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재덕(成載德 Pierre singer)베드로 신부

 

-1910년 9월 13일. 프랑스 북부 헤댕(Hesdin) 출생.

-1935년 7월 7일 사제 서품.



성 재덕 신부는 신심이 두터운 가톨릭 가정에서 13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28년 9월 21(18세)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935년 사제 서품을 받음과 동시에 한국에 파견된 성신부는 13년 후인 1948년 6월 첫 휴가를 얻어 프랑스로 귀국하였는데 이 때 1948년 파리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 장면 박사를 도와 대한민국 독립을 승인 받아 내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49년 논산 본당 제8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1961년까지 사목 활동을 하였다.

성신부가 부임했던 1949년도의 논산의 인구는 약 20만 명이었고 그 중 논산 중앙에 2만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때문에 논산은 지방의 소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 신자가 약 2,500여 명인 논산 성당은 조용하고 공기가 맑은 교외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1958년에 논산 성당은 대전 교구로 편입되었다.

성신부는 이곳에서 6.25와 1.4후퇴를 겪었다. 이 두 전란 때 부산으로 피난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6.25 전란에는 교회가 공산군에 징발되었고 사제관이 소실되었다. 그리고 주위 일대는 거의가 전란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빈민촌을 이루었다. 성신부도 기아에 찌들리는 생활로써 감자만을 주식으로 하는 생활을 하였다.

당시 논산은 구호대상지역으로 책정되어 미국에서 천주교회측으로 많은 구호물자가 왔다. 이와 함께 성신부는 모국인 불란서에 원조를 청하여 논산 일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신자들도 점차 급증하게 되었다.






1) 사목 활동

성신부는 늘 검소하고 가난한 생활로 모범을 보이시면서 신자들과의 유대관계를 중시하였다. 신자들과 만나 그 집의 상황의 파악하면서 밀접하게 지냈다. 성인 교리 문답 교육을 위해 6명의 교리 교사가 있었는데 성신부는 이들에게 성당 사무와 재정을 담당토록하고 자신은 전교에 몰두하였다.



성신부는 공소 사목에도 열성을 기울였다. 33개 공소를 자적를 타고 눈비를 가리지 않고 순회하면서 성사와 대세를 주고 교리를 시험하며 미사를 거행하였다. 신앙 생활도 철저하여 매주 월요일이 되면 강경 본당에 가서 목세영(睦世永 Bermond) 신부께 고백성사를 보았다.



또한 그는 성체거동 행사를 해마다 거행하는데 1955년의 성체거동은 참으로 장관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 일대 천안, 대전, 공주, 부여, 이리, 안대, 나바위, 강경 등의 본당이 합세하여 참가 인원이 오천여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논산 본당에서 창미사가 끝난 다음 성체거동을 따라 대건 중고등학교 외곽 주위 도로를 돌았고 다시 성당으로 귀한했다. 이때 교통이 차단되어 지나가던 군인들과 여행자들도 엄숙한 분위기에 휩싸이어 이 성체 거동에 참가하였다.



성신부는 사목활동 중에서 어린이 사목에 각별한 주위를 기울였다. 늘 어린이들을 주위에 두었고 그들과 함께 수영도 하고 놀이도 하며 함께 하였다. 또한 사제관에 환등기, 어린이 놀이 기구를 마련하여 두고는 어린이들이 끊이지 않고 와서 놀게 하였다. 또한 뛰어난 유머 감각으로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을 즐겁게 하였고 많은 어린이들을 사제 성소로 이끌었다.



다음은 1959년 9월 29일 불란서 본가에 보낸 서신 내용이다.

‘내가 사제관밖에 나서자마자 내 주위에는 많은 어린이들이 따릅니다. 나를 보고 내 긴 수단에 달라붙곤 하지요. 이들은 내가 운영하고 있는 교리학교 학생 100명의 어린이 중에 일부입니다. 나와 잠깐 교리 이야기하러 오는 학생들은 중학교 학생들입니다.’

이는 성신부가 어린이와 얼마나 가까이 지내는 지를 말해준다. 당시 그는 5평 정도의 교실을 짓고 어린이들에게 교리 문답을 가르치셨다.



성신부의 생애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것은 한국어로 된 어린이 미사책 보급이다. 1949년 10월「어린이를 위한 미사경본」을 번역하여 인쇄에 넘겼다. 이 미사책은 노래로 되어 있어서 어린이들이 쉽게 미사에 접할 수 있게 되어있다. 당시 어른들도 라틴어로 미사를 드리는 상황에서 우리나라 말로 된 어린이 미사책은 많은 호응을 받았다. 그리하여 제 3판까지 간행되어 전국적으로 보급되었고 전국 어린이들이 신나게 미사를 드릴 수 있었다.



2) 활동 성과

(1) 성당, 사제관, 대건중고등학교 건립

경제적 사회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성신부는 논산 성당 신축, 사제관 건립, 대건 중고등학교 교사 신축 등의 대 사업을 이루었다.

1954년에는 6.25 동란에 불타 없어진 사제관을 65평의 건물로 신축하였다. 그리고 그는 부임하면서 대건 중학교의 대리 경영을 맡아 직접 간접의 경제면 운영면에서 적극적인 후원을 하였다. 1947년에 설립된 대건 중학교는 1951년에 고등학교로 인가 받았다. 1956년 현 위치의 부지를 매입하고 본관 2층 6학급을 증축하여 대건 중고등학교의 일부가 현 쌘뽈 여중고등학교의 위치에서 이전하였다. 그리고 교황청으로부터 150,000달러의 원조를 받아 1960년 11월 새 교실 증축을 마치고 완전히 쌘뽈 여자 중고등학교의 위치에서 새교사로 이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성신부는 자금조달의 어려움과 교사들 문제로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하였다.



1962년 10월에는 237평의 성당이 준공되었다. 신자가 점점 급증하여 성당이 비좁게되자 성 신부는 교황청에 원조를 청하여 1960년 2월 성당 착공에 들어갔다. 성신부는 성당 건립에 보탬이 되고자 담배조차 끊고 겨울에는 하루에 연탄 한 장을 아껴 때시며 지냈다. 그리고 반듯한돌이 있으면 주어모으면서 성당 건립에 주력하였다. 신자들에게는 별도로 성당건립 기금을 마련치 않고 교부급으로 대치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정성들여 세운 성당이 준공되자 홍산 본당 주임으로 부임되었다.





(2) 쌘뽈 양로원

1952년 10월 하순경 논산 성당 문전에 쓰러져 있는 걸인 노파를 당시 본당에서 일하고 있는 오채경(말지나) 수녀가 성신부의 지시로 노인에게 대세를 주고 부엌방을 마련하여 간호하였다. 그후 일주일 남짓하여 선종하자 장례식까지 치르어 주었다. 이밖에도 성신부는 길가에 쓰러진 걸인과 계룡산 갑사의 보살이라고 하는 걸인 노파를 데려와 수녀들로 하여금 보살피게 하였다. 그 후 사방에서 무의무탁한 노인들이 모여와 입주를 간원함으로 이를 거절할 수가 없어 1953년 10여명의 할머니들을 구 사제관 뒷편의 창고를 개조하여 부양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하여 성당 구내에 설립된 양로원은 그후 라리보 주교의 경제적 원조로 본격화되었다. 성신부가 초대원장 신부로 부임하였다. 1965년 재단법인 대전교구천주교회유지재단으로 인가 받았다. 처음에는 성당 구내에 3동의 가옥으로 되어있던 양로원이 같은 구내에 본당, 학교 등이 밀집해 있는 관계로 대지의 부족과 환경의 부조화 등으로 인해 1978년 9월 15일 논산읍 부창동 585평의 대지위에 새 건물을 짓고 이전하였다.





(3) 성광원(星光園)

 성광원의 처음 이름은 양생원이라 했다. 양생원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라 다두 라는 나환자의 어머니가 논산 성당의 신자였다. 1956년 3,4월경 그녀는 성신부를 찾아와 자기 아들이 마을에서 못살고 외진곳에서 사는데 도와달라고 간청하였다. 당시 10세대 정도의 나환자들이 외진 곳에서 정부의 대책도 없이 소외된 채로 있었다. 이들은 걸식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성신부는 그녀의 청을 들으시고, 진료반을 보내주시어 나환자 이동 병원 진료가 시작되었다. 동시에 정석주, 박병태, 김재영 외 17명으로 기성회를 조직하고 서로돕고 사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그 명칭을 양생원(養生園)으로 발족하여 가톨릭 구제회에서 구호를 받게 되었다.



진료반이 이곳에 올 때 N.C.W.C(미국의 천주교 전재부흥위원회)의 보조로 밀가루, 옥수수 등과 구호품이 전달되었다. 이후 나환자 집단이 점점 불어났고 성신부의 도움으로 논산 본당을 통해 정식으로 밀가루, 옥수수가루를 배급받게 되었다.

성신부는 황무지인 이곳에 흙벽돌집 7채와 소집(우사) 1채를 지어 주시고 복숭아 나무도 심어주셨다. 판공성사 때는 빠지지 않으시고 자전거를 타고 오시어 성사를 주셨다.



1960년 5월에 양생원을 성광원으로 개칭하고 논산군1)

 광석면 율리 산 49의 2번지 부지 22,440평을 매입 계약했다. 이는 충남 나협회의 주선으로 정부에서 매입 기증한 땅이다. 당시 나환자들은 59명이었고 이때 비로소 나환자 정착지로 책정되어 현재에 이른 것이다.

현재 50세대 150여 명이 거주하고 있고 성당과 수녀원도 건립되었다.





(4) 쌘뽈 여자중고등학교

1960년 11월 논산의 대건 중고등학교가 교사를 신축 이전하였는데 성신부는 그 구교사를 인수받아 1961년 12월 29일〔해성 중고등학교〕의 명칭으로 중․고등학교의 명칭으로 중․고 각 6학급씩 설립인가 받았다.



논산은 1972년 70만 대군으로 칭하여지는 육군 제 2훈련소가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논산은 읍에만 3만, 군 전체로는 20만의 인구가 정착하게 되었다. 때문에 논산은 결정적으로 여자 중고등학교가 필요하게되어 주민들이 여학교 설치를 도청에 호소하였다. 그런데도 도청에서는 이러한 필요에 응하지 않아 여학생들은 백리 밖의 대전이나 20리 밖의 강경의 여학교로 통학하게 되었다. 이에 성신부는 이 교사에서 여학교를 시작할 것에 착안하고 서울 성바오로 수녀원 본부에 이 사업을 의뢰하였다. 당시 대전교구는 경제적 여유가 없었으며 만일 교구에서 경영치 못할 경우에는 나라에서 인수하려했기 때문에 수녀원에 의뢰했던 것이다. 그래서 샬트르 성바오로수녀원에서 이양 받아 1962년 3월 9일「쌘뽈여자중고등학교」로 개교 하였다.





(5) 레지오 마리애 도입과 시약소 설치

1958년경 성신부는 대전교구에서는 처음으로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하여 신자들의 신앙과 봉사정신을 돈독케 하였다. 성신부가 광주 세나투스에 직접 연락하여〔천주의 모후〕쁘레시디움으로 시작하였다. 그후 대전교구 각 성당으로 파급되었다. 이 외에도 논산 성당의 단체로는 청년회, 안나회, 성모회 등이 있었다. 청년회에서는 교리교육, 성가, 성당 행사를 맡았고 안나회는 주로 대세나 장례에 참석하는 연령회였다. 그리고 안나회에서는 대개 교회내의 손님 접대를 도왔다.



성신부는 1949년 9월 1일 논산에 처음으로 시약소를 설치하였다.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에 의뢰하여 수녀 한 명으로 시작되었다. 각 마을 의 환자를 방문하여 치료하고 약을 팔았다. 본당에 설치된 시약소는 여러 잇점이 있었다. 외진 곳의 사람들에게 의료혜택을 주고 찾아 오는 외인에게 좋은 전교가 되었다. 또한 시약소의 약들을 조금씩 돈을 주고 판매하였기 때문에 본당의 빈약한 재정에 부담을 주지도 않았다.

논산에서의 성 신부의 사목 활동은 다양하게 펼쳐졌으며 어린이를 위한 사목과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선이 일관되게 전개되었다. 이 곳에서의 사목 활동은 그의 일대기에 가장 정열을 쏟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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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Response to 성재덕(成載德 Pierre singer)베드로 신부

  1. user#0 님의 말:

    성재덕 신부의 서한

    순서

    정리번호

    발신일․장소

    수신자

    제 1 신

     

    1949년 6월 25일. 논산

    가족 및 친지

    제 2 신

     

    1949년 8월 3일. 논산

    제 3 신

     

    1949년 9월 29일. 논산

    제 4 신

     

    1949년 11월 21일-12월 3일. 논산

    제 5 신

     

    1950년 3월 17일. 논산

    제 6 신

     

    1950년 4월 15일. 논산

    제 7 신

     

    1950년 6월 16일. 논산

    제 8 신

     

    1950년 7월 22일. 논산

    제 9 신

     

    1950년 7월 31일. 논산

    제 10 신

     

    1950년 8월 24일. 부산

     (6월 25일~7월 29일)

    제 11 신

     

    1950년 9월 18일. 부산

    제 12 신

     

    1951년 1월 25일. 부산

    제 13 신

     

    1952년 12월 16일. 논산

    제 14 신

     

    연도미상 9월 27일. 파리

    제 15 신

     

    1955년 12월 28일. 논산

    제 16 신

     

    1959년 5월 29일. 논산

    제 18 신

     

    1960년 11월 15일. 논산

    후원자들

     ▷근거 자료: 서울성가소비녀회 50주년사 기념자료집 제 2 집

     성재덕 신부 서한집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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