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리 공소 안내문
■ 진산사건 사적지(史蹟地)
한국 천주교회 최초로 피의 증거자들이 탄생하는 계기가 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있었던 곳을 흔히 전라도 땅으로 알고 있으나 바로 이곳이 진산이다. 진산(珍山)은 본래 전라도 땅이었으나 1963년의 행정개편으로 충청남도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진산사건은 1791년 윤지충(바오로)이 유교식 제사를 거부하여 발생한 사건을 말한다. 한국 교회 초창기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윤지충의 어머니 권씨 부인은 죽음을 앞두고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일은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1791년 5월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윤지충은 정성을 다하여 상례는 치렀으나 외종 사촌 형인 권상연(야고보)과 상의하여 유언에 따라 음식을 드리거나 신주를 모시는 등의 유교식 제사의식을 거행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당시 사회 안에서 패륜의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체포령이 떨어지자 윤지충과 권상연은 진산 관아로 가서 자수하였고 전주에 있는 전라감영으로 압송되었다. 윤지충은 “만약에 제가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제가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증언하며 권상연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들은 1791년 12월 8일에 전주 남문 밖(현재 전동 성당 부근)에서 참수로 순교하였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서남쪽 5.5km 인근에 있는 장구동(논산시 벌곡면 도산리 장고티)에서 태어났고, 지방리나 막현리 일대로 이주하여 성장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진산사건의 발단이 된 윤지충의 집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두 순교자의 고귀한 정신을 기억하며 이 자리에 기념한다.
■ 지방리 공소
진산사건이 발생한 후 이 지역에는 천주교가 잠시 주춤하였으나 새로운 신앙공동체들이 형성되었다. 지방리 공소는 그 중 하나이다.
지방리 공소는 본래 가새벌(지방2리 가사벌 마을. 동쪽 500m 사제관 있는 곳)에 있었다. 가새벌은 병인박해(1866년) 이전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와 살던 곳이다. 병인박해가 시작된 이래 탄생한 세 명의 순교자가 가새벌 출신이다.
▶ 김영삼: 1866년 전주에서 순교(참수)
▶ 김 사도요한: 1877년 서울에서 순교(옥사). 김영삼의 동생
▶ 김춘삼(사도요한): 1878년 서울에서 순교(옥사)
박해가 끝난 후 가새벌에 큰 공소가 형성되자 초대 회장이 기증한 땅(현재 위치)으로 공소를 옮겼다. 1927년에는 교우들의 노력으로 성당(현재 건물)을 건립하고 그 해 11월 5일에 봉헌식을 가졌다. 이후 본당 유치에 적극 나서 1929년에 초대 주임 신부가 파견되어 지방리 본당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성직자가 부족해지자 1931년에 다시 공소로 되었고, 이후 금산에 본당이 설립되면서 지방리는 계속 공소로 남게 되었다.
■ 진밭들 사적지
서쪽 2.2km 인근에 위치한 진밭들(금산군 진산면 두지리)은 긴 밭(長田)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박해시대에는 교우촌이 있었다.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일화가 있는 곳이다. 다음은 1856년 9월 13일에 최양업 신부가 쓴 편지의 일부이다.
“하루는 전라도 진밭들이라는 마을로 갔는데, 그곳은 얼마 전부터 거의 마을 전체가 교리를 배우며 세례 준비중이었습니다….. 제가 저녁나절에 신자 몇 명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한 다음, 아기 세례에 이어 대세받은 아기들에게 세례성사 보례를 집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잠깐 눈을 붙였다가 닭이 울 때 일어나 미사를 드릴 예정을 하고, 영세 준비를 마친 어른 15명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백 명이 넘는 포졸들이 마귀 떼같이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제가 성사를 거행하고 있는 집을 둘러싸더니 미사 가방과 성작 등을 빼앗아 가기 위해 제가 있는 방까지 들어오려고 덤벼들었습니다…… 저는 몇몇 신자들과 함께 방 안에 있었는데 신자들의 도움으로 급히 미사 짐을 챙겨 들고, 뒤 창문으로 재빨리 빠져나와 캄캄한 밤을 이용하여 산 속으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저와 몇몇 신자들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가시덤불 사이로 허둥지둥 이리저리 헤매었습니다.”(<<너는 주추 놓고 나는 세우고>>, 120-12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