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한] 政治 [영] politics [관련] 권력

정치라는 현상은 본래 인간의 사회성 또는 공동체성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사회현상이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홀로 외롭게 살도록 창조되지 않고 타인과 더불어 공동체를 이루고 살도록 하였다. 여기에 인간은 타인과의 어떠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 인간관계는 서로 협력하고 상조하고 사랑을 나누는 우호적 관계가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자기중심주의에 빠져서 서로 분열하고 다투고 투쟁하는 관계가 될 수가 있다. 여기서 서로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개인 또는 집단사이에 조화를 이루고 서로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할 필요가 생긴다.

정치는 바로 인간관계의 조정이 그 목적이다. 서로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힘과 조정기관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국가권력이다. 그리고 그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이 집권자(군주 · 국왕 · 황제 · 대통령)다. 따라서 집권자는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 안에서 평화와 질서가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 그 본연의 임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력의 정치사는 집권자가 권력을 남용하여 인간을 억압하고 압박하는 경우가 많았다. 환언하면 정치권력의 본질적 가치를 전도시킴으로써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게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일이 많았다.

가톨릭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는 때로는 정치권력과 화합하고 때로는 대립하여 왔다. 정칙권력이 교회의 독자적 존재를 옹호하고 교회활동을 보장하고 교회의 자주특권을 인정할 때는 정치권력과 협력하였으며 정치권력이 교회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거나 간섭할 때는 서로 대립하고 투쟁하였다. 정치권력이 교회를 억압함으로써 국가권력과 교회가 서로 투쟁한 대표적인 경우가 초대 교회였다.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초대 교회는 정부로부터 많은 억압을 받았다. 로마의 군주는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에 반항하는 정치적 집단으로 간주하여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투옥하고 살해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국사범이나 대죄인에게만 지워지는 십자가에서 처형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가 죽은 이후에도 약 300년간 교회는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이것은 교회가 반체제적 집단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생각하는 율법과 상반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교회와 정치권력과의 투쟁은 부정과 불의에 대한 진리와 정의의 투쟁이었다.

교회와 정치권력이 서로 협력하고 공존한 시대는 중세교회였다. 4세기에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 황제가 됨으로써 교회는 로마의 국교가 되어 로마의 평화로 번영을 이룩하는데 공헌하였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고 교회의 권위가 정치적 권력보다도 우위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지나치게 강화됨으로써 교회 자체가 세속적 문제에까지 간섭하여 복잡한 문제가 야기되기도 하였다.

근대초기에 와서도 교회는 정치권력과 야합함으로써 특권을 누리기는 하였으나 사회문제를 외면하여 가난한 자의 편에 서지 못하여 교회의 사회적 기능을 다하지 못한 때도 있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정치와 교회는 서로 독자성을 존중하면서 공존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그러나 정치와 교회가 나라에 따라 상이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가톨릭 교회는 인류 구원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윤리적 판단을 내리고 있으며 정치의 본질과 목적과 사명에 대해 여러 가지 문헌을 통해서 교회의 기본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레오 13세는 “정치권력은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 행사되어야 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공익을 위하여 그것을 행사해야 하며 공익이야말로 하느님의 마지막 법이다”라고 말하였고, 비오 11세는 “통치자는 사회구성원을 보호해야 한다. 특히 가난한 자, 약한 자를 보호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정치는 본질적으로 윤리적인 것이다. 따라서 정치는 정의에 합당해야 한다. 따라서 정의가 없는 곳에는 정당한 정치권력도 없다. 부정한 법이 법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부정한 정치는 정치가 아니다. 정치의 본질은 힘의 균형에 의해서 정의를 이룩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를 위협하는 위기는 부단히 계속되므로 폭력으로 정의를 파괴하려는 사람들에 대하여 정치권력은 부단히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 정치권력은 공동선(共同善)을 추구해야 한다. 공동선은 개인과 가족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의 법에 맞고 값있고 행복한 생활을 쉽게 할 수 있는 정상적이며 안정된 공적 조건의 실현을 말한다. 이 공익은 국가의 목적이며 규준이다. 따라서 국가의 숭고한 특권, 즉 정치권력의 사명은 국민생활에 있어서 개인의 활동을 조절하고 또한 원조해서 이들을 조화 있게 공동선으로 합류시키는 데 있다(비오 12세). 공익은 멋대로 규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의 물질적 번영을 그 최고법칙으로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조화적 발달, 자연적 완성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공동선은 공동생활에 있어서 어떤 방법으로 질서 있게 상호 상통하느냐 하는 것이며 어떤 방법으로 정치공동체의 시민들과 공권력간의 관계를 조정하느냐 하는 것이고 또 어떤 방법으로 개인과 정치 공동체가 상호간에 상호 조화하느냐 하는 것이다.

모든 개인과 단체들은 공동선을 위하여 해당된 공헌을 할 의무가 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간들이 자기의 권익을 타인의 권익과 조화시켜야하고 이러한 목적으로 자기의 재물과 노력을 제공하게 하는 것이다. 공동선이 요구하는 것은 정치권력이 한 시민으로 하여금 용이하게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게 하는 것이다. 공동성이 요구하는 것은 국가의 위정자들이 시민들의 권리를 조정하고 보호함에 있어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 개인이나 사회단체의 권리에 치중한 나머지 그들에게만 이익을 주는 일이 없어야 한다. 참으로 인간다운 정치활동을 확립하려면 저의와 선의의 공동선에 봉사하려는 정신을 길러주고 정치 공동체의 성격, 공권의 목적, 그 바른 행사, 그 한계 등에 관한 기본적 신념을 확립해야 한다. 요컨대 공동선은 개인이나 단체로 하여금 질서 있는 협동에 의하여 하느님이 바라는 뜻을 위해서 노력하게 할 수 있는 제도나 상태를 말한다.

공동선의 첫째 특성은 재분배하고 하는 것이다. 공동선은 모든 인간에 재분배되어야 할 것이며 모든 인간의 발전을 조장시켜야 한다. 둘째 특성은 공동선은 정치권력의 기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공동체를 공동선의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그들 가운데 특정한 사람이 그 책임자가 되어야 하며 그 사람이 내린 명령이나 결정은 공동체 구성원이 지키도록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전체의 복지를 목표로 하는 정치권력은 특수선을 위하여 행사하는 독재권력과는 다르다. 셋째 특성은 공동선은 단순히 이익과 효용의 총체일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바른 생활, 즉 대중의 선량하고 공정한 인간적 생활을 증진시켜야 하다.

정치의 목적인 공동선은 국민대중 사이에 덕성의 발전을 요구한다. 정의와 진리를 거스르는 모든 정치행동은 그것 자체가 공동선에 해로운 것이다. 경제적인 면에서 공동선의 요구로 고려되어야 할 것은 최대다수의 노동자가 고용될 것, 불우한 계급이 나타나지 않도록 할 것, 임금과 물가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고 재물과 시설이 국민 다수에 의해서 이용될 것, 산업 간의 불균형이 없을 것, 경제발전과 공공시설의 발전 간에 균형이 취해질 것, 생산방법이 최대한도로 과학화될 것 등이다. 정치적이란 말은 입법 · 사법 · 행정을 통해서 국가를 통치하는 기능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정치라는 것은 복잡하고 다양한 인간관계를 총체적으로 어떤 목표를 지향하도록 조정하는 기능이다. 그렇다면 정치적이라는 것은 목적의식적이고 미래 지향적이고 공동체 이념에 바탕을 둔 행동적인 것이다. 정치적 행동은 인간이 하느님께 소명을 받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인간이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체험할 때 비로소 바른 길이 드러난다. 만일 정치적 행동이 그렇게 실천된다면 그 행동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근본적인 무능을 수긍할 태세, 자기 힘과 지혜만으로 무엇을 건설하려는 고집을 포기할 태세를 갖춰야 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행동은 반드시 이성적 근거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

정치체제가 어떠하든지 정치적 권위 즉 지도하고 명령하는 권리는 인민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러나 인민은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정치권력의 원천도 하느님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정치란 인민을 위한 정치다. 정치제도와 사회제도가 그리스도 교인의 목적자체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어는 특정 정치제도가 필연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느님은 어떠한 정치형태도 정해주지 않았다. 이러한 부수적인 것은 오랜 관습에 의해서 결정된다. 교회는 어떠한 정치제도가 가장 합당한 것인지를 정할 수 없다. 교회는 정부의 기구나 법률을 결정함에 있어서 그 정치사회의 역사적 상황을 참작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가 삼권분립을 취하는 것은 인간본성에 합당하다. 그 이유는 이러한 정부형태에서는 국민들이 자기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용이하게 한다. 정치권력자들이 자기의 권리를 타인에게 양도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러나 그리스도적 사랑의 정신으로는 이것이 가능하다. 교회는 정의와 진리를 존중하면서 정당을 만드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교회가 정쟁에 휘말려 들거나 교회의 지지에 의해서 자기 정당의 승리를 가져오려고 하는 것은 종교의 남용이다.

세계관적으로 다원적인 현대사회에 있어서 교회는 때때로 신앙과 윤리의 수호자로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정당의 강령에도 직면할 것이다. 이럴 경우는 예언적인 판단으로 이를 비난 · 배격할 수 있다. 과거에 있어서 그리스도 교인은 정치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거나 외면하는 것이 바람직한 수덕으로 생각되었다. 그것은 교회는 완전사회이며 선을 독점하고 있는 반면 정치사회는 불완전 사회로서 대립과 투쟁만이 지배하는 악의 사회라는 성속 이원론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는 인류의 구원과 인권에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윤리적 판단을 내려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하였다(사목헌장 76).

교회는 모든 정치체제에 대해서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날 때 비판할 능력을 행사할 것이며 하느님의 종말론적 단서를 붙여야 한다. 분명히 그리스도교의 신앙자체는 상세한 정치적 강령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는 정치적 분야에서의 자신의 예언자적 사명과 특유한 성격 미 주체성을 의식하고 인간실존의 모든 국면에 새로운 빛을 던짐으로써 정치적 세계에서 적극성을 띠고 매일 매일 이 세계의 사건에 개입하여 자신을 이 세계와 동일시하거나 혼돈하는 일없이 인류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자들 중에서 직업적으로 정치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활동의 복음적 의미를 명백히 하고 오늘날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정치는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해야 하는 그리스도 교인의 중대한 의무를 실천함에 있어서 어떤 요구들을 내세우는 하나의 방법이지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교회의 정치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폭력의 배제이다. 아무리 정치와 교회가 분리하여 독자적으로 공존한다 하더라도 교회는 정치적 폭력에 대해서는 강력히 비난한다. 그것은 폭력은 그리스도교적인 것도 복음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교인은 평화적이다. 그러나 폭력과 싸울 수 있기 때문에 단순한 평화주의자는 아니다. 다시 말하여 비폭력은 피동이 아니다. 교회는 정치를 비신성화하고 정치권력을 민주화하고 억압된 자의 편에 섬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게 된다. (⇒) 권력 (韓庸熙)

[참고문헌] 한용희, 가톨릭 정치윤리, 분도출판사, 1980 / 사목헌장, 제2부 4장 / 사회정의, 가톨릭출판사, 1976 / H.J. Laski, A Introduction to politics,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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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염 [한] 鄭鐵艶

정철염(1817∼1846).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가타리나. 경기도 수원(水原)의 교우가정에서 태어났다. 성장해서 포천의 김씨 성을 가진 한 양반집에 하인으로 들어갔는데 이 때 주인 가족의 한 사람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20세 되던 해 동짓날 주인으로부터 미신적인 동짓날 행사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 주인에게 혹독한 매를 맞았고 이듬해 봄에 다시 그런 사태가 일어나서 서울로 피신하여 교우들 집에 몸붙여 살았다. 그 후 1845년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가정부로 들어가 신부의 처소를 돌보았고, 이듬해 5월 김 신부가 체포되자 현석문(玄錫文)이 마련한 집에 피신해 있던 중 7월 11일 현석문, 김임이(金任伊), 이간난(李干蘭), 우술임(禹述任)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한결같은 신앙으로 이겨내고 9월 20일 매를 맞아 거의 반죽음이 된 몸으로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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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상 [한] 丁哲祥

정철상(?∼1801). 순교자. 세례명은 가롤로. 정약종(丁若鍾)의 장남. 어려서 모친을 여의고 부친에게 천주교를 배워 부친의 모범을 따라 세속의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20세경인 1801년 신유(辛酉)박해로 부친이 체포되자 감옥 근처에 머무르며 부친을 봉양했고 이해 4월 8일 부친이 순교하자마자 이 날로 곧 체포되어 5월 14일(음 4월 2일) 최필제(崔必悌), 정인혁(鄭仁赫)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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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한] 鄭鎭奭

정진석(1931∼ ). 주교. 제2대 청주(淸州) 교구장. 세례명 니콜라오. 서울 수표동에서 출생. 계성보통학교와 중앙중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서울대 공대 화공과에 입학했으나 6.25동란으로 서울대를 중퇴하고 1954년 성신대학(聖神大學)[현 가톨릭大學]에 입학, 1961년 동(同)대학을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후 중림동본당 보좌신부, 성신중 · 고등학교[소신학교] 교사를 거쳐 1962년 서울대교구 법원 서기, 1964년 한국 천주교중앙협의회 총무, 1965년 서울 대교구장 비서 겸 상서국 부국장, 1966년 상서국장, 1967년 성신중 · 고등학교 부교장 등을 역임한 후 1968년 로마 성 우르바노대학원에 유학, 1970년 동 대학원에서 교회법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했고 귀국하자 곧 공석 중이던 청주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이해 10월 3일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현재 청주교구장으로서 청주교구의 사목과 행정을 총괄하고 있으며 이외에 주교회의 교리주교위원회, 사목주교위원회, 200주년 주교위원회 등의 위원과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담당 주교 및 평신도사도직 전국단체인 한국평신도사도직협의회,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한국레지오마리에 등의 담당주교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와 역서로는 ≪교회법 원사(源史)≫(분도출판사), ≪교계제도사≫(성 바오로출판사, 1974), ≪목동의 노래≫(가톨릭출판사), ≪라디오의 소리≫, ≪라디오의 메아리≫, ≪성년 마리아 고레띠≫(譯), ≪억만인의 신앙≫(가톨릭출판사), ≪칠층산≫(譯, 성바오로출판사), ≪질그릇≫(가톨릭출판사) 등이 있다.

[참고 : 정진석 대주교는 1998년 5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대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현재 서울대교구 교구장으로 사목중이다. 그리고 현재 청주교구 제3대 교구장은 1999년에 착좌한 장봉훈 가브리엘 주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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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한] 鄭芝溶

정지용(1902∼1950). 시인. 세례명 프란치스코. 아명은 池龍.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忠北 沃川郡 沃川面 下桂里)에서 부(父) 정태국(鄭泰國)과 모(母) 정미하(鄭美河)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한 뒤 옥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2세 때인 1913년 송재숙(宋在淑)과 결혼하였다. 1918년 휘문고보(徽文高普)에 진학, 이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이듬해 12월 문학지 <서광>(曙光) 창간호에 소설 <삼인>(三人)을 발표하고 김화산(金華山) · 박팔량(朴八亮) · 박제경(朴濟瓊) 등과 동인지 <요람>(搖籃)을 만들어 사적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1922년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1924년 휘문고보의 장학생으로 일본 교오또(京都)의 도오시샤(同志社)대학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했고, 이 때 영세 · 입교하였다. 1926년 교오또의 유학생 문학지 <학조>(學潮)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 · <슬픈 인상화> · <파충류 동물> 등 모더니즘적인 시를 발표하면서 공적인 문학활동을 시작, 이후 1929년 도오시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의 시 전문지 <근대풍경>(近代風景)에 일어로 된 많은 시들을 발표하여 당시의 일본의 대표적 시인 가따하라(北原白秋)의 호평을 받았다. 1929년 도오시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모교인 휘문고보의 영어교사로 재직하면서 명동본당 청년연합회 회지 <별>의 편집에 참가하여 장면(張勉) · 박준호(朴準鎬) 등과 청년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1930년〈시문학〉(詩文學)의 동인으로 참가하여 활발히 문학활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가톨릭청년>이 창간됨과 동시에 편집고문이 되었고, 창간호에 <해협의 오전 2시>를 발표하고 이후 계속해서 <가톨릭청년>지에 <임종> · <별> · <갈릴레아바다> · <승리자 김 안드레아> 등 많은 종교시들을 발표하였다. 그 뒤 <조광>(朝光), <조선문단>(朝鮮文壇), <삼천리>(三千里) 등 유수한 문학지에 서구(西歐) 모더니즘적인 성향을 탈피한 독특한 동양적 모너니즘의 시들을 발표, 시인으로서 한국문단의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39년 <문장>(文章)지의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趙芝薰) · 박목월(朴木月) · 박두진(朴斗鎭) · 김종한(金鍾漢) · 이한직(李漢稷) · 박남수(朴南洙) 등 유명한 시인들을 배출시켰고, 광복이 되자 휘문고보 교사를 사임하고 이화여전(梨花女專, 이화여대의 전신) 문과과장으로 대학 강단에 서서 라틴어와 한국어를 강의하였다. 1946년 <경향신문>의 창간과 함께 경향신문 주간(主幹)으로 직장을 옮겼다가 이듬해 이화여대에 복직하는 한편 서울대에서 시경(詩經)을 강의하기도 했으나 1948년 대학 강단을 떠나 녹번동의 초당에서 독서와 서예로 소일하였다. 6.25동란 중 북한 정치보위부원에게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이광수(李光洙) · 계광순(桂光淳) 등 납북 인사 33인과 함께 수감되었다가 유엔군의 폭격으로 폭사당하였다.

정지용은 최초의 모더니즘 시인으로, 그리고 그것을 자기 세계 안에 융화시켜 동양적 · 목가적 모더니즘의 세계를 창출한 시인으로서 아울러 가톨리시즘을 추구했던 시인으로 한국문단사에 있어서 최대의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집으로 ≪정지용시집≫(鄭芝溶詩集, 時文學社, 1935), ≪백록담≫(白鹿潭, 文章社, 1941), ≪지용시선≫(芝溶詩選, 乙酉文化社, 1946) 등을 남겼고, 이외에 시론집 ≪지용문학독본≫(芝溶文學讀本, 博文出版社, 1949)과 산문집 ≪산문≫(散文, 同志社, 1949) 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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