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권 제 9장 안티오쿠스가 죽은 후 힐카누스가 수리아로 출정하고 로마와 동맹을 맺은 것에 대하여, 그리고 데메트리우스 왕과 알렉산더의 죽음에 대하여

 


제 9 장



안티오쿠스가 죽은 후 힐카누스가 수리아로 출정하고 로마와 동맹을 맺은 것에 대하여, 그리고 데메트리우스 왕과 알렉산더의 죽음에 대하여



 1. 힐카누스가 그리심산에 있는 사마리아 성전을 파괴하고 이두매를 유대화하다



 힐카누스는 안티오쿠스가 죽은 사실을 듣자마자[㈜ 주전 129년에. 전쟁. 1권. 2 : 6(62)에 있는 병행구는 힐카누스(Hyrcanus)가 적어도 반년 일찌기 안티오쿠스(Antiochus)의 파르티아(Parthia)공격후 즉각 출정했음을 보여준다] 수리아의도시들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 도시들로 진군하였다. 그들이 그곳에 갔을 때는 싸울만한 사람도 없었고 그 성을 구출할 만한 사람들도 없었다. 그래서 힐카누스는 6개월 후에 메다바(Medaba)를[㈜ 고대 모압 성읍으로 지금의 마다바(M\’d\’b\’)임. 이때에는 나바타이아인(Nabataean)의 수중에 있었음, 참). 고대. 13권. 1 : 2(11)] 점령하였으나, 그 동안에 그의 군대는 대단한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 그는 사모가(Samoga)와[㈜ 異文에는 \”사메가(Samega)\”라고도 함. 아벨(Abel)의 \’GP\’ii : 443에서 지금의 사막(Samak)으로 주장하는데는 이 곳은 메다바(Medaba) 북동쪽 약 8마일 떨어진 곳이다. ] 그 주변 지역들을 점령하였고, 이들 지역 외에도 세겜(She-chem)과 그리심(Garizein)과 구다국(Cuthaean nation)을 점령하였다. 구다국은 예루살렘 성전을 본따서 지은 성전 가까이에 있었는데,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 11권. 8 : 4(322-324)에서. ]그 성전은 알렉산더(Alexander)가 그들의 통치자인 사나발레테스(San-aballetes)에게 대제사장 야두아(Jaddua)의 형제이자 자신의사위인 므낫세(Manassses)를 봐서 건축해도 좋다고 허락한 것이었다. 이 성전이 폐허가 된 것은 그후 200년 후의 일이었다. [㈜ 이곳에 주전 330년경에 성전건물을 세웠다. 참). 전쟁. 6권, 부록, p. 509. 힐카누스(Hyrcanus)에 의한 사마리아성전의 파괴는 아마 기슬루월(Kislew, 12月) 21일 \”그리심(Gerizim)산의 날\”로 메길라드 타아니드(Megillath Ta\’anith)에 암시되어 있다. ] 힐카누스는 또한 이두매의 도시인 아도라(Adora)와[㈜ 참). 고대. 13권. 6 : 5(207). ] 마리사(Marisa)도[㈜ 성경에는 마레샤(Mareshah)로 지금의 델 산다한나(Tell Sandahanna), 참). 고대. 8권. 10 : 1(246). ] 점령하였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이두매인들을 굴복시킨 후에, 만일 그들 자신들이 할례를 행하고 기꺼이 유대인들의 율법을[㈜ 異文에는 \”관습(customs)흑은 훈령 (ordinances) \”로 되어 있음. ] 준수하는 한 그들 나라에 그대로 살아도 좋다고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선조들의 땅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할례를 받는 것과 다른 모든 면에 있어서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버리고 유대인들의 생활방식에 따르는 것을 감수하였다.그때부티 계속해서 그들은 유대화되 어 왔다. [㈜ 사마리아 성전 건축과 이두매인들(Idumean의 유대화(化)에 대한 표현 들은 전쟁. 1권. 2 ; 6(62, 63)절에 나타나지 않음. ]



 2. 힐카누스가 로마와의 협정을 갱신하다



  [㈜ 다음 자료가 안티오쿠스 Ⅶ 시데테스(Antiochus Ⅶ Sidetes, 주전 132년경)의 재위기간에 있었는지 혹은 안티오쿠스 Ⅸ세 키지케누스(Cyficenus, 주전 105년경)의 치하에 있었는지에 대한 문제에 관해서는 부록에 인용되어진 자료들을 볼 것. ]



 이제 대제사장 힐카누스는 로마인들과의 우호관계를 새롭게 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에게 사신을 보냈다. 원로원은 힐카누스의 편지를 받고, 그와 다음과 같이 우호동맹을 체결하였다. \”집정관인[㈜ stathgov\”는 라틴어 Praetor(지도자)의 번역임. 참). 마기(Magie), PP. 6, 11] 마르쿠스(Marcos)의 아들 판니우스(Fa-nnius)는, 코미티움(the Comitlum)에[㈜ 사본들의 오독(誤讀)에 서 유추됨] 2월의 이데스날(theIdes of February : 2월 13일을 말함)이 되기 8일 전에 원로원을소집하였다. 이 회의는 특사들이 가져온 문제들을 토의하기 위하여 메네니아 부족(the Menenian 샤\”�인[㈜ 사본에서 유추됨, \’Man(n)ius. \’] 루키우스(Luc-ius)의 아들 루키우스 말리우스(Lucius Mallius)와[㈜ 사본에서 유추됨. \’Mentinan. \’] 팔레르니아 부족(the Falernian tribe)인 가이우스 (Gaius)의[㈜ G. Fannius와 G. Sempronius는 주전 132년에 집정관들이었다. 참). \’PW\’6, 1988와 HA. 1441에 있는 뮌쩌(Munzer)/] 아들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Gaius Sempronius)[㈜ 편집본도 같음. \’페나이우스(Pennaeus)\’. ] 앞에서 모인 것이었다. 그 특사들은 도시데우스(Dositheus)의 아들 시몬(Sim-on)과 알렉산더의 아들 아폴로니우스(Apollonius)와 야손의 아들 디오도루스(Diodorus)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유대백성들이보낸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유대 백성들과 로마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우정과 동맹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공적인 사무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다. 그공적인 사무란 그들이원하는요구 사항들에 관한 것이었다. 즉, 욥바와 그 부속 항구들 가자라(Gazara), 페가이(Pegae),[㈜ 지금의 아스 엘 아인(R\’s el \’Ain)으로 욥바 북동쪽 약 10마일 떨어진 곳임. 참). \’BASOR\’11(1923년. 11월) p. 6이하. ] 그리고 안티오쿠스가전쟁을 통하여 획득한 다른 도시들과 영토들은[㈜ 이 칙령이 안티오쿠스 Ⅶ세 치하에 통용되었다면 이 언급은 아마 유대인들로부터 그가 일찍이 조공으로 요구했던(팔레스틴 해변가에 있는)성읍들과 항구들을 탈환함을 말한다. 참). 고대. 13권. 8 : 3(246). ] 원로원의 포고령과[㈜ dovgma는 대개 라틴어 senatus consultum과 종종 senatus decretum의 번역이다. 참). A. A. Schiller, \’Textbook of Roman Law\’, p. 112. ] 반대되는 것으로 자신들에게 되돌려져아 한다. 그리고 안티오쿠스왕의 군사들이 자기들의 나라를 통하여 행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전쟁 동안에 안티오쿠스에 의해 만들어진[㈜ 異文에는\’시도되어진 일들\'(문자적으로 \’추구하다. 챁다\’)임. 異文에는 \’약탈물, 전리품(spoil taken)\’으로 추측됨. ] 법령들도 원로원의 포고령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폐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안티오쿠스가 유대인들에게서 빼앗은 곳들을 반환케하며, 또 그 전쟁 동안에 황폐케 된 그영토들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하여 특사들을 파견해 주고, 로마인들은 또한 이 유대의 특사들에게 왕들과 자유도시들(free cit-ies : 독립국가를 이룬 도시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이본(異本)에는 \’문제들\’. 라이나흐(Rinach)의 지적대로 이 언급은 아마 안티오쿠스(Antiochus)와의 논쟁을 중재하도록 유대인들이 로마에 청원하는 것을 말한다. 원로원은 이를 정중하게 상정하였다. ] 주어 자신들의 본국으로의 안전한 귀환을 보장해 달라는 등이 유대인들의 요구사항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우호협정이,유대 백성들에 의해 보냄받은 그 훌륭한 사람들과 갱신되었음을 포고한다. \’ 그러나 그 편지들에 관하여 그들은 원로원의 틈을 낼수 있을 때 잘 생각해 보고 장차 그와 유사한 불의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돌아보겠노라고 답변해 주었다. 또한 집정관 판니우스가 그들이 귀환하는데 필요한 돈을 국고에서 줄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따라서 판니우스는 유대의 특사들에게 국고에서 돈을 꺼내 주면서, 그리고 그들리 인전하게 귀국할 수 있도록 그들의 가는 길을 호위하면서 가는 사람들에게 원로원의 포고령을 건네주면서 그들을 보냈다.



 3. 알렉산더 제비나스가 데메트리우스 Ⅱ세로부터 왕권을 빼앗다



  [㈜ 셀류키드(Seleucid) 왕조의 역사를 주로 다룬 다음의 단락은 \’전쟁사\’에는 어떤 병행구도 없다. ]



 그 당시 대제사장 힐카누스 치하의 상황은 이러하였다. 데메트리우스(Demetrius) 왕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는 힐카누스를 치기 위하여 출병하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데메트리우스는 힐카누스를 치러갈 시간도 기회도 없음을 알았다. 왜냐하면 수리아인들과 그의 군사들은 모두가 그가 악당이었으므로 적대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피스콘(Physcon)이라[㈜ 톨레미 Ⅶ세 유에르게테스 Ⅱ(Ptolemy Ⅶ Euergetes Ⅱ), 별명이 피스콘(Physcon : \’살찐 배\’라는 의미)임. 그는 톨레미 필로메토르(Ptolemy Philometor)의 형제이고 주전 146에서 116년까지 통치했다. 애굽의 유대인에 대한 그의 증오에 관해서는 아피. 2권. 5(51-55)를 볼 것. ] 불리는 톨레미에게 사신들을 보내어, 왕좌를 차지하기 위하여 셀류쿠스의 측근 중 얼마를 보내줄 것을 그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므로 톨레미는 제비나스(Zebinas)라고도[㈜ 고대 자료에 자비나스(Zabinas)라고 쓰여진 이 이름은 아람어( )(the bought one : 산자)의 헬라어 형이다. 이것은 유대적 이름으로 에스라 10 : 43에 나타난다. 유스티누스(Justinus), xxxix : 1, 4에 따르면 그는 알렉산더 발라스(alexander Balas)의 아들로 등장한다<참). Eusebius, \’연대기;. \’ Schoene판, I : 257>. ] 불리는 알렉산더에게 군대를 주어 데메트리우스와 함께 전투에[㈜ 다메섹 가까운 곳. 참). 베반(Bevan), \’H. Sel. \’ ii : 250. `] 참여하게 하였다. 그러나그 전투에서데메트리우스는 패하고 말았다. 전투에서 패한 그는 톨레마이스에 있는 자기 아내인 클레오파트라에게로[㈜ 그의 전부인은 데메트리우스가 포위되었을 때 그의 안티오쿠스 시데테스와 결혼했다. 참). 고대. 13권. 7 : 1(221, 222). 클레오파트라(Cleopatra)는 안티오쿠스 시데테스(Antiochus Sidetes)가 죽을 때 데메트리우스(Demetrius)와 재결합했다. ] 도망쳤다. 그러나 자기 아내가 자신을 받아주지 않자 그는 거기서 두로(Tre)로 갔다. 두로로 피한 그는 결국 그곳에서붙잡혀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 손에서 모진 고통을 당한 후에 죽임을 당했다. [㈜ 아피안(Appian), \’Syr. \’68과 리비(Livy), \’Epit\’1x에 따르면 데메트리우스(Demetrius)를 살해하도록 명령한 자는 바로 클레오파트라(Cleopatra)였다. 이 일은 주전 126-125년에 일어났다. ] 그후 알렉산더가 그 왕권을 이어받고 대제사장 힐카누스와 화목하게 지냈다. 나중에[㈜ 주전 123-122년에. ] 그는 그리푸스(Gry-pus)라고[㈜ 안티오쿠스 Ⅷ세 그리푸스(Antiochus Ⅷ Grypus)가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데메트리우스 Ⅱ세(Demetrius Ⅱ)의 아들임. 참). 고대. 13권. 10 : 1(271) 다음의 각주. ] 불리는 데메트리우스의 아들 안티오쿠스와의 싸움에서 패해 죽임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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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권 제 9장 안티오쿠스가 죽은 후 힐카누스가 수리아로 출정하고 로마와 동맹을 맺은 것에 대하여, 그리고 데메트리우스 왕과 알렉산더의 죽음에 대하여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9 장


    안티오쿠스가 죽은 후 힐카누스가 수리아로 출정하고 로마와 동맹을 맺은 것에 대하여, 그리고 데메트리우스 왕과 알렉산더의 죽음에 대하여


     1. 힐카누스가 그리심산에 있는 사마리아 성전을 파괴하고 이두매를 유대화하다


     힐카누스는 안티오쿠스가 죽은 사실을 듣자마자[㈜ 주전 129년에. 전쟁. 1권. 2 : 6(62)에 있는 병행구는 힐카누스(Hyrcanus)가 적어도 반년 일찌기 안티오쿠스(Antiochus)의 파르티아(Parthia)공격후 즉각 출정했음을 보여준다] 수리아의도시들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 도시들로 진군하였다. 그들이 그곳에 갔을 때는 싸울만한 사람도 없었고 그 성을 구출할 만한 사람들도 없었다. 그래서 힐카누스는 6개월 후에 메다바(Medaba)를[㈜ 고대 모압 성읍으로 지금의 마다바(M’d’b’)임. 이때에는 나바타이아인(Nabataean)의 수중에 있었음, 참). 고대. 13권. 1 : 2(11)] 점령하였으나, 그 동안에 그의 군대는 대단한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 그는 사모가(Samoga)와[㈜ 異文에는 “사메가(Samega)”라고도 함. 아벨(Abel)의 ‘GP’ii : 443에서 지금의 사막(Samak)으로 주장하는데는 이 곳은 메다바(Medaba) 북동쪽 약 8마일 떨어진 곳이다. ] 그 주변 지역들을 점령하였고, 이들 지역 외에도 세겜(She-chem)과 그리심(Garizein)과 구다국(Cuthaean nation)을 점령하였다. 구다국은 예루살렘 성전을 본따서 지은 성전 가까이에 있었는데,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 11권. 8 : 4(322-324)에서. ]그 성전은 알렉산더(Alexander)가 그들의 통치자인 사나발레테스(San-aballetes)에게 대제사장 야두아(Jaddua)의 형제이자 자신의사위인 므낫세(Manassses)를 봐서 건축해도 좋다고 허락한 것이었다. 이 성전이 폐허가 된 것은 그후 200년 후의 일이었다. [㈜ 이곳에 주전 330년경에 성전건물을 세웠다. 참). 전쟁. 6권, 부록, p. 509. 힐카누스(Hyrcanus)에 의한 사마리아성전의 파괴는 아마 기슬루월(Kislew, 12月) 21일 “그리심(Gerizim)산의 날”로 메길라드 타아니드(Megillath Ta’anith)에 암시되어 있다. ] 힐카누스는 또한 이두매의 도시인 아도라(Adora)와[㈜ 참). 고대. 13권. 6 : 5(207). ] 마리사(Marisa)도[㈜ 성경에는 마레샤(Mareshah)로 지금의 델 산다한나(Tell Sandahanna), 참). 고대. 8권. 10 : 1(246). ] 점령하였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이두매인들을 굴복시킨 후에, 만일 그들 자신들이 할례를 행하고 기꺼이 유대인들의 율법을[㈜ 異文에는 “관습(customs)흑은 훈령 (ordinances) “로 되어 있음. ] 준수하는 한 그들 나라에 그대로 살아도 좋다고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선조들의 땅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할례를 받는 것과 다른 모든 면에 있어서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버리고 유대인들의 생활방식에 따르는 것을 감수하였다.그때부티 계속해서 그들은 유대화되 어 왔다. [㈜ 사마리아 성전 건축과 이두매인들(Idumean의 유대화(化)에 대한 표현 들은 전쟁. 1권. 2 ; 6(62, 63)절에 나타나지 않음. ]


     2. 힐카누스가 로마와의 협정을 갱신하다


      [㈜ 다음 자료가 안티오쿠스 Ⅶ 시데테스(Antiochus Ⅶ Sidetes, 주전 132년경)의 재위기간에 있었는지 혹은 안티오쿠스 Ⅸ세 키지케누스(Cyficenus, 주전 105년경)의 치하에 있었는지에 대한 문제에 관해서는 부록에 인용되어진 자료들을 볼 것. ]


     이제 대제사장 힐카누스는 로마인들과의 우호관계를 새롭게 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에게 사신을 보냈다. 원로원은 힐카누스의 편지를 받고, 그와 다음과 같이 우호동맹을 체결하였다. “집정관인[㈜ stathgov”는 라틴어 Praetor(지도자)의 번역임. 참). 마기(Magie), PP. 6, 11] 마르쿠스(Marcos)의 아들 판니우스(Fa-nnius)는, 코미티움(the Comitlum)에[㈜ 사본들의 오독(誤讀)에 서 유추됨] 2월의 이데스날(theIdes of February : 2월 13일을 말함)이 되기 8일 전에 원로원을소집하였다. 이 회의는 특사들이 가져온 문제들을 토의하기 위하여 메네니아 부족(the Menenian 샤”�인[㈜ 사본에서 유추됨, ‘Man(n)ius. ‘] 루키우스(Luc-ius)의 아들 루키우스 말리우스(Lucius Mallius)와[㈜ 사본에서 유추됨. ‘Mentinan. ‘] 팔레르니아 부족(the Falernian tribe)인 가이우스 (Gaius)의[㈜ G. Fannius와 G. Sempronius는 주전 132년에 집정관들이었다. 참). ‘PW’6, 1988와 HA. 1441에 있는 뮌쩌(Munzer)/] 아들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Gaius Sempronius)[㈜ 편집본도 같음. ‘페나이우스(Pennaeus)’. ] 앞에서 모인 것이었다. 그 특사들은 도시데우스(Dositheus)의 아들 시몬(Sim-on)과 알렉산더의 아들 아폴로니우스(Apollonius)와 야손의 아들 디오도루스(Diodorus)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유대백성들이보낸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유대 백성들과 로마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우정과 동맹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공적인 사무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다. 그공적인 사무란 그들이원하는요구 사항들에 관한 것이었다. 즉, 욥바와 그 부속 항구들 가자라(Gazara), 페가이(Pegae),[㈜ 지금의 아스 엘 아인(R’s el ‘Ain)으로 욥바 북동쪽 약 10마일 떨어진 곳임. 참). ‘BASOR’11(1923년. 11월) p. 6이하. ] 그리고 안티오쿠스가전쟁을 통하여 획득한 다른 도시들과 영토들은[㈜ 이 칙령이 안티오쿠스 Ⅶ세 치하에 통용되었다면 이 언급은 아마 유대인들로부터 그가 일찍이 조공으로 요구했던(팔레스틴 해변가에 있는)성읍들과 항구들을 탈환함을 말한다. 참). 고대. 13권. 8 : 3(246). ] 원로원의 포고령과[㈜ dovgma는 대개 라틴어 senatus consultum과 종종 senatus decretum의 번역이다. 참). A. A. Schiller, ‘Textbook of Roman Law’, p. 112. ] 반대되는 것으로 자신들에게 되돌려져아 한다. 그리고 안티오쿠스왕의 군사들이 자기들의 나라를 통하여 행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전쟁 동안에 안티오쿠스에 의해 만들어진[㈜ 異文에는’시도되어진 일들'(문자적으로 ‘추구하다. 챁다’)임. 異文에는 ‘약탈물, 전리품(spoil taken)’으로 추측됨. ] 법령들도 원로원의 포고령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폐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안티오쿠스가 유대인들에게서 빼앗은 곳들을 반환케하며, 또 그 전쟁 동안에 황폐케 된 그영토들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하여 특사들을 파견해 주고, 로마인들은 또한 이 유대의 특사들에게 왕들과 자유도시들(free cit-ies : 독립국가를 이룬 도시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이본(異本)에는 ‘문제들’. 라이나흐(Rinach)의 지적대로 이 언급은 아마 안티오쿠스(Antiochus)와의 논쟁을 중재하도록 유대인들이 로마에 청원하는 것을 말한다. 원로원은 이를 정중하게 상정하였다. ] 주어 자신들의 본국으로의 안전한 귀환을 보장해 달라는 등이 유대인들의 요구사항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우호협정이,유대 백성들에 의해 보냄받은 그 훌륭한 사람들과 갱신되었음을 포고한다. ‘ 그러나 그 편지들에 관하여 그들은 원로원의 틈을 낼수 있을 때 잘 생각해 보고 장차 그와 유사한 불의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돌아보겠노라고 답변해 주었다. 또한 집정관 판니우스가 그들이 귀환하는데 필요한 돈을 국고에서 줄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따라서 판니우스는 유대의 특사들에게 국고에서 돈을 꺼내 주면서, 그리고 그들리 인전하게 귀국할 수 있도록 그들의 가는 길을 호위하면서 가는 사람들에게 원로원의 포고령을 건네주면서 그들을 보냈다.


     3. 알렉산더 제비나스가 데메트리우스 Ⅱ세로부터 왕권을 빼앗다


      [㈜ 셀류키드(Seleucid) 왕조의 역사를 주로 다룬 다음의 단락은 ‘전쟁사’에는 어떤 병행구도 없다. ]


     그 당시 대제사장 힐카누스 치하의 상황은 이러하였다. 데메트리우스(Demetrius) 왕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는 힐카누스를 치기 위하여 출병하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데메트리우스는 힐카누스를 치러갈 시간도 기회도 없음을 알았다. 왜냐하면 수리아인들과 그의 군사들은 모두가 그가 악당이었으므로 적대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피스콘(Physcon)이라[㈜ 톨레미 Ⅶ세 유에르게테스 Ⅱ(Ptolemy Ⅶ Euergetes Ⅱ), 별명이 피스콘(Physcon : ‘살찐 배’라는 의미)임. 그는 톨레미 필로메토르(Ptolemy Philometor)의 형제이고 주전 146에서 116년까지 통치했다. 애굽의 유대인에 대한 그의 증오에 관해서는 아피. 2권. 5(51-55)를 볼 것. ] 불리는 톨레미에게 사신들을 보내어, 왕좌를 차지하기 위하여 셀류쿠스의 측근 중 얼마를 보내줄 것을 그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므로 톨레미는 제비나스(Zebinas)라고도[㈜ 고대 자료에 자비나스(Zabinas)라고 쓰여진 이 이름은 아람어( )(the bought one : 산자)의 헬라어 형이다. 이것은 유대적 이름으로 에스라 10 : 43에 나타난다. 유스티누스(Justinus), xxxix : 1, 4에 따르면 그는 알렉산더 발라스(alexander Balas)의 아들로 등장한다<참). Eusebius, '연대기;. ' Schoene판, I : 257>. ] 불리는 알렉산더에게 군대를 주어 데메트리우스와 함께 전투에[㈜ 다메섹 가까운 곳. 참). 베반(Bevan), ‘H. Sel. ‘ ii : 250. `] 참여하게 하였다. 그러나그 전투에서데메트리우스는 패하고 말았다. 전투에서 패한 그는 톨레마이스에 있는 자기 아내인 클레오파트라에게로[㈜ 그의 전부인은 데메트리우스가 포위되었을 때 그의 안티오쿠스 시데테스와 결혼했다. 참). 고대. 13권. 7 : 1(221, 222). 클레오파트라(Cleopatra)는 안티오쿠스 시데테스(Antiochus Sidetes)가 죽을 때 데메트리우스(Demetrius)와 재결합했다. ] 도망쳤다. 그러나 자기 아내가 자신을 받아주지 않자 그는 거기서 두로(Tre)로 갔다. 두로로 피한 그는 결국 그곳에서붙잡혀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 손에서 모진 고통을 당한 후에 죽임을 당했다. [㈜ 아피안(Appian), ‘Syr. ’68과 리비(Livy), ‘Epit’1x에 따르면 데메트리우스(Demetrius)를 살해하도록 명령한 자는 바로 클레오파트라(Cleopatra)였다. 이 일은 주전 126-125년에 일어났다. ] 그후 알렉산더가 그 왕권을 이어받고 대제사장 힐카누스와 화목하게 지냈다. 나중에[㈜ 주전 123-122년에. ] 그는 그리푸스(Gry-pus)라고[㈜ 안티오쿠스 Ⅷ세 그리푸스(Antiochus Ⅷ Grypus)가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데메트리우스 Ⅱ세(Demetrius Ⅱ)의 아들임. 참). 고대. 13권. 10 : 1(271) 다음의 각주. ] 불리는 데메트리우스의 아들 안티오쿠스와의 싸움에서 패해 죽임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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