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사순 제 4주일: 실로암 못에서의 장님 치유


보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

– 눈먼 사람의 치유 –

1. 말씀읽기: 요한9,1-41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 주시다

1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2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3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4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5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6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7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8 이웃 사람들이, 그리고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이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이가 아닌가?”

9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이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니오. 그와 닮은 사람이오.” 하였다.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0 그들이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하고 묻자, 11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12 그들이 “그 사람이 어디 있소?” 하고 물으니, 그가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바리사이들이 개입하다

13 그들은 전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갔다.

14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15 그래서 바리사이들도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다시 물었다. 그는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 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6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17 그리하여 그들이 눈이 멀었던 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18 유다인들은 그가 눈이 멀었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앞을 볼 수 있게 된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19 그들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20 그의 부모가 대답하였다.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이를 먹었으니 제 일은 스스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22 그의 부모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다인들이 이미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23 그래서 그의 부모가 “나이를 먹었으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하고 말한 것이다.

24 그리하여 바리사이들은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다시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 하고 말하였다. 25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 26 “그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소? 그가 어떻게 해서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소?” 하고 그들이 물으니,

27 그가 대답하였다.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28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말하였다. “당신은 그자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 29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오. 그러나 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오.”

30 그 사람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31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32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33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34 그러자 그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 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참으로 눈이 먼 사람

35 그가 밖으로 내쫓겼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시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36 그 사람이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38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39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40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4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오늘 예수님께서는 눈먼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볼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그런데 눈먼 소경이 눈을 뜬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누가, 어떻게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가 더 궁금합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당연히 좋아해야 하지만 눈을 뜬 소경과 함께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눈먼 소경의 치유를 통해서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가려 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내 옆에 있는 사람의 기쁨을 함께 하지 못합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백성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주변에 좋은 일이 생긴다면 그와 함께 기뻐하는 내가 될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상대방을 사랑하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2.1. 눈먼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


① 눈먼 사람을 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소경을 만나셨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못 본 사람의 고통을 예수님께서는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을 놓고도 다르게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비참한 처지를 보셨지만 제자들은 그의 처지에는 관심이 없고“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요한9,2)하고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만일 나였다면 어떻게 말씀드렸을까요? “주님! 저 불쌍한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하고 청하지 않았을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병을 죄의 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죄를 지으면 병을 얻게 된다고 간단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태생 소경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죄 때문인지(아이가 뭔 죄가 있겠습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궁금해 하게 됩니다. 그 생각이 바로 오늘 이 질문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런 논리라면 엄마 뱃속에서 죄를 지으면 어떤 죄를 지을까요? 분명 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의 죄로 아이가 눈이 멀었다면 그것 또한 불합리한 것 아니겠습니까?


②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시려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병을 세상에 현존하는 사탄의 힘의 표시로 말씀하기도 하시지만 결코 특정한 병이 개인이 지은 죄의 결과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를 다 부정을 하십니다. 그것은 단지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그 소경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그 소경에게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9,3)

하느님의 일은 보지 못하는 이들을 보게 하고, 듣지 못하는 이들을 듣게 하며, 걷지 못하는 이들을 걷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을 살리는 일이며,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 일을 예수님께서 하러 오셨고, 이제 눈먼 이에게 빛을 선물해 주실 것입니다. 이제 당신께서 하시려는 일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요한9,4)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 즉 “하느님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활동하시는 것을 하루에 비유하십니다. 공생활의 3년은 낮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상에서의 삶을 마칠 때까지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셔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라고 표현된 것은 제자들이 하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고,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하기에 “우리”라고 표현된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있는 신앙인들은 서로 한 마음이 되어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계속 이어가야 합니다.


③ 빛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의 빛이심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9,5) 빛은 어두움을 밝힙니다. 빛은 숨을 것을 드러내고, 잃은 것을 찾을 수 있도록 해 주며,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참 빛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빛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실 이 소경도 예수님의 빛으로 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의 어둠을 예수님께서 몰아내 주셨기에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우리가 빛이 되어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나는 빛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보지 못하는 이들을 보게 하고,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어둠이 되어 형제자매들의 빛을 꺼버려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④ 소경을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요한9,7) 하고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경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에 바르셨을까요? 사실 우리야 눈에 흙이 들어가면 안보이겠지만 소경은 눈에 흙을 발라도 안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소경에게 실로암에 가서 그냥 씻으라고 했으면 분명 안 씻었을 지도 모릅니다. 마치 엘리사가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에게 그저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고 할 때 나마만이 불평했던 것처럼 말입니다(2열왕5,1이하). 예수님께서는 그 소경에게 진흙을 개어서 바르신 이유는 “내가 너를 고쳐주마”하는 의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말씀 한마디로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그 소경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소경의 눈에 진흙을 개어서 발랐던 것입니다.


2.2. 치유 받은 소경을 바라보는 사람들

2.2.1. 이웃 사람들

① 놀람

눈을 뜬 소경을 본 사람들은 그를 보고 놀랐습니다. 소경이었고, 구걸하던 사람이 멀쩡하게 걸어 다니니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치유 받은 소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그들은 소경이 눈 뜬 것을 기뻐하지 않고 “그 사람인지 아닌지”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사실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논쟁할 때, 소경이었던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요한9,9)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눈을 뜬 소경과 함께 기뻐하지 않고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요한9,10) 소경이었던 그는 “예수님이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요한9,11)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고 있는 그대로 말을 했습니다. 눈을 뜬 이 사람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는 기쁨에 넘쳐서 흥분하면서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마치 나에게 “당신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고 있습니까? 안 하고 있습니까? 안 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 말씀대로 했더니 눈을 뜨게 된 저를 좀 보십시오.” 하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믿고 있다면 믿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면 믿는 대로 될 것입니다.


② 눈을 뜬 사람의 기쁨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 있음

그런데 사람들은 눈을 뜨게 된 이 사람의 기쁨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얼마나 기쁘냐? 참 다행이다. 축하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디 있소?”(요한9,12) 그러나 눈을 뜨게 된 소경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여 치유를 받았지만 예수님의 얼굴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디 계신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전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사람들은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기에 눈을 뜬 소경을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로 데려 간 것입니다. 당시 종교와 관계있는 사건을 조사하는 것은 바리사이들의 일이었고, 기적이 일어났으므로 그것이 사실인지 바리사이들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치유 받은 소경의 기쁨에는 관심이 전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2.2.2. 마음이 닫혀 있는 바리사이들

① 안식일을 문제 삼음

사람들이 눈을 뜨게 된 소경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려오자 바리사이들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치유 받은 소경은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 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요한9,15)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바리사이들도 치유 받은 소경의 기쁨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축하해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지은 사람처럼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유 받은 소경은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비록 축하는 받지 못하고 있다할지라도 두 눈으로 보고 있으니 그는 행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치유 받은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요한9,16)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습니다. 함께 기뻐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어떻게 눈을 떴는지 물어보고 있습니다. 사실은 먼저 기뻐해야 합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했다하여 어떻게 그것이 죄가 될 수 있을까요?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해 준 것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을까요? 그들은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니 소경의 치유를 통해서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차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하여 예수님을 죄인으로 단정합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인간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죄인이 하느님 구원의 도구가 될 수 있을까요?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것을 이들은 받아들이기 싫어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만일 나에게 “안식일이라고 하여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이 치유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어야 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까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분명 “미뤄야 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아들이나 딸이 고통 속에 있다면 반드시 치유 받으려 할 것입니다. 남의 일이기에,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기에 따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일이라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사람들이지만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함부로 하는 것이고, 그 순간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주변 사람들이나 그것을 통해 영향을 받게 되는 이들은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양들을 사랑하지 않는 목자와 함께 있는 양들은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② 눈이 멀었던 이에게 질문하는 바리사이들

이제 군중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보는 사람과 죄인으로 보는 사람으로 갈라집니다. 그러자 그들은 눈이 멀었던 이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묻습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요한9,17)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습니다. 그들은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소경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고 있습니다. 온전히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자신이 체험한 만큼만 고백을 합니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요한9,17)


③ 부모에게 물어보는 바리사이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유다인들은 이제 기적 자체를 없애 버리려고 합니다. 즉 소경이었던 사람이 원래는 소경이 아니라고 우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경의 부모를 불러서 묻습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요한9,19) 그들이 듣고 싶은 대답은 “소경이 아니었다.”는 대답일 것입니다.


가끔은 거짓으로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적수라고 하면서 그것을 눈에 발라서 보이게 되었다고 과장 선전을 합니다. 먼 타지에서 일어난 일을 선전하면 확인할 방법도 없는 것을 이용합니다. 또 그런 선전이 이루어지고 나면 교회가 아무리 아니라고 진실을 말해도 믿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탄압한다고 말합니다.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참된 기적은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는 데 있습니다.


④ 두려워하는 부모

소경이었던 이의 부모는 지금 기쁨보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백성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본성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요한9,20-21) 그리고 유다인들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서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이를 먹었으니 제 일은 스스로 이야기할 것입니다.”(요한9,21)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누구든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다인들이 이미 합의하였기 때문”(요한9,22)입니다.


⑤ 위증을 강요하는 바리사이들

이제 바리사이들은 눈이 멀었던 사람을 다시 불러서 위증을 요구합니다. 참으로 끈질긴 사람들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기적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옳게 바라본 사람들의 목소리도 정작 죄인들의 목소리에 의해 묻혀 버립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요한9,24)라는 것은 “하느님께만 영광을 드리도록 강조한 구약성경적인 표현”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느님께 자기 잘못이나 죄를 고백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으로 언급되었습니다. 따라서 소경이었던 사람과 소경의 부모에게 예수님께서 안식일 법을 위반한 죄인으로 말하도록 유도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실대로 말하시오”라는 것이지만 그들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거짓이라도 좋으니 예수님이 죄인임을 인정하시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옹졸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요한9,24)


이들은 사실을 왜곡하고 있고, 오히려 하느님께 불경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예수님께서 죄인임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뭐 눈에는 뭐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자신들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치유 받은 소경이었다면 어떻게 말했을까요? 혹시 두려움에 사로잡혀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을까요?


⑥ 치유 받은 이의 대답

하지만 이 눈을 뜨게 된 소경은 기쁠 뿐입니다. 지금 그는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의 부모들처럼 유다인의 지도자들의 함정을 빠져 나가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이고, 예수님께서 죄인이시라면 어떻게 자신에게 치유의 은총을 베푸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심을 고백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청하면 모두 치유 받을 수 있음을 선포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가는 분명 공동체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요한9,25)라고 말합니다. 당신들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은 지금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소신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소경이었던 이의 부모와 소경이었던 이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얼마나 소신 있게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을 얼마나 당당하게 고백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반성해 봅시다.


⑦ 다시 묻는 바리사이들

그러자 유다인들은 치유 받은 사람으로부터 어떤 모순을 찾기 위해 재차 물었습니다. “그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소? 그가 어떻게 해서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소?”(요한9,26) 유다인들은 어떤 사건이 발생할 때 다양하게 여러 번 시험해 보는 심문을 극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경우는 진실을 덮기 위해서이고, 예수님께 죄를 덮어씌우기 위해서입니다.


가끔은 말을 하다가 말꼬리를 잡고 말의 본질을 흐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질에서 벗어나 꼬투리를 가지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그들의 모습은 오늘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유다인들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런 모습으로 살지 않도록 노력해 봅시다.


2.2.3. 치유 받은 이의 선포

① 치유 받은 이의 반격

이제 소경이었던 이는 분통이 터집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요한9,27)


남을 깎아 내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닌 듯 합니다. 결국 자기가 당하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유다인들은 심한 모욕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먼저 모욕을 가한 것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모욕을 받은 것 뿐 입니다. 모욕을 받은 이들은 소경이었던 이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그자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 29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오. 그러나 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오.”(요한9,28-29)


그런데 자신들을 변호하는 이 말 안에서 백성의 지도자들인 자신들이 소경이었던 이보다 못하다는 것을 시인하게 됩니다. 소경은 조금이라도 알아 뵈었지만, 백성의 지도자들은 전혀 못 알아 뵙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 입으로 고백한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서 오셨는지를 모릅니다. 모세에게 당신 말씀을 전하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모르고 있으니 어리석은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② 바리사이들을 가르치는 치유 받은 이

눈을 뜬 이는 이제 유다인들을 가르칩니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요한9,30) 신앙에 관계된 모든 것들을 분별하고 해결해주면서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하느님의 일을 식별할 줄 모르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르고 있는 것이 장점이 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잘못 알고 있는 것을 합리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모르고 있는 것들은 배워서 내 몸에 익히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또한 내 옆에 있는 이가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칭찬하고 격려하며 본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알고 있는 단순한 사실을 바리사이들에게 가르칩니다. 31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32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33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한9,31-33)


눈이 멀었다가 다시 뜨게 된 이는 자기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과 둘째,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 그는 이것을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의로운 이의 기도를 즐겨 들어주십니다. 소경이었던 이의 기도는 늘 보게 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응답을 예수님께로부터, 예수님을 통하여 받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는 이것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논리적으로 증거 합니다. 예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심을,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증거 합니다.


또한 이 소경이었던 이는 단순하게 말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평생 소경으로 살아온 사람의 신앙이 평생을 신앙을 연구하고 신앙생활 해온 사람보다 훨씬 낫습니다. 진리란 복잡함에서 오지 않고 단순함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소경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의심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안 들어주시지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확고한 사실은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는데 성경을 공부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니 소경이었던 그는 답답했을 것입니다.


또한 어찌 보면, 이것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무지한 사람이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아주 작은 꼬맹이라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을 모른다고 우기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하는 이들에게 새 영세자들이 가르치는 것일 수 있고, 봉사직무를 맡고 있는 이들에게 아무 직무를 맡지 않은 신자들이 가르치는 것일 수 있고, 사제와 수도자들에게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평신도들이 가르치는 것일 수 있습니다.


③ 받아들이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의 행동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요한9,34) 하면서 소경이었던 이를 쫓아냅니다. 바리사이들은 그가 소경으로 태어난 불행을 부모의 죄로 돌리고, 그를 하느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자로 몰아세웁니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자신들의 부족함이 보이자 분노를 터뜨리는 사람들. 이 모습은 일상생활 안에서 많이 들어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아이들을 혼내는 부모님들의 모습 안에서. 말문이 막혔을 때 배우자를 공격하는 모습 안에서…, 그래서 이제는 내 옆에 있는 이들에게 화를 낼 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당신이 잘못해서라기보다는 내가 부족해서 화를 내는 것입니다.”


2.3. 예수님을 만난 치유 받은 소경

①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쫓겨난 소경이었던 사람을 만나시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요한9,35) 그는 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이 죄인이라 하더라도 그가 체험한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치유해주신 “사람의 아들”이심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요한9,36)라고 청합니다. 그는 눈앞에 계신 예수님을 아직 알아 뵙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요한9,37)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소경이었던 그에게 충만한 믿음을 갖도록 분명하게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② 믿음을 고백하는 치유 받은 소경

이제 소경이었던 그는 “사람의 아들로 자신을 계시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게 됩니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9,38) 육신의 눈을 뜬 그는 믿음의 눈까지 뜨게 됩니다. 이제 그는 예수님께 경배합니다. 경배한다는 것은 꿇어 엎드린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만 드릴 경배자세를 예수님 앞에서 취함으로써 예수님을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되신 분, 곧 구세주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매일 우리는 주님께 기도합니다. 주님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주님의 일을 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소경이었던 그는 기도의 응답을 얻었고, 예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이제는 내가 할 차례입니다. 주님이심을 알아 뵙고 있기에 주님께 입으로만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지 않고, 주님 앞에 꿇어 경배하며, 온 마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저의 주님이심을 굳게 믿습니다.”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만의 고백이어서는 안 됩니다.


2.4.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왜 세상에 오셨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9,39) 이 말씀처럼 예수님의 자비로 소경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본다고 자처하는 이들(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은 눈이 멀어 예수님을 알아 뵙지 못하였습니다. 태생소경은 예수님으로 인해 육신의 눈 뿐 아니라 신앙의 눈까지 뜨게 되었으나 외적으로 볼 수 있는 자들(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은 영적이고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소경이 된 것입니다.


“참으로 본다는 것”은 하느님 빛의 영역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영역은 믿음을 통해서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빛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결국 보지 못하게 되고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심판자이신 예수님을 알아 뵙지 못하는 이들, 즉 “빛을 거부하고 어둠의 자녀가 되는 이들”은 결국 눈먼 자가 되어 멸망으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① 불평하는 바리사이들

예수님께서 눈먼 자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몇몇 바리사이가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요한9,40)하고 질문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소경인지를 모르고 있기에 이렇게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치유행위를 보고도 믿지 못하고 있으니 소경이 틀림없습니다. 소경이었으나 이제는 볼 수 있는 그를 보고도 믿지 않았으니 눈 뜬 장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눈은 있으되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습니다.


②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씀은 아니겠지요?”라고 말하는 이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9,41)고 말씀을 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이 “본다.”고 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본다.”고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본다고 자처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예수님을,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니, 그들은 보지 못하는 것이고, 그들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과 고집에 사로잡혀 있는 한 그들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코 하느님의 일을 볼 수 없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신앙인이면서도 계산하고, 내 것 만을 챙긴다면 나는 아직 소경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좀 더 정확한 계산을 해야 합니다. 좀 더 잘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것을 볼 수 있고, 빛 안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② 사람들은 치유 받은 소경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른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형제자매들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그와 함께 기뻐해 줄 수 있을까요?


③ 나는 보는데 상대방은 못 보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알고 있는데 상대방은 알려고 하지도 않고, 모르면서 아는 체 하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보아야 하는데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내가 모르면서도 아는 체 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4. 공지사항

① 내 옆에 있는 이의 기쁨을 함께 기뻐해 주기

② “주님! 저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기 위해 노력하기

③ 참된 것을 보기 위해 마음의 눈을 활짝 열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이 글은 카테고리: 가해(말씀과놀이,2), 말씀과 놀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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