지켜야 할 6가지 규칙을 밝힌 ‘성월경례본칙'(聖月敬禮本則), 성모에게 영적 꽃다발을 드리는 12가지 방법을 밝힌 ‘1월신화지례'(一月神花之例), 성모에게 매일 영적 꽃다발을 드리는 31가지 방법을 밝힌 ‘매일신화지례'(每日神花之例), 그리고 성모에게 드리는 영적 꽃다발을 기록해 두는 법에 대해 서술한 ‘경제신화지법'(敬製神花之法)등이 수록되어 있고, 이어 본문부분에는 성모성월이 시작되는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31일치의 묵상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간행 직후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으나 한글본 《성모성월》의 번역 원본으로는 사용되지 않았고 오히려 1857년 중국에서 간행된 한문본 《성모성월》(聖母聖月)이 1887년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다.
경교 [라] Nestorianismus [영] Nestorianism [한] 景敎
시리아 유프라텐시스에 있는 제르마니치아(Germanicia) 원주민인 네스토리우스(Nestorius, 또는 Nestorios, ?~451)에 의하여 창출된 교리를 신봉하는 종파.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위격적 결합(hypostatic union)이 아니라 외형적 결합(synapheia)이라 하여 그리스도에는 두 인격이 있다는 주장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 이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는 당(唐)나라 초기에 서역(西域)을 통하여 중국으로 전해져 경교(景敎)로 불렸고 14세기 말에 소멸되었다. 이 종파는 로마 제국 영내에서 발달한 그리스도교가 아니고 로마 제국 영역 밖에서 발달하였다.
네스토리우스의 교의를 따르는 사람들은 페르시아를 거쳐 동방으로 그 선교지를 확장하여 나가, 아라비아, 인도, 중앙 아시아에까지 이르렀다. 이리하여 5세기 말부터 이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는 중국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개시하여 성경의 번역은 물론, 곳곳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교의 일파의 명칭이 왜 중국에서 경교라고 호칭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연혁에 근거를 두고 있다.
중국에서는 최초로 이 종교를 ‘파사교'(波斯敎), 교회당을 ‘파사사'(波斯寺)라고 부르다가, 당나라 현종(玄宗)이 ‘파사사’를 ‘대진사'(大秦寺)로 개칭하여 ‘파사교’는 ‘파사경교'(波斯景敎)로 되었다가 뒤에 ‘대진경교'(大秦景敎)라고 부르게 되었다. ‘대진’이란 로마를 가리킨다. 당의 덕종(德宗)때인 781년(建中 2년)에 세워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에는 “眞常之道 妙而難名功用昭彰 强稱景敎”라 기록되어 경교 신도를 경중(景衆) 혹은 경사(景士)로, 경교사원을 경사(景寺), 본존(本尊)인 미사가(彌師訶)를 경존(景尊)이라고 하였다. 경교 비문에 따르면, 635년(貞觀 9년) 페르시아 사람 알로펜(阿羅本, Alopen 혹은 Abraham)을 단장으로 한 경교 선교사 일행이 장안(長安)에 도착하였고, 638년에는 태종(太宗)이 장안에 대진사를 건립하여 승려 21명을 배속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경교 신자가 당나라 이전부터 중앙 아시아 일대와 만리장성 내외에 거주하였으며, 경교 선교사가 그 곳을 왕래한 사실을 알려 주는 사료들은 적지 않게 있다. 당나라 때의 경교의 주장은, ① 일신교(一神敎), ② 제왕 숭배, ③ 왕법 위본(王法僞本)주의, ④ 부모 효양(父母孝養), ⑤ 보시(布施) 장려, ⑥ 선악 이도(善惡二道, Didache)의 교회를 신봉하고 있었고, 펠리오(P. Pelliot)가 1908년 돈황(敦煌)에서 발견한 《경교삼위몽도찬》(景敎三威蒙度讚) 및 《존경》(尊經)에 의하면, ⑦ 삼위일체설의 신봉과, ⑧ 세례 및 영성체(領聖體)를 행하고, ⑨ 품급(品級)을 경교회의 전례(典禮)로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중국의 전통적인 사상과 타협하여 충효, 호국(護國)의 가르침이라는 점이 설명되었다. 그러다가 무종(武宗)이 도교(道交)를 믿게 되어 845년 다른 교를 압박한 결과, 경교는 차차 쇠퇴하여 신도들이 서역으로 쫓겨가거나 도교의 그늘에 숨어 버리거나 하였다. 원(元)나라 때로 접어들면서 1289년 경교는 다시 그 선교활동이 허용되었고, 삼위일체를 신봉하며, 로마교황의 수위권을 승인하여 원나라의 정치적 심부름을 충실히 하였다. 그렇지만 이 시대에는 경교라고 부르지 않고, 중국측 역사문헌상에는 ‘타르사'(達娑, Tarsa) 또는 ‘에르케운'(也里可溫)으로 알려져 있으며, 원의 경교 사원인 십자사(十字寺)가 72개소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잠시 재흥했던 중국의 경교는 원의 멸망과 더불어 그 터전을 잃고 말았다. 따라서 몽고 각지에 그 유적을 남긴 것 중에 원대 이후의 것은 거의 없다.
한국에서의 경교는, 신라시대의 돌로 된 십자가, 동제(銅製)십자가, 마리아 관음상(觀音像) 등 경교적 흔적을 보여 주는 유물들이 1956년 경주(慶州)에서 출토됨으로써 널리 통일신라시대로 그 전래시기를 보는 측도 있지만 정설(定說)은 아니다. 일본의 경우는《속 일본서기》(續 日本書紀)에 783년 (당 開元 24년, 일본 天平 8년) 당나라 사람 황보(皇甫)가 페르시아 경교 의료선교사인 밀리스(Millis, 李密)를 동반해 와서 세이부(聖武) 천황을 만나게 한 사실이 전래의 초기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F. Loofs, Nestorius and his Place in the History of the Christian Doctrine, Cambridge, Eng. 1914 / L. Wieger, Histoire des croyances religieuses et des opinions philosphiques en Chine, 1919 / E.A. Wallis Budge, The two monks of Khuablai Khan, 1927 / 佐伯好郞, 景敎の硏究, 東方文化學院 東京硏究所, 1935/Henri Bernard S.J., La decouverte de Nestoriens Mongols aux Ordos et l’Histoire ancienne du Christianisme en Extreme-Orient, Tientsin 1935 / P.Y. Saeki, The Nestorian documents and relics in China, Tokyo 1937 / J. Steward 原著, 佐伯好郞 校訂, 賀川豊彦 · 熱田俊貞 譯, 東洋の基督敎 景敎東漸史, 日本 豊文書院, 1940 / L.I. Scipioni, Ricerche sulla Cristologia del Libro di Eraclide di Nestorio, Fribourg 1956 / P.T. Camelot, Grill-Bacht Konz, Ephese et Chalcedoine, v. 2 of Histoire des conciles oecumeniques, Paris 1962.
경건주의 [한] 敬虔主義 [라] Pietismus [영] pietism [독] Pietismus
17세기의 독일 루터파의 한 영향력 있는 실천적 종교운동으로서 시작한 경건주의는, 살아있는 신앙, 즉 개인적인 신심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교를 경건한 태도로 경신하려고 시도한 교회개혁운동이었다. 주창자인 스페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는, 《경건한 열망》(Pia Desideria, 1675)이라는 책을 펴내 비하된 교회의 위치를 논한 뒤, 독자에게 보다 나은 상태의 교회를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심어 주려고 애썼고, 6개의 개혁계획을 제시하였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 경건회(Collegia pietatis)를 설립하고, 드레스덴 시절에는 《신학연구의 장애물들》(1690)이라는 책을 저술하였으며,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라는 나중에 제2의 경건주의 지도자가 될 친구를 알게 되었다.
경건주의는 독일 프로테스탄티즘의 이론적인 신조에 대한 불만으로서 실천적인 신앙을 주장했기 때문에 금욕주의, 신비주의, 정적주의(靜寂主義)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당시의 교리적 형식이나 교회적 관습에 의해 몹시 경직화되었던 프로테스탄트 정통파에 대한 반동으로서, 개인적인 종교체험 또는 생활의 존중, 경건스런 성서에의 복귀를 요망하는 추세를 타고 경건주의는 확산되어 나갔다. 이보다 앞선 1646년 얀센(Cornelius Jansenius, 1585~1638)이 발표한 저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프랑스 교회 안의 엄격한 윤리를 주장하여 교회개혁 정신을 고취하게 됨으로써 얀세니즘을 일으켰는데, 이는 경건주의의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경건주의의 입장은, 일반적으로 사상에 있어 보수적이며 성서주의를 내세우고, 새로운 학문 및 문화에 반감을 품으며, 엄격한 종교적 내지 특수한 교회적 생활을 영위하고, 금욕적인 도덕을 지키며, 교육?사회적인 구제, 전도 등 사업에 노력하여 왔다. 이러한 점에서 근대적인 경향에 접근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방면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교리의 유연화(柔軟化), 종교의 윤리화에 의하여 계몽사상의 준비를 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슐라이에르마허, 칸트 등에게도 감화를 주었고, 19세기의 경건을 주로 하는 사상은 많건 적건 그 영향을 받았다. 오늘까지 존속하고 있는 경건주의는 과거와는 달리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정통파와 평화적으로 협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H. Schmid, Die Geschiche des Pietismus, Nordlingen 1863 / H. Heppe, Geschichte des Pietismus und der Mystik in der reformierten Kirche namenlich der Niederlande, Leiden 1879 / P. Grunberg, Philipp Jakob Spener, v.3, 1893~1906 / L. Wacker, Die Sozial- und Wirtschaffsauffassung im Pietismus, 1922 / J.T. McNeill, Modern Christian Movements, Philadelphia 1954 / F.E. Stoeffler, The Rise of Evangelical Pietism, 1965.
경갑룡 [한] 景甲龍
제3대 대전교구장. 주교. 세례명 요셉. 1930년 12월 15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중동고등학교를 거쳐 가톨릭대학 신학부를 1962년 12월 21일 졸업하면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서품받은 이후 명동성당 보좌(1962. 12. 21), 서울 대교구 부당가(1965. 1. 4), 서울 대교구 재경부장(1966. 12. 14), 금호동성당 주임(1967. 4. 18), 성모병원 경리처장(1967. 9. 10), 서울 대교구 재경부장(1969. 4. 14), 청량리성당 임시보좌(1970. 11. 13)를 맡았다. 1971년 1월 8일 유학길에 올라 미국, 로마, 필리핀에서 카운셀링, 영성신학을 연구한 뒤 귀국하여 논현동본당 주임(1976. 6. 10)을 거쳐 1977년 2월 10일 부파다(Buffada) 주교좌 명의주교로 착좌되면서 서울 대교구 보좌주교에 임명되었다. 1981년 11월에 구성된 200주년기념회의 주교 준비위원회의 4개 집행위원회 중 기념행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1984년 7월 12일 제3대 대전교구장에 임명되었다.
[참고 : 경갑룡 주교는 2005년 4월 1일 대전교구 교구장직을 은퇴하고 후임에 유흥식 라자로 주교가 착좌하였다]
겸손 [한] 謙遜 [라] humilitas [영] humility
자신을 낮추되 비굴하지 않고 자신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인식과 그 태도, 한서(漢書) 서경(書經) 등에 나타나는 덕목이나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겸손을 배우고 실천해 왔다. 구약 성서에서 하느님의 백성은 구세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야훼의 전능 앞에 인간 자신이 오만할 수 없음을 깨달았고, 인간의 거듭된 배신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야훼의 자비 앞에 그들은 비굴하지 않고 용기와 희망을 가졌다. 인간의 처지가 야훼 없이는 무가치하나 한편 인간은 야훼의 사랑을 받고 있는 하느님의 모상이므로 존엄하고 영광스러운 처지이다. 겸손은 인간이 자기 처지 이상으로 높이는 오만도, 그 이하로 낮추는 비굴도 아니며 자신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자존심을 가지되 겸손하고 네 자신을 평가하되 정당하게 하여라.”(집회 10:28) 혈육을 취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전 지상생활을 통하여 겸손의 모범을 보였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하느님은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겸손한 자로 나타내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겸손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필립 2:5-11)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us)는 인간의 죄의식에 근거하여 “인간이여, 그대가 인간임을 알지어다. 그대의 온전한 겸손은 자신을 아는 것이로다.” 하였으나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inas)는 겸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용(magnanimitas)과 관련지었다. 자신의 주제를 넘지 않는 겸손한 자는 허영심을 탐내지 않으며(갈라 5:26) 하느님의 은총 앞에 자기 마음을 열어 놓을 뿐 아니라 이웃에게 관용한 사람이다. 겸손이 그리스도인에게 특유한 덕행인 것은 그것이 애덕(愛德)의 한 측면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