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티나 [원] Palestina

요르단과 이스라엘 두 나라에 걸쳐 있는 지방으로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의 동해안 일대 약 2만 6,300㎢의 지역을 가리킨다. 동쪽은 요르단강, 남서쪽은 시나이 반도, 북쪽은 레바논, 북동쪽은 시리아에 접하고 있다. 지중해안을 따라 좁고 긴 평야가 펼쳐지고, 동쪽으로 갈수록 지대가 높아져 중앙은 구릉지대가 된다. 이 지역의 동쪽은 급한 계곡을 이루며 그 계곡을 요르단강이 흐르고 있다. 남쪽은 네게브라고 부르는 사막지대이다.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로서 비는 적게 온다. 현재 이 지역의 80%는 이스라엘 영토가 되어있다.

팔레스티나는 유태인이 살았던 지역 전체에 적용되고, 또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가나안은 이스라엘 나라였다. 그리스도교의 처음 3세기의 역사는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이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킨 곳이기에 팔레스티나는 역사상으로도 특수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향토로서,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비롯된 정신적 세력은 이스라엘의 후예인 유태인에 의해서,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의해서 오늘날까지 전세계 속에 생동(生動)하며, 유태교와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팔레스티나는 ‘성지’(聖地)인 것이다. 또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유태교와 그리스도교로부터 성스러운 인물과 가르침을 그 종교에 끌어들인 결과, 성지 예루살렘은 이슬람교에 있어서도 성지가 되었다.

그러므로 팔레스티나는 이탈리아를 제외하고는 지구상의 다른 어떠한 곳보다도 종교적인 순례의 목적지이며 유태교 · 그리스도교 · 이슬람교 신자 모두가 방문을 동경하는 성지인 것이다. 팔레스티나라는 명칭은 펠레세트(Peleset, 서남쪽의 해안평지라는 뜻)에서 온 말이다. 기원전 450년경 이 명칭을 쓴 역사가 헤로도투스 이래로, 이 이름은 대체로 유태인이 사는 전 지역에 적용되었지만 구약성서에서는 가나안이나 이스라엘국으로 불렀다. 지리적으로 팔레스티나는 3대륙의 교차점을 이루고, 옛날에는 서로 다투던 대국(大國)간의 완충국가이기도 하였다. 몇 천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강대한 민족들의 대상(隊商), 서남 아시아의 패권을 다툰 세계 정복자의 군대가 이곳을 지나갔다. 이집트인과 로마인, 비잔틴인과 페르시아인, 십자군 정복자와 터키인들이 이 땅을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로 만들었다.

이 전쟁들은 그 때마다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새 시대를 이루게 하였다. 더구나 이스라엘의 유대 산지(山地)에 있는 좁은 지역은 인접 국가들에 대하여 어느 정도 독립을 지키고, 지중해 연안 민족들의 교통로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들 고유의 종교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였다. 그래서 팔레스티나는 하느님이 보내 주신 그리스도의 강생지(降生地)로서 또 그리스도교의 발상지로서 가장 적합했던 곳이다. 나일강과 유프라테스강변(江邊)의 거대한 나라에 비하면 왜소한 나라요, 서남 아시아 민족들 중에 아주 작은 부분이자만 구세사상(救世史上)에 갖는 중요성에서는 실로 지구의 ‘중심’이다.

성지요 약속의 땅인 팔레스티나는 이미 구약성서에서부터 아브라함과 그 자손인 이스라엘인에게 약속된 땅이며 하느님이 계시한 특별한 땅이다. 예수와 마리아, 사도들이 태어난 땅이요 고난을 겪은 땅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적인 고대 팔레스티나는 인류의 거의 반수에 속하는 일신론적(一神論的) 3대 종교인 유태교, 그리스도교 및 이슬람교의 고향이다. 그래서 이 땅은 국제적 이해관계와 격렬한 종교 투쟁의 초점이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최초의 포교에 관해서는 사도행전에 잘 서술되어 있다.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2:14과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1:22에 유대의 신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4세기까지 그리스도교는 이곳에서 아무런 중요성도 얻지 못하였다. 베스타시아누스 및 하드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로마인이 유태인과의 사이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투쟁은, 이 땅이 아직 유태교적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예수와 마찬가지로 그의 제자들도 박해를 당하여 국외로 쫓겨났다. 성 베드로가 팔레스티나를 떠나 로마에 가 전교를 시작함으로써 팔레스티나는 그리스도교의 성장에 대한 그 사명을 마쳤다. 그리스도교의 발상지였음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티나 전체가 그리스도교적으로 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유태인과 그리스도교 신자 및 이교도 간의 끊임없는 투쟁은 성지의 쇠퇴와 고립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6세기라는 긴 세월에 걸쳐 그리스도교 성지들을 신자를 위하여 모범적으로 지켜온 것은 프란치스코회의 큰 공적이었다.

3대 일신교의 복합적인 종교적 ‘숙명’을 배경으로 636년 이슬람교로 뭉쳐진 아랍인들이 로마를 격파한 이후 팔레스티나는 오스만터키 시대(1516∼1917년)를 포함하여 이슬람교의 세력하에 있었다. 그 동안에도 12세기에 제1차 십자군(十字軍)이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하여 일시 그리스도교 세력이 이 지역까지 떨친 적도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티나는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는데 이 지역의 처리문제를 두고 영국이 모순된 정책을 취함으로써 아랍과 유태인 간에 심한 대립을 빚게 되었다. 유태인들은 강력한 시오니즘을 바탕으로 삼아 유태인의 팔레스티나 이주(移住)와 국가 수립을 위한 준비를 실력으로 추진하여 1948년에는 이스라엘국을 건국하였다. 팔레스티나 전쟁과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결과 요르단과 이집트령(領)이었던 요르단강 서쪽 연안 지역과 가자지구도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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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트리나 [원] Palestrina, Giovani Pierluigi da

Palestrina, Giovani Pierluigi da(1526?∼1594). 이탈리아의 가톨릭 교회음악 작곡가. 로마악파의 거두. 팔레스트리나 태생. 고향 성당의 성가대장 겸 오르간 주자가 되고, 1551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내의 카펠라 율리아의 소년 성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554년 교황 율리오 3세에게 미사곡집을 바친 것이 인연이 되어 이듬해 교황청 악부 성가대원으로 임명, 그러나 1555년 교황 바오로 4세(재위 : 1555∼1559)에 의해 결혼했다는 이유로 지위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곧 라테란 성당 성가대장으로 취임, 1561년 산타마리아 마조레 성당의 성가대장이 되었다. 1571년 카펠라 율리아의 성가대장으로 임명되는 동시에 ‘교황청 악부 전속작곡가’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았다. 1589년 상처를 하자, 이듬해 부유한 과부와 재혼, 그 재산으로 자기 작품을 속속 출판하였다. 그가 죽을 때까지 출판한 곡은 미사곡을 포함한 320곡이었다. 그가 늑막염으로 죽자 무덤이 성 베드로 대성당 내에 마련되었다.

그의 작품 스타일은, 초기의 것에는 네덜란드 악파적인 기교적 다성곡(多聲曲)이 많지만, 후기에 가까워지면서 그 기교는 간소화되고 동음음악적인 처리가 눈에 띄기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관능적인 반음계적 진행이나 자극적인 선율의 비약은 가급적 피하고, 불협화음마저 최소한도로 제한해서 종교적 청순성을 유지했으며, 곡보다도 가사에 생동감을 불어넣으려고 힘썼다. 이것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논의된 교회음악 본연의 자세에 합치되어 있고, 로마악파의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도 이 스타일은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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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구본당 [한] 八道溝本堂

1910년 만주 간도성 연길현 팔도구시(間島省 延吉縣 八道溝市)에 창설되어 1946년 폐쇄된 연길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모성심. 팔도구본당은 1910년 간도에서 세 번째로 창설된 본당으로 창설 당시의 명칭은 조양하(朝陽河)본당이었다. 1903년 용정(龍井)에서 12가구의 교우들이 이주해 와 교우촌을 건설, 원산본당 브레(Bret, 白) 신부의 방문을 받다가 1910년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순방 때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임으로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가 부임, 1916년 길이 92척, 너비 30척, 높이 24척, 종각높이 45척의 성당을 완공하고 1918년 4년제 조양학교(朝陽學校)[후에 海星學校로 바뀜]를 개설했다. 1919년 마적의 습격으로 본당 주임 최문식 신부와 10여명의 교우가 납치되자 황해도 사리원본당 주임이던 백남희(白南熙, 베드로) 신부가 이듬해 2월 최문식 신부가 풀려날 때까지 사목했고, 1920년 함경도와 간도지방이 오틸리엔 베네딕토회의 포교지가 됨에 따라 1921년 2대 주임 퀴겔겐(C. Kugelgen, 具) 신부와 보좌 브레허(T. Breher, 白) 신부가 부임하였다. 1922년 10여 개의 공소에 해성학교 분교가 개설되었고, 1923년 퀴겔겐 신부가 육도포본당으로 전임되자 시미트(C. Schmid, 金) 신부가 3대 주임신부로 1년 동안 사목했으며, 이어 에카르트(A. Eckardt, 玉) 신부가 4대 주임으로 1923년까지,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5대 주임으로 1925년부터 1933년까지 각각 사목하였다. 1933년 트라볼트(A. Trabold, 張) 신부가 6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1933년 학교강당을 신축하고 1937년 올리베타노 베네딕토수녀회 분원을 설치, 본당 발전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1946년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이 성당을 포함한 모든 교회재산을 몰수함으로써 본당은 폐쇄되고 이후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본당 내에는 10여개의 신심단체가 있었고 이외에 해성학교, 교리학교, 시약소 등의 사업체가 있었다. 1936년의 교세는 교우수 2,284명, 공소 11개소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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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토하 [원] Pantoja, Didace de

Pantoja, Didace de(1571∼1618).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신부. 중국명은 방적아(龐迪我), 자(字)는 순양(順陽). 1589년 예수회에 입회하여 1596년 공부를 마치고 선교사를 자원, 일본으로 배속되었으나 일본에서 박해가 일어나 포교지가 중국으로 바뀌어 1599년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1600년 리치(Matteo Ricci, 李瑪竇)를 따라 북경(北京)에 가서 전교하는 한편 명(明) 황실의 요청에 의해 천문역산서(天文歷算書)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1610년 리치가 사망한 후로는 우르시스(Ursis, Sabbatinus de, 熊三拔)와 함께 편찬 책임자가 되었다. 1616년 남경에서 박해가 일어나 그 여파가 북경에까지 미치자 마카오로 피신, 2년 뒤 마카오에서 사망하였다. 저서로 ≪칠극≫(七克, 7권, 1614 北京 初版, 1643 · 1778 重刊), ≪인류원시≫(人類原始), ≪천신마귀설≫(天神魔鬼說), ≪수난시말≫(受難始末), ≪방자유전≫(龐子遺銓, 2권), ≪변게≫(辯揭, 1616), ≪야소고난도문≫(耶蘇苦難禱文)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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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관기 [한] 判官記 [라] Liber Judicum [영] Book of Judges

구약성서에서 여호수아로부터 사무엘시대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책. 구약성서에서 7번째에 위치한다. 이 판관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각 부족들에 의한 가나안 정복에서 시작하여 엘리야, 사무엘 시대까지, 즉 기원전 12∼11세기에 걸친 역사 사건들을 토대로 삼고 있다. 저자의 목적은 하느님의 섭리, 즉 배신행위는 항상 처벌되고, 하느님에 대한 충실은 항상 보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특히 강조하는 데 있었다. 판관이란 이 시기에 이스라엘의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준 사람들을 말한다. 원래 히브리어의 판관이란 말에는 ‘구원자’란 뜻이 있었던 것 같다. 즉, 백성을 외적(外敵)으로부터 구해주는 사람이다. 나중에는 더 나아가 사람들은 판관에게 판결을 의뢰했고, 그를 일종의 집정관(執政官)으로 받들고(판관 4:5), 헬리(Heli)(1사무 4:18) 및 사무엘과 그 아들들(1사무 7:8 이하)을 판관의 반열에 넣었다. 그러나 개개의 종족은 아직 전혀 통일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이스라엘 전체의 대표자들로 간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판관기는 내용에서 크게 3부로 나누어진다. 첫머리 부분(1:1, 3:6)은 여호수아기(記)와 깊은 관계가 있으며, 여호수아시대가 목표로 삼았던 가나안의 완전 정복이 아직도 달성되지 않은 까닭을 천명한다. 즉 이스라엘은 야훼를 아주 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야훼는 이교 민족,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이 자신의 정화(淨化)를 위해 그 후 오랫동안 생활을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민족, 즉 가나안인을 비롯한 가지각색의 인접민족을 통해서 이스라엘인을 처벌하였다. 둘째 주요 부분(3:7, 16:31)을 이루는 것은 이스라엘인과 이들 인접민족과의 투쟁이다. 이 투쟁은 6명의 대(大)판관과 6명의 소(小)판관, 도합 12명의 판관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글 12편의 각 판관들의 이야기는 일정한 의도적 계획에 입각해서 서술되어 있다. 즉, 이스라엘인들이 악(惡)을 행하면 야훼는 그들을 억압하기 위해 그들의 적을 보낸다. 그들은 야훼에게 갈구한다. 야훼는 구원자가 될 판관을 보내고, 판관은 적을 쳐부수어 평화를 회복한다. 이 예언자적으로 고안된 플랜은 제1화인 판관 오드니엘(Othoniel)(3:7-11)에서 가장 눈에 띄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눈에 띄지 않게 된다. 그 대신 그 다음의 이야기들이 훨씬 생기 있고 힘찬 느낌을 준다. 아비멜렉(Abimelech)의 이야기(9장)는 이 부분의 원줄거리에서 벗어난다. 또한 셋째 부분의 끝부분(17-21)도 역시 원줄거리와는 다르며, 이스라엘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한 두 가지 추가, 즉 단족(族)의 이동과 베냐민족에 대한 조치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둘째 부분과 셋째 부분의 이야기는 편자(編者)가 원래 있던 것을 정리해서 실은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편자는 판관 오드니엘에서는 본이 될 만한 서술법을 안출하고 그 밖의 판관들 이야기는 그것에 준해서 안배(按配)하였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에 전체 이야기 앞에다 서문(序文)을 배치하였다. 이 서문은 그와 동시에 본문 안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불명예스러운 역할을 하고 있는 유다민족을 위한 변명이 되고 있다. 이 책은 다윗의 최초의 치세(治世) 때 제작된 것이며, 그 권력의 영향권이 아직도 남방에 한정되어 있을 무렵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 판관기에는 후에 다소간 가필(加筆)되었다. 그리고 텍스트 중 약간부분이 훼손되어 있다(70인역 성서는 그 부분을 수복하는 데 공적이 있다). 판관기의 의의는 사실적(史實的) 면보다 오히려 종교적 면에 있으며, 이교민족은 야훼의 손에 의해 이스라엘인들을 징계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모든 점에서 하느님의 지배에 대한 확신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어, 이것이 이 책에 불후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원래 사사기(士師記)라 했으나 1970년대에 성서의 공동번역과정에서 그 명칭을 ‘판관기’로 고쳐 부를 것을 확정하였다.

[참고문헌] O. Eissfeldt, Die Quellen des Richterbuches, 1925 / K. Wiese, Zur Literarkritik des Buches der Richter, 1926 / A. Vincent, Le Livre des Judge, Paris 1952 / J. Bright, A History of Israel, Philadelphia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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