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욱 [한] 尹承旭

윤승욱(1915~?). 조각가. 수원(水原)에서 태어나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9년에 일본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하고 한국 근대 조각 개척에 공헌하였다. 작품 활동으로 1938~1942년의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 출품, 입선하였으나 그 후에는 일제(日帝)의 식민지 정책 미술전을 외면하였다. 한편, 가톨릭 신자로서의 그는 1939년에 동경에서 개최된 로마 전시를 위한 종교미술 공모전에 <그리스도 입상>을 출품한 적이 있고, 같은 시기에 서울에서 <복자 김대건 신부상>을 대리석으로 조각했던 사실이 확인돼 있다. 그러나 앞의 작품기록에서 현존하는 것은 1941년의 조선 미술전 입선작인 <피리부는 소녀>(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뿐이다. 광복 후에는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지내고, 1949년의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國展) 때에는 조각부 추천작가 및 심사위원으로 참가하였다. 그러다 1950년 6.25의 공산군 남침 때 납북당한 후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참고문헌] 韓國現代美術史 彫刻編, 국립현대미술관, 1974 / 世界文藝大辭典, 上 · 下, 成文閣,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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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사물 [한] 尹沙勿 [관련] 보두네

보두네(Baudounet) 신부의 한국명. ⇒ 보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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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문 [한] 尹鳳文

윤봉문(?~1888). 순교자. 세례명은 베드로, 구전(口傳)되는 세례명은 요셉, 거제도 진목정(眞木亭, 현 玉浦)에서 윤사우(尹仕佑)의 2남으로 출생. 거제의 사도(使徒)로 형 경문(景文)과 함께 회장을 맡아 교우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며 전교에 힘쓰는 한편 열심히 수계하였다. 1888년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가 판공성사(判功聖事)를 주기 위해 거제를 방문하자 자신이 가르치던 예비자 15명을 영세시켰다. 로베르 신부가 거제도를 떠난 지 약 한 달 뒤, 진수부(陳壽富), 주남이(朱南伊), 한상필(韓祥弼) 등과 함께 체포되어 매와 대창으로 고문을 당했으나 홀로 굴복하지 않자 통영(統營)으로 압송되었고, 그 곳에서 다시 진주(晋州)로 이송되어 2월 22일 진주옥에서 교살(絞殺)되어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진주의 비라실[長在里]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유족들에 의해 거제도 옥포의 족박골(足泊谷) 산에 이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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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 [한] 倫理學 [영] ethics

1. 윤리의 정의 : 철학의 역사와 철학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윤리와 윤리사(倫理史)도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윤리는 인간관(人間觀)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역시 철학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윤리와 철학은 같은 솥의 밥은 아니다. 철학이 생각하는 학문으로서 인간역사의 한 자리를 차지한다면 모든 사람이 철학적으로 살아야할 필요는 없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소간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질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그 견해가 반드시 철학적일 필요는 없다. 세속적인 견해를 가지고 살 수 있고, 종교적인 견해를 가지고 살 수도 있다.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인간은 철학을 했건 안했건 살아야 할 삶을 살아 왔고 살아갈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무엇인가 보람을 찾으며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는 먼저 삶의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한 여러 가지 수단방법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고 때로는 결단을 내려야 하고 생활습성을 기르고 적응성을 키우고 물질을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를 배워야 한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자기 삶의 틀을 잡아야 한다. 이것은 인간이 삶의 기본방향을 잡아야하고 그 방향은 더 나은, 보다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학문이나 이론적으로 삶을 꾸려 나가지 않더라도 단순히 악을 피하고 선을 진작시키려는 윤리적 영역 안에서 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삶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문을 스스로 제기하게 되고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마련하여 책임을 지게 된다. 산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면 윤리적으로 산다는 뜻이 된다.

인간은 온 생애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만들며 사는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역사를 창조하며 살아 나아간다. 그러므로 인간은 개인을 가꾸고 그것을 사회 속에 심고 삶의 가치를 부여하는 노력을 계속한다. 이것은 윤리성의 근본을 이루는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행동으로써 역사를 짜 나아감으로써 자기를 역사 안에 현실화한다. 그러니 우리는 윤리적인 현실 속에서 인생을 꾸려 나아가도록 되어 있다. 사람은 아무렇게나 멋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절차를 밟으며 살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자연적으로 어느 생활태도를 취했다가 그것이 나중에 하나의 인생이념으로 빚어진다. 이것은 한 개인의 일생을 역사화하고 나아가서는 민족과 인류의 역사적 문화를 쌓는 인자가 된다. 그리하려 인간은 삶의 모델을 제시하게 되고 따라서 사는데 있어서 일정한 지침을 모색하게 된다. 이 삶의 지침은 시대를 거듭하고 사회화하면서 관습을 이룬다. 이 관습은 바로 윤리로 나타난다. 윤리를 라틴어로 Moralis라 한다면 그 말은 바로 관습이란 라틴어(mores)에서 파생된 말이다.

인간이 사는 태도가 역사화하여 윤리가 형성된다면, 인간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윤리의 역사가 있다. 그리스 사람들이 살아온 역사에는 그들이 산 태도가 있고 따라서 그들의 윤리가 있다. 한국 사람들이 살아온 발자취에는 그들의 삶에 대한 태도가 있고 윤리가 있다. 그러므로 윤리는 삶과 더불어 자연 발생적인 하나의 인생이다. 이 점에서 윤리학은 윤리철학과 다르다. 윤리철학은 위에서 말한 인간으로서의 삶의 태도로 나타나는 윤리 사실을 사색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 사람들은 자기네가 보는 인생을 논리적인 이치에서 사는 데 필요한 윤리가 있었고, 한국인들은 한국인 나름대로 농토에 뿌리를 박고 가족을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가족윤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가 되었다. 이렇게 한 민족 또는 인류가 살아가는 역사적 상황은 그것대로 줄기를 이루면서 민족적 관습이 되고 철학적인 이론이 되면서 윤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역사 속에서 윤리적으로 살아온 것을 인간의 본성적 인생 목적과 대조하여 체계화하면 윤리학이 성립되는 것이며 여기에서 보편성을 고려하여 이론화하면 윤리철학이 성립되는 것이다.

인류 최초의 윤리철학이라고 볼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쿠스 윤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온 윤리생활을 인간본성과 대조하여 인간의 보편적 생활태도를 이론화한 것이다. 니코마쿠스 윤리는 그리스인들의 생활역사에서 그들이 노력하고 실천한 덕행으로 4대 덕목 즉 용기 · 절제 · 지혜 · 정의를 인생의 이상적인 생활목표로 표출하였다. 윤리가 이와 같이 인간이 자기 본성을 만개시키기 위한 생활태도의 모색이라면 인생목적이 달리 설정됨에 따라 윤리학도 같아지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가 그리스인들의 도시국가 시민으로서의 이상적인 생활을 계도하기 위하여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제시한 이념을 바탕으로 체계화한 학이라면, 그 후대에는 개인생활의 행복을 추구하는 철학을 토대로 두 개의 상반된 윤리학이 제창되었다. 그것은 스토아학파라고 일컬어지는 금욕주의와 에피쿠리즘이라 일컬어지는 쾌락주의가 제창되었다. 인생은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냐는 주장으로 쾌락을 놓치지 말자는 주장과, 그래봤자 허무한 것이고 굳이 내세를 바라보지 않더라도 쾌락에 신경을 쓰는 그 자체가 괴로운 것이니 그 반대로 어차피 채워지지 않는 인간욕심을 싸워 이기는 의지력에서 보람을 찾는 것이 인간이 인간다운 생활의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금욕주의와의 논쟁이었다. 자연에서 시작하여 자연으로 끝나는 존재체로 파악한 그리스 철학의 인간관에서는 인간의 존귀한 것이 지성이었고, 따라서 인간계발의 최상 역점은 지성개발에 있었다. 이를 토대로 한 인생은 자연주의적인 행복추구에서 윤리가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교 시대에 들어오면서 인간관이 바뀌고 인생관도 달라졌다.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물이며 하느님 나라에서 살도록 창조된 초자연적인 소지를 지닌 존재이다. 따라서 현세생활의 방법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가장 안심스러운 생활태도이다. 하느님의 뜻은 자연생활을 위한 개성계발이 아니고 서로를 위하여 돕고 사는 봉사의 생활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사도 바울로가 포교한 사랑의 실천을 윤리의 최고로 꼽는다. 근본적인 인간관의 쇄신과 윤리관의 혁신을 가져온 것이다. 문예부흥시대는 고전시대에로의 향수와 더불어 합리주의적 사조로 인간을 다시 그리스, 로마시대의 자연적인 존재로 끌어내려 독특한 윤리관이 필요치 않았다. 인간을 지존한 존재로 구가하면서 윤리가 없이 방황하던 인문주의시대를 박차고 일어서서 윤리를 인간본성에서 찾은 사람은 칸트이다. 칸트는 선을 그 결과에서 가늠하지 않고 선 그 자체에 추구하면서 순수윤리를 주창하였다. 행동의 내용이 좋고 나쁜 데서 윤리성을 따지는 것이 아니고, 좋든 나쁘든 관계없이 의무를 수행하는 순수의지에서 윤리성을 찾는 것이다. 그러니 잘 되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고 의무를 다했다는 형식에서 행복을 찾는 이른바 형식윤리이다. 철학과 윤리의 백과사전을 펴내어 당대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일컬어지던 헤겔은 칸트의 윤리를 자기 윤리철학의 한 계기라고 불렀다. 칸트의 윤리는 내용을 상관하지 않는 추상적인 것으로서 개인위주의 윤리체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객관적이고 개인을 넘어서 사회로 옮아가는 국민윤리로 도약해야 된다는 것이다. 헤겔은 오늘날의 다급한 문제인 사회윤리의 문제점을 제시하였고 이를 이어받은 20세기는 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적 유물론의 사회윤리와 초개인적인 인격을 사회의 실생활에서 찾으려는 실존주의 윤리로 갈라졌다. 오늘날의 과제는 이 사회성과 인격성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하는 안타까운 일을 해 내야 하는 문제이다. 이 과제는 하느님의 구원이 이 지상에서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느냐 하는 가톨릭의 신학문제와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2. 윤리와 인간 구조 : 인간은 자기의 삶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삶이 다 만들어져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동물의 삶은 주어진 환경에서 이러저러하게 살도록 이미 결정된 대로 살게 되어 있지만 인간은 주어진 세계를 자기의 세계로 꾸미고 살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결정된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기획을 펴면서 살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자유의 행동이다. 그리고 이 자유결정은 한번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일생동안 무수히 되풀이된다. 그러니 인간은 자유행위로 자기 인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데 윤리의 원천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인간성은 2부 구조에 4영역의 행동바탕이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육신과 영혼의 근본구조이며 감각 정서 지성 영성의 4활동 영역이다. 자유가 가치창조의 지향성(志向性)이라면 인간의 어느 행동 영역에 자기의 인생가치를 설정하느냐에 따라 자유가 자유롭게 혹은 부자유롭게 행사되는 것이 달려있다. 우선 감각적 영역에 인생 가치를 두었다면 자유는 대부분 장애를 받게 되어있다. 감각은 물질세계를 그 행동반경으로 하고 있고, 동물과 마찬가지로 본능적인 기능에 의하여 움직여진다. 이 영역의 모든 행위는 거의 기계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대로 이루어진다. 그러니 한 방향 외에 다른 가능성이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감각적인 영역이 전혀 무가치한 영역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차원이 높은 인생가치를 이룰 수 있는 기반이 된다. 그러므로 감각적 영역은 기본단계로서의 가치를 인정하는 슬기가 덕스럽다. 다음 영역은 정서적인 영역이다. 정서는 우선 감각의 영역을 딛고 전개된다. 정서는 감각을 통하여 받은 외부세계를 내면화하는 첫째 관문이다. 즉, 물질세계를 인간화하는 것이다. 정서는 그 상태분석으로 보아 감각에서 오는 결과로서의 수동적인 상태에서 인간으로써 움직이는 경향성의 상태로 나아간다. 우선 쾌(快) · 불쾌(不快)의 상태는 감동의 상태를 빚어내고 그것은 또다시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성을 가지면서 격렬한 감정으로 흐른다. 이윽고 행동반경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것은 사회화의 초보적인 단계이다. 그런데 정서를 유발하는 인자는 감각뿐이 아니고 혈연 · 친지 · 공동체의식 등 비(非)이성적인 사회적 인자와 진리에 대한 동감, 미에 대한 심미감, 선에 대한 감격 등 지성적인 인자, 예술적인 인자, 윤리적인 인자가 있고, 사랑이라는 종교적인 인자가 있다. 여기서 자유가 행사되는 마당은 감각적인 인자에서 종교적인 인자로 올라갈수록 자유의 폭이 커진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가치설정이 점점 더 고차원적으로 올라감을 알 수 있다.

생활행동의 제3 영역은 이성적 영역이다. 이 영역은 맹목적 힘이 뻗는 감각적인 본능생활과 방향없이 흐르기 쉬운 정서 생활을 판단과 이치로써 길잡아 주는 지도 역할을 한다. 개인생활에서 인생목표를 장단기로 설정해 주고 사회생활에서 공동선을 도모하면서 자연과 인간과의 대화로써 공동보조를 맞추는 길을 모색해 준다. 그러나 지성은 인간에게 무엇이 좋은 것인지를 제시해 줌으로써 인간에게 눈을 뜨게 해주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무한으로 치닫게 한다. 감각적인 영역에서의 욕망은 본능에서 그치지 않고 물욕과 생체욕을 한없이 보채게 한다. 정서적인 영역에서도 정서가 감각을 토대로 하는 한 언제나 욕구 불만이다. 언제나 더 좋고 더 이끌리는 것을 선망하기 때문이고 이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바로 지성이다. 지성적인 영역 자체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더 깊이 알려고 하는 것이 본질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늘 부족한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지성적 영역의 덕성은 끊임없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이 모든 불충족 상태는 감각적인 욕망까지 포함해서 인간이 영원한 영역에서 안주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영원한 존재이다. 이 영원한 존재성을 지닌 인간의 끝없는 희구를 뛸 수 있는 지대가 바로 영성적 영역이다. 영성적 영역에서의 욕구는 사랑으로 표현된다. 사랑이되 한없는 사랑이다. 감각적인 영역에서의 욕망이 실패했다면 그것은 물질에 대한 사랑, 육체에 대한 사랑, 그밖에 온갖 개인적인 것에 대한 사랑이었기 때문에 그 대상이 변수(變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감각적인 욕망을 영성적인 영역에서 눈이 뜨이면서 영성화한다. 즉 영원한 안목에서 물욕을 보면 그것이 인생의 한 수단이며 방법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게 된다. 여기에서 비로소 감각적인 영역에서의 덕성이 무엇인지를 또한 알 수 있다. 그것은 존중심이다. 물질도 개인적인 사람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영성적인 영역에서의 덕성은 인간성 만개에 대한 신념이라 할 수 있고 이것은 다른 말로 희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교회는 윤리의 기초를 자연법에 의거할 것과 윤리의 종국적인 완성을 계시에서 찾을 것을 줄곧 가르쳐 왔지만 이제 교회의 이 가르침은 원칙적인 면과 각 시대와 개인에게 적적한 생활행동의 길잡이를 구체적으로 비추어 줄 새로운 각도에서 추구할 책임을 현대인은 지고 있다. 그래서 윤리의 철학적인 모색 가능성을 교회는 남겨두고 있다(Denz. 1650, 1670, 1685, 1806, 2317, 2320). 윤리학은 언제나 인간 파악의 견지에서 성립되며 언제나 철학적일 수밖에 없다. (白敏寬)

[참고문헌] R. Le Senne, Traite de morale generale, 1948 / H.H. Joachim, Aristotle, the Nicomachean Ethics, ed. by D.A. Rees, 1951 / D. von Hildebrand, Christian Ethics, 1952 / J. Pieper, Reality and the Good,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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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 [한] 倫理神學 [라] theologia moralis [영] moral theology

1. 윤리신학은 윤리적 문제들을 신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가톨릭 교회와 서구 및 라틴 계통에서는 윤리신학(moral theology)이라고 부르고, 북구와 영미 계통에서는 그리스도교 윤리학(Christian ethics)이라고 부른다. 윤리문제를 신학적으로 연구한다는 말은 연구의 기본이나 과정을 계시진리(啓示眞理)의 의거해서 알아본다는 의미다. 즉 인간의 윤리성은 인간의 자율(自律)도 타율(他律)도 아닌 하느님과의 응답적 관계에서 보는 것이다. 즉 인간의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부르심과 응답, 소명과 책임이란 관점에서 보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윤리신학의 대상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행위만이 아니고, 하느님은 인간에게 무슨 사명을 주셨으며, 바로 살기 위하여 어떤 가치질서와 의미를 주셨는지 알아보고, 계시된 이 진리들이 시대와 문화여건에서 어떻게 표현되었으며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는 어떻게 살아 왔으며 가르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 있는 것이다. 윤리신학은 하느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서와 성서를 충실히 보관하고 전담하며 해석해주는 교회의 가르침을 기초로 해야 하는 것도 바로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윤리신학은 성서학과 교의신학(敎義神學), 교회법과 수덕학(修德學) 및 윤리학에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고, 또 공동으로 연구되어야 함을 알고 있다.

2. 약사 : 하느님의 계시는 여러 세대를 통해 여러 가지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나타났으므로 계시 진리를 기초로 하는 윤리신학은 위와 같은 전제조건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계시에 핵심을 알아내어 시대적 상황과 조건이 무엇이며 제시된 진리가 어떤 것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이와 같은 작업이 바로 윤리신학의 과제이며, 역사 안에서 시도한 내용들이다.

① 교부(敎父)시대 : 교부시대에는 윤리신학도 다른 신학의 분야와 마찬가지로 독립된 신학의 분야가 아니었다. 따라서 복음선포와 함께 일반생활에 관한 훈계와 권유, 시대적 비윤리성에 대한 비판과 죄악들에 대한 단죄, 죄인들에 대한 견책 등 교회 목자들에 의한 교육의 범위에서 논의되었다.

② 중세기 : 서구사회가 그리스도교화됨에 따라 사회윤리는 그리스도교 윤리가 되어야했으며 학문의 세계에서도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이 집대성되고, 분류되어 사본을 만들고 전파시키는 시대가 되었다. 13세기부터는 학문이 황금기를 맞아 체계화되고 전문분야가 발달되기 시작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신학대전≫(神學大典) 제2권에서 오늘의 윤리신학 분야라고 할 수 있는 내용들을 구분하여 논하였다.

③ 근세 : 신학이 크게 발전하면서 처음으로 윤리신학이란 용어도 사용되었고(17세기초부터) 신학의 한 독립과목으로 발전되기 시작하였으나, 곧 결의론(決疑論)에 치우쳐 사목자들의 성사집행을 위한 보조학문같이 협소하고 율법주의적으로 흐르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신학의 구분이 다르게 나타났으며 가톨릭의 윤리신학 문제들이 조직신학(組織神學)과 실천신학(實踐神學)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④ 현대 : 산업화사회로 바뀌면서 새로운 윤리문제가 대두되는 19세기 말에서부터 윤리신학도 차차 변화가 요청되었으나, 실제로는 20세기 중반기부터 변화되었다고 보아야한다. 독일계통에서 성서와 교의신학에 기초를 두고 그리스도인의 실존적 근거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포된 복음에 기초를 둔 윤리생활이 강조되었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즉 결의론적 경향에서 탈피하여 “그 학술적 해설에 성서의 가르침을 보다 풍부히 가미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이 받은 성소의 고상함을 깨우쳐주고 세상 생활에 있어서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할 신자들의 의무를 밝혀주는”(사제양성 20) 윤리신학이 되게 하라고 강조한다.

3. 구조(構造) : 윤리신학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전개할 수 있겠으나 두 가지 부분으로 구별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첫째 기초 윤리학으로서 원리가 되는 문제들을 다루고, 둘째 각론에 해당되는 특수 윤리신학이다.

① 기초윤리신학(基礎倫理神學) : 윤리적 제 문제들을 다루기 위한 기초 및 전제조건에 해당되는 원리들을 다룬다. 인생관 내지 세계관을 결정짓는 그리스도교적 인간관을 보고, 이에 따른 인간의 목적과 목적에 합당한 행위론을 다룬 뒤 윤리성의 원천인 윤리적 가치와 규범들, 이를 알아들을 수 있고 확인하는 능력으로서 양심을 고찰한 후 인간의 죄, 죄에서의 구원 등을 살펴본다. 어떤 학자들은 여기서 인간의 윤리적 능력으로서의 대신덕(對神德 혹 向主德)과 윤리덕(倫理德)을 다루기도 한다.

② 윤리신학 각론(특수윤리신학) : 여기서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영역에서 윤리성을 검토하는 것으로 여러 가지 양식이 있다. 과거에는 십계명의 순서를 따르면서 계명과 교회법규를 중심으로 논의하기도 하고, 혹은 덕행과 악습의 기준에서 사추덕(四樞德)과 칠죄종(七罪宗) 등을 다루기도 하였다. 20세기 중엽부터는 생활분야나 그리스도인의 삶 즉 성사를 중심으로 한 윤리문제들을 다루기도 한다. 첫째 종교적 차원의 윤리이다. 인간이 하느님께 대한 예배와 신앙생활에 관한 것, 그리고 그에 반대되는 행위를 살펴보며, 둘째 자연 속에 사는 인간으로서의 위치, 의무 등 직업과 노동, 과학기술과 산업사회에 대한 책임 등의 윤리문제들을 검토하고, 셋째는 이웃과의 생활에서 오는 여러 가지 의무와 책임 등을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의무를 고찰한다. 넷째는 사회윤리를 인간과 성 · 가정 · 사회 · 국가 및 세계에 관련된 윤리문제들을 복음적 관점에서 검토하고 연구하게 된다. 그러나 이 방대한 분야를 그 누구도 바로 분석하고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사회의 발달은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므로 어떤 구체적이고 확실한 생활규범은 제시할 수 없는 것이며 복음정신에 의지하면서 믿음과 바램과 사랑 안에서 완성시켜 나아갈 것이 윤리의 과제로 제시된다.

③ 윤리학과 윤리신학 : 현대에 와서 제기된 문제 중의 하나는 고유한 그리스도교 윤리가 존재하느냐하는 것이다. 성서에서나 교회사에서 볼 때 구체적 윤리규범들이나 도덕률은 시대적 상황의 반영으로서 인간의 합리성과 도덕성에서 발견된 가치들이고 특유하고 전혀 새로운 규범들은 없다고 하는 견해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함께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체험에서 형성되는 삶은 전혀 새로운 삶의 차원이란 점에서 그리스도교적 윤리의 특수성이 있다고 하는 견해이다. 이 점에 대하여는 큰 토론이 있었으나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전제한다면 상충되는 의견은 아니다. 이미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대로 인간은 자연법칙에 의해서만 살지 않고 지성의 힘으로 평가하고 판단하면서 살기 때문에 자연적 차원에서 참됨을 발견하고 생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구원자이신 하느님이 다른 분이 아니다. 창조의 신비 안에서 들어 있는 인간 능력이 구원의 차원에서 완성되는 것이므로 일반적 윤리규범과 가치들은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원리 안에서 보완되고 자극되며 바른 방향으로 수정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의 의미와 과제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윤리신학은 계시진리가 지니고 있는 인간의 역사성과 한계성을 분별해 내고 자연도덕과 윤리안에 들어있는 창조주의 질서와 의미를 발견하고 확인하는 일을 꾸준히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윤리신학은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에서 방향과 기준을 얻고 실제 인간생활 안에서 참된 생활가치들을 발견하여 생활규범을 제시할 수 있는 학문으로 성장하고 꾸준한 개방성으로 성숙해 가야 할 것이다. (崔昌武)

[참고문헌] 유봉준, 기초윤리신학, 1978 / 뵈클레, 기초윤리신학, 서강대 신학연구소 총서 2, 1974 / Handbuch der Christlichen Ethik I-III, 1979~1982 / B. Haring, Frei in Christus I-III, 1979~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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