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흡 [한] 崔昌洽

최창흡(1787∼1839).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회장. 세례명 베드로. 일명 여칠. 성녀 손소벽(孫小碧)의 남편. 성년 최영이(崔榮伊)의 부친. 서울의 중인계급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입교했고 1801년 신유(辛酉)박해로 이복형인 최창현(崔昌顯)이 순교한 후로는 냉담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30세 경 결혼한 뒤 아내와 함께 새로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여 1821년 전국에 콜레라가 퍼지자 아내와 함께 대세(代洗)를 받고 이때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후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사위 조신철(趙信喆)이 북경(北京)에서 가져온 교회 물건들이 발견되어 이 때문에 포청(捕廳)에서 7회의 신문과 함께 주뢰, 주장 각각 7차, 태장 150도로 맞는 혹형을 당해야 했고, 형조(刑曹)로 이송되어서도 3차의 혹독한 형문을 받았다. 그러나 모든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내고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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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현 [한] 崔昌顯

최창현(1754∼1801). 순교자. 세례명 요한. 황사영 백서에는 최창현(崔昌賢)으로 나온다. 중인(中人)으로 역관(譯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성격이 온순한데다가 활동적이고 정열적이었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따랐고, 덕망이 높아서 그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없었을 뿐 아니라 그의 가르치는 지도에 모두들 마음으로 따랐다. 그러므로 그가 총회장(總會長)이 되어 20년 동안을 하루같이 복음 전도에 몸을 바친 결과 초기 조선 교회는 박해 속에서도 뿌리를 내려 다져질 수 있었다. 그의 집은 서울 입정동(笠井洞)에 있었으므로, 신자들간에는 관천(冠泉)이라는 호(號)로 널리 알려졌었는데, 그는 초창기 교회에 교리책 등 서적이 많지 않아 전교에 불편함을 느끼고 ≪주일분 첨례의 성경해설≫이란 한문책을 우리말로 옮겨 신자들에게 보급하여 교리지식을 높이기도 하였다. 한편 권일신(權日身), 이벽(李檗), 정약종(丁若鍾), 이존창(李存昌) 등과 함께 조선 교회 창립에 주동적 역할을 하였음은 물론, 성직자 영입을 위해서 앞장서서 활동하였다.

그의 이러한 활약과 명성으로 그는 신자들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1785년부터 형조(刑曹)에서 그의 체포를 꾀하였으므로 그는 일시 피신하여 체포를 모면했으나 1801년 1월 5일에 병이 나서 하는 수 없이 집에 돌아왔을 때, 배교자 김여삼(金汝三)의 밀고로 잡혀 포도청에 갇히게 되었다. 옥에 갇힌 그는 형리들의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처음에는 배교했으나 국청(鞠廳)에 와서는 배교를 취소하고 죽기로 신앙을 고백하여 판관(判官)에게 호교문(護敎文)까지 제출하였다.

이에 판관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여 그 해 4월 8일(음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정약종(丁若鍾) 등과 함께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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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주 [한] 崔昌周

최창주(?∼1801). 순교자. 세례명 마르첼리노. 경기도 여주(驪州) 출신. 원경도(元景道)의 장인. 1791년에 체포되어 광주감영(廣州監營)에 갇히었는데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 뒤 이를 참회하고 더욱 열심히 천주를 믿어 신앙을 지켜 나갔다. 그리하여 1800년 10월에 여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감옥에서 3개월 동안 고생하는 가운데에도 함께 갇힌 신자들에게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교리를 강론하여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1801년 4월 25일(음 3월 13일) 여주에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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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정 [한] 崔昌鼎

최창정(1937∼1984). 서울대교구 소속 신부. 세례명 요아킴.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 남천리에서 출생. 가톨릭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1961년 12월 30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후암동본당 보좌신부로 첫 성직생활을 시작하여 1963년 7월 군종신부로 육군에 입대했고, 1971년 6월 예편과 동시에 이문동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1975년 서울대교구 재경분과위원에 임명되고 이듬해 이문동본당에서 청담동본당을 전임되어 레지오 마리에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1980년 9월 서독의 포교사목을 맡아 서독으로 건너갔으나 간암으로 귀국, 투병생활을 하던 중 1984년 11월 1일 강남 성모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유해는 용인교회묘지 내의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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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근 [한] 崔昌根 [관련] 르장드르

르장드르(Le Gendre) 신부의 한국명. ⇒ 르장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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