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교구 소속 본당. 현재 충북 제천시 남천동 157에 소재한 남천동 본당으로서 본당 주보는 예수 성심이다. 1940년 7월 춘천지목구 소속 용소막본당(龍召幕本堂)에서 분리, 설립되어 서울교구에 속하게 되었다. 초대(1940∼1942년) 주임신부로 박일규(朴一圭, 안드레아) 신부가 부임하여 한옥을 구입, 성당으로 사용하다가 1942년 읍부리 373번지로 이전하였고, 3대(1943∼1953년) 봉희만(奉喜萬, 안토니오) 신부 재임시인 1943년에는 천혜원[고아원]을 설립하였다. 1947년에는 남천동(南泉洞)에 성당을 신축, 이전하였고, 다시 6대(1956∼1959년) 메리놀회 소속 커피(John F. Coffey) 신부 재임시인 1956년 6월 지금의 성당을 신축하였다. 제천본당은 1958년 6월 23일 청주대목구의 설정으로 이에 편입되었고, 다시 1965년 3월 22일 원주교구의 설정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1964년에는 제천읍 내에 의림동본당이 신설됨에 따라 본당 명칭을 남천동본당으로 개칭하였다. 1970년 3월 13일 본당 관내에 성모유치원을 설립하는 한편 1974년 8월 23일에는 유치원과 수녀원 건물의 축성식을 가졌다. 1980년 8월 3일 서부동본당의 신설로 관할공소 가운데 금성공소를 제외한 장평 · 배론 · 원박공소를 이관하였는데 당시 신자수는 1,953명이었다(서부동본당은 신자수 1,427명, 공소수 7개). 1982년 6월 18일에는 본당 교육관을 축성식을 가졌고, 1983년 4월 3일에는 본당 월보 <솔산가족>을 창간하였다. 1984년 현재 주임신부는 13대(1983∼) 이병돈(李丙敦, 보스코) 신부로서 1,775명의 신자와 2개 공소를 관할하고 있는데, 역대 주임신부는 다음과 같다. 2대(1942∼1943년) 윤예원(尹禮源, 토마스) 신부, 3대 봉희만 신부, 4대(1953∼1955년) 윌시(John Walsh) 신부, 5대(1955∼1956년) 하이스(John Heisse) 신부, 6대 커피 신부, 7대(1960∼1968년) 레이(James Ray) 신부, 8대(1968∼1971년) 양대석(梁大錫, 알로이시오) 신부, 9대(1971∼1973년) 이학근(李學根, 베네딕토) 신부, 10대(1973∼1976년) 안승길(安承吉, 로벨토) 신부, 11대(1976∼1981년) 노세현(盧世賢, 마티아) 신부, 12대(1981∼1983년) 이규영(李揆榮, 마르코) 신부.
제주중앙본당 [한] 濟州中央本堂 [관련] 제주본당
제주교구 주교좌본당. 원 명칭은 제주본당이었으나 1969년 제주중앙본당으로 바뀌었다. ⇒ 제주본당
제주본당 [한] 濟州本堂
1889년 제주읍(현 제주시)에 창설된 본당. 현재의 명칭은 제주중앙본당이며 제주교구 주교좌본당. 주보는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제주도는 1856년 베드로 펠릭스라는 한 사공에 의해 처음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베드로 펠릭스는 풍랑으로 표류하던 중 구조되어 홍콩에서 한국인 신학생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후 고향인 제주도에 돌아와 친척과 이웃을 중심으로 전교, 곧 교우공동체를 만들었다. 이 공동체는 1866년 병인(丙寅)박해로 산산이 흩어지게 되었으나 그 후로 다시 교우들이 생기기 시작하여 1899년 페이네(C. Peynet, 裵嘉錄) 신부와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제주읍에 부임, 제주본당을 창설하게 되었다. 1909년 페이네 신부가 전임되고, 후임에 라크루(Lacrouts, 具瑪瑟) 신부가 부임하여 성당을 마련했고, 이어 이듬해에는 서홍리(西烘里)본당[서귀포본당의 전신]이 신설되어 무세(G. Mousset, 文濟萬) 신부와 김원영 신부가 그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1901년 제주도 교난사건으로 성당이 파괴되고 대부분의 교우가 학살당하는 등 본당은 폐허가 되었으나 라크루 신부의 노력으로 재건되었고, 1909년에는 신성(晨星)학교를 개설, 교육사업을 전개하였다. 1915년 본당의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라크루 신부가 전임하고 후임으로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가 부임했으나 김 신부도 이듬해에 전임되어 제주본당은 목포본당에서 관리하게 되었고, 1924년 이필경(李弼景, 안드레아) 신부가 부임하면서 본당으로 재출발하였다. 1926년 최덕홍(崔德弘, 요한) 신부가 부임, 1930년 건평 130여평의 성당을 신축했고, 1933년 에이레의 성 골룸바노 외방선교회가 한국에 진출하여 제주도와 전라남도 지방을 관할하게 되자 이후 골룸바노회 신부들이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 후 일제말기 교회탄압과 6.25동란으로 본당 발전은 잠시 정체되었으나 6.25동란 직후부터 다시 발전하기 시작, 성당이 증축되었고, 1955년 샤르트르 성 바오로수녀회 분원이 설치되었으며, 1969년 현재의 성당이 신축됨과 동시에 본당명이 제주중앙본당으로 바뀌었다. 1971년 제주도가 지목구로 설정되고 전(前)광주교구장 헨리(Henry, 玄海) 대주교가 초대 지목구장에 임명되자 주교좌본당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3년말 현재 교세는 교우수 3,638명, 공소 3개소이며, 카리타스수녀회 분원이 설치되어 본당사목을 돕고 있다.
제주교난 [한] 濟州敎難
1901년(광무 5년)에 일어난 천주교인과 제주도민 사이의 충돌사건으로 대표적인 교안(敎案)의 하나이며 ‘신축교난’(辛丑敎難)이라고도 한다.
제주도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시기는 1856년 무렵이지만, 본격적인 전도는 페이네(Peynet, 裵) 신부와 김원영(金元永) 신부가 파견된 1899년부터 이루어졌다. 1년 뒤 페이네 신부가 전임되면서 라크루(Lacrouts, 具) 신부가 부임하였고, 곧 이어 김원영 신부의 후임으로 무세(Mousset, 文) 신부도 부임하였다. 이러하여 선교사 파견 2년 뒤인 1901년에는 교우 242명, 예비교우 700여명으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이 때 강봉헌(姜鳳憲)이란 사람이 제주도 봉세관으로 파견되어 온갖 잡세를 거둬들임으로써 도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그런데 잡세를 거둬들인 마름[舍音]이나 잡색(雜色)들 가운데 교우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원성이 천주교에도 미치게 되었다. 게다가 교회는 매입한 목장과 공유지로 있던 신목(神木)을 베어 내거나 신당(神堂)을 헐어 버림으로써 토착신앙이 뿌리깊이 박혀 있던 도민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이러한 도민들의 원성과 반감을 이용, 대정군수 채구석(蔡龜錫)과 유림(儒林)의 좌수 오대현(吳大鉉)은 일본상인들과 결탁하여 상무사(商務社)란 비밀결사를 조직, 봉세관과 교회에 대항하려 하였다. 이 중 오대현은 강우백, 이재수 등과 함께 도민들을 규합하고, 일본인들로부터 입수한 무기로 무장하여 1901년 5월 봉세관이 있는 제주읍을 공격하였다. 이들은 제주읍을 공격하는 한편 교우들을 학살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라크루 신부는 교우들을 이끌고 제주읍을 방어하면서 중국 상해로 사람을 보내어 프랑스함대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5월 28일 제주성은 도민들에게 함락되었고, 교우 500여명이 처형당하였다. 6월 1일 프랑스군함의 도착으로 소요가 가라앉았고 뒤이어 정부에 파견한 강화진위대에 의해 사태가 수습되었다. 봉세관 강봉헌, 대정군수 채구석, 오대현, 강우백, 이재수 등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제주교난은 막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은 교우 700여명, 도민 200여명 등 총 900여명이었다. 제주교난 사건은 재판과정에서 오대현, 강우백, 이재수의 사형으로 끝이 났지만, 교회에 대한 배상금문제, 희생자 매장지문제 등으로 오래 지연되었고, 희생자의 매장지가 황사평(黃沙坪)으로 결정되면서 매듭지어졌다.
제주교난의 원인은 ① 해체기에 이른 봉건사회에서 지배계급에 대한 백성들의 항쟁이 천주교신자와의 항쟁으로 발전되었다는 점, ②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한반도를 배타적으로 독점하기 위해 프랑스인들을 구축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점, ③ 신부의 특권을 이용하려는 일부 신자들이 신부의 특권을 미끼로 민간에 많은 행패를 부려 도민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는 점, ④ 토착민의 문화를 무시하고 신목과 신당을 없앰으로써 토착문화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는 점 등이 지적될 수 있다.
제주교구 [한] 濟州敎區
제주도 전역을 관할하는 교구. 주교좌 본당은 제주 중앙본당이며, 현 교구장은 김창렬(金昌烈, 바오로) 주교. 1971년 6월 28일 지목구로 설정된 뒤 1977년 3월 21일 정식교구로 승격되었다. 제주도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해진 것은 1858년 베드로 펠릭스라는 한 사공에 의해서였다. 그는 1856년 폭풍으로 중국 광동(廣東)에까지 표류하던 중 영국배에 구조되어 홍콩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한국인 신학생을 만나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1858년 제주도에 돌아와 가족, 친족, 친구 등 20여명을 입교시키고 집단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로 이 교우집단은 없어지게 되었고, 그 뒤 1899년 페이네(Peynet, 裵嘉錄) 신부가 파견되어 제주도읍 대조동과 서귀포 한논[大畓]에 본당을 창설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제주도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1900년 라크루(Lacrouts, 具瑪瑟) 신부가 부임하여 전교에 힘쓴 결과 1901년 제주교난이 일어나기 전까지 교우수 242명, 예비자 700여명으로 발전했으나 이러한 비약적인 발전은 자연 제주도민과 마찰을 낳게 되어 결국 1901년 5월 제주교난이 일어나 700여명의 교우가 학살당하는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피해 속에서도 라크루 신부,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는 제주지역의 교회 재건을 위해 열심히 노력, 본당들을 재정비하고 1909년 제주읍내에 신성여학교(晨星女學校)[신성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전개하였다. 1915년 신부수의 부족으로 두 신부가 제주도를 떠나게 되자 제주지역은 목포본당 관할 공소로 격하되었다가 1924년 이필경(李弼景, 안드레아) 신부가 부임함으로써 다시 본당으로 재출발하게 되었고, 1933년부터는 전남지역에 진출한 아일랜드의 성 골룸바노회 선교사들이 부임하여 사목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1937년 광주 지목구의 설정과 함께 대구교구에서 광주지목구로 편입되어 전교에 활기를 띠게 되었으나 광복 후 1948년 공산주의자들의 제주반란산건, 6.25전쟁 등으로 다시 정체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1950년 광주교구장에 임명된 헨리(Henry, 玄海) 주교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1952년 신창본당, 1954년 한림(翰林)본당, 1958년 모슬포본당이 창설되고 이어 1961년 한림 금악면에 농촌소득증대를 위한 이시도로목장이 설립되어 개척농가 조성사업이 전개되었다. 1968년 동문본당, 1970년 광양본당이 창설되는 한편 1959년 순교복자 성직수도회, 1960년 성 골룸바노수녀회, 1978년 성체회 등이 제주도에 진출하게 되었다.
1971년 6월 21일 광주교구에서 분리되어 제주지목구로 설정되면서 제주도 전교에 공이 큰 광주교구장 헨리 대주교가 초대 교구장에 임명되었고, 1977년 3월 21일 다시 주교구로 승격되어 박정일(朴正一, 미카엘) 주교가 2대 교구장에 부임하였으며, 이어 1983년 11월 21 김창렬 신부가 3대 교구장에 임명되어 이듬해 1월 6일 주교로 성성되었다. 1983년말 제주교구의 교세는 다음과 같다. 신자수 1만 9,935명, 본당 12개소, 공소 21개소, 한국인 신부 9명, 외국인 신부 6명, 한국인 수사 2명, 한국인 수녀 28명, 외국인수녀 8명, 남자수도단체 1개, 여자수도단체 7개, 병원 1개소, 양로원 1개소, 유치원 2개소,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1개교, 주일학교 33개소 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