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나시오 [라] Athanasius

Athanasius(295∼373). 성인. 328년 알렉산데르를 계승하여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가 낳은 4세기의 가장 위대한 학자이다. 파란만장한 생애 가운데서도 오로지 교회의 정통신앙과 니체아신경의 가르침을 수호하기 위하여 몸 바친 정열가이다. 당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와 콘스탄시우스(Constantius)를 비롯한 동로마 제국권의 보호를 받았던 아리우스파(派)는 황제정권과 결탁하여 아타나시오를 괴롭혔으며 이 때문에 5번이나 교구장직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17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굴의 투지와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교회의 정통적 입장을 확고히 지켰다. 또한 동료주교들을 설득하여 삼위일체 교의 중 그 동체성(同質性, Homoousios)을 고백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동 · 서방 교회에서 추앙받는, 명실공히 ‘교회의 교부’로 인정받았다.

아타나시오는 295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하여 교육을 받았으며 이 때 수도자적 영향을 받음과 함께 319년 알렉산데르에 의해 부제로 선출되고 후에 그의 비서가 되었으며 제1차 니체아 공의회가 열렸을 때는 알렉산데르를 따라 공의회에 참석하여 아리우스파의 이단사상을 감지하였다. 유배기간 중에는 로마에 머무르며 로마교회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의 사상은 한 마디로 반(反) 아리우스주의로 요약될 수 있다. 이성을 앞세우며 헬레니즘화(化)를 꾀한 이 위험한 사조에서 아타나시오는 신앙과 성서의 가르침을 앞세우면서 교회의 정통 가르침을 수호하였다. 물론 이성과 철학이 학문상 꼭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는 이것을 신학과 신앙을 위한 길잡이로 생각하고 신앙과 전통의 우위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그리스도의 인성(人性) 및 신성(神性)을 함께 강조하여 후대의 그리스도론(論) 및 성삼론(聖三論)의 완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수도생활의 창시자로 불리는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St. Antonius, 251?~356)의 전기를 쓰는 등 서방에 수도원운동을 처음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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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나시오 신경 [한] ∼信經 [라] Symbolum Athanasianum [영] Athanasian Creed

아타나시오신경은 일명 ‘퀴쿰케(Quicumque)신경’이라고도 불린다. 즉 누구든지 믿는 자만이 구원될 수 있다는 첫 글자에서 연유된 것이다. 이 신경은 7세기부터 중세까지 아타나시오의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최근 학자들의 연구로 이의가 제기되고 있다. 7세기 이전에는 이 작품이 아타나시오의 것으로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점과 이 신경의 원어(原語)가 라틴어라는 점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경의 저자와 저술시기에 대해서는 학자와 교부에 따라 의견이 다른데 어떤 이들은 프와티에(Poitiers)의 힐라리오(Hilarius, 320~367)를, 다른 이들은 암브로시오(Ambrosius, 340?~397)를 그 저자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신경이 여러 공의회를 거치면서 이루어진 일종의 공동작품으로 추정하는 사람들은 5세기 후반에 갈리아지방에서 이루어진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신경은 성삼(聖三) 교리를 강조하며 특히 그리스도의 양성을 분명히 주장, 고백하고 있다. 저자는 또한 이 신조를 따르지 않을 때는 벌을 받으리라고 경고하고 있다. 40개 신조로 이루어진 이 신경은 9세기부터는 매주일 성무일도 중에 고백하도록 배려되었고, 옛 예식서의 구마경에도 포함되어 사용되었다. 오늘날에는 성삼대축일 성무일도서에 삽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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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나고라스 [라] Athenagoras

2세기의 호교교부(護敎敎父). 아테네 출신으로 개종 전에는 플라톤 주의자로 추정되며 일설에는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교철학파의 창시자로 글레멘스의 스승이었다고도 한다. 177년경 당시의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황제에게 바쳤다는 호교론 ≪Embassy for the Christian≫으로 알려졌으며, 여기서 그리스도교가 무신론과 근친상간을 가르친다는 당시의 터무니없는 중상들을 반박하면서 그리스도교 저술가로는 최초로 삼위일체론을 철학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밖에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논문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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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리나리우스주의 [한] ∼主義 [라] Apollinarianismus [영] Apollinarianism

예수의 인성을 부인하는 4세기의 그리스도론적 이단주의 니체아 신조의 옹호자였던 라오디체아(Laodicea)의 주교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의 이름을 딴 것으로 삼위일체론에서 그리스도론적 이단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나타났다. 아폴리나리우스는 원래 반 아리우스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옹호하려는 의도가 지나친 나머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무시하는 아리우스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구절에서 그리스도론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열쇠를 발견했다고 믿고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①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두 개의 완전한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은 하나로 합쳐질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인성의 축소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일치는 설명될 수 없다. ② 죄는 인간의 의지 안에 주재하며 자유의지와 죄는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 죄가 존재한다. ③ 예수는 완벽한 인성을 취한 것이 아니라 육체 및 육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민감한 영혼만을 취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하느님 말씀이 육화한 유일하고 단일한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362년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에서 처음으로 아폴리나리우스의 교의가 검토되었는데, 그 기본원리가 동방 신학과 같다고 하여 비난 받았으며 375년 안티오키아에서 그의 제자 비탈리스에 의해 ‘아폴리나리우스회’가 조직되자 그의 평판은 결정적으로 손상되었다. 376년 아폴리나리우스는 비탈리스를 그의 안티오키아 교회의 주교로 축성하고 그의 후계자 티모데오를 베리투스(Berytus)의 주교로 인정함으로써 교황의 비난에 저항했으나 그의 가르침을 이집트 주교들에게 전파하려는 시도와 함께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무산되고 말았다.

로마 교회회의의 결정은 378년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 379년 안티오키아 교회회의 및 381년 제1차의 로마 공의회에 의해 재확정되었다. 그러나 아폴리나리아니즘은 390년 아폴리나리우스가 죽기까지 많은 동방교회에 받아들여졌으며 그의 사후에는 점차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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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원] Africa

① 개관 : 아프리카의 종교는 사하라사막을 기준으로 하여 그 성격이 뚜렷하게 구분 된다. 북부지방이 일찍부터 그리스도교의 영향아래 있었고, 이후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세계 종교가 발달한데 비해 남부지방은 광대한 열대 우림지대에 산재해 있는 종족의 수만큼이나 종교도 많고 복잡하다. 애니미즘, 주물숭배(fetischism), 귀신숭배, 영웅숭배, 토테미즘 등의 각종 원시 자연종교가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여기서 15세기 이후 전파된 그리스도교의 영향이 아프리카 종교의 파악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총면적 3,033만 1,002㎢, 인구 4억 9,553만 1,000명(1982년 추계).

② 그리스도교의 전래 : 아프리카에 그리스도교는 상당히 일찍 전래 되었다. 이미 마르코 이전에 그리스도교가 이집트에 전해졌고 2세기말 경에는 상당히 광범하게 퍼졌다. 3세기에는 주교만도 100명이 넘었고 곳곳에 수도원이 세워졌다. 알렉산드리아와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크게 발전한 그리스도교는 – 특히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 논쟁에서의 결정적인 역할 담당 – 북아프리카 일대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5세기에 이르러 그리스도 단성론이 지배적인 신앙으로 되고, 7세기 이후 밀려온 이슬람교에 의해 이디오피아에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그리스도교의 아프리카 포교가 다시 시작된 것은 15세기 이후의 일이다. 1462년 교황 비오 2세는 기니에서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를 파견, 교구장으로 임명했고, 그 후 콩고의 왕을 개종시켰다. 잇달아 예수회, 카르멜회 등의 수도사들이 검은 대륙으로 파견되었고, 17세기 이후에는 도미니코회도 참여, 선교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적극적인 선교는 19세기 이후 유럽제국의 식민지 정책에 편승하여 이뤄지게 되었다.

③ 현황 :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아프리카 침략에 의한 수탈과 억압, 인신매매는 아프리카 민중의 광범한 반항 촉발, 민족주의 고양을 이어져 선교사업에 커다란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특히 2차 대전 후 각성한 아프리카 민중은 신 식민주의의 세계 경제구조에서의 해방을 위한 복음으로서 그리스도교를 정립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가톨릭 신자수는 6,304만명(1982년 현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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