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물’을 의미하는 낱말. 이는 구약성서(집회 31:8)와 사해문서 및 탈무드에 나오고 있으나 신약성서(마태 6:24, 루가 16:9 · 11 · 13)에 잘 나타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재물을 가진 자가 ‘영원한 집’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가난한 친구를 위해 재물을 쓰라고 가르치시며, 하느님의 사랑과 황금의 사랑은 인생에 있어서 상호 배타적인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 16:24).
말씀의 전례 [한] ∼典禮 [라] Liturgia Verbi [영] Liturgy of Word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며 말씀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 구원을 얻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행위. ‘말씀의 전례’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교회 안에서 사용하게 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 안에서 처음으로 쓰게 되었으나 그 기원은 구약시대 시나고가(Synagoga)라고 하는 유태인 회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성서봉독을 한 데서 비롯한다. 학자들은 시나고가의 성서봉독과 현대의 말씀의 전례 사이의 내용적인 관련성을 밝혀 보려 했으나 실패했지만 양자간의 형식적인 유사점은 인정되었다. 즉 독서 두 편 사이에 시편을 노래하고 간청기도 및 성서 해설과 축복의 순서가 그것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유태인 회당에서 거행된 성서봉독 예배를 실천하시고 참석하셨는데 초대교회 신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유스티노 순교자는(150년경) 성서봉독 예배를 중시하였고 3세기에도 말씀의 전례가 따로 거행되었다는 사실이 있으며 미사와 연결시키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말씀의 전례 형식은 성금요일 전례의 첫 부분과 부활축일 전야에 거행되는 말씀의 전례이다.
창세기에서 보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말씀 그대로의 결과를 가져오는 창조의 힘을 지닌다. 한편 하느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아쉬웠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었다. 그 사랑의 말씀은 사람이 되시어 인간 역사 안에서 구원의 업적을 이루어 놓으셨다. 그 효험을 세상 종말까지 지속시키고자 그리스도는 자신의 사제직을 바탕으로 교회 안에 전례를 제정하시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전례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구원행위를 재현하며 은혜를 얻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전례행위는 과거의 역사적인 구원행위를 추모하는 단순한 기념행사가 아닌 것이다.
말씀의 전례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은 구원의 역사적 사건을 체험하며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창조의 힘을 지닌 말씀이 생활에 있어서 그대로 이루어짐으로써 구원의 은총을 얻을 뿐 아니라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전례헌장은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전례 행사 안에 항상 현존”하실 뿐 아니라, “당신 말씀 안에도 현존하시니 교회에서 성경을 읽을 때 말씀하시는 이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고 하였다(7항). 말씀의 전례의 시기에 관하여 전례헌장은 “말씀의 전례는 대축일 전날, 구세주 대림절 및 사순절의 어느 요일, 또 주일과 축일에 장려되어야 한다. 특히 사제가 없는 곳에서 행할 것이니, 이런 경우에는 부제나 주교에게서 권리를 받은 사람이 이 말씀의 전례를 지도해야 한다”(35항)고 하였는데 미사의 일부분으로 거행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어떤 의미에서 미사성제는 두 가지 부분 즉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구성되어 있으나 두 부분은 서로 밀접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오직 하나의 흠숭행위를 이루는 것이다”(전례헌장 56항).
말씀의 전례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기도를 올리는 것이므로 이를 구성하는 요소는 독서, 시편노래, 강론, 신자들의 기도로 짜여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주일과 큰 축일 미사의 일부분으로 거행되는 경우는 구약성서, 서간, 복음 등 3개의 독서를 하며 시편까지 합치면 4개가 된다. 예컨대 구약성서에서는 하느님이 다윗에게 ‘후손 중에서 메시아가 나올 것’을 약속하였고 시편에서는 ‘이 약속은 희망의 원인’이 된다고 노래하였으며 복음에서는 하느님이 마리아에게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는 것과 그 내림’을 고하였고 서간에서는 바울로가 이 구세주를 사람들에게 알린다. 미사의 일부분으로서의 말씀의 전례를 통하여 신구약성서 전체를 3년마다 1회 독하도록 편성되어 있다. 미사에서 성찬의 전례와 분리하여 말씀의 전례만을 거행할 때는 거행하는 동기에 적합한 성서 구절을 선택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말씀의 전례에서 하느님의 백성은 생활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같이 들으면서 믿음과 사랑의 대화 속에 다같이 그분에게 응답하는 것이므로 “전례행위는 사(私)적인 행위가 아니라 ‘일치의 성사’인 성교회의 식전(式典)”(전례헌장 26항)인 것이다.
[참고문헌] 崔允煥, 말씀의 典禮, 司牧, 22호 / 申相祚, 典禮와 生活, 神學展望, 22호 / 민루까, 전례쇄신에 대한 理解, 司牧, 3호 / New Catholic Encyclopedia, 1966.
말세 [한] 末世 [영] last times
일반적으로 한 국가의 정치 · 도덕 · 풍속 따위가 매우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또는 망해 가는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말세’와 동일하게 쓰이는 말에 ‘계세’(季世), 시대의 끝을 나타내는 ‘말대’(末代), ‘숙세’(叔世), ‘말조’(末造) 등이 있다. 불교의 경우는 ‘말법(末法)의 세상’을 말세의 뜻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가 탄생한 때부터 재림(再臨)할 때까지의 세상을 지칭하여 ‘말세’라고 한다. 이 개념은 ‘마지막 날’(the last day)이라는 개념과 밀접한 유사성을 가지며, ‘날들의 마지막’(the end of days)이라는 구약성서 개념에 그 뿌리가 있다. 즉 현재 세계의 진행과정이 진입해 들어가는 전체적인 종말론적 기간을 뜻하며, 흔히 추측되는 것처럼 ‘역사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의 개념은 ‘다가오는 세대’(the coming aeon)라는 후기의 개념과 동일하다. 반면에 신약성서에서의 ‘말세’는 현 세대 혹은 현 세대가 끝나는 시간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의 재림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살고 있다는 ‘마지막 시대’ 의식이 나타나 있다. 韓佛字典(1880)에 따르면, 모든 것의 종말, 특히 통치의 최후를 가리키는 말로 풀이되고 있다. ‘최후의 시기’ 또는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는 이 말에서 가톨릭의 입장에서의 ‘종말의 완성’(final consummation)에 대하여 부연하자면, 현세의 끝과 그리스도의 역할의 결말로서의 이 세상의 쇄신을 기함을 말한다. 즉 이 세상의 끝남과 함께 성스러운 삼위일체에 의한 완전한 지배가 시작된다. 이것이 바로 창조 전체의 목적이며, 인간의 역사 전체와 종국적인 의미인 것이다.
말라위 [원] Malawi
동남부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 잠비아, 탄자니아, 모잠비크와 접경하고 있으며 면적 11만 8,484㎢에 인구 약 627만 명이다. 1891년 이후 영국 식민지였으며, 로디지아 · 니야잘랜드 연방(1954-1963년)의 일원이었으나, 1964년에 니야잘랜드가 말라위 독립국이 되었다. 1959년에 교계제도가 확립되었으며, 1982년 현재 137만 1,000명이 가톨릭 신자이며 본당 131, 공소 1,324개소 등이 있다.동남부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 잠비아, 탄자니아, 모잠비크와 접경하고 있으며 면적 11만 8,484㎢에 인구 약 627만 명이다. 1891년 이후 영국 식민지였으며, 로디지아 · 니야잘랜드 연방(1954-1963년)의 일원이었으나, 1964년에 니야잘랜드가 말라위 독립국이 되었다. 1959년에 교계제도가 확립되었으며, 1982년 현재 137만 1,000명이 가톨릭 신자이며 본당 131, 공소 1,324개소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