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서 찾은 오아시스 같은 사랑
오아시스가 뭘까? 이창동 감독이 새로 찍는다는 영화제목을 들으면서 생각해보았다.
내게 오아시스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단어이다. 특별히 어떤 정서를 일깨우지도 절실한 소망의 대상도 되어 본 적이 없는 말이다. 하지만 이 단어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는 알고 있다. 오아시스가 없는 땅에 살고 있지만 이 말이 사막에서의 물처럼 ‘절실한 대상’이자 ‘해갈의 원천’을 의미한다는 것을. 아마도 그런 단어를 선택한 감독이나 영화의 제목을 듣는 관객들도 오아시스의 은유적 의미를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어떤 단어가 주는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은가? 내게 있어 오아시스는 무덤덤한 단어다. 그래서 이창동 감독의 새 영화도 무심하게 지나치려 했는지 모른다. 게다가 <초록물고기>도 <박하사탕>도 다 극장에서 봤지만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영화적인 재미가 별로 없었다. 뭔가 틀에 박힌 상투적인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그의 영화를 칭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제목도 감독도 별로 흥미를 끌지 못했지만 정작 영화는 훌륭했다. 솔직히 어느 잡지의 인터뷰에서 이창동 감독이 주장한 핸드핼드의 미학에 대해서는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다. 카메라를 들고 흔들며 찍었든 삼각대에 고정시켰든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단지 감독이 이야기하려는 게 뭔지, 뭘 보여주려는지 정확히 전달되기만 한다면 크리스토퍼 도일식 들고 찍기나 라스 폰 트리에의 들고 찍기나 문제될 게 없다. 감독 자신이야 잠 못 이루고 고민을 거듭하겠지만 단언하건대 <오아시스>의 힘은 형식에 있지 않고 인물을 다루는 감독의 관점에 있다.
수 년 동안 한국영화를 지배해온 악한 주인공들(한국영화 관객점유율을 50% 가까이 끌어올린 일등공신들)이 이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현실에서나 영화에서나 한 번도 주인공인 적이 없었던 약하고 소외된 인물이 무대의 중심에 선다. 남자는 방금 교도소에서 나왔다. 여름에 들어간 그는 겨울에 반 팔 남방을 입고 있다. 여자는 뇌성마비 장애우다. 그녀의 이름으로 배당 받은 장애인 아파트는 오빠 내외가 차지하고 그녀는 낡은 아파트에 홀로 방치된다. 남자가 자동차 사고로 죽인(사실 사고를 낸 것은 그의 큰형이다.) 피해자의 집을 찾았을 때 여자의 오빠는 그녀를 두고 이사를 가려던 참이었다. 남자는 무방비 상태로 버려진 여자에게 관심을 갖는다. 처음에는 그녀에게 꽃을 보내고, 몰래 아파트에 숨어 들어가 “네가 좋다고, 예쁘다고” 말한다. 그리고 억지로 그녀를 강간하려 한다. 그는 이미 강간범으로 감방에 간 적이 있다. 여자가 실신하자 그냥 도망쳐 버리지만, 과연 이 남자가 순수하게 여자에게 사랑을 느꼈는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놀라운 것은 여자가 남자가 남긴 명함에 찍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건 것이다. 장애인 아파트에 시찰 나오던 날 오빠의 손에 이끌려 새 아파트에 살고 있는 듯 연기를 하고 낡은 아파트로 돌아오던 날 밤이었다. 여자는 남자를 불렀고 그는 여자에게 찾아온다. 그 때부터 이들의 사랑이 시작된다. 장애인이나 범법자들이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이미 수많은 영화들이 이런 사람들의 사랑을 그렸다. 이 둘의 사랑이 낯선 것은 그들이 처한 악조건이 아닌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사랑의 방식 때문이다. 그들은 착하기보다는 어눌하고 바보같이 보여지지만 착한 사람들이다.(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 복수를 꿈꾸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죄, 혹은 약점’을 잘 알고 인정한다는 점에서). 보호를 받아 마땅한 이들은 가족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착취당하고 소외되지만 자기들의 방식으로 그것을 수용한다. 주변 사람들 역시 완전히 악인은 아니다.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범법자의 가족이 된다는 것, 평생 장애우를 돌봐야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쉬운 짐이 아니다.
도리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남자와 여자의 모습이다. 그들은 상식에 적응할 수 없거나 상식을 무시한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그들이 죄인이거나 장애우 라서가 아니라 전혀 상식에 걸맞지 않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주소도 가르쳐 주지 않고 이사간 가족들에게 남자는 화내지 않는다. 도리어 자신을 버린 가족들을 찾아가 천연덕스럽게 왜 주소도 안 가르쳐 주고 이사갔냐고 한마디 던지고 그냥 얹혀 산다. 한마디로 눈치가 없다. 여자는 좀 무식하지만 신체 건장한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함이 없다. 때론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려는 남자를 도발하여 잠자리를 같이 할 만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이 사건으로 남자는 강간범으로 몰려 다시 철창 신세를 지지만 여자는 단 한마디의 변호도 해주지 못한다. 정말 사랑할 자격이 없거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사랑에 아름다움이 있다.
다시 붙잡혀 들어갈 게 뻔한 남자는 여자의 아파트 옆 나무 위에 올라가 나뭇가지를 자른다. 여자는 방벽에 비치는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무섭다고 했었다. 감옥에 들어가지 않고 자신의 결벽을 주장하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헌데 이 남자는 여자가 원해서 잔 것이라는 말을 하는 대신 경찰서에서 도망친 짧은 시간에 나뭇가지를 자르기 위해 형사들이 감시하는 여자의 아파트로 향한다. 여자는 하나씩 사라지는 나뭇가지 그림자를 보고 남자가 돌아 온 걸 깨닫는다. 하지만 창문을 열고 그를 부를 수가 없다. 결국 라디오 볼륨을 최대한 올려서 자신이 남자의 존재를 알고 있음을 전한다. 남자는 다시 잡혀가고 한밤중에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라디오를 켠 그녀에게 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친다. 대다수의 관객들은 이 남자와 여자의 사랑 그 자체보다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혹은 살아가는 방식)에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불편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현실에서 그런 연인을 본다면 십중팔구는 “병신들 육갑한다”는 육두문자를 서슴없이 입에 올릴 것이다.
나는 이들의 사랑하는 방식을 그리고 이들의 존재를 무대 위에 올린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들은 자신을 변명하는 데는 서툰 대신 불의를 감수하는데 익숙한 약자들이다. 하지만 그들도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서로를 사랑한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이들의 사랑은 교도소의 담도, 신체의 장애도 시간의 흐름도 넉넉히 끌어안는다. 많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고도 배우자나 연인, 가족의 신체적이고 정서적인 장애, 시간의 장애, 사회적 장애를 이겨내지 못하고 사랑을 포기한다. 어쩌면 우리(나 자신도 예외는 아니므로)는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진 탓에 사랑할 수 없는 지도 모른다. 사랑은 -자기가 가진 것을 포함하여- 나 자신을 상대방에게 내어 주는 것이다. 부자 청년이 고민하며 돌아섰던 것처럼 너무 건강하고 많은 것을 소유한 우리는 다 내어주는 사랑에 장애를 겪는다.
그러고 보니 오아시스는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사막에서 만나는 ‘물이 있는 장소’였다. 그 물은 사랑할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어떤 사람들에게 어느 날 기적처럼 다가온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오아시스를 찾은 사막의 나그네처럼 그 물의 맑고 더러움을 따지지 않을 것이다. 그저 해갈의 기쁨만을 온전히 누릴 것이다.
남자, 종두 종두는 뺑소니교통사고로 형을 살다가 교도소에서 막 출소했다. 그 사이 이사를 가버린 가족들을 겨우 찾아가지만 가족들은 귀찮은 내색을 숨기지 않는다. 어느 날 별 생각 없이 피해자의 가족을 찾아간 종두는 마침 다들 이사가고 난 낡고 초라한 아파트 거실에 정물처럼 혼자 뎅그러니 남겨진 장애인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종두는 또다시 그녀를 찾아간다. 비루한 살림살이가 널려있는 여자의 아파트에서 종두는 여자를 상대로 혼란스러운 욕정을 느끼지만 여자는 두려움에 일그러진 몸짓을 한다. 종두는 여자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져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느 밤, 잘못 걸린 듯한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 속 주인공은 뜻밖에, 여자다.
여자, 공주 공주는 중증뇌성마비장애인이다. 오빠 부부가 이사가던 날, 비둘긴가 햇살인가 그 사이로 낯선 남자의 그림자가 보였다. 행동이 부자연스런 그녀가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방안에 걸린 오아시스 그림에 밤마다 어른거리는 그림자다. 그것은 창 밖 커다란 나무가 흔들리며 가로수에 비춰지는 것이지만 공주는 그림의 위치를 바꾸지도 나무를 어쩌지도 못한다. 어느 날 혼자있는 공주의 아파트에 남자가 들어온다.
공주는 남자를 본 것부터 그 남자가 자기의 몸을 만진 것, 아프게 한 것까지 온통 난생 처음인 것뿐이다. 남자가 사라지고 난 후 공주는 오아시스 그림과 밤과 혼자라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서워졌다. 무슨 생각이 났던 것일까. 공주는 힘겹게 몸을 움직여 전화번호를 누른다..
사랑, 오아시스 종두와 공주는 비로소 사랑이란 것을 알게 된다.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남자인 종두와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공주가 그려나가는 사랑은 어설프기 짝이 없다. 전화 통화를 시작하고 데이트를 하고 짜장면을 먹기도 하면서 둘은 서서히 감정을 교류해 나간다. 사랑 안에서 공주는 정상인으로 걷고 웃고 말하며, 사랑 안에서 종두는 사랑하는 한 여자를 가슴에 보듬는 듬직한 남자다. 둘은 오아시스 그림 앞에서 춤을 추고 사랑을 나누지만 운명은 때로 잔인하게 엇갈린다.
* 작 품 해 설 * 컴퓨터 그래픽을 최대한 자제하고, 핸드헬드 카메라, 시나리오 순서대로의 촬영 등 ‘현실 그대로의 가장 자연스럽고 실감나는 사랑’을 표방하고 있는 <오아시스> 남다른 이창동 감독의 시나리오와 연출감각, 숙달된 스탭과 배우들의 순조로운 호흡조율로 매 장면마다 관계자들의 감탄을 자아내며 촬영을 진행했다. 영화 사이사이 삽입되는 회상장면 역시 다른 영화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정성을 들였다고… 서울 영상 위원회, 서울시, 서울 지방 경찰청이 <오아시스>를 위해 마음을 모았다. 영화 속에서 종두가 공주를 안고 차량을 헤쳐나가며 춤을 추는 장면을 서울의 중심, 청계 고가도로에서 촬영하기로 한 것. 청계 고가가 생긴 이래로 최초로 이뤄진 역사적 촬영에는 엑스트라 공모를 통해 선발된 차량 100대와 스탭, 취재진과 관계자들을 비롯 자원봉사에 나선 ‘박사모(박하사탕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회원 등 가히 블록 버스터급의 인원동원이 이뤄졌다. 한 사람, 한사람의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영화 <오아시스> 당연히 조연 배우들 모두 내노라하는 연기파들을 집결 시켰다. 이색적인 캐스팅은 주인공 홍종두의 동생 홍종세로 출연한 류승완 감독. 이창동 감독의 <초록 물고기>를 열렬히 좋아한다는 류승완 감독은 <오아시스>를 통해 특별출연이나 단편영화가 아닌 본격적인 배우로의 데뷔전을 치루는 셈. 무전취 식혐의로 경찰서에 붙들린 형을 데려가려고 차를 몰고 오는 장면에서 한 겨울 날씨에 히터도 없이 덜덜 떨며 좀처럼 나오지 않는 오케이 싸인을 위해 연신 핸들을 꺽어야 했다.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