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1757∼1801). 순교자. 경기도 포천(抱川) 출신. 홍교만(洪敎萬)의 아들. 아버지에게 교리를 설명하고 권고하여 함께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1800년 12월 박해를 피해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피신하였다가 그 이듬해 2월 14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체포되었다. 아버지는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나, 그는 포천으로 이송되어 그 뒤 10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802년 1월 30일(음 1801년 12월27일) 44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홍익만 [한] 洪翼萬
홍익만(?∼1802). 순교자, 세례명은 안토니오. 서울의 양반 출신으로 유업(儒業)을 닦다가 1785년 김범우(金範禹, 토마스)로부터 ≪천주실의≫(天主實義)를 빌어 읽은 뒤, 정약종(丁若鍾), 이승훈(李承薰), 황사영(黃嗣永) 등에게 교리를 배워 영세, 입교하였고, 그 뒤 자신의 집이 귀양간 왕족 은언군(恩彦君) 이인(李裀)의 폐궁과 붙어 있는 것을 이용하여 강완숙(姜完淑)과 함께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이인의 처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에게 소개, 입교시켰다.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자 여주(驪州), 이천(利川) 등지로 피신해 다녔으나 체포되어 1802년 1월 29일(음 1801년 12월 26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斬首)형으로 순교하였다.
홍의호 [한] 洪義浩
홍의호(1758∼1826). 문신. 천주교 박해자. 자는 양중(養中), 호는 담녕(擔寧), 본관은 풍산(豊山),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수보(秀輔)의 아들. 1784년 정시문과 병과(庭試文科丙科)에 급제,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고 지평(持平), 집의(執義), 응교(應敎), 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거쳐 호조 · 예조 · 공조의 참판(參判)을 역임하였고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자 목만중(睦萬中)과 함께 남인(南人)의 공서파(攻西派)의 영수로서 남인 신서파(信西派)와 천주교인들을 탄압하였다. 그 뒤 1803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淸)에 다녀와서 대사간, 동지장연사, 의주부윤(義州府尹), 강화유수(江華留守), 우참찬(右參贊) 등을 역임하고 예조와 공조의 판서를 지냈다. 1814년 형조판서로 금주령을 반대하다가 삭직(削職)되었으나 1818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복직되었고 1823년 동지사(冬至使)로 다시 청에 다녀온 뒤 1825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정헌(正憲). 저서로는 ≪청구시지≫(靑丘詩誌), ≪담녕집≫(澹寧集) 등이 있다.
홍의주교 [한] 紅衣主敎 [관련] 추기경
추기경의 별칭.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들이 지위에 따라 색깔이 다른 수단을 입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즉 일반사제는 검은색 수단을, 주교는 자색을, 추기경은 적색을, 교황은 백색을 입는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에서는 적색의 수단을 입는 추기경을 한때 ‘홍의주교’로 일컬었다. (⇒) 추기경
홍유한 [한] 洪儒漢
홍유한(1726∼1785). 명문가(名門家)에서 태어난 그는 8,9세 떼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과 백가제서(百家諸書)에 통달하여 신동이라는 평을 들었다. 1742년 16세 때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1751년 이익이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 등 서학을 연구할 때, 그는 누구보다도 예리한 관찰력과 명민한 이지력(理智力)으로 대철리(大哲理)를 먼저 발견하였다. 그는 유학(儒學)과 불경(佛經)에서 찾아볼 수 없는 오묘한 진리를 깨달아 솔선실천할 것을 가슴 깊이 품고 1757년부터 고향인 예산(禮山)으로 내려가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스스로 터득한 신앙생활을 영위했으나, 이곳도 여러 가지 번거로움이 많아 1775년에 더 조용한 곳을 찾아 경상도 소백산(小白山) 밑 구들미[九皐里, 현재는 九邱里]로 옮겨 칠극에서 터득한 덕행을 쌓기 위해 7일마다 하루를 축일(주일)로 정하여 속세일을 전폐하고 기도와 묵상으로 하루를 거룩히 지내는 동시, 육욕을 금하여 30세 이후는 정절의 덕을 실천하였다. 그는 자비심과 정의감이 투철하면서도 희비애락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는 위엄이 있었다. 본시 기질이나 신체가 강건한 편이었던 그는 지나친 고행과 절식으로 점차 몸이 쇠약해졌으나 오로지 기도와 묵상으로 만년(晩年)을 보내다가 1785년 1월 30일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천주의 존재를 굳게 믿고 계명을 지키며 덕행을 닦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 당시 사정으로 미루어 그는 수세(水洗)를 받지 못하고 필경 화세(火洗)를 받았을 것으로 믿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