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권 제 7장 유다가 아폴로니우스와 세론의 군대를 물리치고 그 군대장관들을 죽인 것과 조금 후에 루시아스와 고르기아스를 패배시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을 정결케 한것에 대하여.

 


제 7 장




유다가 아폴로니우스와 세론의 군대를 물리치고 그 군대장관들을 죽인 것과 조금 후에 루시아스와 고르기아스를 패배시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을 정결케 한것에 대하여.




 1. 아폴로니우스와 세론에 대한 유다의 승리[마카비 1서3  : 10]




  이 소식을 들은 사마리아의 총독 아폴로니우스는[㈜ 마카비 2서의 미살크 아폴로니우스(Apollonius the Mysarch)와 동일 인물이다. 참). 각주 302.] 군대를 일으켜 유다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유다는 그와 전투를 벌여 그를 패배시키고 많은 적병을 살해하였으며, 아폴로니우스마저 살해하여 그가 사용하던 칼을 빼앗아 보관하였다.[㈜ 마카비 1서에는 \’유다가 아폴로니우스의 칼을 취하여 일생동안 그 칼을 가지고 싸웠다\’라고 나와 있다.] 그는 또한 많은 적들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적진에서 많은 전리품을 노획한 후에 철수하였다. 코엘레 수리아의 총독이었던[㈜ 마카비 1서에는 \’수리아군의 사령관\’으로 나와 있다. (참). 다음의 각주와 각주 356.] 세론은 보다 많은 사람들을 규합하여 그와 전쟁을 치를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는 소식을 듣고 왕의 명령을 어긴 사람은 징벌해야 됨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여 그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에 그는 전 군대를 동원하여 유다를 공격하였는데, 그의 군대 중에는 유대 나라로부터 로마로 망명한 자들과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유대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바이도론(Baithoron)이라는[㈜ 마카비 1서에는 \’바이도 론(Baithoron)의 언덕\’으로 되어 있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12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즉 현재의 Beit \’Ur el- fog\’인 상부 벳호론과 현재의 Beit-\’Ur et-tahta인 하부 벳호론 사이이다.] 마을까지 진출하여[㈜ 동사가 변형된 형태이다. 다른 사본들에서는 \’접근하였다\’로 나와 있다.] 그곳에 진을 쳤다. 유다는 그곳에서 세론과 조우하여 싸우려고 하였으나, 자신의 군대가 수적으로 열세이고 식량도 부족하고, 금식을 하고 있었던 관계로[㈜ 마카비 1서에는 \’우리는 오늘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라고 나와 있다.] 전투를 수행하기 힘든 상태임을 알고 이렇게 병사들을 격려하였다. \’적을제압하여 승리하는 것은 군사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신앙심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우리 선조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분명히 드러나는데, 우리의  선조들께서는 율법과 어린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수만명의 적군을 신앙심에 의지해 싸움으로써 패배시킬 수 있었다.[㈜ 마카비 1서에는 유다는 그들의 조상들을 언급하지 않는다. 여기서 요세푸스는 마카비 2서 2 : 50이하에 있는 마타디아스(Mattathias)의 유언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참). 고대. 7권. 6 : 3(279)이하. 마카비 2서 2 : 50 이하.] 옳은 일을하는데는 항상 하느님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말함으로써, 유다는 그의 군사들이 적의 대군에 기죽지 않도록 격려한 후에 세론과 전쟁을 벌인 결과 그를 패퇴시켰다. 세론의군대는 자신들의 지휘자가 쓰러지자,[㈜ 마카비 1서에는 세론(Seron)이 쓰러졌다고 명료하게 말하지 않고, \’세론과 그의 군대가 궤멸되었다\’라고 표현하였다.] 도망가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판단하여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유다는 이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800여명의 적군을 살해하였으며, 나머지 적들은 간신히 해변으로[㈜ 마카비 1서에는 \’팔레스틴 사람들의 땅까지\’로 나와 있다.] 탈출하였다.




 2. 안티오쿠스 에피파테스가 루시아스에게 명령을 내리고 바사로 떠나다[마카비 1서 3 : 27]




  안티오쿠스왕은 이 소식을 듣고 격노하여 군대를 소집하고 여러 섬에서 용병을 모집하여[㈜ 이 시점에서 \’섬으로부터 온 용병들\’에 관해서는 마카비 1서에 말하여진 것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나중에<고대. 6권. (29))> 안티오쿠스 유파토르(Antiochus Eupator)에 관련하여 언급된다. 성경에서 \’섬들\’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주로 지중해 연안의헬라 언어권을 말한다.] 봄이 시작될 무렵에[㈜ 주전 165년. 참). 각주 361.] 유대를 침공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병사들에게 임금을 지불할 때가 되자 안티오쿠스는 자신의 재정이 바닥나 돈을 지불할 수 없음을알았다. 이렇게 재정이 고갈된 이유는 속국(subject nations)에서[㈜ \’그 나라의 공물은 그가 그 나라에 가져다 준 재앙과 분열로 인해 매우 적었다\’라고 마카비 1서에  나와 있다.] 반란이 일어나 조공이 걷히지 않았고 선물을 구입하는데 돈을 낭비했을 뿐만 아니라 무분별한 사치를 즐겼기 때문이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의 사치는 \’폴리비우스\’, 26 : 1에 선명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는 우선 바사로 가서 그 곳에서 조공을 거두리라 결심하였다. 그는 루시아스(Lysias)라는[㈜ 마카비 1서 3 : 32에 따르면 루시아스(Lysias)는 \’왕족\’이다. 마카비 2서 11 : 1에는 suggenhv\”, 즉 \’왕의 친척\’으로 나온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해석되지는 않으나, 고위 귀족의  의미이다. \’). Bevan의 \’셀류쿠스 왕실\'(H. Sel), 2 : 281. 그는 후에 코엘레 수리아(Coele-Syria)와 베니게(Phoenicia)의 총독이 된다. 마카비 2서 10 : 11을 보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본문에서 요세푸스가 이 당시의 코엘레 수리아의 총독을 Seron으로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주 345를 보라.] 사람들에게 정권을 위임하고 바사로 향했다. 루시아스는 왕의 총애를 받는[㈜ 니이제(Niese)는 라틴어 사본으로부터 \’그에게 총애를 받는\’이란 말 다음에 \’그리고 그에게 주었다\’라는 말이 빠져 있다고 한다. 우리가 허드슨의 수정본을 수용한다면, 그 본문은 유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물이었으며 유브라데(Euphrates)강 유역에서부터 애굽의 변방지역과 하부 아시아(Lower Asia)를[㈜ \’하부 아시아\'(Lower Asia)는 마카비 1서에는 언급되지 않았다. 요세푸스가 의도하는 바가 선명하지 않다.] 다스리고 있었다.[㈜ 허드슨이 라티어 사본에 나오는 dievponta,즉 \’지배하다\’라고 생각한 본문 대신 우리가 dihvkonta, 즉 \’펼쳐진\’이라고 나오는 사본들을 보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헬라어 사본이 \’그에 의해 존귀히 여김을 받고\’ 다음에 두 단어를 빠뜨리고 \’그에게로부터 펼쳐진 지역을 그에게 주었다\’고 하는 니이제의 더 발전된 추측을 수용해야 한다.] 왕은 또한 루시아스에게 자신의 군대와 코끼리의 일부를 남겨주었으며 자신이 유대지방을 정벌하여 그 주민들을 노예로 만들고 예루살렘을 멸망시켜 유대민족들을 정복하고 돌아올 때까지 아들 안티오쿠스를[㈜ 아피안(Appian)의 \’syr.\’ 45에 의하면 안티오쿠스 Ⅴ세 유파토르(Antiochus  Ⅴ Eupator)는 당시 9세였다.]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였다. 루시아스에게 이같은 지시를 내리고 안티오쿠스왕은 147년[㈜ 셀류키드 왕조 147년은 주전 166년 10월부터 165년 10월까지에 해당된다. 마카비 1서에는 바사(Persia)에 관해 나오지만 이것은 안티오쿠스가 알메니아의 왕인 아르탁시아스(Artaxias)를 치러 최초의 동방 원정을 한 것에 대한 언급일 것이다(Appian \’syr.\’45와 Diod. Sic., 21 : 17). 타키투스의 \’박물학\'(Historicus Naturalis), 5 : 8에 나오는 구절은 파르티아인들을 치러 원정을 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아닌 안티오쿠스 시데테스(Antiochus Sidetes)를 언급한 것으로 추측된다<참). 고대. 13권. (253), W. Otto, \’Zur Geschichte dre Zeit des 6. Ptolemaers\'(Abhandlungen der bayer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Phil.-hist. Abteilung, N. F. Heft 11), 뮨헨, 1934년판, p.85 각주 3>.] 바사로 떠나 유브라데 강을 건너 상부 총독관할구(Upper Satrapies)로 [㈜ 마카비 1서에는 \’상부지역\’으로 되어 있다. 이 단어는 폴리비우스(Polybius)와 아리안(Arrian)이 아르메니아(Armenia)와 메대(Media), 바사(Persia)등을 지칭할 때 사용한 단어이다.] 들어갔다.







  3. 루시아스가 유대를 정벌하기 위해 톨레미와 니카노르와 고르기아스를 파견하다[마카비 1서 3 ; 38]




  루시아스는 왕의 친구들[㈜ \’친구들\’은 전문 용어이다.] 중에서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던 도리메네스(Dorymenes)의[㈜ 그는 마카비 2서 10 : 12에서는 마크론(Macron)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그는 톨레미 필로메토르(Ptolemy Philometor) 휘하의 구브로(Cyprus) 지역의 애굽인 통치자였다. 후에 그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게로 가며 (마카비 2서 10 : 13) 루시아스를 계승한 것이 분명하다. 주 356을 보라.] 아들 톨레미와 니카노르,[㈜ 마카비 2서 8 :9에 의하면 파트로클루스(Patroclus)의 아들이다. 그가 니카노르와 동일인이라면 데메트리우스가 함께 로마에서 도망했다고 말해진다.] 그리고 고르기아스(Gorgias)를[㈜ 다음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골기아스(Gorgias)가 군대의 명령 수행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것 같다.] 선발하여 그들에게 40,000명의 보병과 7,000명의 기병을 주어 유대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엠마오(Emmaus)[㈜ 크리스찬 니코폴리스(Christian Nicopolis). 이곳은 하부 벧호론(Beth horn)의 남서 약 8마일, 예루살렘 북서 약 15마일 되는 곳이다. 이곳이 눅 24 : 13에 나오는 것과 같은 엠마오라면 예루살렘에서 60스다디온(약 7마일, 한글개역에는 25] 지역에 이르러 평지에 진을 쳤다. 이때 수리아와 그 주변의 국가들로부터 동맹군과 유대인 도망자들과   리-역주)으로 계산한 누가의 생각은 틀리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본들은 160스타디온(18마일)으로 나온다. 참). Dalman의 \’Sacred Sites\’, p. 226 이하, Thackeray가 쓴 전쟁. 7권. (217)의 각주 73. 거기에는 다른 엠마오가 나오는데 예루살렘에서 30스다디온(약3마일)되는 거리에 있다. [㈜ 수리아인들 중 유대인들과 동맹을 맞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마카비 1서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각주 374를 참고하라.] 포로로 잡힌 유대인들을 노예로 사기 위해 많은 금과 은을 가져온 노예상인들도 도착하였다. 유다는 이와 같은 적진의 상황과 엄청난 수의 적의 동맹군들을 보고 병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면서 하느님께 승리의 소망을 두도록 권면하고 선조들이 큰곤경에 처하게 될 때 취하던 관례에 따라 베옷을 입고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 이렇게 하느님께 기도를 드림으로 큰 위기때마다 도와주셨던 하느님께서 이번에도 적군을 물리치고 승리케 해주시기를 강청하였다.[㈜ 마카비 1서 3 : 47-53에는 미스바(Mizpeo)에서 행해진 의식들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유다는 천부장들과 하급 지휘자들의[㈜ \’하급 지휘자\'<kai\’ taxiavrxou\”,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는 고대. 7권. (26)의 각주>는 다른 본문들에는 생략된 내용이다.] 휘하에 전열을 정비하였으며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은사람들과 최근에 재산을 갖게 된 자들을 돌려보냈는데[㈜ 이 면제에 관한  규정은 신 20 : 5이하를 보라.] 이는이들이 이러한 즐거움을 누리는데 집착하여 목숨에 연연해 하며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임전태세를 강조하였다. \’동지들이여! 지금은 매우 절박한 위기상황이며 여러분들의 용기가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마카비1서 3 : 58). 여러분들이 용감히 싸운다면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하느님께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지금 자유를 쟁취하여 우리 조상들의 관습과 법에 따라 행복하고 축복받은 삶을 누리게 될 것인지, 아니면 굴욕적인 운명을 맞게 되어 비겁하게 싸운 댓가로 우리 민족이 멸절되고 말 것인지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그러므로싸우지 않는 사람은 죽게 될 것임을 명심하고 최선을 다해 끝까지 싸웁시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자유,조국, 율법, 종교와 같은 중요한 문제로 싸우다 죽게 된다면 영원한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읍시다. 준비하고 임전태세를 갖춥시다.372) 다음 단락 302-304에서 요세푸스는 마카비 1서 3 :58-60에 나오는 유다가 말한 내용을 크게 확대 해석하고 있다.[㈜ 다른 본문들에는 \’마음을 가다듬어\’라고 나와 있다.] 그리하여 내일 아침 적과 맞서 싸웁시다.\’




 4. 유다가 엠마오에서 수리아 군대를 격파하다[마카비 1서 4 : 1]




  유다는 이와 같이 병사들을 격려하였다. 한편 적은 고르기아스에게 보병 5,000명과 기병 1,000명을 주어 유대인 도망자들을 길잡이로 고용하여[㈜ 마카비 1서에는 \’아크라(the Akra)로부터 온 사람들이 그들의 안내자들이었다\’ 라고 나와 있다. 여기에서는 5 : 4(252)와 같이 요세푸스는 이 아크라 지역을 개종한 유대인들이 점령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밤에 유다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마타디아스의 아들(유다)은 이 소식을 듣고 적의 병력이 분산되었을때 적진을 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진영에 환하게 불을 켜놓고[㈜ 이것들은 유다가 다음날 아침 일찍이 그의 갑작스런 출현으로 적들을 놀라게 했다는 진술이 담긴 마카비 1서 4 : 6로부터 추론한 상세한 기술이다.] 엠마오에 있는 적을 공격하기 위해밤새도록 행군하였다. 고르기아스는 적진에 아무도 없음을 알고산으로 숨었다고 생각하여 그들이 어디있든지 찾아내고야 말겠다고 결심하였다. 새벽녘에 유다는 빈약하게 무장한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엠마오의 적진에 도착하였다. 유다는 적군이 훌륭한 장비를 갖추고 강력한 진영을 구축하여 놓은 것을 보고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비록 맨몸으로라도 적들과 싸워야 합니다. 하느님께선 과거에도 우리들에게[㈜ 발췌문도 같은 표현을 썼지만, 다른 사본들은 \’유대인들\’이라고 나와 있다.] 용기를 주어 이보다 더 많고 무장이 잘 된 적들에게도 승리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마카비 1서에 의하면 하느님의 자비와 그들의 조상들과의 계약 때문이었다.]\’ 이 말을 마치고 그는 나팔수에게 공격신호를 보내라고 명령하였다. 이와 같이 적에게 기습공격을 가하여적진의 심장부에 타격을 가하여 혼란에 빠뜨린 다음 유다는 많은적군을 살해하고 도망치는 자들은 가자라(Gazara)와[㈜ 다른 본문들에는 전와(轉訛)되어 가다라(Gadara)로 되어 있다. 가자라(Gazara)는 성경상에는 게셀;(Gezer)로 나온다. 유다와 블레셋의 국경에 있는 게셀(Gezer)은 엠마오(Emmaus)의 북서쪽으로 약 5마일 떨어진 현대의 텔 예자르(Tell Jezar)이다. 참). 고대. 5권. (83) 각주 55.] 이두매(Kdumaea)평원,[㈜ 위치하므로 Abel과 Bevenot의 생각대로가 아니라면 이 본문은 생소하다. 여기서는 이두매(Idumaea)는 유대의 남쪽에 위치한 비 유대지역을 나타내는 모호한 용어로 사용되었다.] [㈜ 성경에는 아스돗(Ashdod)으로 나와 있는데, 이 지경은 해안 근처의 팔레스틴 해안에 있는 지금의 에스둣(Esdud)을 말한다.] 아소도(Azotus),[㈜  성경에는 얍니엘(Jabniel)로 나와 있는데, 이 지역 역시 아소도(Azotus)의 북동쪽 약 10마일에 있는 팔레스틴 평야에 있는 지금의 얍네(Yabneh). 참). 고대. 5권. (87)이다.] 그리고 얌네이아(Mam-neia)까지 추격하여 약 3,000여명을 살해하였다. 유다는 한편으로 병사들에게 지나치게 약탈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이는 고르기아스와의 전투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또한 고르기아스마저 정복하고 난 후에는 아무런 부담없이 전리품을 취해도 좋다고 말하였다.[㈜ 마지막 구는 마카비 1서에 첨가된 내용이다.] 유다가 그의 군사들에게 이와같이 말하고 있을 때 고르기아스의 군사들은 고지에서 자신들의진영이 불타고 병사들이 패주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마카비 1서4 : 17]. 진영을 태우고 있는 검은 연기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고르기아스의 군사들은 이같은 상황을 눈치채고 유다의 군사들이 자신들을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깨닫고는 당황하여 뿔뿔이 도망하였다.[㈜ 마카비 1서는 블레셋 사람들을 지칭하는 ajllovfuloi, 즉 \’이방인들\’에다가 dij\” gh\’n ajllofuvlwn을 덧붙인다.] 고르기아스의 군사들은 싸워보지도 않고 패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유다는 많은 금, 은과 진홍빛 예단과 푸른 보랏빛 예단 등을 노획하여 성공을 자축하는 노래를 부르며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번 전투에서의 승리가 자유를 회복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5. 루시아스와 유다가 벧술에서 교전하다[마카비1서 4 : 26]




  루시아스는 자신이 파견한 고르기아스의 군대가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당황하여 그 다음 해에[㈜ 이것은 셀류키드 왕조 148년 일 것이다. 이 기간은 주전 165년 10월에서 165년 10월까지에 해당하는 시기로 좀 더 정확하게는 주전 165년 가을에 일어난 일이었다. (321)을 보라.] 60,000여명의 보병과50,000여명의 기병을 소집하여 유대지방을 공격하였다.[㈜ 다른 본문들에는 이두매(Idumaea)로 나와 있고, 다른 사본들과 마카비 1서도 현 본문과 같은 표현을 썼다. 벧술(Bethsur)이 이두매와 유대(Judaea) 사이의 국경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 두 본문 모두 옳다.] 그는산간지역으로 진출하여[㈜ \’산간지역으로\’는 요세푸스에 의해 첨가된 상세한 기슬이다.] 유대의 한 마을 벧술(Bethsura)에[㈜ 헤브론에서 북서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지금의 Khirbet et-Tubeiqah에 해당한다. 거대. 8권. (246) 부분의 각주를 보라. 이곳은 바사 시대만큼 이른 시기에도 중요한 요새였다. 바사와 헬라 시대의 고고학적 발견들에 관하여 O. Seller의 \’The Citadel of Beth-Zur\’, 1933년판을 보라.] 진을 쳤다. 유다는 10,0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들과 맞섰으나 적의 수가 엄청난 것을 보고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여 적과 싸우게 될 때 힘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였다.[㈜ 마카비 4 : 30 이하에 있는 기도가 보다 장문(長文)의 기도이다.] 그는 기도를 마친후 적과 전투를 벌여 약 5,000여명을 살해하여 다른 적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루시아스는 유대인들이 전투에 임하는 정신자세와 만일 그들이 자유롭지 못하게 될 경우에는 죽음까지도불사하겠다는 결사항전의 태도를 보고 두려워하여[㈜ 이 본문은 약간 불확실하다. 마카비 1서는 이 특별한 동기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군대를 거느리고 안디옥으로 되돌아가 더 많은 군대를 유대를 공격하기 위해 외국인 용병들을 고용하였다.




 6. 예루살렘 성전을 정결케 하다[마카비1서 4 : 36]




  유다는 이와 같이 안티오쿠스왕의 장군들에게 승리를 거두자 백성들을 모아놓고 하느님께서 승리를 가져다 주셨으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을 정결케하고 전통적인 제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였다. 그가 전 백성들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올라와 보니 성전은 황폐해져 있었고 성전의 문은 불에 타버렸으며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정원에는 잡목들이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유다는 이러한 황폐한 성전의 모습을 보고 그의 백성들과 함께 슬퍼하였다.[㈜ 마카비 1서는 그들의 절망 상태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는 병사 몇 명을 선발하여 성전을 정결케 할 때까지 성채(Akra)를[㈜ 참). 전쟁. 1권. (39)에는 \’그는 상부 도시로부터 그 군대를 축출하여 그 성읍의 아크라(Akra)라 하는 하부 지역에 가두었다\’라는 진술이 있는데, 마카비 1서에 기초하지 않고 있다.] 수비하고 있는 적과 계속하여싸울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난 후 그는 성전을 정성껏 정결케하고 촛대와 금으로 만든[㈜ 이 마지막에 나오는 상세한 기술은 마카비 1서의 내용에 첨가한 것이다.] 제단[㈜ 향 제단.] 등과 같은 집기들을 새로 들여놓고 문에는 휘장을 달았으며 새로 문을 만들어 달았다. 그는또한 전에 있던 제단을[㈜ 번제물을 드리는 제단. 요세푸스는 마카비 1서 4 : 46에 나오는 \’더럽혀진 제단의 돌들은 예언자가 나타나 처리 방법을 지시할 때까지 성전산 적당한 곳에 치웠다\’는 설명은 뺐다. 왜냐하면 요세푸스 당시에는 예언의 영감이 학개, 스가랴, 말라기로 끝났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13권. (300)의 각주 390을 보라.] 치우고 정으로 다듬지 않은 각양각색의 돌로 새 제단을 만들었다[㈜ 이 마지막 기술은 마카비 1서 4 : 47의 \’그들은 율법에 따라서 자연석을 가져다가 전의제단과 같이 새로운 제단을 건축했다\’라는 전술을 확대한 것이다.] [마카비1서 4: 52]. 카슬류(Cha-sleu)월[㈜ 다른 본문들에는, 엑셀레오스(Exeleos), 젤라이오스(Zellaios), 카슬라이오스(Chaslaios)등으로 나와 있다. 히브리 기슬로(Kislew)는 대략 12월에 해당된다. 이와 같은 것이 메길랏 티아니시(Megillath Taanith)에 나온다(Lichtenstein 판, \’HVCA\’, 8-9권. 1931/2년, p.341) 기슬르 25일은 8일간의 하누카(Hanukkah) 절기가 시작되며 금식이 금지된다. 참). 주 403.] 25일(마게도냐인들은 아펠라이오스(Apellaios)라고[㈜ 마게도냐 사람들이 사용한 월명(月名)은 마카비 1서에는 주어지지 않았다.] 부른다)에 유대인들은 촛대에 불을 켜고 제단에 향을 피우고 상에 떡(loaves)을 차려놓은 후 새로 만든 제단에서 번제를드렸다. 우연히도 이 날은 3년전 그들의 제사가 이방인들에 의해 타락되고 불경스럽게 변질되었던 그 날과 날짜가 같았다. 안티오쿠스가 성전을 황폐화시킨 후 3년이 흘렀던 것이다.[㈜ 마카비 2서 10 : 3에는 그 기간에 대해 2년이라고 잘못 적고 있다. 참). 오토(Otto)의 \’ptol.\’ p.40, 주 2번과 메이어(Meyer)의 \’Ursprung\’, 2 : 459.] 즉성전이 폐허가 된 것은 제153차 올림피아드가[㈜ 참). 고대. 12권. (248) 각주 285.] 있었던 145년 아펠라이오스월 25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전이 다시 정결케된 것은 제 154차 올림피아드가 있던 148년[㈜ 주전 165년 12월. 올림피아드(Olympiad)fur 154년은 일반적으로 주전 164년 7월부터 160년 7월까지에 해당하는 기간이다(마카비 1서에는 나오지 않음).] 아페라이오스월25일이었다. 이와 같이 성전이 황폐화되리라는 것은 408년전[㈜ (\’전\’이 주전 573년 \’재봉헌하기 전\’을 뜻한다면) 이것은 주전 576년 경일 것이다. 다니엘의 예언은 단 11 : 31과 7권. (25)를 보라.] 다니엘이 예언한 바이다. 그는 마게도냐인들이 성전을 폐허로만들 것이라고 예언하였던 것이다




 7. 유대인들이 빛의 축제(the festival of lights)를 즐기다[마카비 1서 4 ; 56]




  유다와 그의 백성들은 8일동안 성전에서 다시 제사를 드리게된 것을 마음껏 즐거워하였다. 유대인들은 많은 값비싼 제물로하느님께 제사를 드렸으며 찬양과 악기로 하느님께 감사 드리며기뻐하였다.[㈜ 다른 본문에는 \’그들이 찬송과 각종 악기로 하느님을 경배하고 기뻐하였다.\’] 유대인들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그들 고유의제사를 드릴 권리를 되찾은 것과 자신들의 전통이 부활된 것을 매우 기뻐하였으며 후손들이 성전의 제사가 회복된것을 8일동안 축하하도록 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그 이후로 현재까지 이 축제는 지켜져 왔으며 이를 빛의 축제라 명명하였다.필자는 이러한 이름이 붙여진 것이 제사를 다시 드리게 되리라고 거의 생각하지 않았던 시기에 그 권리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하고 생각한다.[㈜ 요세푸스는 \’빛의 절기\'(The festival of lights)라는 이름을 절망의 암흑 가운데 나타난 빛과 같은 갑작스런 구원으로 설명한다. 이와 유사한 설명이 메길랏 타아닛(Megillath Taanith)의 주에 \’그들이 압박에서 자유케 되었기 때문에 하누카(Hanukkah)라는 영원한 절기를 만들었다\’고 나온다. 그러나 그가 성전의 촛대에 불을 붙이는 것과 그 이름을 직접 연관 시키지 않은 것은 수수께끼이다. 참). 7 : 6(319). 8일의 축제와 관련하여 메길랏 타아닛에 대한 주(Scholion)에는 기름 항아리의 발견을 간단히 언급한다. 이 항아리는 단지 하루만을 밝히는데 필요한 기름을 넣는데 8일 동안에 대해서 Schurer의저서 1권. 209, 주 61이나 최근의 작품으로는 O. Rankin의 \’The Origin of the Festival of Hanukkah\’ 1990년판을 보라. 마카비 2서에서 그 절기는 기슬르 달의 장막절이라고 불린다. 하누카는 랍비문헌에 나오는 일반적인 명칭이다. 하누카는 \’봉헌\’이라는 뜻이다.요 10 : 22에 나오는 eigkaivnia와 Strack-Billerbeck의 2 : 539에 인용한 본문을 참고하라. Derenbourg의 저서 p.62 주 2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빛\’이라는 이름은 yemeneroth \’el Hanukkah, 즉 \’봉헌의 빛의 날들\’이라는 히브리어의 약어형으로 소급할 수 있다고 한다. 절기의 8일동안 매일 불을 붙이는 관습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여전히 지켜온다.] 유다는 예루살렘시 주변에[㈜ 마카비 1서에는 \’시온 산\’, 즉 성전이 있는 언덕.] 성벽을 다시 쌓고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높은 망대를 세워 그 곳에 수비대가 주둔하도록 하였다. 그는 또한 벧술을 요새화하여 적의 침입에 의해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대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마카비 1서에는 \’백성들을 이두매(Idumaea)쪽에서 지키는 요새를 마련키 위하여\’ 라고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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