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사랑: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
1. 말씀읽기: 마태오5,38-48
폭력을 포기하여라 (루카 6,29-30)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원수를 사랑하여라 (루카 6,27-28 ; 루카 6,32-36)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고 사랑으로 돌려주는 것. 누가 그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사랑!” 말로는 참으로 하기 쉬운 것이지만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굳은 결심과 큰 인내가 필요합니다. 물론 그 사랑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몸소 보여주셨고, 나 또한 하고자만 한다면 신앙의 힘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하고자 하더라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웃음으로 돌려줄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를 묵상해 봅시다.
2.1. 사랑하여라. – 동태복수법의 포기
구약에서는 “동태복수법”이 있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마태5,38)라고 하는 것처럼, 가해자가 피해자의 눈을 상하게 했다면 가해자의 눈을 피해자가 입은 상해만큼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똑같이 복수를 한다 하더라도 감정이 안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내 아들의 눈을 다치게 한 상대방에게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는 아버지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양쪽 눈을 다 멀게 하지 않겠습니까? 더 나아가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 복수심에 불타는 복수는 보복을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끊임없이 악순환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동태복수법은 금전적 보상제도로 대체되었고, 예수님에 의해 완전히 폐기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행과 학대를 당할 때 보복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2.2.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5,39)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음의 것들을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5,39-42)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힘들고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말씀해 주실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 이러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예수님께서도 나에게 그대로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① 누가 오른 뺨을 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먼저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5,39)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른 뺨을 때린다는 것은 오른손잡이가 손등으로 얼굴을 때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가장 모욕적인 행위였습니다. 랍비의 법에는 손등으로 남을 치는 행위는 특별히 수치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이 행위에는 두 배의 벌이 가해졌습니다. 하지만 그 모욕을 받아들이고 다른 뺨까지 돌려 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미는 무엇일까? 바보처럼 당하고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고방식, 하느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사고방식을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한대 맞았다고 해서 똑같이 때려준다면 그 모욕이 사라질까요? 그 수치스러움이 사라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분노의 씨앗을 심을 뿐입니다.
악인에게 똑같이 맞선다면 나 또한 악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그의 행동을 용서할 때, 그 모욕은 내 마음에 자리 잡지 않고, 분노의 씨앗도 뿌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때린 사람은 두 발 뻗고 자지 못해도, 맞은 사람은 두발 뻗고 잔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 맞은 사람은 바로 용서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게 오른 뺨을 때리는 이에게 왼뺨마저 돌려 대 주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것을 할 수 없을 것 같으니, 예수님께서는 몸소 인간이 되시어 용서를 베푸셨고, 모범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하면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빌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보복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행동을 보여 주셨으니, 이제는 내가 해야 할 차례인 것입니다.
②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마태5,40)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서로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은 재판을 걸어서 서로 자기 것이라고 우깁니다. 여기서는 이겨도 죄를 짓게 되고, 져도 죄를 짓게 됩니다. 둘의 관계는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관계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속옷을 빼앗으려는 사람에게 “그래 겉옷도 필요할 테니 이것마저 가지고 가거라.”라고 한다면 “얼씨구나”하면서 가지고 갈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는데 그렇게 할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그렇게 가져갔다 할지라도 내가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나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폭력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에게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는 것입니다. 설사 그가 다시 한 대를 치더라도, 더 요구한다 하더라도 그에 맞서서 또 다른 불의를 낳느니보다는 그것을 참아 받는 것이 훨씬 이익 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모두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넘치고, 후하게 갚아 주실 것이니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 분명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나를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해 주는 사람 또한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나를 학대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 또한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누가 내 뺨을 쳤을 때 다른 한쪽마저 돌려대 주는 사람, 겉옷을 빼앗겼을 때 속옷마저 내어 주는 사람. 대단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해 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를 미워하고 나를 박해하고, 피해를 주는 사람에게 잘 해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원수 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남을 비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라는 이 말씀. 참으로 어려운 말씀만 골라서 하고 있습니다. 분명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말씀하셨으니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하겠습니다. 지키는 시늉이라도 하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어느 동네에 아주 고약한 사람 둘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아주 고약한 구두쇠에 자린고비였고, 또 한 사람은 욕심쟁이에 자기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욕심쟁이인 사람이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던 땅을 구두쇠가 땅 주인에게 아주 헐값에 사들였습니다. 욕심쟁이는 그 땅을 내어주기 싫어서 전 주인에게 몇 년 동안 사용하겠다는 각서를 받았고, 대금도 미리 지불해 주었으니 못나가겠다고 하였고, 구두쇠는 자신이 땅을 살 때는 그런 조항이 없었다며 서로 소송을 걸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증인을 만들고, 계약서를 위조하며 몇 년을 소송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법적인 문제가 서로 걸려서 막대한 소송비용은 물론이요 형사처벌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은 “당신들 때문에 우리 동네가 이렇게 시끄럽게 되었으니 둘다 이 동네를 떠나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땅을 가지고 그렇게 싸운 그들은 동네에서 인심도 잃고, 돈도 잃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손해를 본 다음에야 비로소 욕심쟁이는 “그때 그냥 포기할 걸.”하고 후회하였고, 구두쇠는 “몇 년 더 사용하도록 내버려 둘걸.”하고 후회하였습니다. 그러나 결코 두 사람은 화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문제가 되었던 땅에 작은 비석을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문구를 본당신부님께 만들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본당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써 주셨습니다. “주면 행복해지거늘…,”
③ 누가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마태5,41)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이 말씀을 하실 때는 키레네 사람 시몬을 떠올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에 오르실 때, 로마군인들은 키레네 사람 시몬을 붙잡아서 그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로마군인들은 식민지 사람들에게 그런 것을 시킬 권리가 있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다는 것을 얼마나 크게 기뻐했겠습니까?
그러므로 누가 강제로 나에게 짐을 지워서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할 때, “네가 가자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해서 이천 걸음까지도 가 줄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가준다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발적으로 그를 도와주는 것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기억해 주실 것이고,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보상해 주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가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한 행동이기에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키레네 사람 시몬에게 얼마나 큰 은총을 주셨겠습니까?
복수를 하지 않고 사랑으로 포용해주며, 자신의 것을 내어주면서까지 주님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는 것, 폭력에 저항하지 않고 사랑으로 감싸 안아 주는 것. 이 모든 것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는 이라야 할 수 있고, 사랑이 가득 담긴 이라야 할 수 있으며,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이라야 할 수 있고, 주님의 은총이 있어야 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것들, 기도하지 않으면 결코 실천할 수 없는 것들을 예수님께서는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 혼자 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슴에 온전한 사랑을 담고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기도하면서 그 사랑을 실천하려고 할 때, 나머지 것들은 주님께서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나는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도저히 못하겠다는 마음과 내 힘으로 하겠다는 마음”을 버릴 때, 주님께서는 내 안에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자리 잡게 해 주시며, 열정이라는 은총을 끊임없이 쏟아 부어 주실 것입니다.
④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마태5,42)고 하십니다.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의롭지 못한 이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게 주면 다시 채워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넘치도록 후하게 채워 주실 것이기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날, 낯선 자매가 사제관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남편은 아파서 일을 못하고, 아이가 병원에 가야 하는데 돈이 없다고, 돈을 좀 빌려 달라고…, 그 자매가 거짓을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그 자매의 손에 돈을 쥐어 주는 것. 그리고 한 마디 해 주는 것.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 보세요.”라고 말 하는 것. 그 모습이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까요?
알면서도 당해줄 수 있는 사람들. 신앙인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렇게 형제자매들에게 다가간다면, 형제자매들도 어느 순간 변화되게 될 것입니다. 그가 변화가 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그를 어떻게 해서든지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굳게 믿고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실 것입니다.
또한 필요한 이들에게 내 것을 내어 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움켜잡기만 하는 사람을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인은 자신이 움켜잡은 것은 놓을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조금 내 놓고,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산다.”고 입으로 떠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느 날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발견한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동네에서 평이 안 좋은 아이랑 둘이 놀고 있는 자신의 아이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꾹 참고서 집에서 아이를 기다렸습니다. 아이가 들어오자 어머니는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너는 왜 그렇게 좋지 않은 그 녀석과 놀고 있는 거냐? 그 애가 얼마나 버릇이 없는 애 인줄 알고 있어? 다시는 그 녀석과 놀지마…”
그러자 아이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그건 나도 알고 있는데 내가 안 놀아 주면 그 애는 놀 친구가 하나도 없어…,”
2.3. 원수를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그와 함께 있기를 원하며, 그에게 잘 대해줍니다. 그런데 참된 사랑은 그것이 아님을 알려주십니다. 그 사랑은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나를 박해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5,43-44)
① 이웃 사랑
구약에서는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이 있었으나 이웃이란 유다인에게 있어서 오직 유다인들 만을 가리켰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주시면서 강도당한 사람에게 누가 이웃이냐고 질문하셨을 때 율법학자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하지 않고,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던 것입니다.
사실 모세와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사람은 될 수 있는 한 이방인과 교제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과의 교제를 통해 우상숭배로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의 명령이 이방인을 미워하는 하나의 구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이웃으로 바라보지 않았고, 자비를 베풀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 그들을 속여도, 그들로부터 물건을 훔쳐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아마 그래서 지금도 유다인들은 그렇게 무자비하게 보복을 하고, 자기 민족만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더 나아가 박해를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가르치신 모든 것을 삶의 모범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박해하는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의 죄를 슬퍼하며,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내 사랑의 범위도 커져갈 것입니다.
② 하느님의 자녀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들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다음,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5,45ㄱ) 그리고 내가 사는 이유도 설명해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마태5,45ㄴ) 내가 지금껏 이렇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의인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내가 악인이어도, 내가 불의를 저질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그렇게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녀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녀”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내는 자녀들입니다. 하늘이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처럼,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들의 의로운 모습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려야 합니다. “역시! 신앙인인은 달라.”라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히 빛나게 됩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주어진 일들을 성실하게 수행하면 수행할수록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은 거룩히 빛나게 됩니다.
둘째, 사랑과 자비와 용서로 통치하시는 아버지의 나라를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자비와 용서로 당신의 통치를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들이 사랑과 자비와 용서 안에서 살아가고, 그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낼 때, 세상 사람들은 나를 보고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할 것입니다.
셋째, 아버지의 말씀에 언제나 “예”하고 순명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먼저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해야 할 일에 “예”하고 순명하며, 하지 말아야 할 일에서 발길을 돌립니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명할 때, 하느님의 뜻은 나를 통해서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의 순명으로 이 땅에서 당신의 뜻이 펼쳐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넷째, 형제자매들의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알고 있기에 주님의 자녀들은 언제나 한 끼의 식사 앞에서도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양식만을 청하지 않고, 형제자매들의 양식도 청하며,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 줍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느님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형제자매들의 잘못을 먼저 용서해 주고 용서를 청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고, 용서를 청합니다. 그리고 용서받는 것을 알고 있기에 용서해 줍니다. 또한 용서해 주지 않으면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기에 먼저 용서해줍니다.
여섯째, 유혹을 피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유혹과 싸우면 이길 확률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피하는 것이 결국 유혹을 이기는 방법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요셉이 포티파르의 아내에게서 도망치듯 그렇게 유혹에서 도망칠 때, 유혹을 물리치고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악을 멀리하려는 사람들입니다. 내 힘으로는 악에서 나를 구할 수 없기에, 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나를 이끌어 주시기를 청하며, 악을 가까이 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께만 매달립니다.
여덟째, 아버지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를 바라며, 자기 자신 또한 그것을 원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아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자녀들은 늘 기도하는데, 그것을 빈말로 하지 않습니다. 내가 고백한 믿음을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그 믿음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고백하는 이 모든 내용들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로 고백하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사랑하고 용서하며, 내어주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그렇게 해 주시니, 나 또한 주님께 그렇게 드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당연히 하느님의 자녀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고, 이렇게 살아가야 되는 것을 알고 있기에 주님의 은총을 청하면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2.4. 하느님의 상을 받는 방법
① 모든 이를 사랑하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녀들은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함을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마태5,46) 하느님께서 이유가 있어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무조건 사랑하시는 것처럼, 나 또한 내 옆에 있는 이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바라보며 사랑해야 합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내가 받을 상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받지 못할 사람은 없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사람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그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랑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본당에 성격이 고약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 형제를 피하는데 유독 베드로 형제만이 성격이 고약한 요셉 형제와 친하게 지냈습니다. 어느 날, 신부님께서 베드로 형제에게 물었습니다.
“베드로 형제님은 요셉 형제와 친하게 지내시는데,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별 것 없습니다. 집에서 같이 살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니 성당에서는 친하게 지낼 만 하더군요. 그 형제 아내나 자녀들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형제자매들을 사랑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의무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 보다 훨씬 쉽지 않습니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내 곁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비신앙인들도 자기들끼리는 그 누구보다도 친하게 지냅니다. 계원들끼리는 신앙인들보다 더 자주 만나고, 더 친하게 지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갖지 말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관심을 가져 줍시다. 다른 사람이 관심 기울이지 않는 이들에게도 관심을 가져 줍시다.
② 모든 이에게 인사하기
한 자매가 냉담을 하였습니다. 냉담 이유는 “성당에 가면 아는 체 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반겨주는 사람이 없고, “왔냐고 인사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자매의 냉담 얘기에 다른 형제는 “왜 인사를 받으려고 하느냐? 먼저 인사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그 사람 잘못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틀린 이야기 입니다. 처음 성당 나왔을 때 먼저 인사하기가 얼마나 쑥스럽습니까? 신앙의 이름으로 낯선 사람들이 모인 곳에 발을 들여 놓았다면 당연히 신앙공동체 안에서“따스함, 마음의 평화, 위해주고 반겨줌, 기도해 줌”등을 기대할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도 차갑게 다가오는 것이 현실입니다. 자기들끼리만 인사하고, 자기들끼리만 움직이고, 자기들끼리만 음식을 먹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성당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하고 발길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는 사람에게만 인사를 할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손을 내 밀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그를 처음 보았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형식적으로 하는 인사, 아는 사람에게만 하는 인사,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밖에 나오면 아는 체도 안하는 모습. 서로에게 관심 없고, 내가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갖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런 교회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사람들은 너무도 한정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상처받고 돌아서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무도 없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마태5,47) 그러므로 적어도 신앙인이라면 비신자들이 하는 것 이상으로는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간다면 먼저 와서 인사하고, 가시는 형제자매들에게 따뜻하게 인사하는 신앙인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가정방문을 하면서 기도해 주고, 어려움이 있으면 도와주는 신앙인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함께 성당에 오려고 노력하고, 참된 신앙의 벗이 되려고 노력하는 신앙인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③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기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완전함이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완전하시지만 어떻게 인간이 완전해질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완전함이란 사랑하는데 결점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데 결점이 없고, 내어주는데 결점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따르는 사람을 말하며, 주님과 온전히 일치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나를 박해하는 이를 위해 기도하며, 속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겉옷까지도 기꺼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사람은 된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가기 위해서 내가 용서해 줄 것만을 생각하지 않고, 내가 용서를 받고 있음만을 기억합니다. 내가 주님께로부터 받고 있는 것만을 기억합니다. 만원을 주면 일억을 주겠다고 하는데 안 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보잘 것 없는 것을 내어 주고, 감당할 수 없는 은총을 받아 누리는 이가 바로 나 자신임을 알 때, 내가 용서하고, 이해하고, 내어주는 것들은 아무것도 아님을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좀 더 너그러운 사람, 좀 더 자비로운 사람, 좀 더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며 기도하는 신앙인이 되고자 굳은 결심을 해 봅시다.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 봅시다.
그런데 “예수님! 이건 너무 어렵지 않습니까?”라는 불평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얘야! 그래서 내가 인간이 되었지 않느냐? 인간의 모든 고통을 나 또한 겪었단다. 네가 힘을 내고,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내가 먼저 해 보인 것이란다. 힘낼 수 있지? 내가 네 곁에 있지 않느냐?”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때 “예수님! 잘 안 들려요.^*^”하고 싶을 지라도, “예! 해보겠습니다.”하고 씩씩하게 응답하는 내가 되어 봅시다.
3. 나눔 및 묵상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② 나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요?
③ 내가 인사를 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이고, 내가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주님께서는 “내가 누구와 함께 하길” 원하실까요?
4. 알림 및 공지
① 나를 미워하고 괴롭힌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해 주기
② 형제자매들에게 먼저 인사하기
③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