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스 스코투스 [원] Duns Scotus, Johannes

Duns Scotus, Johannes(1265?~1308). 성기(盛期) 스콜라학의 마지막 인물로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 1281년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보나벤투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옥스퍼드대학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수학적인 엄밀성과 명확하게 증명될 수 있는 것을 추구함이 학문의 이상이라 하여 예리하고 비판적인 방법으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판하였다. 그리스도에 의한 예견구제(豫見救濟)로서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에 대한 그의 주장은 신학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스코투스는 아포스테리오리(a posteriori)한 논증을 개연적이고 불확실한 것으로 배척하고 아프리오리(a priori)한 논증만이 참된 논증이라고 주장하면서 신의 존재와 속성, 영혼불멸 등에 대한 참된 논증은 가능하지 않다고 하였다. 그에 대한 개연적인 논증밖에 할 수 없다고 하여 신을 논증하려는 시도의 무의미성을 비판하였다. 신이란 어떤 것에 의해서도 구속받지 않고, 어떤 근거 없이도 존재하는 무한자(無限者)로 신은 그의 의지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에 신의 의지가 선악의 최고원칙이라고 주장하는 둔스 스코투스는 의지를 오성(悟性)보다 우위에 두었다. 인간에 있어서도 의지가 이성보다 우위에 있으며 인간이 어떤 대상을 인식하거나 어떤 행위를 할 때 오성은 단지 이성의 보조원인(causa subserviens)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에 있어서의 행위는 인간 의지의 자유에 의해 선택된 행위이고, 이 행위의 선악도 신의 의지와 얼마나 일치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은 도미니코회의 의해 채택되어 발전되었고, 둔스 스코투스의 주장은 프란치스코회에 의해 채택되어 발전됨으로써 이 두 개의 수도회가 서로 대립된 입장을 갖게 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둔스 스코투스의 사상은 후에 유명론 자들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쳤고 이로 말미암아 둔스 스코투스는 스콜라학과 르네상스를 연결시키는 교두보의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주요 저서로는 ≪opus Oxoniense≫, ≪Reportatio Parisiensis≫, ≪Questiones Quodlibetales≫, ≪De primo rerumomnium principio≫, ≪Quaestiones Disputata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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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세 [원] Doucet, Camille-Eugene

Doucet, Camille-Eugene(1853~1917). 서울교구 부주교, 한국명 정가미(丁加彌). 1917년 4월 19일, 1876년부터 40여 년간, 갖은 박해를 헤치며 한국 교회를 끝까지 지킨 초기 한국 교회의 산 증인인 부주교 두세 신부를 잃음으로써 한국 교회는 큰 슬픔에 잠겼다. 그는 1853년 11월 16일 쉬브롱(Chevron)에서 태어나 1873년 9월 10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76년 12월 23일 사제서품을 받고, 이듬해 1월 25일 한국으로 떠났다. 이 때 한국에는 1866년 병인박해로 두 명의 주교를 포함한 9명의 성직자가 순교한 뒤에도 계속 박해가 끊이지 않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1877년 3월에 만주에 도착한 그는 9월 11일 리델(Ridel) 주교와 로베르(Robert) 신부와 함께 배를 타고 떠나 23일 저녁에 황해도 배천(白川) 맞은편 한강 입구에 닻을 내리고, 배천으로 들어가 1878년 1월말에는 구월산(九月山) 일대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 수 있게 되었다. 곧이어 서울에서 리델 주교가 체포되자 두세 신부와 로베르 신부를 만나 서로 무사함을 기뻐하였다. 이어 포졸들의 추적을 피해 이북 5도를 돌아다니면서도 전교활동을 멍추지 않았고, 12월에는 남부지방으로 내려가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로 가는 도중, 천연두에 걸린 어린이에게 성사를 베풀다가 자신도 감염되어 15일간 병석에서 신음하는 고통도 겪었다. 1881년 뮈텔(Mutel) 신부와 리우빌(Liouville) 신부가 조선 입국에 성공한 후, 두세 신부는 충청도지방을 전담하여 근 10년간 이곳에서 복음 전파에 전력을 다하였다. 1890년에 서울에 올라온 그는 곧 약현(藥峴, 현 중림동) 성당의 건축을 담당했고, 성당이 준공되자 1892년 초대 약현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사망하기까지 25년간 그 곳에서 일생을 바쳤다.

1896년 코스트(Coste) 신부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부주교로 임명되어, 더욱 바쁜 봉사생활에 몰두하였으나 점차 몸이 노쇠해져 40년에 걸친 그의 헌신적 봉상에 종지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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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봉 [한] 杜峰 [관련] 뒤퐁

⇒ 뒤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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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도구본당 [한] 頭道溝本堂

1929년 만주 간도성 연길현 두도구시(滿洲 間島省 延吉縣 頭道溝市)에 창설되어 1946년 폐쇄된 연길교구 설정 이후 창설된 첫 본당으로 시래플(C. Schrafl, 周)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 1930년 사가(私家)를 매입하여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는 한편 해성학원(海星學院)을 개설했고, 이어 하프너(A. Hafner, 韓)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 초등교육기관 해성학교(海星學校)를 개설하고 1936년 두도구 북부지역에 대지를 마련하여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하였다. 1937~1938년경 성당이 완공된 후 교세는 날로 번창했으나 1946년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이 성당을 비롯한 모든 교회재산을 몰수함으로써 본당은 폐쇄되었고 이후 지금까지 침묵의 교회로 남아 있다. 본당 내에는 4개의 신심단체가 있었고, 이 외에 해성학교, 해성학원, 해성여자학원 등이 교육기관이 있었다. 1936년의 교세는 10개의 공소에 교우수 1,334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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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재본당 [한] 升峙本堂 [관련] 고산본당

1893년에 설립된 본당으로서 1944년에 폐쇄되었다. 전주교구 관하의 본당이었다. ⇒ 고산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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