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용어의 유래 : 세계 2차 대전 직후인 1946년에 사르트르(J.P. Sartre, 1905~ )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라는 소책자를 내놓았다. 그리고 ‘실존철학’을 표방한 야스퍼스(K. Jaspers, 1883~1969)가 ≪Existenzphilosophie≫를 낸 것이 1948년이다. 그런데 실존(Existenz)이란 말을 현대(철학)적인 의미로 주체적인 면에서 강조한 것은 키에르케고르(S.A. Kierkegaard, 1813~1815)이다. 그러나 실존의 일반적인 의미는 첫째, 보통으로 우리의 인식이나 의식(意識)으로부터 독립하여 사물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말함이다. 어떤 의미의 실존은 허무(虛無)와 대립하는 것이다. 둘째, 형이상학적으로는 사물의 본질이나 본성(本性)과 구별하여 그 사물이 존재하는 것 자체를 표시하기 위해 쓰였다. 이런 의미의 실존은 본질과 대립된 말이다. 셋째, 실존철학의 의미로는 추상(抽象)이나 이론에 맞서서 삶 자체가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현실적 인간존재를 말함이다.
실존으로 번역된 existence, Existenz란 말은 본래 라틴어 existentia에서 온 것인데, 이 말은 existere란 동사에 유래한다. 그것은 ‘무엇인가로부터’ ex-와 ‘존립한다’ -sistere란 의미로 ‘존재’라기보다도 오히려 ‘생기(生起)한다’는 것을 뜻하였다. 그것이 ‘생기한다’는 것에서 ‘현존(現存)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이 말은 스콜라철학에 있어서, 사물의 본성을 표시하는 본질과 구별하여, 사물이 현실에(객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활동을 표시하는 데 쓰이게 되었다. 이처럼 있는 유(有)의 본질과 실존의 구별을 처음으로 명확히 한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인데, 기실 토마스 자신은 existere(existentia)란 말을 쓰지 않고 esse 즉 ‘있다’는 동사의 부정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후기의 스콜라학도들이 esse란 용어 대신에 existentia라는 술어(術語)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2. 실존의 성격 : 19세기의 합리주의적 관념론과 실증주의(實證主義)에 맞서는 전후의 새로운 사조로서 일어난 것으로, ‘주체적 존재’로서의 ‘실존’을 중심 개념으로 하는 철학적 사상을 널리 실존주의 또는 실존철학이라고 부른다.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 마르셀(G. Marcel, 1889~ ), 니체 (F.W. Nietzsche, 1844-1900),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 샤르트르 등의 철학사상이 이에 속한다. 이 중에 니체는 초인주의(超人主義)를 내세운 생철학자(生哲學者)로 규정되기도 하고, 하이데거는 자기의 입장을 ‘기초적 존재론’이라고 천명하였지만, 범논리주의(汎論理主義)적 헤겔 철학과 대결함으로써 개체적(個體的)인 실존개념에 기초를 두고 뿌리 깊게 근원적으로 파고든 사람은 키에르케고르이다. 그에 의하면 진리는 객관적 합리적인 것이 아니고, 개별적 주체적인 것이다. 주체성이 진리이고 주체성이 현실인 것이다. 인간은 합리적 체계 속에 해소되지 않는 구체적인 주체이고,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이자택일(二者擇一)의 선택을 해야만 되는 윤리적 존재이다. 이 같은 존재는 고독한 단독자(單獨者)로서 불안과 죄책의 느낌을 지니고 있다. 자기 자신에 관한 관심을 갖는 존재로서의 이 같은 실존의 성격은 실존주의 사상일반에 공통된 것이나, 이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관념론에 대립하여 구체적 존재를 중시한다. 실존은 현실적 인간존재이기에 일반적인 것 속에 해소되지 않는 개별적인 ‘나’를 뜻한다. 둘째, 그러나 실존적 자각은 동시에 실증주의와 맞서서 객관적으로 파악되지 않는 내면성(內面性)으로서 성립한다. 셋째, 내면적 현실존재로서 실존은 주체적 윤리적이고, 이 같은 존재로서 그것은 성실함을 바탕으로 하는 진실된 존재이다. 넷째, 진실된 존재로서의 실존은 자연적 생활이나 개념적 체계 속에 안주하지 못하고 불안과 고민을 지니는 동시에,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초월(超越)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 초월의 방향에 따라서 두 갈래로 유별된다. 하나는 키에르케고르 · 야스퍼스 · 마르셀 등의 입장으로 이를 유신론적 실존주의, 또 하나는 니체 · 하이데거 · 사르트르 등의 입장으로 이를 무신론적 실존주의라고 할 수 있다.
3. 유신론적인 것 :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 실존은 미적(美的), 윤리적, 종교적 3단계를 거치지만, 참된 실존은 신 앞에서의 실존이다. “사람은 어떻게 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는가”를 밝히는 것이 그의 생애의 과제였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언제나 신 앞에 직면하는 사람, 하느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와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신이 시간적인 모습을 취하여 이 세상에 나타난 이로서 영원과 시간의 접촉점이고, 이 계시의 순간은 인간이성의 이해를 넘어선 역설(逆說)이기에 정열적인 신앙의 비약에 의하지 않고는 포착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이 같은 신앙에 의해서 신 앞에 선 사람이고, 거기에 인간의 참된 자기 존재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기에 본래적으로 신과 관련된 자기가 신과의 관련을 떠나 있는 것은 자기가 참된 자기를 소외하고 있는 상태이므로 이것이 바로 죄(罪)인 것이다. 죄 속에 있는 인간은 결국 절망 속에 사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은 참된 자기가 되고자 하는 한, 항상 영원자를 구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노력의 과정, 즉 자기가 본래의 자기로 되려고 하는 생성과정이 실존하는 것이고, 이것은 이미 한갓된 이성(理性)의 문제가 아니고 인간의 특수한 삶의 방식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을 방해하는 것은 넓은 의미의 낭만주의 즉 문학적인 심미주의(審美主義)와 헤겔의 철학적 사변(思辨)이었다. 거기서 이 양자를 비판하여 미적인 삶의 절망적인 무상함과 이성적 사변의 추상성을 지적하고 분석하였다. 이런 견지에서 ‘단독자’, ‘주체성’, ‘실존적 사유’라는 그의 근본개념이 헤겔적인 ‘보편성’, ‘객관성’, ‘추상적 사유’라는 개념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확립된 것이다. 무릇 신앙은 개인문제이기 때문에 신 앞에 서는 자는 단독자가 아닐 수 없고, 종교적 진리는 무관심할 수 있는 객관적 진리와는 달라서 사람이 그 때문에 살거나 죽기를 원하는 그런 주체적 진리가 아니면 안되는 까닭에 사유도 참된 자기가 되기 위한 사유로서 실존적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키에르케고르는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함으로써 그 뒤에 나온 실존철학에의 길을 터놓는 동시에 바르트(K. Barth, 1885~1968)를 위한 변증법 신학의 기초를 구축한 것이다.
야스퍼스에 있어서도 키에르케고르의 경우와 같이 주체적인 실존이 철학의 중심을 이룬다. 과학은 대상을 밖으로부터 객관적으로 파악하지만, 철학은 대상적인 것을 넘어서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하려고 함에 그 기초가 되는 것은 구체적 상황 속에서 주체적으로 살고 잇는 실존의 자각이다. 실존은 자기 자신에 관계함으로써 기성관념을 타파하고, 자기의 근원으로 자기 자신을 넘어섬으로써 전체적 진리, 초월자(超越者), 일자(一者), 포괄자(包括者)에 도달한다. 자기 자신에 관계함으로써 대상성을 넘어서는 실존적 사유는 동시에 초월자와 관계하게 되는 사유이지만, 인간은 피할 수 없는 이율배반(二律背反) 즉 한계상황에 부딪쳐 좌절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실존의 내적 행위에 있어서 비로소 초월자는 다만 한갓 상징으로서나 또는 암호(暗號)로서 파악될 뿐이다. 이것은 그의 말대로 ‘철학적 신앙’의 입장이라고 할 것이다.
마르셀은 프랑스 실존주의의 선구이며 가톨릭적 실존주의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가 사색과 저술에 몰두하여 가톨릭에 입교한 것은 1929년이다. 그의 철학은 체계적 형식을 취하지 않고 실존적 체험의 자유로운 기술로써 이루어지고 있다. 그에 의하면, 주체적 실존과 객체적 존재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차원을 갖고 있으나, 양차원의 교차점이 바로 ‘나의 신체’인 것이다. 이 신체는 곧 ‘나’인 동시에 ‘그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육화(肉化, incarnatio)의 사실에 있어서 그 신비를 체험하고 문제에 봉착한다. 문제는 객관적 시야에서 보아지는 데 대해서 신비는 “나가 참여하고 있는 무엇인가?”이고, 이 같은 신비를 현상학적(現象學的) 반성에 의해서 기술하는 것이 형이상학의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신비에 있어서 인간의 태도는 정신적 교제의 기대나 능동적인 대화 즉 기도이고, 객체화되지 않는 ‘너’(toi)에게로 향한다. 이와 같은 ‘너가’ 현현(顯現)하는 영역, 즉 2인칭의 판단에 응답하는 실재가 인간관계의 중심에 있어, 거기에 있어서만 성실(fidelite)을 통하여 자타의 자유가 실현된다. 그리고 이 성실은 더 근본적으로는 희망(esperance)으로 지지되어 있기에 인간은 이 소망에 의해서만 죽음의 승리가 궁극적 사실이 아님을 깨닫는다. 하지만 인간의 자연적 경향은 언제나 ‘너’를 ‘그’(lui)로 ‘우리들’(nous)을 ‘사람’(on)으로 대신하여 다루려고 하기 때문에 타인도 또한 객체화를 면치 못한다. 이에 유일한 예외는 신(神)이고, 이 신만은 합리적 철학이 ‘그것’(cela)으로서 다루면 언제나 한갓된 비실재적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 신만은 객체화되지 않는 타자 즉 절대적인 당신인 것이다. 인간은 오로지 절대적인 사랑과 흠숭 속에서만 이 같은 신을 만나게 되고 진정한 그 존재를 분유(分有)하게 되는 것이다.
마르셀에 의하면, 나의 모든 성실을 다하여 절대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상대자는 신이다. 따라서 신에 대한 성실에 의하여 신이 나에게 존재하게 되는 것이요, 그만큼 나도 또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성실로써 영원성을 알게 된 자만이 진정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이같은 소망을 다함께 가지고 신에게 공동적으로 참여하는 공동지반은 믿음 즉 신앙이다. 그러니 무릇 신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설명이나 증명하려는 것같이 어리석은 일은 없다. 신은 객체화될 대상이 아니므로 참된 신은 어떠한 말로써나 3인칭으로는 표시할 수가 없다. 신은 바로 인격적인 신이기에 언제나 ‘당신’이다. 따라서 신을 3인칭으로써 다루려고 할 때에 신은 벌써 자취를 감추고 만다. 신은 거기에 있지 않다. 나를 참으로 신에게로 인도하는 것은 믿음 즉 신앙이지 과학이나 변신론(辯神論)이 아니다. 믿음이란 증명에 앞서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르셀에 있어서는 영원자인 존재가 마치 우리를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 존재의 소명(召命)에 응답하는 것이 다름 아닌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성실이요, 희망이요, 사랑이다. 성실 · 희망 · 사랑은 존재의 신비에 참여하는 열린 마음이다. 여기에 우리의 마음을 여는 나의 참여의 자유가 있고 창조적 행동이 있다는 것이다. 신과 만나는 것, 존재에 참여하는 것, 신에 대한 성실이야말로 나 자신을 참된 존재로 실현케 하는 것이다.
4. 무신론적인 것 : 니체가 한 문명비판, 즉 그리스도교에 유래된 유럽문명의 정신적 퇴폐(頹廢)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의한 인간의 기계화, 노예화에 대한 비판은 억압된 개인이나 삶의 해방을 위한 커다란 역사적 역할을 하였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의 영향을 입은 하이데거나 야스퍼스에 의해서 그는 실존주의 철학자로서 키에르케고르와의 대조자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 거론되는 ‘사신론’(死神論)은 그의 말인, “신은 죽었다”(Gott ist tot)에 유래하는 것이라 하겠다. 니체가 내세운 ‘임에의 의지’(Wille zur Macht)는 말하자면 생성에 대해서 존재의 각인(刻印)을 찍는 것이지만, 주체적으로는 생성에의 자기상실 속에서 자기를 결단 속에 회복하는 것이 된다. 자기상실을 통해서 자기를 존재로 돌아오게 하는 것, 자기 밖에서 자기로 되돌아오는 것 즉 ‘영원한 되돌아옴’[永劫回歸, ewige Wiederkunft]인 것이다. 이런 ‘되돌아옴’은 외적 세계의 대상적 사건은 아니다. 주체의 결단적인 ‘자기회복’의 행동이다. 이 점에서 키에르케고르의 ‘반복’(反復, Wiederholung)과 통하는 것이 있다고 보겠다. 그리고 자기를 상실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자기가 아닐 수 없다는 의식이 곧 ‘운명애'(運命愛, amor fati)이다. 이에 운명이란 자기 밖에 있는 것으로서 자기를 괴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상실에 있어서 자기로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는 자기 자신인 것이다. 니체의 주의주의(主意主義)적인 ‘힘에의 의지’란 ‘영원한 되돌아옴’과 ‘운명애’의 결단을 통하여 자기의 실존에로 되돌아오는 의지로서 그의 생철학의 중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자기의 입장을 해석학적 현상학을 방법으로 하는 기초적 존재론이라고 함으로써 실존철학으로부터 자기를 구별한다. 그의 의도하는 바는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는 것이게 하는 존재 자체의 해명이지만, 존재 자체에 도달하는 통로로서 인간 존재 즉 실존이 중시되는 한에 의미의 실존주의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는 우리가 현재 여기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이 그가 말하는 ‘현존재’(現存在, Dasein)이고, 이 현존재의 존재방식이 실존인 것이다. 우리의 현존재는 이 세상 속에 있는 존재 즉 ‘세계내 존재’(世界內 存在, In-der-Welt-Sein)로서 우선 배려(配慮)나 염려하는 관심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일상생활에 있어서 사람은 이 관심의 본래의 성격을 잃어버리고 한갓된 ‘사람’(das Man)으로서 이 세상에 전락하고 있는데, 이런 전락 속에서 본래의 자기를 되찾을 때에 사람은 무(無, Nichts)에 직면해 있음을 자각하게 되고 불안해진다. 이 불안한 존재는 세상 속에 던져지며 자기를 미래로 향하여 내던지고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일 때 자기를 미래로 향한다. 우리의 현존재는 과거를 지니면서 미래로 향함으로써 현재를 성립시키는 시간성(時間性, Zeitlichkeit)으로 환원됨으로써 그 구조가 분명해진다. 한 마디로 현존재는 유한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존재의 빛’을 찾는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무신론을 기반으로 하고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것이나 매우 사회적이란 점에 그 특징이 있다. 그에 의하면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는 것이니, 실존은 개념적 본질 속에 해소되지 않고, 합리적 파악 이전의 것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무(無) 속에서 “스스로를 만드는 무엇”이라고 한다. 이 말은 자기 스스로 책임을 지는 주체적 존재로서 ‘자유’인 것을 뜻한다. 인간을 무엇이라고 선험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이상 인간을 보증하는 것은 인간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란 휴머니즘이다”고 말한다. 그런데 자유 바탕에서 자기를 선택하는 것은 동시에 인류를 대표하는 것이기에 세계전체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티’를 지반으로 한 단체로서의 인간의 공통구조를 해명하고, 그 바탕을 자유로서 전제함으로써 동시대의 사회적 현실에의 참여를 주장한다. (金奎榮)
[참고문헌] Soren Kierkegaard, Abschliessende unwissenschaftliche Nachschr. zu d. philosophischen Brocken, 1844(表在明 역), 哲學的 斷片, 平和出版社, 서울 1974) / Karl Jaspers, Existenzphilosophie, 1937 / Gabriel Marcel, Journal metaphysique, 1929; Etre et avoir, 1935; Homo viator, 1945; Exitentialisme chretien, 1947; le mystere de l’etre, 1951 / Friedrich Wilhelm Nietzsche, Alsosprach Zarathustra, 1883 / Martin Heidegger, Sein und Zeit, 1927 / Jean-Paul Sartre, L’etre et le neant, 1943 / 曺街京, 實存哲學, 博英社 서울, 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