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신 정리번호 : 1929 연말보고 ,1929, 논산

 

 제 4 신 정리번호 : 1929 연말보고



발신일 : 1929, 논산

수신자 : 뮈텔 주교







주교님,

올해의 교세 통계표는 많은 영세자를 제시하지 못하니 1927~1928년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작년에, 올해의 더 많은 수를 기대했었습니다. 제가 기대했던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작년과 다름없는 학습 단계에 머물고 있는데 그렇다고 천주교를 완전히 포기한 것도 아니면서 진전도 퇴보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도 두 가정에서 이미 장성한 자녀들을 영세 받게 했으며 또 그보다 어린 자녀들에게도 교리의 가르침을 받게 하고 부모들 역시 자녀들과 함께 교리 문답을 배우고 미사에 참석하지만 마지막 결심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방해하고 있고, 뿌리깊은 이교(異敎)주의 때문인 것 같습니다.

벌써 일 년 이상 저는 동포들을 개종시키는데 교우들의 관심을 돌려보려고 애썼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설교를 끝낸 수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납득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론을 실천할 단계에 이르면 팔짱만 낀 채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모든 조선인들이 그렇듯이 사랑이나 혹은 그 외 다른 곳에서 장황한 담판이나 벌이다가 끝내는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저는 처음에 그들의 무기력함 앞에 조금 낙담하기도 했지만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무기력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논쟁가가 되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영적 갈증을 갖는 의무가 있는 것처럼 그들도 동향인에게 복음화의 의무가 있다는 것을 그들이 귀가 아프도록 들어서 마침내 이해하기를 저는 원합니다.

저는 외교인들에게 접근하는 데에는 그들과 같은 동족들을 통해 접근하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믿습니다. 만일 주교님께서 다른 방법을 알고 계시면 일러주십시오. 저희 모두가 그 방법을 따라 매일 방황하는 수많은 무리 앞에 답보 상태에 있지 않도록 말입니다. 제가 교우들에게 외교인들을 보살피도록 이끌었던 이 지역에서는 교우들이 아이들과 임종을 맞은 성인들에게 적극적인 열의를 보이는 성과를 얻어 지난해보다 월등히 많은 임종 대세자 수를 얻었습니다. 저는 이 열의를 장려하여 영제자의 부모들에게도 전교 하여 그들을 성교회로 데려오고, 또한 교우들로 하여금 이 사업에 더욱 힘쓰도록 고무시킬 것입니다. 제가 헛된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저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제일 먼저 저의 열의가 식어 버릴까 봐 두렵습니다. 우리 주님을 누구보다 제일 먼저 사랑해야 할 사람이 말입니다.

저는 아이들의 교리 학습을 조금 늘려 주일마다 아이들에게 강의하고 또 암기도 시킵니다만 그것이 아직은 완벽한 방법이 아니어서 요망되는 사항이 많습니다. 제가 그 일에서 벗어나도록, 아니면 가능한 한 그 일에 조금 덜 매달리도록 그리고 특히 제가 부재일 때를 위해서 저의 보조자가 우선 필요합니다.

이곳에서는 상당수의 교우들이 매일 미사에 참석합니다. 그런데 5리 혹은 9~10리 떨어진 곳에 사는 교우들이 주일 미사를 잘 지키지 않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주일이나 지켜야 할 첨례 때에 미사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공과로 첨례를 보아도 소용없음을 어떻게 그들에게 이해시킬지 모르겠습니다.

본당 공소는 특히 성당 바로 곁에 형성된 두 곳의 옹기촌으로 인해 그 수가 증가되었습니다. 하나는 성당 소재지인 창말읍과 같은 마을이고 다른 하나는 3리 거리에 있습니다. 1928년 봄에 7~8가구가 그곳으로 왔었습니다. 아마도 대전이나 공주의 옹기촌에서 영락한 사람들인 것 같은데 왜냐하면 제가 그들의 자녀들에게 교리 찰고를 해 보니 그 아이들은 외교인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조차 교리 공부에 게을러 가정에서의 학습을 완전히 포기했던 것입니다. 제가 옹기촌 사람들에게 ‘재미’없는 엄격한 생활을 하게 하자 1월과 2월에 벌써 4가구가 다른 본당으로 이사 갔습니다. 저는 있는 줄도 몰랐던 냉담자들이 이곳 저곳에서 회두 하여 금년의 교우 수는 1,383명이 되었습니다. 그 숫자 안에는 일본인 가구 셋의 17명 교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당 교우들 사이에 그리스도 적 삶을 영위하고 또 그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매주일 미사 후에 갖는 가톨릭 청년회의 회합이 있습니다. 저는 이 모임을 틈타 교리를 강의하고 있기에 남아 건 여아 건 아이들은 모두 강의에 오도록 하고, 가능하면 여자들도 오게 합니다. 여자들을 오게 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결국에는 성공했습니다. 강의가 끝나면 회원이 아닌 사람들은 돌려 보내고, 청년회를 위해 할 일은 그때에 합니다. 오후 2시에 성체 강복을 한 후 묵주 신공을 바치고, 그리고 나서 아이들에게 교리 문답을 외우게 합니다. 청년 3명과 두 여자가 교사 역할을 맡아 해 주고, 여교사 한 명과 저는 여러 방을 돌아보며 아이들의 학습이 잘되는지를 봅니다. 봉재 동안에는 매일 미사 후 성로선공에 많이 오고 첫 첨례 6과 주일에는 장엄하게 성로선공을 합니다. 매월 첫 금요일 모임은, 제가 그 전 일요일에 그 모임을 예고함에도 불구하고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공소들의 교우들은 그들의 신앙 생활을 강화하기 위해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는데, 그것은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몰랐기 때문에 나태함으로 그들을 조금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고백해야겠습니다. 두 공소에 주일 예비자 반을 둔 것이 고작입니다. 강경이에서는 새로 임명된 신임 회장과 작년에 조직된 가톨릭 청년회 덕분에 보다 더 꾸준한 미사 참석과 보다 많은 교리 공부를 하고 있기에 본당 밖에 가톨릭 청년회가 구성되어 대체로 잘 이끌어 나가는 유일한 공소입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저는 지난 한 해 동안 특별히 이루어 놓은 것이 없습니다. 모든 점을 회고해 볼 때 별로 해 놓은 일이 없어서 정말 부끄럽기 그지 없습니다. 비록 어떤 시기에는 너무나 무기력한 교우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만 저 또한 그들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끝으로 주교님께 저와 저의 교우들 그리고 이곳의 외교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공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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