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늙은 순례자

 

두 늙은 순례자




< 원작 / 톨스토이 >




때 




어느 따뜻한 봄날부터




곳 




19세기 러시아의 어느 농촌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나오는 이들 




엘리세이, 에피임, 사나이, 사나이의 아내, 할머니, 사내아이, 소녀, 여인1, 여인2, 순례자 1




막이 열이면




             무대 불이 켜지기 전 조용히 음악이 흐른다.




             그랬더니 그 여자는 “과연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은 저 산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렸는데 선생님네들은 예배드릴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말을 믿어라. 사람들이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에 ‘이 산이다’ 또는 ‘예루살렘이다’하고 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배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예배드리는 분을 잘 알고 있다. 구원은 유다인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요한 4,20-24)








– 제 1 장 –




            (聖地의 그림이 무대 뒷면을 가득 메우며 세워져 있다. 그림은 아득히 멀리에 聖殿이 보이고 그 성전으로 향하는 길이 무대쪽으로 점점 넓어져 있으면 된다. 성전 조금 비켜 위에는 반쯤 위쪽이 잘려진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고 전체적으로 성스러운 분위기가 감돌면 좋다. 전조명이 들어오기 전 무대 오른쪽에 불이 들어오면 엘리세이 보도로프 등장한다. 그는 중키에다 대머리이며 50세 후반에서 60세쯤의 나이에 평범한 옷차림이다. 별로 부유해 보이지는 않으나 명랑해 보이는 얼굴이다.




엘리세이     제 친구 에피임 탈라스비치 세베료프는 돈많은 지주입니다. 그는 착실하고 진실된 사람이죠.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는답니다. 두 번이나 이장직에 있으면서 단 한건의 실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지금 두 아들과 손주들과 함께 살고 있답니다. 




             무대 오른쪽 불이 꺼지고 무대 왼쪽에 불이 들어온다. 에피임이 등장. 그는 몸이 건장하며 나이는 엘리세이와 비슷하고 잘 차려입어 단번에 그가 부자임을 알 수 있다. 턱수염이 아주 인상적이다.




에 피 임     엘리세이 보도로프는 제 친구입니다. 그는 그리 넉넉하지 못하죠. 예전에는 목수일을 했지만 지금은 꿀벌을 치고있습니다. 한 아들은 벌이를 떠났고 다른 아들은 집안을 돌보고 있지요. 이 친구는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웁니다. 노래 부르는 것을 무척 좋아하지요.


엘리세이,


에 피 임     우리는 벌써 오래 전부터 함께 순례의 길에 오르자고 약속했습니다.


             두 사람 같이 무대 가운데로 간다.




엘리세이     여보게 이젠 순례의 길을 떠나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지난번엔 손자놈 장가만 보내고 나면 떠날 수 있다고 하고 선 이제 또 집을 지어야 한다니…


에 피 임     조그만 더 기다려 주게나. 지금 집을 다시 고쳐 짓는 중이라서


엘리세이     내 생각으로는 지금이 제일 좋을 땐 것 같네. 봄철이라 날씨도 따뜻               하고


에 피 임     시작한 일은 끝내놓고 가야할 게 아닌가?


엘리세이     아들에게 맡기게나


에 피 임     안심이 되지를 않네


엘리세이     어차피 우리는 먼저 죽을 몸이야. 아들에게 맡기고 어서 순례를 떠나               도록 하세


에 피 임     하지만 노자도 문제야. 집을 새로 짓는데 돈이 많이 들어서 한 푼도 여유가 없네. 최소한 100루블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엘리세이     자네는 나보다 10배나 수입이 좋지 않은가? 그런데도 돈 걱정을 하고 있다니 나는 수중에 한 푼도 없지만 노자 걱정은 하지 않는다네


에 피 임     그렇다고 빈 손으로 떠날 수야 없지 않은가?


엘리세이     난 집에 있는 돈을 전부 긁어모을 생각이야. 그래도 모자라면 꿀벌을 열통쯤 팔아서 보탤 셈이네.


에 피 임     (놀라면서) 나중에 후회하게 되지 않겠나?


엘리세이     후회한다고? 이 세상에 후회할 일은 죄밖에 없어. 우리 영혼의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나?


에 피 임     하긴 그래. 그래도 집일이.


엘리세이     더 미루지 말고 어서 길을 떠나도록 하세.




– 제 2 장 –




             엘리세이, 에피임, 순례의 길을 떠나는 차림으로 등장, 어깨에 각각 배낭을 하나씩 메고 그 위에 모포도 얹혀 있다.




에 피 임     역시 자네 말이 맞았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하느님 뜻이지. 살아 있는 동안에 순례의 길을 떠나는 게 옳은 일이야. 난 내가 저금했던 돈 중에서 100루블을 찾았네. 나머지 100루블은 마누라에게 맡겨 두었지. 자네 여비는 충분한가?


엘리세이    충분할 수야 있겠나? 여비를 마련하느라고 하는 수 없이 꿀벌 열통을 팔았다네. 그래도 부족한 걸 마누라가 비상금까지 보태지 않았겠나. 아, 그리고 우리 며느린 제 결혼반지까지 빼주네 그려.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왔네. 모두들 돌아올 때까지 건강하기 만을 바랄 뿐이네.


에 피 임     난 이렇게 떠나긴 하네만 집안 일이 걱정이 되서 견딜 수가 없네. 맏아들 놈에게 풀을 베야 한다. 비료는 적절하게 날라야 한다. 새집은 이렇게 창문은 저렇게 달아야 한다. 하고 상세히 일러 놓고 오긴 했네만 도무지 안심이 되질 않아. 아들놈이 시킨대로 잘 해 낼까?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집에 가서 확인을 해보고 싶으이.


엘리세이     너무 걱정하지 말게. 난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았네. 그래도 집안 일은 조금도 염려가 되질 않네. 모두들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잘 해 나가리라 믿고 있지. 자, 우리, 가족들에게 손이라도 흔들고 떠나세. 멀리서라도 볼 수 있게 말일세. 안녕.


             엘리세이, 에피임 손을 흔들며 퇴장한다.




– 제 3 장 –




             엘리세이 에피임, 오랜 노정에서의 피로가 엿보인다. 에피임은 아직도 건강하나 엘리세이는 많이 지쳐 있다. 천천히 무대 위로 걸어 나온다.




엘리세이    여보게, 잠시만 쉬었다 가세 그려. 자네를 따라 가려니 무척이나 힘이               드는구먼


에 피 임    그러세. (두사람 앉아서 쉰다.)


엘리세이    벌써 우리가 꽤 많이 왔나 보네. 두 지방이나 지났지 아마. 그 소러시아 지방 사람들은 정말 친절했네. 잠자리는 물론 식사까지 그냥 대접해 주지 않았나.


에 피 임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야. 우리가 돈을 내려니까 “아, 돈은 그만 두세요. 순례자들을 만나게 된 것만도 큰 기쁨입니다.” 이러면서 도시락까지 그냥 싸 주었지. 덕분에 노자가 많이 절약되었네 그려.


엘리세이    하지만 그 다음 지방 사람들은 정말 안됐네. 흉년이 들어도 그렇게까지 비참할 수가 있을까  원. 돈을 주고도 빵 한 조각 살 수 없었으니.


에 피 임    아~ 짚과 풀까지도 뜯어먹는 형편이라지 않던가. 더 말해 뭣하겠나. 그래도 우리는 한 조각이나마 빵도 샀고 부지런히 걸어서 이 지방에까지 왔으니 다행이지 뭔가.




            엘리세이 담배를 피워 문다.




에 피 임    (언짢은 표정으로) 자네. 제발 담배를 끊어 버릴 수 없겠나?


엘리세이    담배를 끊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담뱃대를 두고왔네만 끝끝내 유혹에 저버리고 말았네. 어쩔 수가 없어. 여보게 어디가서 물이라도 마시고 가세. 목이 말라 견딜 수가 없네.


에 피 임     난 쉬고 싶지 않은 걸.


엘리세이     그럼 자네 먼저 가게. 난 저기 저 집에 가서 물 한 모금 얻어 먹고 곧 뒤 쫓아갈테니


에 피 임     그러게










– 제 4 장 –




             엘리세이 등장하는 쪽에 한 사나이 쓰러져 있다. 며칠을 굶은 듯 얼굴에 핏기가 없어 보이며 옷차림 또한 몹시 남루하다.




엘리세이     여보세요. 지나가던 순례자입니다. 물 한 모금만 얻어 먹을 수 있겠습               니까?




             사나이 움직이지 않는다.




엘리세이     병에라도 걸렸나? (사나이를 흔들며) 여보세요, 정신차리세요.


사 나 이     (겨우 정신을 차리며) 우린 병에 걸렸어요. 먹을 것도 없고 애들과 늙으신 어머님도 배가 고파 거의 죽게 되었어요. 아내는 이미 제 정신이 아니지요.




             사나이 흐느껴 운다.




엘리세이     진정하세요. 제게 마침 빵이 조금 있어요. (배낭을 열어 빵을 꺼내 놓으며) 이걸 애들에게 주세요. 그리고 이건 할머니께 드리구요. 아주머니껜 이걸 드리세요. 제가 비상시에 쓸려고 준비해 둔 겁니다.


엘리세이     (일어나서 독백으로) 스프를 끓여야겠군. 옥수수, 소금, 아 그리고 밀가루와 버터도 있어야겠는데 내 돈으로라도 가게에 가서 사와야겠구나.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지. 그러면 장작부터 패야 하는데. 이거 일이 무척 많겠는걸 서둘러야 겠다.




– 제 5 장 –




             무대 오른쪽 불이 들어오면 엘리세이 양손에 물통을 들고 앞치마를 두른 모습으로 급하게 들어온다.




엘리세이     이제 겨우 한 숨 돌리 수 있겠구나. 세상에 이렇게 불쌍한 사람들도 있었다니. 모두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참이라니, 가만(손가락을 꼽으며) 밀가루 반죽도 했고 집안 청소는 이제 끝났고 연장도 다 고쳤고 이 물만 길어 다 놓으면 되겠구나. 마침 오늘이 즐거운 축일인데 이 댁 아주머니께서도 정신을 차렸으니 정말 다행이야.




             조명 밝아지면 무대 한 편에 식탁이 놓여 있고 할머니, 부인, 여자 아이, 남자 아이 식탁 주위에 앉아서 밝게 웃고 있다. 식탁 위에는 음식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다.




할 머 니     정말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댁이 아니시라면 우린 벌써 죽은 목숨이지요. 가난하긴 해도 근근히 살아 왔는데. 아 이번 흉년으로 가을부터 먹을 것이 떨어져 봄이 되었을 땐 쌀 한 톨 집안에 없었다오.


부    인    며칠동안 풀을 뜯어 먹다가 병까지 걸리게 되었지요. 어쩔 도리가 없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지 뭐에요. 그래도 우린 괜찮다 치고 어린 것들이 불쌍해서 눈을 감을 수가 없었는데


엘리세이     자, 이젠 지난 일을 생각지 마시고 우선 건강이나 되찾으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아주머니께서 기운을 차리셔서 정말 기쁩니다.


부    인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여자아이     아저씨, 우리랑 같이 놀아요.


사내아이     아저씨 우리 노래해요.


엘리세이     그래, 그러자꾸나 (두 아이의 손을 잡으며 ) 자, 아저씨하고 같이


            노래할까?




             소녀와 사내 아이 엘리세이 손을 잡고 춤을 추며 노래한다.




엘리세이     하하하




             소녀, 사내 아이 즐겁게 웃고 할머니와 부인은 식탁에 앉아 손뼉을 쳐준다. 노래 끝날 쯤에 사나이 등장한다. 사나이 건강한 모습이나 침통한 표정으로 식탁에 와서 고개를 떨군다.




부    인     아니, 여보 왜 그런 얼굴을 하고 계세요? 지주한테 갔던 일이 잘 안               되었나요?


할 머 니     얘야, 저당 잡힌 목장하고 우리 땅을 찾아 오겠다더니 일이 잘 안된               게로구나.


사 나 이    (식탁에 고개를 박고 주먹으로 식탁을 치며 흐느껴 운다.) 이젠 다 틀렸어요. 우린 망했어요. 돈을 다 갚기 전에는 목장도 땅도 내 줄 수가 없대요. 앞으로 우린 어떻게 살아야하죠?




             모두 침울한 얼굴로 사나이를 쳐다 본다. 엘리세이 무대 앞쪽으로 걸어 나온다. 조명이 엘리세이에게 떨어진다.


엘리세이     (혼자말로) 이젠 정말 길을 떠나야 할텐데. 그 동안 돈도 너무 많이 썼고 시간도 지체되었어. 하지만 이 불쌍한 사람들을 두고 어떻게 떠나지. 그래, 내일은 이 사람들에게 목장과 땅을 되찾아 주자. 이 불쌍한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내가 순례를 떠난다면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거야.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내 순례보다는 불쌍한 이들을 도와주는 것을 더 기쁘게 여기실거야. 그래 먼저 이 사람들을 도와주어야겠다.




– 제 6 장 –




여   인1     글쎄 처음엔 그분이 도대체 누군지 몰랐다는구료. 그저 지나가는 순례자거니 했대요. 그런데 세상에. 그분이 그런 일을 했다지 뭐에요.


여   인2     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 놓고 지주한테 저당잡힌 목장과 논밭을 되찾아 준 것만도 고마운 일인데 아 글쎄 말 한 마리와 마차까지 사주고 갔다지 뭐에요.


여   인1     그런 좋은 일을 해 놓곤 슬그머니 사라지셨다니. 아마도 그분은 주님께서 보내신 천사임에 틀림없어요.


여   인2     정말 천사에요. 천사. 아니? 어쩌면 그분은 예수님 바로 그분이신지도 몰라요.




             여인들 퇴장하고 엘리세이 들어와 무대에 앉는다.




엘리세이     나무 그늘에 앉으니 정말 시원하구나. 한참을 걸었더니 피곤한 걸. 돈이 얼마나 남았는지 세어 봐야겠다. (지갑을 꺼내 세어본다. 실망한 듯) 겨우 17루블 뿐이구나. 이 돈으로 예루살렘까지 가기에는 어림도 없어.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팔아 구걸을 할 수도 없고 이번에 못 가면 아마 살아 생전에 다시 순례의 길에 나설 수 없을텐데. 아마 에피임이 내 몫까지 경배를 드리고 오겠지. 그리고 주님은 자비로운 분이시니 날 용서하실거야. 되돌아서 집으로 가야겠다.




             엘리세이 퇴장했다가 다시 등장한다. 등에는 벌통을 하나 지고 있다.




엘리세이     내가 없는 동안에도 집안에 아무 일이 없었다니 다행이야. 농사일도 때맞춰 잘 해 나가고 있고 식구들도 화목하고 무엇보다도 모두가 건강하니 더 바랄 것이 없구나. 모두가 하느님의 배려 덕분이야.




             성호경을 그으며 감사송을 바친다. 퇴장


             여인들 등장


여   인1    거 소문 들었수? 아 글쎄 순례 떠났던 엘리세이 영감님이 그냥 돌아왔다지뭐요. 돈을 다 써버리고서 말이야.


여   인2    어째서 그런 바보같은 짓을 했을까요?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성지순례를 도중에서 포기하다니.


여   인1     그러게나 말이유 원 참, 그러니 에피임 영감님은 대단한 분이시죠. 도중에 돌아오는 사람도 있는데 끝까지 묵묵히 가셨다니.


여   인2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순례자시죠. 암 그렇고 말구요.




– 제 7 장 –




             에피임. 많이 초췌해진 모습이다. 천천히 걸어 나온다. 그때 한 순례자가 그 옆을 지나친다.




에 피 임     거 여보슈, 혹시 대머리 노인네를 못 보셨소? 벌써 이틀 전에 이 곳에 도착해서 찾았지만 영 찾을 수가 없구료. 오뎃사에 가면 찾을수 있으려나.


순 례 자1    여기가 바로 오뎃싸입니다. 노인장 어딜 가시는 길이요?


에 피 임    보아하니 순례자이시군요. 나도 예루살렘에 순례를 떠나는 길입니다. 원래 동네 친구하고 같이 출발했었는데 도중에서 그만 친구를 잃어버렸지 뭡니까?


순 례 자1    아, 그래요. 이거 안됐군요. 나도 거기까지 가는 길인데 동행해 가면서 찾아 봅시다. 난 벌써 두 번째 순례길이라 동행하면서 여행안내를 해드리지요.


에 피 임     아휴 이거 정말 고맙습니다. 안 그래도 친구를 잃고 혼자 가려니 적적하던 참이었는데.


순 례 자1    이곳에서 콘스탄티노플 가는 배를 타야 합니다. 아마 한 닷새면 도착할 겁니다. 그런데 노잣돈은 충분하신가요? (교활한 웃음을 지으며 얼굴을 가까이 대고) 어떻습니까? 제가 공짜로 배를 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드릴까요?


에 피 임     (딱딱한 표정으로) 아닙니다. 돈을 정식으로 내고 타겠습니다. 그 때문에 배삯을 준비해 왔는걸요. (뱃고동소리) 저기 항구에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배가 들어 온 것 같군요.


순 례 자1    그런가 봅니다. 자, 항구쪽으로 갈까요?




             순례자1 한쪽에서 잠들어 있디. 에피임 그 옆에서 자기 배낭을 꼭 움켜 쥔 채 앉아 있다.


             에피임쪽에 조명이 켜지고 폭풍우 몰아치는 소리,


             배가 흔들리는 소리




에 피 임     갑자기 왠 폭풍우람. 처음 하루는 그렇게 바다가 잔잔할 수 없더니 벌써 몇칠짼가? 그나저나 이렇게 사람들이 많으니 돈주머니 때문에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없는걸. 그러니 이렇게 배낭을 꼭 껴안고 있을 수 밖에.




– 제 8 장 –




             무대 앞쪽에 흰 천으로 제단이 쌓여지고 무대 뒤쪽에 순례자1과 에피임이 꿇어 앉아 있다. 예수님의 무덤 교회안




순 례 자1    세베료프씨, 간밤엔 잘 주무셨나요? 어제 한꺼번에 너무 여러 곳을 돌아보느라 피곤하셨겠습니다.


에 피 임     아닙니다. 안내까지 해주시느라 저보다 더 피곤하실텐데 저도 놀라서 잠을 제대로 못잔걸요. 어쩌지요. 지갑을 통째로 도둑 맞았으니?


순 례 자1    (개의치 않다는 듯 웃으며) 하하하 괜찮습니다. 난 원래 재물에 초탈한 사람이라서요. 순례자들이 벌써 많이 모였군요.


에 피 임     제 평생에 요즘처럼 감격스러운 순간은 없었을 겁니다. 성모님께서 아기 예수님과 함께 피신하셨던 동굴, 골고다 언덕, 예수님께서 묶이셨던 기둥, 못자국이 생긴 바위 등 그 모든 곳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 같으면서도 왠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고 불편해 지는 건 왜일까요?


순 례 자1    세베료프씨, 순례를 통해 은총을 받기엔 부족한 어떤 걸림돌 같은 게 당신 마음 속에 있나 보구료. 곧 미사가 시작되겠군. 어서 들어갑시다.




             잠시 후 성찬전례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린다. 순례자1, 에피임 곁에 바싹 다가 앉는다. 에피임 한발짝 순례자1 곁에서 떨어지며 혼자 말한다.




에 피 임     아, 제발 저 사람은 이제 그만 헤어졌으면 좋겠다. 저 사람은 순례를 목적으로 예루살렘에 온 것이 아닐지도 몰라. 돈지갑을 도둑맞았다는 것도 거짓말일거야. 아니 애초부터 23루블이란 돈을 갖고 있지도 않았겠지. 어제 낮에 내 돈을 1루블 꾸어가기까지 했는데 (몰래 고개를 저으며) 내가 미사 중에 왜 이런 나쁜 생각을 하는 걸까? 남의 일로 나쁜 생각을 하며 죄를 짓고 있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돈지갑에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데


             잠시후 에피임 팔로 손짓을 하며 허우적거린다.




에 피 임     아, 이상하다. 엘리세이 분명히 엘리세이였어. 사람이 너무 많아 놓치고 말았구나. 내가 돈지갑에 신경만 안 썼더라도 그 친굴 따라 잡을 수 있었을텐데. 그런데 그 친구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왔을까? 시내로 가서 찾아봐야겠다.




– 제 9 장 –




             에피임 혼자 무대에 꿇어 앉아 있다.




에 피 임     역시 내 짐작이 맞았어. 그자가 여관비도 안내고 줄행랑을 놓다니. 그나 저나 이젠 외톨이가 되었네. 곧 미사가 시작되겠지. (성찬의 전례 종소리) 오늘도 역시 뒷구석이구나. 이 기둥옆에 꼭 붙어 있어야지. 아니 저 앞에 저게 누구야 엘리세이야. 역시 엘리세이도 여기까지 왔구나.




             제단 앞쪽에 엘리세이 꿇어 앉아 있고 그의 머리 위에 조명이 비춰진다. 마치 그의 머리 위에 후광이 감도는 듯하다.


에 피 임    아니 엘리세이의 머리 위에 눈부신 후광이 감도는 구나. 그의 모습이 성자와도 같아 보이는군. 오늘은 꼭 놓치지 말아야지.


에 피 임    결국 또 엘리세이를 놓치고 말았구나.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왔는데 왜 엘리세이는 나오지 않는걸까? 내가 엘리세이를 놓쳤는지도 모르지. 워낙 사람이 많으니까




– 제 10 장 –




             에피임 등장, 피곤에 지친 모습, 길가에 앉아 있다.




에 피 임     집이 가까워지니 또 걱정이 되기 시작하는 걸. 새집은 다 지었을까, 가축은 탈이 없는지, 아들놈은 일을 다 제대로 해 놓았을까 불안해 지는데. (에피임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여기쯤 일거야. 엘리세이와 헤어진 곳이. 그 때는 황폐했던 마을이 이제는 풍요로와 보이는데. 날이 저무는구나.




             이 때 소녀가 뛰어 나와 에피임의 팔을 붙잡는다. 전보다 깨끗한 옷차림에 한결 명랑해 보인다.




소    녀     할아버지, 저희 집에서 주무시고 가세요.


에 피 임    아니, 아니다. 난 갈 길이 바빠. 그리고 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아요.


소    녀     아이~ 할아버지 이리 오세요.




             조명 밝아지면서 깨끗한 식탁에 할머니, 사나이 부인 사내아이 즐겁게 얘기하며 앉아있다. 에피임 소녀에게 이끌려 식탁으로 온다.




부    인    (웃으면서 일어선다.) 어서 오세요. 이 집에서 저넉을 드시고 주무시고 가세요. 자 이리 앉으셔요. 할아버지


에 피 임    아 고맙습니다. 처음 보는 나그네한데 이런 친절을 베풀어 주시다니. (에피임 빵과 스프를 먹는다.)


부    인     아닙니다. 저희가 친절한게 아닙니다. 우리는 한 나그네로 인하여 참으로 착하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거의 잊고 살았었지요. 흉년이 들어 가족들 모두가 굶어서 죽게 되고 병까지 걸리게 되자 오히려 하느님을 원망했었답니다. 만약 그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을 보내 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린 모두 굶어 죽었을 거예요.


할 머 니     그분은 어쩌면 사람이 아니라 천사였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가족 모두를 구해 주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이름조차 모른답니다. 대머리에다 평범하게 생긴 그분이 물 한 모금을 청했을 때 이 죄 많은 몸은 대꾸하기조차 귀찮아 했었지요. 그때 일이 눈에 선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보자 배낭을 여기 이렇게 내려 놓으시고는


소    녀     네 맞아요. 할머니 그 아저씨께서는 여기에 배낭을 내려 놓으시고 방을 치우셨어요.


사 나 이     그분이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죄의 상태에서 그대로 죽었을 겁니다. 우리는 낙심하여 사람들과 하느님을 원망하였지요. 그런데 그분이 오셔서 하느님을 알게 해주셨고 사람을 믿게 해주셨지요. (성호를 그으며) 오 주님, 그분을 보호해 주소서. 자 손님 피곤하실텐데 그만 주무셔야죠?


에 피 임    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여러분도 편히 주무세요. (에피임 무대 앞으로 나가면 조명이 그에게 비춰진다.) 틀림없는 엘리세이야. 그가 나를 앞질렀나보군. 하느님께서 내 순례를 기쁘게 받아 들이셨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엘리세이의 기도가 받아들여진 것만은 틀림없어.








– 제 11 장 –




             에피임 의복은 여행길 그대로, 화가 잔뜩 나 있다.




에 피 임     집이라고 와 보니 영 엉망이군. 그래 마누라란 맡겨둔 돈을 다 써버리고 아들놈은 술주정꾼이 다 되어 노름판에나 쫒아 다니고 농사는 엉망이고 소작료는 반도 못 거두었으니.


       


             엘리세이 건강한 모습으로 나온다.




엘리세이     여보게 에피임 자네가 순례를 마치고 돌아왔다는 얘기들었네. 어때 좋았겠지? 난 사정이 생겨서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네, 에피임!


             (엘리세이 앞에 털썩 꿇어 앉으며) 몸뚱이만은 잘 왔지. 하지만 하느님이 내 순례를 기쁘게 받으셨을지.


엘리세이     물론 기쁘게 받으셨을걸세.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에 피 임     (망설이면서) 몸뚱이는 다녀 왔네만 아무래도 영혼은 의심스러워.


엘리세이     다 하느님 뜻이라네. 모두가 하느님의 뜻이야.


에 피 임     돌아오는 길에 그 집에 들렀었다네 자네가 머물렀던 그 집에.


엘리세이     (깜짝 놀라 에피임의 말을 막으며) 다 하느님의 뜻이라네. 내 자네를 위해 꿀을 받아 두었네. 함께 우리 집으로가서 꿀이나 맛보세.




             엘리세이 먼저 들어간다.




에 피 임    (한숨쉬며) 내가 이제야 눈을 바로 뜬 것일까? 눈앞의 이익에 집착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한 게야. (정면을 바라보며) 하느님께서 엘리세이를 통해 내게 깨달음을 주셨어.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가난한 이웃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랑의 실천이었어.




             무대 조명 꺼지며 조용한 음악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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