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세 쥴리앙(공베르: Gombert Julien)신부, 1877년 9월 7일 프랑스에서 출생. 1900. 8. 1 사제서품 1900, 10. 9 초대 금사리 본당 신부로 재임하셨고, 1923년 5월 20일(성신 강림대축일)에 사제 서품에 따른 사제 인사 이동에 의하여 논산 본당으로 부임하게 된다. 공안세 신부 부임 이후 재임기간(1923. 5~1941)동안 본당으로써의 변모와 기틀이 다져져 사목 활동이 본궤도에 오르게 된 것이다.
공베르 신부가 부임할 당시의 본당 건물은 대단히 부실하였다. 이에 그는 새로운 성당 건물을 지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때마침 1925년 논산 전교회장 박준철이 대전의 르블레 신부를 방문했을 때 그의 서재에서 무세(Mousset) 신부가 만든 대전에 신축할 성당의 조감도를 보았다. 이에 자극 받은 박준철 전교회장은 신자들을 모아 놓고 성당 신축을 협의, 졀정한 다음 성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성금 봉헌자 중에 김도마가 있었다. 이 때(1925년) 신축한 성당(구성당)은 72평 규모로 무세 신부가 친히 조감도를 만들었고, 중국인 인부들이 와서 일하였다. 이리하여 본당 건물이 그 해를 넘기지 않고 완공되면서 루블레 신부가 지었던 건물도 확장, 완성되었다. 이 때의 성당과 유럽식 사제관은 이 지역에서 돋보이는 훌륭한 건물이었다.
1926년 경 공베르 신부는 외교인들과 접촉하면서 중국식 건물에 인가가 나지 않은 작은 학교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박 마리아 선생이 아이들에게 유치원 과정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아동들의 수가 점차 증가하자 공베르 신부는 루블레 신부가 세운 성당을 다른 장소로 옮기고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 수녀들을 초청했는데 1932년 10월 20일 서울에서 오게 되었다. 이것이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 논산 분원이 설치된 계기였다.
공베르 신부는 넘쳐 나는 아이들을 모두 수용하기 위하여 학교에 2개의 교실을 증축했고, 그 옆에 수녀원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유치원 과정에서 탈피아여 소화학원(小化學院)을 세워 소학교 미취학자을 위주의 교육을 익년부터 실시히게 되었다. 소화(昭和) 8년(1983년)이었다.
공베르 신부는 시약소를 설치하고 수녀들에게 운영토록 했으나 그리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당시 강경은 논산의 공소였는데 그는 이 곳에 작은 성당을 신축하여 1946년 강경 본당 창설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935년 공베르 신부가 본국으로 건너가면서 꼬요스(Coyos) 신부가 임시로 부임했으나 지병 관계로 역시 프랑스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1936년 공베르 신부가 되돌아와 논산 본당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1941년 12월 8일, 일본인들이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시작하면서 매일 순사들이 찾아와 심문을 하여 논산에 머무르는 것이 대단히 어려다. 그런 연유로 교황 사절 대리 노기남 주교는 1942년에 그를 주교관으로 불러들였다. 명성이 얼마나 자자하였던지 그의 이임은 본인에게나 논산 교우들에게 매우 슬프고 큰 고통으로 오래도록 기억되었다. 공신부는 서울 교구 갈멜 수녀원에서 1950년 7월 15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1950년 11월 12일 옥사를 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