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
1.말씀읽기: 마태 23,1-1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 (마르 12,38-40 ; 루카 11,39-52 ; 루카 20,45-47)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십니다.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공동체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의 예를 들면서 좀더 겸손하게 형제자매들에게 다가가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좀더 겸손하게 하느님 앞에 서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겸손을 통하여 나를 높이려는 삶을 살아가는지, 교만을 통하여 나를 낮추려는 삶을 살아가는지 깊이 묵상해 봅시다.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입법자였습니다. 모세 이후로는 조상들의 전승만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들의 관심사는 모세 율법과 아울러 거기서 발전된 전승을 보존하고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율법학자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과 율법에 나타나 있는 하느님을 뜻을 알려 주었습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율법학자 제도는 에스델 시절(기원 전 5세기)의 것인데, 회당에서 율법을 읽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그들이 맡은 소임이었습니다. 이 제도를 유다 사회는 정당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도 이 제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학자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율법학자들은 사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행실은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율법학자들은 유다 국민의 지도자로서, 또 어떤 의미에서는 모세의 자리를 이은자들 이었지만 그들 자신은 모세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르치고 그리고 그 가르침을 스스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낫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제로서 올바른 표양을 보여주지 못하고 말만 하는 제 자신이 부끄러웠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들의 말은 들으라고 하십니다. 행동은 본받지 말고…, 참으로 다행스러운 말씀입니다. 가끔은 신자들이 사제들을 통하여 신앙을 잃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제들을 통하여 신앙을 얻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율법의 해석자로 자처한 율법학자들에 대한 질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풍자하십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하시며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이 노새와 낙타의 등에 엄청난 짐을 실어 놓고, 그 짐을 옮기는 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장사꾼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해석자로 자처하면서 율법의 본질을 왜곡하고, 실천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정결례, 안식일, 단식과 기도 등을 생각해 보면 하루 벌어서 하루를 살아가는 서민들에게는 얼마나 힘든 규정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억누르는 짐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학자들 자신은 겉으로는 신심을 가장하면서도 자기네를 위해서는 그 짐을 가볍게 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있었으니 그들의 첫 번째 죄는 위선1)이었던 것입니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허영심을 꼬집으십니다. 보여주기 위한 것, 남에게서 칭찬 받기를 원하는 것. 명예로운 호칭을 좋아 하는 것. 이것은 허영심의 결과입니다. 성구 넣는 갑은 그리스 말로 부적이라는 뜻이 있는데, 어느 정도는 미신적인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구 넣는 갑은 조그만 갑인데 그 속에 탈출기 13,1-10. 11-16 그리고 신명기 6,4-9;11,13-21절까지의 글귀를 양피지에 써서 넣었습니다. 작은 갑은 왼팔이나 이마에 달고 다녔는데, 지금도 유다인들은 기도할 때 그것을 다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말을 너희 손에 표징으로 묶고2) 이마에 표지로 붙여라.”(신명기 6,8)는 말씀을 잘못 이해한 데서 오는 것3)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속함을 표시하는 것이고, 경건한 유다인들에게는 율법을 내적으로 충실히 지킨다는 가시적인 표시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외적인 표지가 내적인 것을 반드시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것을 율법학자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통해서 잘 드러내 주었습니다. 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속이 중요하고, 그릇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용물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자리는 나이의 차례에 따라 앉게 정해져 있었으나, 위엄이 있고, 지식이 있는 사람 순으로 정해져 있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허영 다툼의 근원입니다. 자리 그 자체에 위아래를 정하는 것은 질서를 잡기 위해 당연한 일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은 명예심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윗자리 다툼인 것입니다.
그곳에 간 이유는 나를 뽐내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라 축하해 주기 위해서 갔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자신의 허영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앉은 자리가 가장 좋은 자리, 가장 편안한 자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그 자리에 천년만년 앉아 있을 것도 아니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굳이 자리에 신경 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4)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인사를 받는 사람을 “마음과 이마와 입에 새겨 두고 싶다는 그런 뜻으로” 깊이 머리를 숙여 절을 하면서 동그라미를 그려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신자들이 신부님들께 인사를 잘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본당 신부님에게만 인사를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불편해 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옆 본당 신자였습니다. 서품식이나 큰 미사에 가면 눈을 어디에 둘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당당하게 걸어오면서 자신의 본당 신부님이 아니면 인사를 하지 않는 신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내 제자”라는 말을 쓰기를 좋아합니다. 즉 제자라는 말을 통해 자신이 스승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그를 제자라고 하여 내가 올라가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하고, 인생에 있어서는 그가 나의 스승일 수 있다는 것 또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부르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호칭들을 좋아하고, 그것만을 노리는 명예심과 오만을 배척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의 스승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라는 표현”은 신앙인들을 겸손하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조금만 잘 나가면 막말하고, 반발하고, 목에 힘주는 사람들. 그들은 가르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다스려야만 합니다. 사람은 아무리 현명하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에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한 분의 스승은 하느님뿐이십니다. 그렇다면 가르치는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더욱 겸손해 져야 합니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라는 표현은 같은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사람 사이의 보편적 형제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옆에 있는 사람들을 형제요 자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유다인들의 전통에서 아버지는 아브라함, 이사악과 야곱 등 세 조상에게만 사용되었고, 어머니는 사라와 레베카와 레아와 라헬에게만 붙였던 존칭입니다. 그 후 “아브”,“앗바”(아버지)를 유명한 사람이나 학자에게 붙였습니다. 라삐 이스마엘과 라삐 아키바는 세상의 아버지라 존경을 받고, 그렇게 불렸습니다. 하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 밑에서는 모두가 형제이고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모두가 한 형제라는 것을.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목적은 사람이 너무 호칭에 집착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배제시켜야 할 세 가지 칭호(스승, 아버지, 지도자(선생님))의 예는 아무렇게나 선택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칭호들은 초대 교회의 위계질서의 요소를 반영해 줍니다. 특히 유다계 사회에서 제자들은 다소 신심의 모델이 되는 행위와 혼돈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특히 유다인들의 사회에서는 랍비(나의 스승)라는 경칭이 사용되고 있었으나, 제자들은 그러한 칭호를 의식적으로 거부해야만 했습니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형제에 대하여 뛰어난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형제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명예 때문이 아니라 형제의 선 때문에 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섬기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제자들의 탁월한 스승이요 지도자가 되시는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시기에, 교회안의 어떤 스승이나 지도자도 이러한 칭호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아무도 유다교의 랍비들의 본보기를 따라 자기 자신의 교리적인 견해를 주장하거나, 어떤 교리 학파를 세우거나, 거기에 가담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내가 아무리 교회 공동체 내에서 으뜸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섬기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분명 쉽지는 않겠지만).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참된 영광으로 가는 길은 겸손 뿐 입니다. 온유하시고 겸손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가셨습니다.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자신을 높이는 결국 자신을 낮추게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은 들어 올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 앞에서, 한껏 뽐내며 세상 명예를 추구하며 살아왔던 사람들과 자신을 낮추며 겸손하게 살아왔던 사람들의 운명이 결정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이 말씀이 통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높여 주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그냥 무시해 버리는 일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가는 말이 거칠어야 오는 말이 곱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겸손한 사람을 겸손한 사람으로 받아 주어야 합니다. 저항감이 있어야 만이 잘해주고, 그런 사람에게만 예의를 갖춰주고 조심스럽게 대한다면, 그보다 더 불행한 관계가 어디 있겠습니까? 참된 겸손을 통해 주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내가 되어 봅시다. 참된 겸손을 통해 마지막 날에 나를 들어 높이는 신앙생활을 해 봅시다.
3. 나눔 및 묵상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② 율법학자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안에서 위선적인 모습은 어떻게 드러나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겸손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 해 봅시다.
③ 하느님 앞에서 나를 들어 높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내가 착각에 빠지지 않고, 교만에 빠지지 않으며, 형제자매들을 존중해 줄 수 있을까요?
4. 실천사항
① 남에게 보이는 행동과 의로운 신앙인으로서의 행동을 구분해 보기
② 교만한 마음과 착각하는 마음을 버리기
③ 겸손한 삶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 드리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
1.말씀읽기: 마태 23,1-1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 (마르 12,38-40 ; 루카 11,39-52 ; 루카 20,45-47)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십니다.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공동체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의 예를 들면서 좀더 겸손하게 형제자매들에게 다가가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좀더 겸손하게 하느님 앞에 서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겸손을 통하여 나를 높이려는 삶을 살아가는지, 교만을 통하여 나를 낮추려는 삶을 살아가는지 깊이 묵상해 봅시다.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입법자였습니다. 모세 이후로는 조상들의 전승만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들의 관심사는 모세 율법과 아울러 거기서 발전된 전승을 보존하고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율법학자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과 율법에 나타나 있는 하느님을 뜻을 알려 주었습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율법학자 제도는 에스델 시절(기원 전 5세기)의 것인데, 회당에서 율법을 읽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그들이 맡은 소임이었습니다. 이 제도를 유다 사회는 정당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도 이 제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학자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율법학자들은 사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행실은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율법학자들은 유다 국민의 지도자로서, 또 어떤 의미에서는 모세의 자리를 이은자들 이었지만 그들 자신은 모세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르치고 그리고 그 가르침을 스스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낫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제로서 올바른 표양을 보여주지 못하고 말만 하는 제 자신이 부끄러웠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들의 말은 들으라고 하십니다. 행동은 본받지 말고…, 참으로 다행스러운 말씀입니다. 가끔은 신자들이 사제들을 통하여 신앙을 잃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제들을 통하여 신앙을 얻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율법의 해석자로 자처한 율법학자들에 대한 질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풍자하십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하시며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이 노새와 낙타의 등에 엄청난 짐을 실어 놓고, 그 짐을 옮기는 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장사꾼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해석자로 자처하면서 율법의 본질을 왜곡하고, 실천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정결례, 안식일, 단식과 기도 등을 생각해 보면 하루 벌어서 하루를 살아가는 서민들에게는 얼마나 힘든 규정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억누르는 짐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학자들 자신은 겉으로는 신심을 가장하면서도 자기네를 위해서는 그 짐을 가볍게 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있었으니 그들의 첫 번째 죄는 위선1)이었던 것입니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허영심을 꼬집으십니다. 보여주기 위한 것, 남에게서 칭찬 받기를 원하는 것. 명예로운 호칭을 좋아 하는 것. 이것은 허영심의 결과입니다. 성구 넣는 갑은 그리스 말로 부적이라는 뜻이 있는데, 어느 정도는 미신적인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구 넣는 갑은 조그만 갑인데 그 속에 탈출기 13,1-10. 11-16 그리고 신명기 6,4-9;11,13-21절까지의 글귀를 양피지에 써서 넣었습니다. 작은 갑은 왼팔이나 이마에 달고 다녔는데, 지금도 유다인들은 기도할 때 그것을 다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말을 너희 손에 표징으로 묶고2) 이마에 표지로 붙여라.”(신명기 6,8)는 말씀을 잘못 이해한 데서 오는 것3)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속함을 표시하는 것이고, 경건한 유다인들에게는 율법을 내적으로 충실히 지킨다는 가시적인 표시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외적인 표지가 내적인 것을 반드시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것을 율법학자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통해서 잘 드러내 주었습니다. 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속이 중요하고, 그릇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용물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자리는 나이의 차례에 따라 앉게 정해져 있었으나, 위엄이 있고, 지식이 있는 사람 순으로 정해져 있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허영 다툼의 근원입니다. 자리 그 자체에 위아래를 정하는 것은 질서를 잡기 위해 당연한 일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은 명예심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윗자리 다툼인 것입니다.
그곳에 간 이유는 나를 뽐내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라 축하해 주기 위해서 갔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자신의 허영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앉은 자리가 가장 좋은 자리, 가장 편안한 자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그 자리에 천년만년 앉아 있을 것도 아니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굳이 자리에 신경 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4)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인사를 받는 사람을 “마음과 이마와 입에 새겨 두고 싶다는 그런 뜻으로” 깊이 머리를 숙여 절을 하면서 동그라미를 그려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신자들이 신부님들께 인사를 잘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본당 신부님에게만 인사를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불편해 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옆 본당 신자였습니다. 서품식이나 큰 미사에 가면 눈을 어디에 둘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당당하게 걸어오면서 자신의 본당 신부님이 아니면 인사를 하지 않는 신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내 제자”라는 말을 쓰기를 좋아합니다. 즉 제자라는 말을 통해 자신이 스승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그를 제자라고 하여 내가 올라가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하고, 인생에 있어서는 그가 나의 스승일 수 있다는 것 또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부르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호칭들을 좋아하고, 그것만을 노리는 명예심과 오만을 배척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의 스승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라는 표현”은 신앙인들을 겸손하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조금만 잘 나가면 막말하고, 반발하고, 목에 힘주는 사람들. 그들은 가르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다스려야만 합니다. 사람은 아무리 현명하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에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한 분의 스승은 하느님뿐이십니다. 그렇다면 가르치는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더욱 겸손해 져야 합니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라는 표현은 같은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사람 사이의 보편적 형제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옆에 있는 사람들을 형제요 자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유다인들의 전통에서 아버지는 아브라함, 이사악과 야곱 등 세 조상에게만 사용되었고, 어머니는 사라와 레베카와 레아와 라헬에게만 붙였던 존칭입니다. 그 후 “아브”,“앗바”(아버지)를 유명한 사람이나 학자에게 붙였습니다. 라삐 이스마엘과 라삐 아키바는 세상의 아버지라 존경을 받고, 그렇게 불렸습니다. 하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 밑에서는 모두가 형제이고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모두가 한 형제라는 것을.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목적은 사람이 너무 호칭에 집착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배제시켜야 할 세 가지 칭호(스승, 아버지, 지도자(선생님))의 예는 아무렇게나 선택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칭호들은 초대 교회의 위계질서의 요소를 반영해 줍니다. 특히 유다계 사회에서 제자들은 다소 신심의 모델이 되는 행위와 혼돈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특히 유다인들의 사회에서는 랍비(나의 스승)라는 경칭이 사용되고 있었으나, 제자들은 그러한 칭호를 의식적으로 거부해야만 했습니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형제에 대하여 뛰어난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형제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명예 때문이 아니라 형제의 선 때문에 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섬기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제자들의 탁월한 스승이요 지도자가 되시는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시기에, 교회안의 어떤 스승이나 지도자도 이러한 칭호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아무도 유다교의 랍비들의 본보기를 따라 자기 자신의 교리적인 견해를 주장하거나, 어떤 교리 학파를 세우거나, 거기에 가담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내가 아무리 교회 공동체 내에서 으뜸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섬기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분명 쉽지는 않겠지만).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참된 영광으로 가는 길은 겸손 뿐 입니다. 온유하시고 겸손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가셨습니다.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자신을 높이는 결국 자신을 낮추게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은 들어 올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 앞에서, 한껏 뽐내며 세상 명예를 추구하며 살아왔던 사람들과 자신을 낮추며 겸손하게 살아왔던 사람들의 운명이 결정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이 말씀이 통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높여 주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그냥 무시해 버리는 일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가는 말이 거칠어야 오는 말이 곱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겸손한 사람을 겸손한 사람으로 받아 주어야 합니다. 저항감이 있어야 만이 잘해주고, 그런 사람에게만 예의를 갖춰주고 조심스럽게 대한다면, 그보다 더 불행한 관계가 어디 있겠습니까? 참된 겸손을 통해 주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내가 되어 봅시다. 참된 겸손을 통해 마지막 날에 나를 들어 높이는 신앙생활을 해 봅시다.
3. 나눔 및 묵상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② 율법학자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안에서 위선적인 모습은 어떻게 드러나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겸손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 해 봅시다.
③ 하느님 앞에서 나를 들어 높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내가 착각에 빠지지 않고, 교만에 빠지지 않으며, 형제자매들을 존중해 줄 수 있을까요?
4. 실천사항
① 남에게 보이는 행동과 의로운 신앙인으로서의 행동을 구분해 보기
② 교만한 마음과 착각하는 마음을 버리기
③ 겸손한 삶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 드리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