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성욕을 절제하고 규율하는 윤리덕. 고대 이교도들은 성(性)의 이중성(ambiguity)을 체험하고 있었는데 그리스도교 역시 이를 강조하여 성은 본래 선한 것이나 잘못 사용하면 약한 것이 된다고 하였다. 창세기는 성의 구별과 결합을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생산력을 발견했으며(창세 1:28) 상호 예속성 안에서 서로를 보완하고 있음을 보았다(창세 2:13). 하느님과 인간의 눈에 가장 좋게 보이는 세 가지 중 하나를, 집회서(25:1)는 온전히 화합한 남자와 여자라 한다. 한편 그리스도(마태 19:10-12)와 사도들은(1고린 7:33-35) 동정과 독신을 귀하게 여겼다. 이는 결혼을 경시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하느님 나라와 사도직 봉사에 전념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마태 19:12). 성세성사를 받아 ‘그리스도를 입은’ 그리스도인은 그 몸이 성령의 궁전이 되었다(1고린 6:15-20).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자기 성생활을 가치 있게 영위해야 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거룩하게 자신의 몸을 자제해야 한다”(성윤리에 관한 선언문 4:4). 정결은 독신자나 기혼자를 불문하고 요구되는 것이나 양자의 정결은 성질상 다르다. 기혼자의 정결은 후기 지혜문학에서 찬양되었고(지혜 3:13), 요셉(창세 39:9)과 수산나(다니 13:22-23)는 그 모범인들이다. 신약성서에서 정결은 성령의 열매이며(갈라 5:23, 1데살 4:3-8), 성덕과 도덕적인 이상으로 되풀이 강조되었다. 이는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을 뿐 아니라(마르 7:14-23),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이다(필립 4:8).
교부들은 성서의 가르침을 발전시켜 정결을 성(性)의 성화(聖化)로 보았다. 동방교부들은 그 신비적 초월적 성격을, 서방교부들은 실제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성을 그릇 사용하면 하느님의 계획을 모독하고 성령의 성전인 인간의 품위를 손상시키므로 정결을 실천해야 한다. 그 방안으로 ‘거슬러 행동하라’(agere contra)는 고전적인 원칙도 유의할만 하겠으나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한 삶을 마음속에 품고(필립 4:8 참조), 그 삶에 몰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뉴먼 추기경은 순결문제로 고민하는 젊은이를 위한 기도에서 하느님을 ‘순결을 사랑하는 이’로서가 아니라 ‘참된 사랑을 사랑하는 이’로서 불러 호소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정결이란 스토아적인 고립된 개념이 아니라 애덕으로부터 힘과 아름다움을 이끌어 내고 또 역으로 확고한 힘으로 애덕을 보전하는 그러한 그리스도와의 닮음의 일면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