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 제 24주일; 무자비한 종의 비유, 용서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1. 말씀읽기: 마태18,21-35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루카 17,4)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오늘 예수님께서는 진실한 기도와 용서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십니다.  용서한다는 것,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용서가 무엇인지를 삶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노력합시다. 그런데 진실하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참된 용서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몇 번을 용서하면 될까요? 어떤 사람을 용서해야 할까요? 오늘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이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고,“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봅시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에게 잘못한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를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일곱 번을 이야기 합니다. 일곱 번이라는 숫자를 이야기 한 것은 적어도 베드로사도가 용서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곱 번 용서한다는 것은 용서 할 만큼 했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기적으로 그러한 잘못을 되풀이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말씀을 이렇게 바꾸어 보면 어떨까요? “예수님! 저에게 잘못하는 형제가 있는데,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는 제게 용서를 청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형제를 제가 일곱 번 까지 용서하고 그 다음 여덟 번째는 한대 때려도 될까요?”^*^



랍비들은 “세 번까지만 용서해 주면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세 번까지만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 생각해서 인간들도 세 번까지만 용서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될 것입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한없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어떻게 무한히 용서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바꿔 생각해보면 이 말씀은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용서해 주시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로움을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드러내고 계십니다.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용서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내 형제를 용서한다면 하느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타이를 때 받아들일 마음이 없거나, 그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고 나에게 화를 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상처를 주는 말 중의 하나가 “내가 너랑 친해서 하는 말인데 너는 그것이 나빠!”이 말이 큰 상처를 준다고 합니다. 충고할 때도 사랑으로 해야 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아닌 것을 옳다고 말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그 형제를 얻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형제적 사랑을 가지고 책망을 통해서 그를 회개하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들이 해야 할 몫입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니 그것을 마다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그가 용서를 청한다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번만 용서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예수님도 나에게 그렇게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내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해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예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공동체에서 잘못하고서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 공동체가 모여서 기도를 한다면, 그가 공동체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를 한다면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공동체가 모여서 기도하니, 당연히 그에 대한 “서운함”등은 모두 용서했다는 것이 전제가 되고, 용서하려 한다는 것이 전제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느님께서 외면하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돌아와서 전혀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당에서 보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또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본당신부님이 바뀌시면 또 나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의 본성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나오는 것을 막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인사도 해 주고 반겨줍니다. 그리고 또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덤비고 욕하고 안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을 용서하고,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도 힘이 듭니다. 신앙인의 자비를 역이용하는 사람을 끝까지 지켜봐 준다는 것이 너무도 힘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공동체는 그를 사랑으로 받아들여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헤아리신 다면 감당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의 용서하심과 자비로우심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위로요 희망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용서하시고, 무한히 자비로우십니다.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남을 용서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고해성사를 보고 변화되지 않고 계속해서 같은 죄를 범해도, 용서를 청하면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용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위해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드십니다. 비유 자체의 배경은 고대 근동의 농지세나 로마제국의 세금 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근동의 왕들은 신하들을 일정 지역의 책임자들로 내세우고, 농지세를 받아 정해진 몫을 왕실에 바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왕과 종이 셈을 하는 이야기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일만 탈렌트는 커다란 액수입니다. 1데나리온 한 사람의 하루품삯이었고, 1 탈렌트는 6천 데나리온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5만원을 한 데나리온이라고 한다면, “5만원 * 6,000 * 10,000 = 엄청난 액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종이 어쩌다 이렇게 엄청난 빚을 왕에게 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종이 무능하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가뭄이나 홍수 등 천재지변으로 그가 관리하는 지역의 농부들이 한 해 농사를 망쳤기 때문에 약속된 세금을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종이 자신의 빚을 왕에게서 탕감 받은 다음, 다른 종의 멱살을 쥐고 빚진 돈을 갚으라고 윽박지르는 장면은 아마도 세금 하청을 맡긴 하급 관리에게 빚 독촉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좌우지간 이 종이 임금 앞으로 끌려 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세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그리고 임금에게는 뭐라고 말씀을 드리려 했을까요? 만일 나였다면 어떤 마음으로 임금 앞에 섰을까요?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마음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의 그 마음을 잊어버리면,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임금은 종에게 원칙대로 빛을 다 갚으라고 명령을 합니다.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그런데 아무리 처자식을 팔아도 어디서 그렇게 큰 돈을 마련하겠습니까? 이 종은 엄청난 빚과 임금의 명령 앞에서 “엎드려 절하며” 간청을 합니다. 그는 시간을 달라고 청합니다.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애걸만으로 왕은 마음이 움직여서 빚을 탕감해 줍니다. 자비가 있는 왕의 모습입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빚을 탕감 받은 종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런데 그렇게 자비를 입은 종은 다른 사람에게는 자비롭게 대하지 않았고, 자신의 기쁨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그가 이런 곤경에 빠진 것이 그의 책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동료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그가 빚을 완전히 갚을 때까지 감옥에 처넣었습니다.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내가 받은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내가 받을 것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안 그러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멸망  뿐입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살다보면 “저런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마음 가지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분개를 합니다. 그 무자비한 동료의 잘못을 보면서, 자신들의 힘으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자 그들은 왕의 도움을 청합니다. 즉, 누군가가 무슨 잘못을 했을 때, 자신들의 힘으로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다른 이의 도움이라도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러바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이런 저런 행동들에 대해서 말을 만드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심어지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누군가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그들 분위기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안타까운 나머지”라는 단어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그것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하느님께 기도할 것임을 반드시 명심합시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자비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풀지 않은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악한 종아!” 이 말로 그 종의 죄가 드러나고, 이 말을 통해 임금이 그 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자비를 입었다면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주님께 자비를 청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하고, 지금까지 입은 자비까지도 빼앗겨 버릴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1)

임금의 자비로 말미암아 얻었던 것을 자신의 무자비를 통해 잃고, 이제 그가 자신의 동료에게 한 것처럼 그렇게 똑같이 심판을 받습니다. 그는 형리에게 넘겨집니다. “빚을 다 갚을 때까지”라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사실 그는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나 그렇게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나눠주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내 인생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는 주님께 자비를 청하고 살아가고 있고, 주님의 넘치는 자비를 입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내가 무자비한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면 결국 나는 “영원히 빚을 갚는 곳”(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용서하시고, 무한히 자비로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몇 번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끝없는 용서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 또한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다짐해야 하빈다. 내가 “마음으로부터 용서”를 베풀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용서한다면 하느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물론 쉬운 것은 아닙니다. 참된 용서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이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참된 용서를 하는 내가 되어, 주님께서 베푸시는 자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내가 늘 용서받고 있는 사람임을 기억하면서, 단 한 번이라도 참되게 용서를 해 줄 수 있는 내가 되어 봅시다.


3. 나눔 및 묵상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② 무자비한 종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런 모습의 내 모습을 성찰해 봅시다. 나는 어떤 면에서 무자비한 종과 비슷합니까? 그리고 어떻게 해야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③ 살아가면서 많은 잘못을 합니다. 내가 참된 용서를 청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어떻게 용서를 청하고 있습니까?



4. 공지사항

①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감사하기

② 약한 사람의 편이 되어 그와 함께 고통을 나누는 사람 되기

③ 용서하고 용서를 청하지 못하면 그 끝은 멸망임을 명심하며, 사소한 자존심은 버리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이 글은 카테고리: 가해(말씀과놀이,2), 말씀과 놀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가해 연중 제 24주일; 무자비한 종의 비유, 용서에 1개의 응답

  1. 관리자 님의 말: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1. 말씀읽기: 마태18,21-35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루카 17,4)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오늘 예수님께서는 진실한 기도와 용서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십니다.  용서한다는 것,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용서가 무엇인지를 삶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노력합시다. 그런데 진실하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참된 용서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몇 번을 용서하면 될까요? 어떤 사람을 용서해야 할까요? 오늘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이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고,“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봅시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에게 잘못한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를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일곱 번을 이야기 합니다. 일곱 번이라는 숫자를 이야기 한 것은 적어도 베드로사도가 용서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곱 번 용서한다는 것은 용서 할 만큼 했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기적으로 그러한 잘못을 되풀이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말씀을 이렇게 바꾸어 보면 어떨까요? “예수님! 저에게 잘못하는 형제가 있는데,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는 제게 용서를 청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형제를 제가 일곱 번 까지 용서하고 그 다음 여덟 번째는 한대 때려도 될까요?”^*^


    랍비들은 “세 번까지만 용서해 주면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세 번까지만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 생각해서 인간들도 세 번까지만 용서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될 것입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한없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어떻게 무한히 용서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바꿔 생각해보면 이 말씀은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용서해 주시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로움을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드러내고 계십니다.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용서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내 형제를 용서한다면 하느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타이를 때 받아들일 마음이 없거나, 그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고 나에게 화를 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상처를 주는 말 중의 하나가 “내가 너랑 친해서 하는 말인데 너는 그것이 나빠!”이 말이 큰 상처를 준다고 합니다. 충고할 때도 사랑으로 해야 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아닌 것을 옳다고 말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그 형제를 얻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형제적 사랑을 가지고 책망을 통해서 그를 회개하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들이 해야 할 몫입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니 그것을 마다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그가 용서를 청한다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번만 용서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예수님도 나에게 그렇게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내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해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예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공동체에서 잘못하고서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 공동체가 모여서 기도를 한다면, 그가 공동체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를 한다면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공동체가 모여서 기도하니, 당연히 그에 대한 “서운함”등은 모두 용서했다는 것이 전제가 되고, 용서하려 한다는 것이 전제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느님께서 외면하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돌아와서 전혀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당에서 보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또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본당신부님이 바뀌시면 또 나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의 본성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나오는 것을 막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인사도 해 주고 반겨줍니다. 그리고 또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덤비고 욕하고 안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을 용서하고,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도 힘이 듭니다. 신앙인의 자비를 역이용하는 사람을 끝까지 지켜봐 준다는 것이 너무도 힘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공동체는 그를 사랑으로 받아들여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헤아리신 다면 감당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의 용서하심과 자비로우심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위로요 희망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용서하시고, 무한히 자비로우십니다.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남을 용서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고해성사를 보고 변화되지 않고 계속해서 같은 죄를 범해도, 용서를 청하면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용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위해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드십니다. 비유 자체의 배경은 고대 근동의 농지세나 로마제국의 세금 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근동의 왕들은 신하들을 일정 지역의 책임자들로 내세우고, 농지세를 받아 정해진 몫을 왕실에 바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왕과 종이 셈을 하는 이야기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일만 탈렌트는 커다란 액수입니다. 1데나리온 한 사람의 하루품삯이었고, 1 탈렌트는 6천 데나리온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5만원을 한 데나리온이라고 한다면, “5만원 * 6,000 * 10,000 = 엄청난 액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종이 어쩌다 이렇게 엄청난 빚을 왕에게 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종이 무능하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가뭄이나 홍수 등 천재지변으로 그가 관리하는 지역의 농부들이 한 해 농사를 망쳤기 때문에 약속된 세금을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종이 자신의 빚을 왕에게서 탕감 받은 다음, 다른 종의 멱살을 쥐고 빚진 돈을 갚으라고 윽박지르는 장면은 아마도 세금 하청을 맡긴 하급 관리에게 빚 독촉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좌우지간 이 종이 임금 앞으로 끌려 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세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그리고 임금에게는 뭐라고 말씀을 드리려 했을까요? 만일 나였다면 어떤 마음으로 임금 앞에 섰을까요?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마음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의 그 마음을 잊어버리면,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임금은 종에게 원칙대로 빛을 다 갚으라고 명령을 합니다.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그런데 아무리 처자식을 팔아도 어디서 그렇게 큰 돈을 마련하겠습니까? 이 종은 엄청난 빚과 임금의 명령 앞에서 “엎드려 절하며” 간청을 합니다. 그는 시간을 달라고 청합니다.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애걸만으로 왕은 마음이 움직여서 빚을 탕감해 줍니다. 자비가 있는 왕의 모습입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빚을 탕감 받은 종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런데 그렇게 자비를 입은 종은 다른 사람에게는 자비롭게 대하지 않았고, 자신의 기쁨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그가 이런 곤경에 빠진 것이 그의 책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동료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그가 빚을 완전히 갚을 때까지 감옥에 처넣었습니다.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내가 받은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내가 받을 것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안 그러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멸망  뿐입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살다보면 “저런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마음 가지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분개를 합니다. 그 무자비한 동료의 잘못을 보면서, 자신들의 힘으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자 그들은 왕의 도움을 청합니다. 즉, 누군가가 무슨 잘못을 했을 때, 자신들의 힘으로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다른 이의 도움이라도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러바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이런 저런 행동들에 대해서 말을 만드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심어지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누군가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그들 분위기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안타까운 나머지”라는 단어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그것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하느님께 기도할 것임을 반드시 명심합시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자비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풀지 않은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악한 종아!” 이 말로 그 종의 죄가 드러나고, 이 말을 통해 임금이 그 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자비를 입었다면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주님께 자비를 청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하고, 지금까지 입은 자비까지도 빼앗겨 버릴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1)

    임금의 자비로 말미암아 얻었던 것을 자신의 무자비를 통해 잃고, 이제 그가 자신의 동료에게 한 것처럼 그렇게 똑같이 심판을 받습니다. 그는 형리에게 넘겨집니다. “빚을 다 갚을 때까지”라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사실 그는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나 그렇게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나눠주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내 인생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는 주님께 자비를 청하고 살아가고 있고, 주님의 넘치는 자비를 입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내가 무자비한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면 결국 나는 “영원히 빚을 갚는 곳”(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용서하시고, 무한히 자비로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몇 번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끝없는 용서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 또한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다짐해야 하빈다. 내가 “마음으로부터 용서”를 베풀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용서한다면 하느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물론 쉬운 것은 아닙니다. 참된 용서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이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참된 용서를 하는 내가 되어, 주님께서 베푸시는 자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내가 늘 용서받고 있는 사람임을 기억하면서, 단 한 번이라도 참되게 용서를 해 줄 수 있는 내가 되어 봅시다.

    3. 나눔 및 묵상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② 무자비한 종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런 모습의 내 모습을 성찰해 봅시다. 나는 어떤 면에서 무자비한 종과 비슷합니까? 그리고 어떻게 해야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③ 살아가면서 많은 잘못을 합니다. 내가 참된 용서를 청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어떻게 용서를 청하고 있습니까?


    4. 공지사항

    ①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감사하기

    ② 약한 사람의 편이 되어 그와 함께 고통을 나누는 사람 되기

    ③ 용서하고 용서를 청하지 못하면 그 끝은 멸망임을 명심하며, 사소한 자존심은 버리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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