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주의 [한] 利己主義 [라] egoismus [영] egoism

이기주의는 철학에서 때로 인식론적 문제로 취급되기도 하지만 주로 윤리학적 문제로 다뤄지고 있다. 인식론적 입장에서 이기주의는 유아론의 영역으로 다루어진다. 윤리학에서는 이기주의를 “개인이 자신에게 불리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무시한 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기주의는 이타주의 및 모든 자연법과 신 중심 체계(theocentric systems)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이기주의는 또한 인간은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쾌락주의와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는 것을 인생의 주요 목표로 삼는 ‘권력에의 의지’ 또는 ‘초인적 존재’와 자아 발전을 유일한 존재 이유로 삼는 ‘완벽주의적 이기주의’(perfectionistic egoism) 등과 공통된 부류에 속한다.

1. 주요 지지자 : 고대의 키레네파와 에피큐리안파 사람들은 쾌락주의적 이기주의자들이었으나 이들은 친절함과 우정과 같은 덕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주의가 논리적으로 수반하게 되는 이기주의를 완화시켰다. 그 뒤 이기주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발전과 함께 사라졌다가 르네상스시대에 이탈리아에서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의 쾌락주의의 형태로 다시 나타났으며 17∼18세기에는 특별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영국의 홉즈는 유물주의와 이에 관련된 윤리학을 옹호했는데, 그에게 있어서 선은 단순히 인간들의 욕구의 대상임에 반하여 악은 그들의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는 인간의 이익과 선천적 성격은 주로 자위적 본능과 개인의 힘의 증대와 쾌락에 달려있다고 보았으며 그에 의하면 전쟁은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상태인데 왜냐하면 만약 같은 것을 여러 사람들이 원한다면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단지 서로를 파괴시키거나 굴복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맨데빌(Mandeville, 1670~1733)도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보다 날카롭고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꿀벌의 우화≫에서 개인적 악이 공동의 이익이 된다고까지 암시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홉즈와 동시대인인 가상디(Gassendi)는 그리스도교 신학에 있어서 쾌락주의가 가장 확고한 기초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쾌락주의의 부활을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실패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독자들이 그 불합리성을 간파하기도 했거니와 그의 사상이 그리스도교 사상의 상부 구조를 경시하는 근본적인 쾌락주의를 받아들이고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상디와 영국 경험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많은 프랑스의 계몽주의 지도자들은 이기주의를 다소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는데, 이들 중에는 엘베시오(C.A. Helvetius, 1715~1771), 메트리(J. Mettrie), 홀바흐(Holbach) 같은 이들이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이기주의는 이타주의에 의해 흡수되거나 근본적으로 새로운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경향을 보였으며 허버트 스펜서는 이기주의와 자비는 둘 다 인간에게 있어서 정상적이고 필요한 현상이며 이들은 진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서로 조화되고 합쳐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 반면에 프리드리히 니체는 노예적 다수를 위해서는 박애와 동정의 그리스도적 윤리가 적당하지만 초인들은 선과 악의 일반적인 개념을 초월하여 어떤 의무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들 자신이 스스로의 가치 기준을 결정한다고 주장하였다. 20세기에는 이기주의를 옹호하는 철학자는 극소수에 불과했으나 문학작품을 통해 이기주의의 개념이 계속 전파되고 있다.

2. 평가 : 이기주의는 다음과 같은 기본진리들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① 인간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②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①의 사실은 더욱 타당한 것으로 된다. ③ 쾌락과 개인의 잠재력의 발전과 힘의 획득은 인간의 정당한 권리이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있어 자기 자신이 그의 유일한 목적임을 주장하는 이기주의는 그 중심에 있어 심각하고 해로운 요소를 안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하느님의 섭리를 유물론적 또는 실증적으로 거부한 데 대한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의 철학으로서 이기주의의 부적당함은 또한 정신건강에 미치는 여파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모든 것을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킴으로써 이기주의자는 사회 및 자기 자신과의 불가피한 모순들과 부딪치게 되어 사랑할 수도 적응할 수도 없게 되며, 결국 좌절되고 불행해지게 된다. 모든 인간은 같은 목적을 갖고 있는데, 이는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며 소유하는 일이다. 인간은 또한 같은 성격과 필요와 권리를 지닌다. 그러므로 적절하고 합리적인 생을 살기 위하여 인간은 인성의 뚜렷한 모순을 확연히 인식해야 하며 자신뿐만 아니라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을 잊을 정도로 열렬히 하느님과 그의 동료를 섬길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C.D. Broad, Certain Features in Moore its Ethical Doctrines, Illinois 1942 / R.A. Tsanoff, The Moral Ideals of Our Civilization, New York 1942 / J. Nuttin, Psycho-analysis and Personality, tr. G. Lamb, New York 1953 / J. Leclercq, Les Grandes lignnes de la philosophie morale, Paris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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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연 [한] 李箕延

이기연(1738∼1801).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 충주(忠州) 출신으로 권일신(權日身)에게 문교(問敎)하여 입교하였다. 충주지방에서 전교하다가 신유박해(辛酉迫害) 초인 1800년말 체포되어 배교를 취소하고 자신이 입교시킨 이부춘(李富春), 이석중(李石中), 며느리 권아기련(權阿只連) 등과 함께 1801년 10월 5일(음 8월 27일) 충주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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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양 [한] 李基讓

이기양(1744∼1802). 문인. 자는 사흥(士興), 호는 복암(伏菴), 본관은 광주(廣州), 덕형(德馨)의 7대손. 1744년 진사시(進士試)에 급제, 영릉참봉(英陵參奉)이 되었고 1784년 이벽(李檗)과 천주교에 대한 토론을 벌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1795년 정시문과 을과(庭試文科乙科)에 급제, 부수찬(副修撰)이 되고 이어 검상(檢詳), 승지(承旨), 의주부윤(義州府尹) 등을 역임한 후 1800년 진하부사(進賀副使)로 청(淸)에 갔다가 다시 천주교 교리를 접하게 되었다. 귀국 후 이가환(李家煥) 등 신서파(信西派)와 교유하며 서학(西學)을 강론하고 실학(實學)을 토대로 한 사회개혁을 주장하였다. 병조참판(兵曹參判), 우승지(右承旨),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1801년 대사간(大司諫), 예조참판(禮曹參判),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고 이해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천주교인으로 고발되어 함경도 단천(端川)으로 유배되어 이듬해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 사후(死後) 신원(伸寃), 복관(復官)되었다. 저서로 ≪복암유고≫(伏菴遺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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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론 [한] 理氣論 [관련] 성리학

⇒ 성리학(性理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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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경 [한] 李基慶

이기경(1756~1819). 문신, 천주교 박해자, 자는 휴길(休吉), 호는 척암(瘠菴). 본관은 전주(全州). 지평 제현(齊顯)의 아들. 1777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789년 식년문과 을과(式年文科乙科)에 급제, 승문원(承文院) · 강제문신(講製文臣)을 거쳐 감찰(監察) ·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지냈다. 이승훈(李承薰)과 동문수학했던 관계로 1784년 이승훈이 북경(北京)에서 세례를 받고 온 뒤 많은 서학서(西學書)를 빌어 보고 천주교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나 곧 공서파(攻西派)에 가담하여 천주교를 배격하였고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홍낙안(洪樂安)과 친(親)신서파인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을 공격하다가 오히려 함경도 경원(慶源)에 유배되었다. 1794년 유배에서 풀려나 이듬해 지평(持平)에 복직, 그 뒤 병조정랑(兵曹正郞), 정언(正言),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지낸 뒤 1802년 대왕대비 김씨(大王大妃金氏, 貞純王后)의 수렴청정을 반대하다가 다시 함경도 단천(端川)에 유배되었고 이듬해 풀려났으나 이남규(李南圭)의 탄핵으로 다시 경상도 운산(雲山)으로 유배되어, 1809년 풀려나왔다. 저서로는 그의 후손(後孫)들에 의해 편찬이 완료된 ≪벽위편≫(闢衛篇)이 있는데 이는 정조(正祖) · 순조(純祖) 때의 박해와 교회사(敎會史)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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