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신 1949년 6월 25일, 논산에서
사랑하는 부모님, 형제자매, 조카, 삼촌과 아주머니, 사촌과 친한 이들에게….
지난 3월 14일 시작한 기나긴 여행이 마침내 끝나고 지금은 새로운 임지에 부임하여 있습니다. 저를 대전성당 주임신부로 임명한다고 하신 주교님께서 뜻을 바꾸어 다시 논산본당 주임신부로 임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논산은 저에게 할당된 “주님의 포도밭”입니다. 논산은 군청 소재지로서, 약 20만 명입니다. 기차가 날마다 몇 차례씩 이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을 지나가는데, 그것은 구경하는 것이 저의 작은 심심풀이입니다. 두 말할 것 없이 이 작은 도시는 60만 명의 인구가 북적대고 있었던 서울과는 천지 차이가 있습니다. 이 도시는 벌판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가 프랑스에 있을 때는 들판을 보기 위해서 2식단 이상 걸어가야 했었지만, 여기서는 벌판이 바로 내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당이 도심지에서 약간 떨어진 외곽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평온하고 조용한 곳인데다 공기가 맑은 곳입니다. 저 멀리 산들이 보이고, 가까이는 논들이 즐비한 평야입니다. 성당 부지는 상당히 넓어서 야채를 재배할 수 있는 땅이 있을 정도입니다. 실은 땅이 너무 넓어서 그 일부를 농사 지을 수 있게 빌려주었지요. 그 결과로 얼마쯤 수입을 올릴 수 있습니다.
이 본당은 이미 작고한 “루블레”2)
신부가 30년 전에 설립한 성당입니다. 그 분의 후임자는 “작은 공베르” 신부었습니다. 그런데 “공베르”3)
신부는 일본인들의 적개심 때문에 전시 동안에 이 곳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공베르” 신부의 후임자로는 적어도 4명의 방인신부4)
가 있었는데, 이들 중에는 이곳에 오랫동안 봉직한 사람은 없습니다. “공베르” 신부는 작으면서도 꽤 아담한 성당과 유럽식 사제관을 지었는데, 이 사제관은 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집들에 비교해 보면 궁궐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공베르”신부는 또한 수녀들을 위한 주택과 작은 유치원(국민학교인 것 같기도 하지만)을 지었습니다. 이 지역에는 약 1500명의 신자가 있는데, 그 가운데 800명은 논산 시내에 있고 나머지는 14개의 공소에 흩어져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일거리가 얼마든지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오벵 생 바스트에서 헤댕까지 거리에 상당하는) 새로 설립된 본당5)
이 있는데, 이 본당은 프랑스 남동부에 있는 “갑”교구 출신의 “베르몽”신부가 설립하여 지금까지 주임신부로 계시는 본당입니다. 한 달에 2번씩 그곳에 가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고해성사를 받기도 합니다. “베르몽”신부는 착하고 겸손한 노인으로 하느님의 성인이며 많은 사람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분입니다. 논산 성당에서 저는 76세 되신 김명제 신부님과 함께 살고 있는데, 은퇴한 이 노인신부가 돌아가실 때까지 제가 돌보아 드릴 것입니다.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 더 정확히 말해서 참으로 고통스러운 십자가는, 바로 가톨릭계 중학교를 운영하는 일입니다. “공베르”신부가 이 성당을 떠나고 일본이 패망한 후에, 어느 한국신부가 유치원(국민학교인지?)을 남자 중학교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미침내 서우교구 노주교의 동의를 얻어냈습니다. 이 학교는 성당부지의 상당한 면적을 점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조금씩 더 면적을 넓혀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학생 수가 곧 700명에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사업에 착수할 때 한국 신부들은 위신만 생각할 뿐 그 사업의 장래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로,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진짜 함정에 빠져 버렸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교장은 외교인이며 15명의 교사 중에 12명이 역시 외교인들입니다. 유리창의 유리들이 거의 모두 깨져 있습니다. 구 유치원(국민학교인지?)의 건물을 제외하고는 나무와 짚을 섞은 흙으로 지어진 교실들은 곧 무너져 버릴 것 같습니다. 학교 재정은 25만원6)
의 빚이 있을 뿐 아니라, 다음 학기를 앞두고 2개의 교실을 신축하고 교사들에게 월급을 주기 위해서는 최단 시일 내에 3백만원이나 장만해야만 할 상황입니다. 교사들 가운데는 결핵에 걸린 사람들이 있어 곧 학교를 떠날 것이라고 어제 나에게 통고해 주었습니다. 학교 때문에 병에 감염되었다고 주장하는 그 교사들에게 연금을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이 외교인이고 빈정거리기 잘 하는 학생들에게 그 선생들을 대신하여 한 주인에 7시간의 수업을 해야만 할 것이니, 아마도 내 청춘시절에 범한 죄 때문에 톡톡히 벌을 받게 될 모양입니다. 학생들은 매월 500원씩의 학비를 내고 있습니다. 매년 100명의 신입생을 뽑게 되어 있는 이 학교는, 설립된지 겨우 4년밖에 되지 않아 현재의 학생 수는 400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매년 100명씩 신입생을 의무적으로 뽑게 되어 있습니다. 신입생들은 입학금으로 1천원씩 내게 되어있습니다.
중등학교에 관한 이 나라의 법률은 매우 엄격합니다. 학교를 설립하지만, 우선 인가를 얻어야 하며 은행에 5백만원을 예치해야 합니다. 인가는 전임 한국인 신부가 얻었지만, 5백만원의 예치금은 아직 까지 예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일 인가 받은 학교가 유지될 수 없을 때, 국가가 학교와 그 부지를 몰수하고 학교 운영을 맡아 책임집니다. 현재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학교와 그 부지를 몰수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입니다. 한편, 이 학교에 대해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본단 신자들은 일을 지원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세운 한국인 신부를 비난하기만 합니다. 그 이유는 그 신부님이 유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본당이 책임질수도 없는 사업에 착수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이지만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일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 신설 교구에서는 중학교란 하나 뿐이므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이를 지키고 개선하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는 주교님의 당부 말씀이 계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인간적 상식으로 볼 때 불가능한 일인데… 언젠가는 저도 사표를 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듭니다. 학교를 설립한 신부가 그 사업을 계속해서 맡아 했으면 모르지만, 외국인으로서 비신자들에게, 그 사고방식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지시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선은 그저 최선을 다해 볼 것이요, 그 다음에 문제를 다시 고려 해 보아야 하겠지요.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당 일과 학교 일 이외에 가사일에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일을 도와 줄 사람을 하나 구했으나 요리를 전혀 할 줄 모르는 까닭에 제가 언제나 불어 요리책을 들고 주방에 들어가 그에게 유럽식 요리를 가르쳐 주어야만 합니다. 게다가 배추나 당근까지 심어야 하니 정신을 잃을 것만 같습니다. 그렇지만 만족합니다. 이 모든 역경들을 이겨냈을 때 비로소 만족을 느낄 것입니다. 어제는 너무 짠 스프(Soup)를 먹었고, 그러께는 타버린 고기를 먹어야만 했습니다.
단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두를 포옹합니다. 프랑소와와 마리아와 에이몽, 뽈레트르르 생각하고 “쁠롱“씨와 그의 자녀들도 자주 생각합니다. 아침에 커피를 먹을 때에는 마르크 르메르와 필립보를 생각합니다. 내일 성가수녀회 피정지도를 위해서 서울로 갑니다. 기차로 8시간이나 걸리지요. 성가회를 떠날 때는 마음이 아주 슬펐습니다. 그 수녀회는 잘 되어 가는 주님의 사업입니다. 로마에서는 수정된 회한을 보내왔습니다. 입회 신청서는 34장이나 들어 왔습니다.
모두를 포옹하고 모두를 사랑합니다.
삐에르 쎙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