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토의 민들레

동토凍土의 민들래

사진:윤주영

이 포토 다큐멘터리는 사할린(옛 樺太)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며

허망하게 일생을 보낸 한국인 징용자들의 이야기다.

제2차 세계대전이 점차 치열해지자 국내의 에너지원(源)인 석탄 증산에 박차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본 정부는 많은 한국인 청년들을

사할린의 탄광지대로 투입했다. 그 당시 일본은 동조동선同祖同先(일본과 조선은 동일한 조상)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며 내선일체 內鮮一體(일본과 조선은 한 몸)임을 강조했다. 한국인의 이름도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했고 모든 한국인을 황국신민皇國臣民화시켰다. ‘성전聖戰’의

완수를 위해 국가의 부름에 응하는 것이 국민된 사람의 의무이며, 만에 하나라도 이를 거역하는 사람은 비국민으로 처벌받았다. 수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부모형제나 처자와 견디기 어려운 이별을

감수하면서 징용徵用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일본국민의 신분상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사할린이 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고, 일본인들의 귀국문제가 제기되자 일본정부는 그때까지 창씨개명까지

강요하며 같은 일본인이라고 강조해 왔던 한국·조선인들을 귀환자

명부에서 제외시켰다. 그 이유는 일본에서 분리 독립될 한국·조선인들은 제3국인이며, 그들의 문제에 일본은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정부의 기본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우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 는 눈물의 호소는 묵살되고, 그대로 사할린에 내버려진 채

새 지배가의 가혹한 혹사와 탄압에 신음하며 살아가야 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사할린으로 연행된 한국인들의 대다수는 한국의

남부지역 출신자들이었다. 그러나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냉전이

격화되자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그들의 소원은 무망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1981년 봄, 한국과 러시아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개선의 분위기가

싹트기 시작했을 때 사할린을 방문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과 또 그 다음해 봄에도 사할린을 방문하여 많은 한국인 노인들을 만났다. 20대, 30대의 젊은 나이로 그곳에 끌려갔던 사람들이

벌써 백발이 성성한 60대, 70대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눈은

평생 흘린 눈물 때문에 일그러져 축축이 젖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들의 거친 손과 달아빠진 손톱은 바라보는 것조차 끔찍스러울 정도였다.

이 포토 다큐멘터리는 모진 운명의 손에 희롱되어 사랑하는 부모 처자와 헤어져서 일생을 허무하게 마감하게 된 불행한 사람들의 기록이다. 그들의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나마 안락과 행운이 깃들기를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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