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권 제 8장 힐카누스가 대제사장직을 받고 그 나라에서 톨레미를추방한 것과 안티오쿠스가 힐카누스와 전쟁을 하였으나 나중에 그와 동맹을 맺게 된 것에 대하여

 


제 8 장



힐카누스가 대제사장직을 받고 그 나라에서 톨레미를추방한 것과 안티오쿠스가 힐카누스와 전쟁을 하였으나 나중에 그와 동맹을 맺게 된 것에 대하여



  1. 힐카누스가 그의 아버지 시몬의 뒤를 잇다



 그래서 톨레미는 다곤이라[㈜ 독(Dok)의 오역(마카비 1서 16 : 15). 지금의 아인 둑( Aln Duq)의 여리고(Jericho) 북서쪽 약3마일 떨어진 곳임. ] 불리는 여리고(Jericho) 위에 있는 요새들 중 한 곳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힐카누스는 자기 아버지의 대제사장직을 취하여 먼저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런 다음에 그는 톨레미와 싸우기 위해 출병하여 그의 요새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그는 비록 자신이 모든 면에서 톨레미보다 우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가지 면에 있어서만은 불리하였다. 그 한가지 점이란 톨레미에게 붙잡혀있는 어머니와 형제들에 대핀 연민이었다. 왜냐하면 톨레미가 그들을 성벽 위에다 붙잡아 매고는, 만일 힐카누스가 그 공격을 중지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거꾸로 떨어뜨려 버리겠다고 협박하면서, 모든 사람들이보는 앞에서 그들을 학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힐카누스가그 요새를 점령하기 위한 공세를 늦추면 늦출수록 그만큼 톨레미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학대하던 것을 멈추고 부드럽게 다루었기 때문에, 힐카누스는 싸울 의욕을 잃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는 자기 때문에 약해져서는 안된다고 그에게 말하면서 양 손을 내뻗었다. 힐카누스는 참다못해 이전보다 더 큰 분노를 티뜨렸다. 그리하여 그곳을 점령하고 그 원수를 사로잡기 위하여, 그리고 불쌍한 가족들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왜냐하면 어머니가 만일 자신들에게 고문을 가하고 있는 원수에게[㈜ 이본(異本)에는 \”톨레미(Ptolemy)\”<그는 병행구인 전쟁. 1권. 2 : 4(58) 에서 불리 움>] 자신들에게 행한 악행에 대한 복수를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은 고통 중에 죽어도 괜찮다고 말하였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이같이 말하였을 때, 힐카누스는 반드시 그 요새를 점령하고야 말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보이며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그는 어머니가 모질게 매질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기력을 잃고 연민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그의 공격이 이같은 방식으로 자꾸만 지연되는 동안에 유대인들이 활동하지 않고 안식해야만 하는그 해가 돌아왔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마치 제칠일에 지키는 안식일처럼 매 7년마다 이같은 안식년 제도를 준수하였기 때문이었다. [㈜ 이 안식년은 주전 135년 10윌부티 134년 10월까지이다. 참) 고대 12권. 9 : 5(378) 각주와 14권. 16 2(475)각주. ]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적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게된 톨레미는 힐카누스의 형제들과 어머니를 죽였다. 그리고 톨레미 는 그들을 죽인 후에, 빌라델비아(Philadelphia)[㈜ 성경에는 라밧 암몬(Rabbatth Ammon). 지금의 트랜스요르단(Transjordan)에 있는 Amman임. ] 시의 통치자인[㈜ 요세푸스는 tvuranno\”(독재자)와 turanneuvein(독재하는 것)을 소 지 역의 토착 군주들(native rulers)에게 적용하고 있다. ] 코틸라스(Cotylas)라고 불리우는 제논(Zenon)에게로 피하였다.



 2. 안리오쿠스 시데례스가 유대를 침범하다



한편 안티오쿠스는 자신이 시몬에게 당했던 그 패배에 분개하여, 자신이 통치한지 제 4년이 되는 해이며, 힐카누스의 통치 첫해, 곧 제 162번째 올림피아드(O1ympiad)에 유대를 침범하였다. [㈜ 이 부분에서 주어진 몇몇 연대는 일치하지 않음. 안티오쿠스 재위 4년째와힐카누스(Hyrcanus)의 재위 첫해가 주전 135내지 134년이었다. 반면에 162차 올림피아드는 주전 132년 7월 시작되었다. Euseblus의 \’연대기\'(Chron. ) Schoene 판 i. 255에서 포르피리(Porphyry) 또만 안티오쿠스(Antlochus)의 예루살렘 공격이 162차 을림피아드(의 3년째의 해)로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쉬러(Schurer) 1 : 259 각주 5에서는 유세비우스(Euseblus)의 본문을 의심하고 있다 즉 피늘 부분적으로는 그 전쟁이 주전 134에서 132년까지 지속되었다고 가정함으로써 마찰을 완화시킨다. 그 공격이 일년 이상 계속되었다는 것은 쉬러(Schurer)의 지적대로 그공옹걱할 때 쯤 11월 의 비 (November rains)가 왔다는 사실에 의해 드러난다] 그는 유대를 황폐케 만든 뒤, 힐카누스를 예루살렘 안으로 몰아넣고는 7개의 진을 그 둘레에 쳤다. 그러나 처음에 그는어떤 것도 이루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성벽들은 튼튼하였고 포위당한 사람들이 용감하였을 뿐만아니라 사실은 물이 부족했기때문이었다. 그들은, 플레이아데스 성단(星團, the Plelades, 황소자리의 일곱 별)과 함께 찾아온 억수같은 호우로 인해 어느정도 물 부족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러 자 안티오쿠스는 마침 지면이 편편하게 되어있는 그 성벽의 북측 면에다 각각 3층 높이로 100개의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 그 위에다 출사들을 배치해 놓고 매일같이 공격하였다. 그들은 또한 깊고 폭이 넓은 2중의[㈜ 이본(異本)들은 ) 그 도랑이 이중으로 되어 있다는 언급을 하지 않는다. ] 도랑을 팜으로써 주민들을 그 성벽안에 가두어 놓았다. 그러나 주민들은 그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빈번하게 돌격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돌격할 때마다 적에게 많은 손상을 입혔다. 그리고만일 적이 자신들의 공격을 알아채면 곧장 퇴각하였다. 그러다가 힐카누스는 자신들이 식량을 빨리 소모했기기 때문에 대세가 불리함을 깨달았다. 또한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은 결코 사람들수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한 그는, 불필요한 사람들을 구분하여 그들을 내쫓고, 오직 싸울 수 있고 한창 나이에 있는 사람들만을 그대로 두었다. [㈜ 공격에 관한 이전 묘사에는 몇가지 투키디데스의 기억이 있다. 참). 고대. 13권. (239), (240), (245)]) 그러나 안티오쿠스 편에서는내쫓겼던 그 사람들을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리하여 쫓겨났던 사람들은 두편 사이에 있는 성벽 주위를 방황하게 되었기때문에 처음에는 당하는 수난으로 인해 지치게 되었고 마침내는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바로 그때 초막절 절기(the fes-tival of Tabernacles)가 돌아왔다. 그리하여 그 도시 안에 있던사람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다시금 받아들였다.



[안리오쿠스 시데테스의 기사도 정신]



 힐카누스는 안티오쿠스에게 사람을 보내어, 장막절 절기로 인하여 7일 동안 휴전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자 안티오쿠스는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경건을 표시하면서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더우기 그는 보기 좋은 뿔을 가진 황소들과 온갖 종류의 멋을 낸 금잔과 은잔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제물을 보냈다. 성문에서 안티오쿠스가 보내온 제물을 받은 사람들은 그것을 성전으로가져갔다. 그러는 동안 안티오쿠스는 자기 군대를 위하여 축연을 베풀었다. 이렇게 안티오쿠스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와는 아주 달랐다. 안티오루스 에피파네스는 예루살렘을 점령 하였을 때, 그 제 단 위에다 돼지를 제물로 제사를 드렸으며, 그 돼지 기름으로 성전을 더럽혔었다. 이와같이 유대인들의 제사와 그들 선조들의 경건을 모욕하는 그의 행동으로 인해 유대 민족은 들고 일어나 전쟁을 벌였으며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그의 원수가 되었었다. [㈜ 참). 고대. 12권. : 4(253). ] 반면에 이 안티오쿠스는 그의 열렬한 헌신 때문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유세베스(Eus-ebes, 경건한 사람)라고 불리웠다. [㈜ 요세푸스는 그를 고대, 7권. I5 : 3(393)에서 그렇게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성(性)은 다른 곳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참). 위 고대. 13권. 7 : 1(222)]



3. 힐카누스가 안티오쿠스 시데테스와 타협하다



 이제 힐카누스는 안티오쿠스의 친절로 인해 좋은 인상을 받았 으며, 하느님에 대한 그의 경의를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특사들을 그에게 보내어 유대인들에게 그들 고유의 통치형태를회복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안티오쿠스는 이러한 그의 편지를 거절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유대인들의 생활 방식 때문에이 민족을 뿌리채 뽑아버려야 한다고 촉구하는 사람들의 말에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 분리에 대한 유사한 비난들은 디오도루스(Diodorus) xxxiv : 1에 있는 병행이야기에서 보면 안티오쿠스 Ⅶ세(AntiochusⅦ)의 조언자들에 의해 유대인들에 대하여 주어졌다. C. Muller를 필두로 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포시도니우스(Posidonius)를 그 근원자로 간주한다. 아마 요세푸스는 다메 섹의 니콜라스(Nicolas of Damascus)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알았을 것이 다(그는 고대. 13권. 8 : 4(251)에서 인용된다. 디오도루스(Diodorus)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사용되어진 구절은 \”모든 민족들 중에 그들만이 다른 민족들과의 사회적 친분을 갖지 않고 그들을 모두 적으로 간주한다( movnou\” ga;r @apavntwn ejqnw\’n ajkoinwmhvtou\” eth\’\” pro;\” a[llo e{qno\” ejpimixiva\” kai; polemivou\” uJpolambavnein pavnta\”)\”. ajmixiva(분리, 파벌 )는 유대주의에 대한 이방인의 문헌에 도 나타난다. 참). Juster i : 46에 있는 요약문. 전통적인 표현은 하만(Haman)에 의해 이러한 기소문에 쓰인다(i. iii : 8). 참). 고대 11권. . 6 : 5(212), 이 부분에 서 요세푸스는 a[mikton(친절하지 않은, 배타적인, 당 파적인)이라는 형용사를 첨가한다. ] 반대로 그는 유대인들이 모든 일에 있어서 경건하게 행동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 특사들에게 회답해 주었다. 즉 포위당한 유대 군사들은 무기들을 건네 줄 것이며, 욥바와 유대와 경계선상에 있는 다른 도시들에 대한 공물을 자신에게 바칠 것이며, 한 수비대를 그 안에 두어야만 하며 이렇게 된다면 유대인들은 전쟁에서 자유롭게 다는 조건들을내걸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다른 조건들은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는 반면에 수비대 문제만큼은 동의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구별되었다는 생각에서 다른 백성들과는 접촉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수비대 대신에 볼모들과 은 500달란트를 줄 것을 제의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즉시 은 300달란트와 힐카누스 자신의 형제가[㈜ 이 형제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힐카누스(Hyrcanus)의 형제 중 둘은 최근에 살해되었다<참). 고대. 13권. 8 : 1(235)>. 그리고 라이나흐(Reinach)의 지적대로 고대. 13권. 7 : 4(228)에서 요세푸스는 그들이 유일만 형제들이었음을 암시해 주는 듯하다. ] 포함된 볼모들을 보냈다.그러자 그 왕은 이를 수락하고 그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들을 허물어뜨렸다. [㈜ 어떤 역사가들은 그벽들의 활쏘는 구멍들만 파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 이것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쉬러(Schurer)의 지적대로 다른 고대 자료는 그 벽들 자체에 대하여 얘기하고 있다<이 벽은 힐카누스(Hyrcanus) 에 의해 후에 재건됨, 참). 마카비 1서(xvi : 23)). 참). 디오도루스(Diodorus) xxxiv : 1과 포르피리 (Porphyry) (ap. 유세비우스(Eusebius), \’연대기\’, Schoene판. i ; 255). ] 이러한 상태에서 안티오쿠스는 공격을 중지하고 철군하였다. [㈜ 아마 이 사건은 쉐발월(Shebat : 지금의 2~3월) 28일 메길라드 타아니드 (Megillath Ta\’anith)에서 언급된다. \”안티오쿠스(Antiochus)는 예루살렘을 떠났다. \” 참). 리히텐슈타인(Lichtenstein),\’Fastenrolle\’pp. 287~288과 고대, 12권. 9 : 7(383). ]



 4. 힐카누스가 안티오쿠스 시데테스의 파르티아 출정을 원조하다. 안티오쿠스의 죽음과 데메트리우스 Ⅱ세의 복귀



 힐카누스는 또한, 부에 있어서는 다른 모든 왕들을 능가하는 다윗의 묘실을 열어 은 3,000달란트를 꺼냈다. 이와같이 해서 힐카누스는 금액을 가지고 외국 군대를 원조한 유대의 첫번째 왕이 되었다. [㈜ 고대, 7권. 15 : 3(393)에\’따르면 힐카누스(Hyrcanus)논 이 돈의 일부를 안티오쿠스(Antiochus)에게 공격하도록 주었다. 힐카누스가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가 아마 이 때인 것 같다. 참). 고대. 13핀. 9 : 2(260-265),14권. . 8 22(247-255). ] 그래서[㈜ 고대. 13권. 8 : 4(250-253)의 내용은 \’전쟁사\’에 나와있지 않음. ] 그는 안티오쿠스와 우호동맹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게 하고 그의 군사들에게 그들이 필요한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관대하게 공급해 주었다. 그리고 안티오쿠스가 파르티아인들과 싸우기 위하여 원정 길에 올랐을 때, 힐카누스는 그와 함께 출정하였다. [㈜ 주전 130년에. 그 부대에 대하여는 디오도추스(Diodorus), xxi(iv : 15-17, 유스티누스(Justinus), xxxviii : 19, 리비(Livy), \’서신(Epit)\’lix. , 아피안(Appian), \’Syr. \’ 68. 포르피리 (Porphyry) (Eusebius, \’연대기\’, i : 255)에 기술되어 있다. 파르티아(Parthia)의 통치자는 프라아테스 Ⅱ세(Phraates Ⅱ )였다. 참). Debevoise, pp. 31-34] 이것에 대해서는 다메섹의 니콜라스(Nicolas of Damascus)가 이같이 증언하고 있다. \”안티오쿠스는 파르티아의 군대장관인 인다테스(Indates)를 패퇴시킨 후에 리쿠스 강(the Lycus river)에다. [㈜ 앗수르에 있는 대(大) 잡(Greater Zab). ] 전승 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그는 유대 민족의 절기로 인하여유대인인 힐카누스의 요청으로 거기서 이틀을 머물렀다. 유대인들은 절기 때에는 행군하지 않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이었다. \”힐카누스가 이같이 이톨 동안 머물자고 요청한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오순절 절기가 안식일 바로 그 다음날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 이 구절은 라이나흐(Reinach)의 지적대로 오순절(Pentecost)이 바리새파의 월력(月曆)체계에서처럼 우연히가 아니라 사두개파적인 월력체계에 따라 의도적으로 레 23 : 11 이하의 문자적인 해석에 근거하여 주(週)의 첫째날(일요일)과 겹친다고 가정 한다면 힐카누스(Hyrcanus)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과의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준다(고대. 13권. 10 . 5(288)를 볼 것). ]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나 또는 어떤 절기 때에도 행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행군을 하다가 안티오쿠스는 파르티아 사람인 아르사케스(Arsaces)와 교전 중에 대부분의 군사들을 잃고, 그 자신도 전사하였다. [㈜ 안티오쿠스 Ⅳ세와 Ⅶ세 사이의 죽음에 대한 고대 자료의 혼동에 대하여 고대,12권. 9 : 1(355)와 \’ABAW\’에 있는 Otto, Phil. -Hist. Abt. , N. F. M. 11(1934), p. 85 각주 3을 참조할 것. ] 그후 안티오쿠스의형제인 데메트리우스(Demetrius)가[㈜ 데메트리우스 Ⅱ세(Denetrius Ⅱ). 참). 고대. 13권. 5 : 11(184). ] 수리아의 왕권을 계승하였다. 이미 다른 곳에서 언급하였듯이,[㈜ 이본(異本)에는 \”우리 문서(Writings)의 다른 어떤 곳과 결부된\”으로 되어 있다. 이 공식문구는 물른 \”다른 어면 곳(elsewhere)\”이 다른 역사가들의 자료를 의미하지 않는다면 요세푸스로부터 취해진 것이다] 안티오쿠스가 파르티아를 침 입 한 바로 그때에 아르사케스는 포로로 잡혀 있던 데메트리우스를 풀어주었던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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