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리우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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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한 4세기경의 이단사상.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Arius, 250?~336)로부터 발단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신 안에 있는 세 개의 위격(位格)은 모든 면에서 대등하고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부(聖父)만이 그러하다. 성자(聖子)는 모든 피조물들과 같이 무에서 유로 창조되었을 뿐이며, 신으로 불려질 수는 있지만 그것은 단지 피조물과 신의 중계역할을 하고 세상을 구원하도록 신에 의해 선택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의 은총과 선택에 의해 하느님의 양자(養子)가 되었으며 그가 죄를 지을 수도 있었으나 짓지 않는 것을 보시자 신은 그의 덕을 예견하고 선택하였다. 즉 그는 신이 아니라 덕을 갖춘 뛰어난 반신(半神)이며 이점에서 성부와 닮았다.
이러한 반(反)삼위일체주의적 아리아니즘이 강생의 신비를 단지 수사학적인 문제로 돌림으로써 그리스도교의 근본교리가 해체될 위험에 처하자, 교회는 325년 니체아 공의회를 소집, 아리아니즘을 단죄하였다. 또한 니체아 신경(信經)을 발표, 삼위가 모두 성부로부터 났으며 각기 그 자체로서 완전한 신이라는 삼위일체설을 고백하였다. 381년의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다시금 고개를 든 아리아니즘을 단죄하고 니체아 신경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의 후계자들에 의해 북부 게르만 민족들에게 전파되었던 아리아니즘은 게르만족의 로마 진입과 더불어 로마제국 전역에 퍼졌다. 교회는 7세기에 이르러서야 아리아니즘을 몰아내고 정통 교리를 회복시킬 수 있었다.
제1차 니체아 공의회(325년)의 결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주교들에 의하여 제창된 아리우스주의에서 생겨난 종교단체. 니체아 공의회 후, 아리우스파는 독자적인 교회가 되었다. 정통 신앙과 다른 교의의 정식문(定式文)이 널리 씌어졌는데 그것은 전반적으로 혼동되기 쉬운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정통신앙의 해석도 인정하였다. 정통신앙은 국가권력에 의해 인정되고 있었으므로, 이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법의 규정에 따라 중벌이 내려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리우스파는 그 뒤 그들 자체가 몇 갈레로 분열되어 갔다. 엄격한 아리우스파인 이른바 아노모이오스파(anomoios)는 성자는 성부와 닮지 않았다고 주장하였고 타협적 아리우스파인 호모이오스파(homoios)는 성자는 성부와 닮기는 하였으나 본질적으로는 성부와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 두 파는 다른 지역보다도 고트족 가운데서 오래 존속하였다. 아리우스파의 고트인 우르필라스(311~383)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교육을 받고, 아리우스의 친구인 에우세비오에 의해 주교로 성성된 후, 서(西)고트족(Visigoths) 가운데서 선교활동을 전개하여 4세기 후반에는 그들의 대다수를 아리우스파로 만들었다. 아드리아노플(Adrianople, 현재의 에디르네)의 전투 뒤 서고트족의 대부분이 로마제국 영토 안에 정주하게 되자, 그 곳에서 아리우스파는 서고트족, 동고트족(Ostrogoths)은 물론, 부르고뉴(Burgundiaus) 지방의 주민인 수에비족(Suevi)과 반달족(Vandals), 그리고 롬바르드족(Lombards)의 공인 종교로까지 되어 약 200년 동안 존속하였다.
19세기말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교회 내부의 개혁운동. 가톨릭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자 하는 국외자들을 주저하게 하는 많은 요소들을 교리 · 포교 · 개종 방법 속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요소들을 제거하고 현대세계의 문화 풍토에 맞게 수정해야 한다는 목적을 가진 움직임이었다. 파울리스트회의 창립자인 헤커(I. Th. Hecker)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아메리카니즘은 당시 가톨릭 교리는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교회는 오히려 신자들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지적하고, 교리는 신악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교리만이 가르쳐져야 하며, 종파에 구애됨이 없이 형제적 사랑을 실천해야 된다는 교파무차별주의적(敎派無差別主義的) 입장을 취하였다. 그래서 1893년 9월에는 아메리카니즘에 입각한 교파들이 시카고에 모여 종교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또 교회의 권위가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개개인의 영혼은 성령에 의해 직접 인도된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아메리카니즘은 사고 · 언론 · 저술 등의 다방면에 걸쳐 개인의 자유가 크게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새로운 도덕원리가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이전까지 강조되던 수동적 복종 · 겸손 · 금욕 대신에 능동적으로 그리스도교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강조되었고, 초자연적 관상생활이나 수덕생활이 지닌 수동적 생활보다 능동적인 자연적 덕의 함양이 더욱 중요하다고 주장되었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은 아메리카니즘으로 하여금 모든 보수주의에서 벗어나 박애적 사업에 전념케 했고, 민주주의를 촉진케 했고,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요구하게끔 하였다. 아메리카니즘의 이상(理想)은 진보와 지극히 순수한 가톨리시즘이 종합된 아메리카 국가조직을 가지는 것이었다(워싱턴 가톨릭대학장 Keane 주교의 1878년 3월 Catholic World지 기고 논문 중에서).
아메리카니즘은 여러 가지 점에서 근대주의에 선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프랑스 · 독일 등에 영향을 미쳤고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엘리어트(W. Elliott)가 지은 ≪헤커의 일생≫(The life of Isaac, T. Hecker) 불어판(1873)이 출판되면서 프랑스는 찬반 양론의 급류 속에 휩싸였다. 논쟁은 1899년 교황 레오 13세의 사목서한 에 의해 일단락되었다. 교황은 아메리카니즘이 빠진 오류, ① 영원한 교도권을 필요 없는 것으로 배제한 점, ② 초자연적인 덕보다 자연적 덕을 더 예찬한 점, ③ 수동적 덕보다 능동적 덕을 더욱 선호(選好)한 점, ④ 그리스도교적 자유와 양립할 수 없다하여 수도서원을 거부한 점, ⑤ 변신론적(辯神論的) 방법을 채택한 비가톨릭적 접근방식 등 5개를 신중한 어조로 지적하였다.
‘신뢰할 만한’이라는 의미의 어근 ‘mn’에서 나온 히브리말. ‘진실로’, ‘그렇습니다’, ‘그럴 것입니다’라는 뜻을 지녔다. 유태인들(신명 27:15 · 16)과 그리스도 교도(1고린 14:16)에 의해 종교적인 문구나 기도, 성가 및 신경(信經)의 끝에서 동의를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