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아그립바왕이 로마로 가이사 디베료를 만나러 갈 때자기가 해방시켜준 노예가 그를 고소하여 구속되었다가 디베료 사후에 가이우스가 석방하여 빌립이 다스리던 분봉국의 왕에 임명된 것에 대하여
1. 로마의 황제 문중과 아그립바와의 절친한 관계 및 그의 방종
헤롯왕이 죽기 얼마전에 아그립바는 로마에 살고 있었다. 그는 디베료 황제의 아들인 드루수스(Drusus)와[㈜ 첫 번째 아내인 빕사니아(Vipsania)가 낳은 디베료의 아들.] 매우 절친한 사이로 함께 자라났다. 그는 또한 드루수스 형의[㈜ 디베료 황제의 동생이다. 그는 몇 차례의 행동을 통해서 그 자신을 게르만인과 구별을 짓지만, 그는 그 말에서 떨어져서 주전 9년에 사망했다.] 아내인 안토니아(Antonia)와도[㈜ 집정관 마가 안토니(Mark Antony)의 딸이며, 게르마니쿠스(Germanicus)의 어머니, 미래의 칼리굴라(Caligula)황제의 할머니이다. 참). 고대. 18권. 6 : 4(164)이하.] 친분을 나누었다. 이는 아그립바의 어머니인 베레니케(Berenice)가 안토니아의 친구들로부터 존경받는인물로서 어떻게 해서든지 아그립바를 도와 주라는 그녀의 친구들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그립바는 본래 정신적으로 고상했고[㈜ 또는 \”타고난 귀족\”, \”본성이 위대한\”이라고 할 수 있다.] 남에게 주는 것을 아낄 줄 모르는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어머니가 살아 계신 동안에는 그의 본성을 숨기며 살았다.그것은 어머니의 꾸지람을 듣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머니 베레니케가 죽자 그는 돈을 마구 쓰면서 사치를 부렸으며 남에게 마음껏 선심을 베풀었다. 그가 선심을 베풀면서 지불한 비용 가운데 가장 비쌌던 것은 황제의 노예를 자유민으로 만들어주는데 드는 비용이었는데 여기에는 그들의 협조를 받아 자신의지위를 확고히 보장받고자 하는[㈜ 문자적으로는, \”그들 편에서의 어떤 행동들에 대한 희망에서\”라고 할 수 있다.]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이 일로 인해서 그는 가산을 탕진하여 더 이상 로마에서 살 수없게 되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디베료황제는 죽은 아들 드루수스의 친구들이 자신을 찾아오는 것을 엄금하였다. 그들을 보면 죽은 아들이[㈜ 디베료(Tiberius)의 아들은 주후 23년에 세야누스(Sejanus)에 의해서 독살되었다(타키투스 \’연대기\’ iv. 8).] 생각나서 그를 슬픔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었다.
2. 아그립바가 유대로 항해하다 ; 그는 자살을 꾀했으나 분봉왕 헤롯과 헤로디아의 제지로 살아났다.
이러한 이유로 아그립바는 로마에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하고 유대로 항해했다. 유대로 온 그는 가난에 시달려 초라한 몰골을하고 있었으며 수많은 빚쟁이들의 성화에 시달리게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중되는 빚쟁이들의 독촉을 피할 길을 찾을 수없을 정도로 다급한 상황에 몰리자 그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이두매(Idumaea)에 있는 말라다(Malatha)의 한 망대로 피신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자살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인 키프로스가 그의 생각을 알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살을 막으려고 애썼다. 이런 와중에 그녀는 분봉왕 헤롯의 아내이며 아그립바의 누이였던 헤로디아에게 편지를 보내 아그립바의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녀는 헤로디아가 가까운 친척이기에 그를 더욱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재산이 없어서[㈜ 다른 사본에는 \”비록 내가 그 사람만큼 가난할지라도\”로 나와 있다. \”간청했다\” 다음에 나오는 발췌문은 \”그의 남편이 그렇게 할 마음이 내키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구절을 덧붙이고, 그 다음의 문장을 생략한다.] 나의 남편을 도울 수가 없어요.\” 이런 간청을 들은 헤로디아와 그녀의 남편은 그에게 사람을 보내 디베랴(Tib-erias)에 살 곳을 마련해 주고 많은 생활비를 보장해 주었을 뿐아니라 디베랴의 재정장관으로[㈜ 참). 고대. 14권. 10 : 24(261). \’시장감독\'(ajgoranovmo\”)라는 헬라어는 탈무드 문학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크라우스(S. Krauss)의 \’Griechische und lateinische Lehnworter in Talmud, Midrasch und Targum\’, ii, 1899, p.11에 기록된 예들을 보라. 그의 기능은, 로마의 조영관(造營官, 옛 로마의 공공 건물, 도로, 공중 위생 등을 관장함-역자주)의 기능과 비슷하였는데, 그의 주요 임무는 시장을 검열하고, 시장으로 들어오는 물건들의 가격과 양을 조절하고 잘못된 저울과 자를 사용하는 죄를 처벌하는 것이었다.] 높여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움도 그렇게 충분하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이것마저 오래가지 못했다. 한번은 그들이 두로(Tyro)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는데 술기운이 돈 상태에서 욕설을 하며 서로 싸웠다. 헤롯은 아그립바에게 자기 도움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라고 빈정댔고, 아그립바는 그런 모욕을 참을 수 없어 플라쿠스(Flaccus)를 [㈜ 플라쿠스(L. Plmponius Flaccus)는 주후 약 32~35년 수리아의 통치자였으며 다른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찾아가 도움을 청했는데, 플라쿠스는 로마에 있을 때 매우 가깝게 지내던 로마 집정관으로서 수리아 총독으로 있던 사람이었다.
3. 아그립바와 수리아의 통치자 플라쿠스의 사이가 틀어지다
아그립바는 플라쿠스에게 환영받았으며 한동안 그와 함께 살았다. 아그립바는 플라쿠스와 나쁜 관계에 있던 자기의 형제인 아리스토불루스와 불편한 관계가 될 것을 염려했으나[㈜ 사본들에는 \”저지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플라쿠스가 그 둘을 모두 잘 대해 주었기 때문에 그 둘의 적대감은 플라쿠스와의 우정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포스트(Post) 교수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증오가, 지방총독의 친구들로서 사귀고 있다는 위치를 손상시키지는 않게 했다.\” 마티유(Mathieu)와 헤르만(Herrmann)의 프랑스어 번역에서는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그들의 불일치는 그들이 지방총독을 위한 우정을 나타내기 위해 서로 존경을 보여주는 것을 방해하는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그러나 아리스토불루스는 아그립바에 대한 적대감을 누그러뜨리지 않았으며, 마침내 아그립바가 플라쿠스와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아그립바와플라쿠스의 사이가 멀어지게 된 내막은 다음과 같다. 다메섹(Damascus) 사람들과 시돈(Sidon) 사람들간에 국경 분쟁이 있었는데, 플라쿠스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관심을 두고 있을 때,다메섹 사람들은 아그립바가 플라쿠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인 줄 알고, 아그립바에게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해결되도록 부탁하면서 거액의 뇌물을 주었다. 그래서 아그립바는 힘 닿는 대로 다메섹 사람들을 도와주기로 했다. 그런데 아리스토불루스는 이 사실을 알고 플라쿠스에게 아그립바를 고소했다. 플라쿠스는 그 일을 자세히 알아보게 한 후 사실임이 밝혀지자 아그립바와의 친분을 끊기로 했다. 아그립바는 궁지에 몰려 어려움에처하자 톨레마이스(Ptolemais)로 갔으나 살아갈 방법이 막연해지자 이달리아(Italy)로 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여비도 없어서 그 일을 못하게 되자, 부하인 마르시아스(Marsyas)에게 부탁을 해서 누구에게 빌리든지 아니면 어떻게 해서든지 필요한 돈을 융통해 보라고 했다. 그래서 마르시아스는 아그립바의 어머니인 베레니케(Gerenice)의 부하이며, 후에 안토니아(Ant-onia)의 상속자가 된 프로토스(Protos)에게 아그립바의 보증을 믿고 그에게 돈을 빌려주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프로토스는 아그립바가 얼마의 돈을 떼어 먹었다고 불평하면서 마르시아스가200,000드라크마(Attic drachma)를[㈜ 약 1929(£) 또는 5400$.] 차용해 주라고 했으나 2,500아덴 드라크마만을 빌려 주었다. 결국 마르시아스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것만이라도 받았다. 아그립바는 그 돈을받자 안테돈(Anthedon)에서[㈜ 또한 아그리피아스(Agrippias) 또는 아그리페이온(Agrippeion)이라고 불리는, 가사(Gaza) 근처의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를 가리킨다. 그 도시는 전쟁. 1권. 4 : 2(87)과 고대. 13권. 9 : 1(357)에 언급되어 있다.] 배를 타고 항해하려 했다. 이때얌니아(Jamnia)의 행정장관인 헤레니우스 카피토(HerenniusCapito)는[㈜ 참). 필로(Philo)는 \’Leg. ad Gaium\’ 199에서 유대인에 대한 헤레니우스 카피토(Herennius Capito)의 증오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한다. 프라까로(P. Fraccaro)는 \”C. Herennius) Capito di Teate,\” \’Athenaeum\’, xviii, 1940, pp.136~144에서, 그를 비문에서는 아우구스타(Julia Augusta), 디베료와 가이우스의 행정장관으로 불리우는 헤레니우스 카피토(C.Herennius Capito)와 동일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이 사실을 알고 군인들을 보내, 그가 로마에 있을 때 황제에게 빚진 은화 300,000을[㈜ 아마 드라크마일 것이다. 그러므로 약 28,929(£), 또는 81,000$이다.] 갚으라고 하면서 아그립바를 억류해 두었다. 그는 빚을 갚겠노라고 말하고, 밤이 되자 포승줄을 끊고 알렉산드리아로 배를 타고 도망쳤다. 거기서 그는 유대인의 최고 행정장관인[㈜ 행정장관(alabarch)의 기능에 대해서는 계속 논쟁이 있어 왔다. 로스토프체프(Rostovtseff)와 넬레스(Welles)는 이 직책은 유대인들이 지불했던 특별세와 어느 정도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바론(Baron)은 \’Social and Religious History of the Jews\’, I. 409~410 주16에서 이 공직은 애굽의 유대민족이 쇠퇴한 후에 발견되는 것이라고 바르게 지적한다. 알라바르크는 일반적인 세금 행정관이며 관세를 책임지고 있다는 전통적인 설명이 가장 좋은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더에게[㈜ 철학자 필로(Philo)의 형제이며 악명높은 행정장관이며 배교자인 티베료 율리우스 알렉산더(Tiberius Julius Alexander)의 아버지인 알렉산더 리시마쿠스(Alexander Lysimachus)를 말한다. 전쟁. 5권. 5 :4(205)로부터 알 수 있듯이 성전의 문을 금과 은으로 장식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참). 고대. 19권. 5 : 1(276)과 20권. 5 : 2(100).] 200,000드라크마를[㈜ 약(£)19,286 또는 $ 54,000]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알렉산더는 이를 거절하려다 아그립바의아내인 키프로스를 보아 빌려주기로 했다. 왜냐하면 키프로스는남편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고 그밖에 그녀의 행실이 선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알렉산더에게 꼭 갚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알렉산드리아에서 5달란트(talent)를[㈜ 1달란트는 6,000드라크마였다. 그러므로 5달란트는 30,000드라크마(약(£)2,893 또는 $8,100)일 것이다.] 주었고, 나머지는 그들이 디카이아르키아(Dicaearchia)에[㈜ 캄파니아(Campania)에 있는 푸테올리(Puteoli)의 헬라식 이름이다(참). 자서. 3(16). 바론(Baron)은 그의 책, I. 409. 주 16에서 알렉산더는 통신자 또는 지사를 푸테올리에 보내고 있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그곳에 분명히 풍요로운 유대 식민지가 존재했다고 해서, 바론의 주장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참). 푹스(A. Fuchs), \”Marcus Julius Alexander,\” \’Zion\’ xiii~xiv, 1948~49, pp.10~17[히브리어판].] 도착하면 주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아그립바의 방탕한 기질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프로스는 남편이 이달리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자신은 자녀들과 함께 유대로 돌아왔다.
4. 아그립바가 이달리야로 되돌아가 디베료 황제를 알현하다
아그립바가 푸테올리(Puteoli)에 도착하고 나서 그 당시 카프리(Capri)에 살고 있던 황제 디베료에게 편지를 보내 카프리에가서 찾아 뵙고 드릴 말씀이 있노라고 했다. 디베료는 곧 그에게편지를 보내 특별한 환영의 표시를 하며 카프리로 오라고 했다.아그립바가 카프리에 도착했을 때 디베료는 편지에서 표현한 것못지 않게 아그립바를 융숭하게 대접했다. 다음날 황제는 헤레니우스 카피토가 보낸 편지를 받았는데 아그립바가 300,000드라크마를 빌려갔으며, 약속한 날짜가 지났는데도 갚지 않았으며갚을 것을 요구하자, 아그립바는 재판 관할구역을 벗어나 도망쳤다는 내용이 편지였다.[㈜ 카피토(Capito)의 편지.] 덧붙여 그를 체포하여 돈을 받을 수있도록 그를 인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 편지를 읽고 황제는 기분이 몹시 언짢았으며, 아그립바가 빚을 갚기 전에는 자기에게 나타나지 말라고 명령했다. 황제의 분노로 인해 낙심한 아그립바는 게르마니쿠스(Germanicus)의 어머니이며 장차 황제가 될글라우디오의 어머니인 안토니아에게 디베료와 친분이 끊어지지 않도록 300,000드라크마를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 안토니아는 아그립바의 어머니인 베레니케를 생각해서-이 두 사람은 서로 매우 깊은 친분을 나눈 사람들이었다-또 아그립바가 자기의아들 글라우디오와 함께 자라난 것을 생각해서 그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 아그립바는 빚을 갚자 황제와 불편한 관계를 씻을 수 있었다.[㈜ 고대. 18권. 6 : 4, 5(166-168)은 전쟁. 2권. 9 : 5(178-180)구절과 병행되고 있다.] 그후 황제는 그의 손자에게[㈜ 디베료 게멜루스(Tiberius Gemellus)인데 그는 동생 드루수스의 아들이다. 참). 고대. 18권. 6 : 6(187)이하와 6 : 8(206).] 말하기를 밖에 다닐 때는 항상 아그립바와 함께 다니라고 했다. 아그립바는 안토니아에게 따뜻한 대접을 받았으므로 그녀의 손자이면서 아버지[㈜ 게르마니쿠스(Germanicus)를 가리킨다. 그의 인망을 언급하는 이유둘에 대해서는 고대. 18권. 6 : 8(207-209)를 보라.] 덕분에 최고의 명예를 얻은 가이우스(Gaius)의[㈜ 나중의 가이우스 칼리굴라 황제.] 비위를 잘 맞추어 주었다. 더구나[㈜ 필사본의 기록인 \”다른\”(!avllo\”)는 이 맥락에서는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허드슨(Hudson)이 수정한 \”달로스\”(Qavllo\”)를 받아들이며 그 사마리아인을 쉬러(Schurer)의 책, iii. 495에서와 같이, 유세비우스에 의해서 언급된 우주 역사(\’Chron.\’ Schoene편, I. 265)의 저자인 달루스(Thallus)와 동일시한다. 그러나 필사본의 기록을 \’에 더하여\'(in addition to, besides)라는 의미로서 유지하는 것은 가능하다. 참). 플라톤(Plato)의 \’Gorgias\’ 483 D, Aeschines I. 163을 참조하라. 또는 우리는 !avllo\”를 대명사로 취급하여, \”이제 다른 사람, 즉 태생이 사마리아인인 사람이 있었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리그(H. A. Rigg)는 , 그의 \”Thallus : the Samaritan\’\”, Harv. Theol. Rev.\’ xxxiv, 1941, p.119에서 위와 같이 설명하면서 그는 \”이 구절의 상황은 아그립바(Agrippa)가 한 방향에서는 어느 정도의 돈을 모금했고, 이제는 다른 차원, 즉 사마리아인으로 나타나는 제국의 해방노예로부터 어느 정도의 돈을 빌린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라고 설명한다.] 황제의 부하 중에 사마리아인이 한 명 있었는데 아그립바는 그에게 1,000,000드라크마를[㈜ 약 (£)96,429또는 $270,000.] 빌려 안토니아에게 빚진 것을 갚고 그 나머지는 가이우스의 환심을 사기위해 써서 결국 황제의 막강한 측근이 되었다.
5. 디베료의 느긋한 성격
아그립바와 가이우스가 매우 친밀하게 지내고 있을 때 어느날그들은 말을 타고 가면서[㈜ 병행구절인 전쟁. 2권. 9 : 5(179)에 따르면 그것은 아그립바가 디베료는 죽고 가이우스가 황제로서 계승하기를 기원하는 저녁만찬에서 가이우스를 대접하는 동안이었다.] 디베료 황제에 대한 말을 주고 받았다. 그 둘이 나란히 앉았을 때 아그립바가 기도하는 식으로 말했다. \”디베료가 하루 빨리 황제 위에서 물러나고 모든 면에서 유능한 가이우스가 황제가 되게 하소서.\”그들의 말을 몰던 아그립바의 부하인 유티쿠스(Eutychus)는 이 말을 주의깊게 들었지만 그 당시에는 혼자만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티쿠스가아그립바의 옷을 훔쳐 꾸중을 듣게 되자 그는 도망갔으나 곧 잡혔다. 그는 그 시(市)의 장관이었던 피소(Piso)앞으로 끌려와서 왜 도망갔는지를 추궁당했다. 그는 황제의 안전과 관계된 중요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피소는 그를 결박한채 디베료가 있는 카프리로 보냈다. 그러나 디베료는 유사 이래로 가장질질 끄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습관대로 유티쿠스를 오랫동안감옥에 두었다. 디베료는 사신을 접견하는 데도 늑장을 부렸을뿐 아니라 총독이나 행정장관이 죽어 그 자리가 공석이 되었는데도 곧바로 임명하지 못하고 질질 끄는 사람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총독들을 늦게 파견하는 디베료의 습성은 타키투스의 \’연대기\’ I. 80에서 여러 가지 설명을 곁들여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반복되는 문제들을 접하는데 대한 디베료의 반감과 한번의 영원한 결단을 위한 계속되는 열정,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위 직책을 즐기지 못하도록 하려는 이기적인 욕망, 그의 경쟁자가 되지 않도록 능력있는 사람들을 로마로부터 멀리 행정관으로 보내는 것 등을 언급한다. 매기(Magie)는 \’Romman Rule\’, ii. 1363주후 6년부터 23년까지 집정관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57명 가운데서, 오직 8명이 아시아 지역의 행정장관직을, 7명이 아프리카 지역의 행정장관직을 디베료가 원수로 있을 동안에 가졌던 것으로 알려진다고 언급한다. 수에토니우스(Suetonius)도 역시(\’Tib.\’ 41)디베료가 지방직을 새롭게 임명하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을 언급한다.] 그래서 감옥에 있는 죄인들의 호소를 듣는 것을 등한시했던 것이다.[㈜ 유티쿠스(Eutychus)의 경우 외에도, 디베료가 부당하게 지연한 경우들이 있는데, 그것은 그의 공판을 2년이나 기다려야 했던 알렉산드리아의 람폰(Lampon)의 경우(Philo, \’In Flacc.\’ 128)와 7년 동안 기다렸던 폼포니우스 세쿤두스(Pomponius Secundus)의 경우(Dio Cass. 1ix. 6. 2)등이다.] 그의 친구가 중요한 일을 그렇게 늦게 처리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디베료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사신들이 곧바로 일을 덜어버리면 새로운 사신을 선출해서 임명해야 하고 그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또 해임시키고 할 수 없어서 그렇게 늦는 것이야. 또 관료 임명에 관해서는 일단 임명된 사람은 그 지역 백성들의 감정을 고려하여 오래남아 있도록 하는 것일세.[㈜ 다른 사본에는 \”국민들을 고려하여 영원히 남아있기 위함일세\”라고 나와 있다.] 총독들은 본래 백성들로부터 재산을 강탈해 가는 경향이 있다네.그런데 재임기간이 짧다거나 임명된 것이 얼마되지 않아 취소된다고 하면[㈜ 다른 사본에는 \”고향땅에서\”라고 나와 있다.] 백성들의 착취가 훨씬 더 심해질 것이 뻔해,[㈜ 타키투스는 또한(\’연대기.\’ iv.6), 지방들이 행정관의 강탈에 시달리지 않도록 디베료가 관심을 썼다는 것을 언급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사실이 디베료가 행정관들을 그 직책에 오랫동안 머물도록 한 이유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의 자리를 오랫동안 유지해 주면 그동안 착취하여 배가부르기 때문에 더 이상 착취하는데 둔감해질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신속하게 후임자를 결정하면 운명적으로 타락된 총독들은 언제 떠나갈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 기간동안 심한 착취 행위를 일삼을 것이고, 이미 백성들로부터 많은 착취를 한 사람은 백성들을 착취하는 일에 관심을 덜 가질 것이기 때문이네.\” 그러면서 그는 예를 들어 계속해서 말했다.[㈜ 참).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Rhet.\’ ii. 1393, b 23~1394 a 1), 이솝(Aesop)이 사모스(Samos)에서의 모임 이전에 부유한 지도자를 옹호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여우, 파리, 고슴도치의 이야기를 참조하라. 이솝은 다음과 같이 사모스의 사람들에게 경계한다. 만약 당신들이 투표해서 이 지도자를 죽게 하면, 부유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서 당신들의 보화를 완전히 없게 할 것이다.] \”부상당한 한 사람이 있는데 파리떼들이 그 상처 부위에 몰려들었다네. 지나가는 사람이 그 처절한 곤경에 빠진 것을 보고, 그 파리떼를 쫓아낼 힘조차 없는 것으로 믿어 그것들을 쫓아버려 주려고 했는데 그 부상당한 사람이 그대로 두라고 간청했다네. 행인은 그러한 고통스런 상황에서 왜 그것들을 쫓아버리지 않느냐고 물었지. 그는 대답하기를 \’당신이 파리떼를 쫓으면, 나는 더 심한 곤경에 처하게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파리들은 이미 충분한 피를 빨아 먹었기 때문에, 단지 붙어있는 것 외에는 더 심하게 나를 괴롭히지는않을 것이오. 그러나 다른 파리들이 새로운 식욕으로 또다시 붙는다면 나를 더욱 심한 고통으로 몰아넣을 것이고 아마도 내가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네. 이와 똑같은 이유로심한 착취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신속하게 총독들을보내지 않으므로써 미리 예방을 해 보나는 것이네. 총독들도 파리떼들처럼 포화상태로 착취했기 때문에[㈜ 문자적으로는, \”그들을 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황폐화시켰기 때문에\”이다. 다른 사본에는 \”그들을 약탈하다\”(plunder)라고 나와 있다.] 그 즐거움으로 약탈에 대한 그들의 욕구가 감소될 것이기 때문이지.\”
디베료의 그러한 행위는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충분히 이해될 것이다. 그가 황제로 있었던 22년 동안 유대 나라의 총독으로 후임자를 보낸 것은 그라투스(Gratus)와 빌라도(Pilate) 두명뿐이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게도 그렇게 했다. 더구나 죄인들을 심문하는 것을 질질 끄는 것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죄인들을 곧바로 처형시키면 그에게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된다. 그러나그들이 감옥에서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현재의 불행에 대한 중압감 때문에 더욱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 때문이다.\”
6. 안토니아가 어떻게 세야누스의 음모로부터 디베료를 구했는가에 대하여
유티쿠스가 곧바로 황제에게 심문을 받지 못하고 감옥에 갇혀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때문이었다. 얼마후 디베료가 카프리에서(로마에서 100퍼얼롱 떨어진) 투스쿨룸(Tusculum)으로 옮겨왔을 때[㈜ 주후 36년의 여름의 후반기 동안의 일이었다. 로저스(R. S. Rogers)의 \’Class. Weekly\’ xxxix, 1945~46, p.43을 보라. 그는 투스쿨룸 (Tusculum)으로의 이 여행을 위한 유일한 증거는 요세푸스의 기록이라고 언급한다.] 아그립바는, 유티쿠스가 자신에 대해 제기한소송사건을 황제가 심문할 때 자신이 안전하게 되도록 조처를 취하게 해달라고 안토니아에게 부탁했다. 아그립바가 안토니아에게 이러한 부탁을 한 것은 안토니아는 디베료 황제가 극진히 아끼는 사람이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안토니아는 디베료의 형제인 드루수스(Drusus)의 아내였고, 또 그녀는 품행이 고결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청상과부로 남아있으면서 황제가 재혼하도록 설득하기도 했지만 계속 거부했다. 또 그녀의 생활이 구설수에 오른적이 없다. 더구나 그녀는 디베료에게 매우 큰 공을 끼쳤는데 그것은 황제의 친구이며, 그당시 군대장관으로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세야누스(Sejanus)가 황제에게 대반역을 계획하고 있을 때, 안토니아가 결정적으로 디베료를 도운 것이다.그당시 세야누스는 대부분의 집정관들과 부하들을 끌어들였으며[㈜ 비록 매기(D. Magie)가 그의 \’De Romanorum iuris publici sacrique vocabulis sollemmigys in graecum sermonem conversis\’, 1905에서, 병행구를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헤게모니아\'(hgemoniva)라는 단어는 명확하게 보병 친위대의 장관직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다. 벨(H. I. Bell)이 복원한 것이 옳다면, \’Acta Isidori\’에는 하나의 병행구절이 있다. 참). 벨의 \”A New Fragment of the Acta Isidori\”, \’Archiv f. Papyrusforsch\’. x, 1931, p.11.] 군대를 매수하여 반역은 최고조에 달했던 것이다. 이때 그 반역은 성공했을 것이다.[㈜ 참).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의 책 1xv. 14. 1을 참조하라. 그는 안토니아(Antonia)가 디베료에게 카이니스(Daenis)를 통해서 세야누스(Sejanus)에 대한 비밀 편지를 보냈다고 전한다. 그 외에는 세야누스의 일에 있어서의 안토니아의 역할은 어느 곳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마쉬(F. B. Marsh)는 그의 \’The Reign of Tiberius\’, 1931, p.304에서 디오(Dio)의 진술은 디베료에 대한 음모의 생각에 어떤 지지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안토니아의 응답의 비밀스러운 성격과 세야누스가 혁명을 음모하고 있었다는 수에토니우스의 진술(\’Tib.\’ 65)은 요세푸스의 진술을 확증하는 것이다. 마쉬가 강하게 의존하고 있는(p. 193주 1을 보라), 짧은 자서전에서 디베료가 그가 게르마니쿠스의 자녀들의 증오를 알았기 때문에 세야누스를 처벌했다고 주장하는 진술은(Suet. \’Tib.\’ 61), 로마인들 사이에서 알려져 있던(고대. 18권. 6 :8(207-210), 게르마니쿠스의 신비한 이름을 불러 환기시킴으로써 동정을 얻으려는 황제의 약삭빠른 시도이다. 마쉬는 안토니아가 게르마니쿠스의 자녀들에 대한 세야누스의 음모를 알리기 위해서 디베료에게 글을 썻다고 생각한다(마쉬의 전게서). 그러나 그 편지는 디베료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궁정에서 그녀가 그러한 호의를 얻었다고 하는 것이 더욱 일리가 있을 것이다.] 안토니아가 디베료에 반역하는그 음모를 알게 되자 그녀는 정확한 설명을 편지로 써서 믿을만한 팔라스(Pallas)를 시켜 카프리에 있는 디베료에게 보냈다.디베료가 이 사실을 접하고 즉시 세야누스와 그 일당들을 잡아처형시킨 것이다. 디베료는 전에도 그녀를 존경했었는데 이런일로 인해 더욱 그녀를 믿고 존경하게 된 것이다. 안토니아가 유티쿠스를 심문해 주도록 요청하자 디베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티쿠스가 만일 아그립바에게 잘못했다면 지금까지 그가받은 벌로 충분한 댓가를 받은 것이요. 그러나 그가 말한 것이사실이라면 자신에게 부당한 일을 한 부하를 처벌하려다가 오히려 아그립바 자신이 벌을 받을 경우가 있음을 알아두시오.\” 안토니아가 이 말을 아그립바에게 전하자 아그립바는 그 일에 대해서 더 철저히 조사해 주기를 요구했다. 아그립바가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자 안토니아는 그를 조사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한편 디베료는 가마로 된 안락의자에 앉아 여행하고 있었다. 가이우스, 그녀의 손자, 그리고 아그립바가 따르고 있었는데 이때 가마 옆에 걸어가던 안토니아가 유티쿠스를 소환해서 그를 심문해보라고 요청했다. 이때 황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토니아,내가 지금 하려는 것은 내가 하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간청에 못이겨 하는 것인 줄 신들이 알것이오.\”
이 말을 하고 디베료는 세야누스의 후임자인[㈜ 친위대 보병의 장관으로서.] 마크로(Mac-개)에게 명령하여 유티쿠스를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유티쿠스가 곧바로 디베료 앞에 대령하자 디베료는 자기에게 자유를 준사람인 아그립바를 고소한 내용이 무엇인지 그에게 물었다. 유티쿠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고대. 18권. 6 : 6(187-189)는 전쟁. 2권. 9 : 5(179-180)과 병행된다.] \”나의 주시여, 가이우스와 아그립바가 함께 말을 타고 있었고 제가 옆에 서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여러 가지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아그립바가 가이우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늙은 황제가 빨리 떠나고 하루 빨리 당신이 통치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손자인 디베료는[㈜ 아그립바와 가이우스 사이의 본래의 대화는 고대. 18권. 6 : 5(168)에 기록된 것과 같이, 디베료의 손자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으며, 또한 가이우스가 그를 죽게하지 않으리라는 아그립바의 기대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는다.] 미리 당신이 제거해 버리면 결코 우리를방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이 다스리는 세상은 매우 축복된 세상이 될 것입니다. \” 디베료는 이 말을 그대로 믿었다. 더구나 그는 아그립바에 대해서 악의가 생겨났는데, 이는 황제의 손자이면서 드루수스의 아들인 디베료를 잘 모시라고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아그립바는 이 명령을 무시하고 가이우스에게 온 정성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베로는 마크로(Macro)에게 아그립바를 결박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마크로는 황제가 누구를 결박하라고 했는지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았고, 또 아그립바를 그렇게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명령의 정확한 의도를 알기 위해 머뭇거렸다. 이때 황제는 분기가 탱천하여 주위를 돌고 있다가 여전히 아그립바가 그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마크로! 이 자를 결박하랬더니 뭐하고 있나\”라고 말했다. 마크로가 다시 아그립바를 가리키며 결박해야할 사람이 그냐고 묻자 아그립바라고 말했다. 이때 아그립바는 황제에게 간청하기를 자기가 황제의 아들과 함께 자라난 것과더구나 그를 가르치기까지 한 것을 기억해 달라며 간청했지만,이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병사들은 아그립바를 자주색 옷을 입은 채로 그대로 감옥에 넣었다. 날씨는 덥고 식사때 물을 많이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아그립바는 갈증을 느꼈다. 그는 그런 꼴을 당하는 자신을 보고 절망감에 빠져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때 가이우스의 종인 다우마스투스(Thaumastus)라는 사람이 물 한통을 들고가는 것을 보고 마실 물 좀 달라고 부탁했다. 그 종은 아그립바에게 물통을 건네주자, 아그립바는 실컷 물을 마신후 말하기를 \”소년아, 내게 베푼 이 친절은 결코 헛되지않을 것이다. 내가 이곳에서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 때 나를 섬긴것에 보답하여 가이우스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다. 내가 옛날의 자리를 되찾을 때 네가 나에게 베푼 호의에 대해서 빠짐 없이 갚아주겠다.\” 아그립바는 자신의 말을 어기지 않고 후에 보답해주었다. 후에 아그립바가 왕이 되었을 때 황제가 된 가이우스로부터 다우마스투스를 인계받아 곧 자유인으로 놓아주고 그를 자기 영지의 청지기로 임명했다. 더구나 아그립바가 죽을 때에도그를 아들인 아그립바와 딸인 베레니케에게 맡겨 같은 자격으로그 들을 섬기도록 했다. 다우마스투스는 그가 나이 들어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는데 이 일은 그 후에 일어난 일이다.
7. 게르만인 죄수가 아그립바가 위대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다. 그러나 그 새가 불길한 것이라고 표명하다
아그립바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자면 그는 많은 다른 죄수들과 왕궁 앞에서 결박당한 채 절망감에 빠져 나무에 기대어 있었다.그런데 로마 사람들이 \’부보(bubo)\’라고[㈜ 뿔이 달린 올빼미.] 부르는 새 한 마리가 아그립바가 기대고 있는 나무 위에 내려 앉았다. 죄수 중의 한게르만(German)사람이 아그립바를 보고 병사에게 자주색 옷을 입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의 이름이 아그립바이며 그가 유대인으로서 유대의 저명한 인사라는 것을 알자, 병사에게 그를 결박한 사람이[㈜ 리챠드(Richards)와 슈트(Shutt)는 \’Class. Quart.\’ xxi, 1937, p.176에서 \”식탁-친구\”라고 기록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백부장이 아그립바에게가 아니라 어느 사병에게 속박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그립바가 매우 중요한 죄수였기 때문에, 백부장이 그에게 속박되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누구인지를 묻고는 아그립바에게로 가서 대화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그립바에게 유대인의 풍습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부탁이 이루어져서 아그립바에게 가서 통역자를 두고 그에게 물었다. \”젊은이, 급작스런 불행으로 매우 절망해 있구만. 당신의 현재의 어려움에서 곧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하느님의 섭리를 내가 말한다면 당신은 결코 믿으려 하지 않겠지. 그러나 나의 조상들의 신과 우리를 이렇게 만든 이 나라 신들에게 맹세하며 말할진대 즐겁게 해주려는 수다도 아니요 호의를 바라고 하는 것도 아니오. 그런 말은 나중에 그 말을 전혀 등지 않은 것보다 더큰 슬픔을 안겨 주게 되는 법이오. 비록 내가 위험에 빠질지도 모르지만 신의 예언을 명확히 해주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해서말하는 것이오. 당신은 머지 않아 결박에서 풀려 자유로와질 것이며, 가장 놓은 명예로운 자리와 권력을 잡게 될 것이오. 당신은 당신의 불행을 동정하던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것이며,자녀들에 의해서 가장 큰 축복된 삶을 누릴 것이며, 당신의 부(富)가 자손들에게 이어질 것이오. 그리고 기억하시오 당신이이 새를 다시 볼 때 5일 안으로 당신은 죽을 것이오.[㈜ 죽음의 징조로서의 올빼미에 관한 헬라와 라틴의 문학에 있어서의 실례들을 위해서는 피스(A.S. Pease)편지, \’IV Aeneid\’, 1935, p.375~!377을 보라. 그러나 그는 위의 구절은 빠뜨리고 있다.] 이것은새를 통해서 신의 뜻을 보여주는 방법이 될 것이오. 이러한 것을미리 알려줌으로써 당신이 정확히 이해할지는 모르겠소. 그러나당신의 축복된 미래를 즐김으로써 지금의 이 고통을 다소나마 잊기를 바라오. 그러나 꼭 기억해 주시오. 당신이 이 모든 영광을 누릴 때 지금 불행에 빠져있는 나를 구해주시오.\” 이러한 예언의 말을 한 게르만 사람은 나중에는 감탄해 마지할 아그립바의 눈에서 못 믿겠다는 듯한 비웃음을 보았다. 한편 아그립바의 불행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던 안토니아는 디베료에게 그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으며 한편으로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아그립바를 위해 마크로에서 다음과 같은 양해를 구해냈다. 즉 그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과 그들을 지휘하고 또 아그립바를 포박했던[㈜ 각주 250을 보라.] 백부장이 아그립바를 잘 대해 줄 것과, 그가 매일 목욕할 수 있도록, 또한 부하들과 친구들이 자유롭게 그를 면회할 수 있도록, 그밖의 다른 신체적인 편안함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에 아그립바의 친구인 실라스(Silas)와[㈜ 그의 전체 군대의 지휘권 내에 있도록 아그립바에 의해서 임명되었다(고대. 19권. 6 : 3(299)).] 그의 부하인 마르시아스(Marsyas)와[㈜ 참). 고대. 18권. 6 : 3(155-157).] 스토에케우(Stoecheus)는 아그립바에게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갖다 주었으며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또 의복을 파는 척하면서 옷도 넣어 주었으며 마크로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의 묵인하에 침대도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아그립바는 6개월을 보냈다.
8. 디베료의 병과 가능성 있는 왕위 계승자 후보들
한편 디베료는 카프리로 돌아오자 병이 들었다. 병세가 처음에는 가벼웠으나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어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가 되었다. 그는 부하 중에 가장 신임하는 에보두스(Evo-연)를 시켜 자손들을 불러오도록 하고 죽기 전에 그들에게 유언을 남기기를 원했다. 황제는 독자인 드루수스마저 죽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더 이상 적자가 없었다.
드루수스의 아들인 디베료 게멜루스(Tiberius GEmelus)와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이며 황제의 형제의 손자인[㈜ 사본들에는 \”아들\”로 되어 있다. 그러나 가이우스는 황제 디베료의 조카였던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이었다.] 가이우스만이 남아 있었다. 가이우스는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었고,[㈜ 참). 제롬(T. S. Jerome)의 \”The Historical Tradition about Gaius\”를 보라. \’Aspects of the Stydy of Roman History\’, 1923, p.401에 나오는 그는 17세가 못되었을 때에, 리비아(Livia)의 장례식에서 가이우스가 추도사를 했다고 언급한다(Tac. \’연대기\’v. 1).] 아버지인 게르마니쿠스의 훌륭한 성품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있었던 젊은이이다.[㈜ 가이우스의 초기의 인망에 대해서는 수에토니우스의 \’Calig\’. 13~21을 보라. 로스보로프(R. R. Rosborough)그의 \’An Epigraphic Commentary on Suetonius Life of Gaius Caligula\’, 1920, p.22에서, 지방과 군대에서의 가이우스의 인망을 가리키는 많은 비문들을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많은 비문들에서 그가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로서 언급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게르마니쿠스는 고매한 성격과 유창한말 솜씨로 누구든지 만나 대화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대중들 로부터 존경을 받아온 사람이었다. 그는 로마 시민이나 집정관들뿐 아니라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그의 매혹적인 예의에 감동을 했으며 그를 만났던 사람들로부터 그에 대하여 들은 사람들도 감동을 했다. 게르마니쿠스가 죽었을 때 온 백성이 슬퍼했으며, 그들의 눈물은 지도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거짓된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서 자기 개인에게 닥친 슬픔으로 여겼다.[㈜ 타키누스는 또한 게르마니쿠스의 죽음과 장례에 대해 전적으로 슬퍼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게르마니쿠스의 백성들에 대한 친숙성 때문에 그의 아들도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특히 병사들은 더욱 감동받아 그가 황제가 될 수만 있다면 목숨을 바치는 것도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이렇게 게르마니쿠스를 실제보다도 좋게 묘사하는 것은, 타키투스의 긴 설명(\’연대기\’ I. 33이하)과 수에토니우스의 짧은 언급(\’Calig,\’ 3)에 의해서 확실시된다. 두 사람은 게르마니쿠스의 친절함과 정중함, 그리고 보편적인 존경과 호의를 일으키는 능력을 강조한다. 발스돈(J. P. V. D Balsdon)은 그의 \’The Emperor Gaius\’, 1934, p.28에서, 게르마니쿠스 시대에 제국을 통해서 계속되는 칭송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만은 이러한 태도를 갖지 않았다고 말한다. 요세푸스는 하나의 예외였다고 그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사실이 요세푸스가 어느 무명의 로마 역사가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호의적인 견해는 아그립바와 그의 친구 안토니아(게르마니쿠스의 어머니), 그리고 그의 친구 가이우스 칼리굴라(게르마니쿠스의 아들)에 대한 일반적인 칭송의 부분이라는 것이 보다 그럴 듯한 것으로 보인다.]
9. 디베료가 후계자를 신의 뜻에 따라 결정하겠다고 결심하다
[㈜ 택커래이(Tackeray)는 그 자신의 요세푸스 사본에서 연필로 써서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요세푸스는 여기에서 디베료가 그의 손자와 손자 조카 사이에서 선택하는 방법의 이야기와 창세기 48장에서의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이야기 사이에 하나의 병행이 있음을 본다. 따라서 택커래이는, 요세푸스의 권위는 아마도 유대적인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에는 점을 치는 요소가 전혀 없다. 또한 성경의 이야기는 야곱이 한 계승자를 찾은 것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 두 아들이 나왔고, 축복을 받은 것이다.]
디베료는 에보두스(Evodus)에게 다음날 아침 일찍 손자들을 데려오라고 명령한 후에 그는 신에게 황제 자리를 이을 후계자가 누군지를 알려 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친손자인 디베료 게멜루스를 후임자로 하고 싶었으나[㈜ 우리들의 자료들 중의 어느 것도 디베료가 실제로 한 계승자를 정했다는 것을 지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수에토니우스는 \’Calig\’ 19에서 그가 디베료 게멜루스(Tiberius Gemellus)에게로 기울어지고 있었다고 언급한다. 타키투스 역시, \’연대기\’ vi. 46에서, 황제직을 계승시키는 것데 대해서 디베료가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언급한다. 그리고 요세푸스같이 타키투스는 가이우스와 티메르우스 게멜루스가 지도자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언급한다(타키누스의 이 구절에 따르면, 디베료는 또한 후에 황제가 된 글라우디오(Claudius)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은 가이사의 이름을 웃음거리로 만들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는 가이우스가 술라(Sylla)의 모든 악덕을 가지고, 그의 덕을 아무것도 가지지 않을 것이라고 한 디베료의 예언을 언급한다. 가이우스가 디베료를 계승할 것이라는 디베료의 두려움은 점성가 드라실루스(Thrasyllus)가 디베료에게 가이우스가 황제가 될 기회가 없는 바이아이만(the Gulf of Baiae)을 말을 타고 건너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그를 납득시켰다는 이야기에서 지적되고 있다.(이 예언의 성취에 있어서 가이우스가 세운 다리의 설명을 위해서는 고대. 19권. 1 : 1(5, 6)을 보라. 수에토니우스는 \’Tib\’. 62에서 한편에서는 디베료가 가이우스와 디베료 게멜루스를 둘 다 죽이려고 했다고 말해준다. 디베료는 디베료 게멜루스를 간통에 의해서 태어난 자라고 미워했다. 타키투스의 \’연대기\’ vi. 46으로부터 생각할 때, 디베료는 그의 후계자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자기 자신의 결정과 소망보다는 신의 뜻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점을 쳐서 다음날 자기에게로 맨처음에 오는 사람이 황제가 될 것이라는 징표를 갖기로 했다. 이 결정을 하고 나서 그는 신이 자기의 책략에 무관심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친손자의 가정교사를 친손자에게 보내 아침 일찍 데려오라고 했다. 그러나 신의 뜻은 황제의뜻을 무시했다. 디베료는 이렇게 마음을 먹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 문자적으로는, \”첫 시간에\” 또는 \”첫 시간의 시작에\”이다.] 에보두스에게 누구든지 맨처음에 도착하는 사람을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에보두스는 밖으로 나갔는데 앞에 가이우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디베료는 아침식사 중이어서[㈜ 또는 \”그는 아직 그의 음식을 소화시키지 못했으므로\”.] 거기에 없었는데 디베료의 생각을 모르고 있던 에보두스가 \”황제께서 부르십니다\”하며 그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디베료가 가이우스를 보았을 때 그는 먼저 신의 위대함을 느꼈다. 그는 황제의 후임자를 선택하는 특권은 결국 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자신의 뜻이 실현되지 않아 매우 슬퍼했고, 더구나 손자 디베료가 로마제국을 잃게 될 뿐 아니라, 그의 존재가 더 강력한 사람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슬프기 그지 없었다. 그의친척들은 그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는 친척들로부터 미움을 받아왔고 특히 황제의 후임으로 물망에 올랐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디베료가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고, 황제 자신의 뜻대로 통치하고 싶어서[㈜ 참). 타키투스에 의해 \’연대기\’ vi. 46에서 이야기된 것을 참조하라. 그 이야기는 한번은 디베료가 게멜루스를 끌어안고 가이우스가 보는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가이우스가 게멜루스를 살해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이야기이다.] 자리에 대한 욕심을 포기하지않을 것이기 때문에 가이우스에게 위협당하고, 미움을 받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때 디베료 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