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권 제 1장 가이우스가 카이레아에게 살해된 것에 대하여

 


   제 19 권

  3년 6개월 동안의 사건을 다룸



 유대인들이 바벨론을 떠날 때부터 로마 총독 파두스까지



 제 1 장



 가이우스가 카이레아에게 살해된 것에 대하여



 1. 가이우스 황제의 광기서린 난폭성



[㈜ 가이우스(Gaius)에 반대하는 음모와 글라우디오(Claudius)의 계승에 대한 긴 이야기를 위한 요세푸스의 자료는 역사가 클루비우스 루푸스(Cluvius Rufus)에 근거하고 있다는 몸센(T. Mommsen)의 이론(\”Cornelius Tacitus und Cluvius Rufus\”, \’Hermes\’ iv, 1870, p.322)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참). 예를 들면, Groag, im Pauly-Wissowa iv, 1901, pp.123~125. 이 이론을 지지하는 중요한 것은 클루비우스(Cluvius)와 원로원 바티비우스(Bathybius) 사이에 있었던 대화의 기록인데, 이 대화에 클루비우스는 바티비우스에 조용히 하라고 재촉하면서 호머(Homer)로부터 적절한 인용을 한다<고대. 18권. 4 : 3(91, 92))>. 그러한 일화는 오직 클루비우스 루푸스 자신으로부터, 즉 말에서가 아니라 정확하게 그의 글에서 유출될 수가 있다고 말해져 왔다(몸센의 책, p.320을 보라. 이것은 R. Syme의 \’Tacitus\’, iv, 1958, Tradition about Caliguila\”, \’Camb. Hist. Jour\’. iv. 1933, p.116에서 요세푸스의 문체에 보통 때보다 은유적이고 뚜렷한 색채를 가지고 나타난다고 이곳의 19권으로부터 많은 예들을 인용한다. 그리고 그는 요세푸스 전의 고도로 수사학적이고 은유적인 스타일을 가진 자로 클루비우스 루푸스가 있었음을 제안한다. 모미글리아노(A. Momigliano)는 그의 \”Osservazioni sule fontiper la storea 야 Caligula, Claudil, Nerone\”, Rend. d. Accad. d. Lincei, viii, 1932, p.305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논증한다. 클루비우스는 요세푸스뿐만 아니라 가이우스 암살의 주제에 대한 두 명의 주요 기록자인 수에토니우스와 디오 카시우스의 주요 자료원이다. 그러나 몸센의 이론은 빈약한 근거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 클루비우스 루푸스의 역사가 가이우스와 글라우디오의 시대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표시가 없다. 왜냐하면 타키투스의 \’연대기\’ xiii. 20과 xiv. 2와 플리니(pliny)의 서신 ix. 19.5에서의 그것에 대한 언급은 네로(Nero)시대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18권. 4 : 3(91, 92)에 기록된 일화는 다른 기록자, 아마도 세르빌리우스 노니아누스(Servilius Nonianus) 또는 아우피디우스 바수수(Aufidius Bassus)(\’Syme\’, I. pp.287~288을 보라)에 의해서 기록되었을 수도 있다. 또는 그것은 구전으로 잘못 전해졌을 수도 있다. 19권에서의 요세푸스의 문체가 다른 부분보다 은유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비록 그럴지라도 이러한 은유가 클루비우스로부터 빌려온 것이라는 증거가 없다. 그의 작품들은 남은 부분이 별로 없고 분실되었으므로(H. Peter, \’Hist. Rom. Relliq.\’ ii, 1906, p.114), 그의 문체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거의 아는 것이 없다. 수사학적 문장은 로마인들 내에서 넓게 계발되었고, 요세푸스는 이러한 은유들을 같은 은유적 전통내에서 활동했던 다른 작가로부터 빌려왔을 수도 있다. 가이우스의 살해와 글라우디오의 계승에 대해서 본제를 벗어나 길게 언급된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유들이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글라우디오의 계승에 있어서(고대. 18권. 8 : 6(236)이하),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유대 왕 아그립바를 영화롭게 하기를 바라는 그의 바램과 연결되어 있는 요세푸스 자신의 도덕적인 이유들(고대. 18권. 1 : 4(16)일 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이우스 황제는 예루살렘과 전 유대지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난폭성을[㈜ 참). 수에토니우스(Suetonius)는 가이우스 칼리굴라의 자서전을 두 부분으로, 즉 황제 칼리굴라와 괴물 칼리굴라로 나누고 있다(\’Calig\’, 22). 가이우스가 미친 것은 다음과 같은 곳에도 언급되어 있다. 필로의 \’Leg. ad Gaium\’ 34 : 디오 카시우스의 책, 1ix. 29, 1 ; 타키투스의 \’연대기\’ xi. 3 ; sen. \’De Cont. sap\’. 18. 1(발스돈의 \’The Emperor Gaius(Caligula), 1934, p.212에서 인용되고 있다).] 보일 뿐 아니라 로마의 재배를 받는 모든 지역의 백성들까지 괴롭혔다. 그는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악행으로 온 제국을 오염시켜 놓았는데 그의 그러한 폭정은 역사이래로 찾아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로마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이는 황제가 로마를 다른 도시와 똑같이 생각했기 때문이며 시민들을 괴롭혔을 뿐 아니라 특별히 원로원이나[㈜ 디오 카시우스의 책, 1ix. 5. 1에 따르면 처음에 가이우스는 원로원 의원에게 큰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수에토니우스의 \’Calig\’. 26에 따르면 후에 가이우스는 원로원 의원들로 하여금 그의 전차 옆에서 원로원 제복을 입고 수 마일을 달리게 했으며, 그가 저녁식사를 할 때에 시중드는 자로 봉사하게 했다. 그는 원로원을 세야누스(Sejanus)의 지지자들이 되는 것으로,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곳으로 남용했다. 또한 Sen. \’De Ira\’ iii. 18. 3~19. 그와 \”De Ben.\’ ii. 12. 1~2와 디오 카시우스의 1ix, 23. 3을 보라.] 귀족 계급들을[㈜ 수에토니우스의 Calig, 35를 참조하라. 그는 칼리굴라는 귀족들로부터 그들의 가족들의 기장(記章)을 빼앗았다. 그래서 그는 토르크와투스(Torquatus)의 금목걸이, 킨키나투스(Cincinnatus)의 머리카락, 폼페이의 가문이 오랫동안 사용해 온 별명인 \”위대한\’이라는 그나이우스 폼페이(Gnaeus Pompey)의 별명을 빼앗았다.] 괴롭혔다. 그는 또한 기사단(the equestrian order)이라는[㈜ 수에토니우스의 \’Calig\’. 30에 따르면, 가이우스는 말타는 사람들이 연극에 참여하는 것과 경기를 즐기는 것에 대한 지나친 열심 때문에 그들이 그의 불쾌함을 초래했다고 단언했다.] 단체를 괴롭히기도 했는데 그들 가운데서 로마의 눈이라 할 수있는 원로원이 선출되기 때문에 그들은 지위나 재정 능력에 있어서 원로원들과 같은 수준이었다. 그는 기사단들에게서 그들의 특권을 빼앗고 로마에서 쫓아버리거나 그들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거나 했다. 그는 재산을 빼앗을 구실을 만들어 기사단들을 처형시키는 일들을 많이 저질렀다.[㈜ 참). 가이우스가 주사위 게임을 중단시키고 궁전 뜰로 나아가서 지나가던 두명의 부유한 말타는 사람을 체포하였으며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나서 그의 행운을 자랑하는 게임으로 돌아온 것에 대한 이야기를 참조하라(수에토니우스 \’Calig\’. 41).] 또한 그는 자신을 신격화시켜 백성들로 하여금 신에게 하듯 경배할 것을 강요했다. 그가 쥬피터신전(The Temple of Jupiter)을[㈜ 쥬피터 옵티무스 막시무스(Jupiter Optimus Maximus) 성전은, 성전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된 카피톨리네(Capitoline)언덕에 서 있었다.] 방문했을 때-그 신전은 로마인들이 카피톨(Capitol)이라고[㈜ 쥬피터 성전은 또한 aedes Capitolina라고도 불리었다. 플리니(pliny)의 \’Hist. Nat.\’ xxxiii. 5. 16, 6. 19 : xxxv. 14을 보라.] 불렀으며 그들의 많은 신전가운데 가장 훌륭한 곳이었다.[㈜ 집정관들이 그들의 공적인 첫 번째 희생을 드리는 곳, 원로원 의원들이 만나는 곳, 승리의 행진이 끝나는 곳, 그리고 외국과의 관계를 다룬 공문서가 보관되는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참). 플래트너(S.B.PLatner)와 아쉬비(T.Ashby)의 \’A Topographical Dictionary of Ancient Rome\’, 1929, pp.297~302.]-자신은 쥬피터와 한 형제라고 할 정도로 교만해 졌다.[㈜ 수에토니우스는 \’Calig\’. 22에서 가이우스가 쥬피터 카피톨리누스(Jupiter Capitolinus)와 대화에 속삭이기도 하고 화난 위협의 말로 소리지르기도 하면서 대화를 했다고 언급한다. 가이우스는 쥬피터가 그와 함께 살자고 자기를 설득했으며, 제국의 궁전과 카피톨(Capitol)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았다고 마침내 선언했다. 디오 카시우스 1ix. 4. 2에서는 비록 처음에는 그가 자신의 우상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였으나, 그는 스스로 상을 제작하기를 계속했으며 성전을 세우고 그 자신을 신으로 섬기며 자신에게 제물을 드리라고 명령했다고 나온다. 또한 (1ix. 28. 5. 5 ; 수에토니우스 \’Calig\’. 22와 유사함)가이우스가 자신을 쥬피터 라티아리스(Juipiter Latiaris), 즉 라티움의 쥬피터(Jupiter of Latium)이라고 불렀으며, 그는 모든 신들의 흉내를 내었다고 (1ix. 26. 5)언급한다. ] 그의 광기서린 행동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그는 배 안에서 생각하기를 캄파니아(Cam-pania)에 있는 디카이아르키아(Dicaearchia)시[㈜ 로마의 푸테올리(Puteoli)를 가리킨다. 고대. 18권. 6 : 3(160)을 보라.]에서 다른 해변 도시인 미세눔(Misenum)에[㈜ 사본들에는 메세니(Meseni)로 되어 있다(복수 \”Miseni\”의 예를 위해서는 Payly-Wissowa, xv, 1932, p. 2046을 보라) ; 현대의 미세노(miseno)이다. 이곳은 그 당시 이달리야에 있는 주요한 해군 기지였다.] 이르는 다리를[㈜ 바이아이(Baiae)의.] 건설할 것을생각했다. 그는 땅에서도 경배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다에서도 같은 경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바다의 주(主)로서 당연한특권처럼 생각한 것이다. 이 끝에서 저쪽 끝까지 30퍼얼롱(fur-long)이나[㈜ 디오 카시우스의 책 1ix. 17. 1에는 26퍼얼롱으로 되어 있다. 그는 그 다리는 푸테올리(Puteoli)로부터 바울리(Bauli)까지 놓여 있었다고 말한다.] 되는 먼 거리를 나룻배로 건넜는데 이제는 만 전체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설해서 꽃마차를 타고 다리를[㈜ 이 다리에 대한 설명을 더 알려면 디오 카시우스의 책 1ix. 17. 1~3을 보라. 그는 이 다리는 휴식처와 숙박소, 그리고 마실 수 있는 흐르는 물까지 있었다고 언급한다. 가이우스는 몇 사람을 그 다리로부터 던짐으로써 그 다리의 헌납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수에토니우스는 이 다리를 지은 것을 괴물 칼리굴라에 포함시키기보다는 황제 칼리굴라에 포함시키면서(\’Calig\’. 19). 발스돈(Balsdon)의 작품 p.52에서와 같이, 그 다리는 단순히 비합리적인 공상적인 작품이 아니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수에토니우스는 다리를 지은 이유를 세 가지로언급한다. (1) 아주 좁은 헬레스폰트(Hellespont) 다리를 놓은 아하수에로(Xerxes)의 업적을 능가하기 위해서, (2) 게르만인(Germans)과 브리튼 사람(Britons)들을 두렵게 하기 위해서, (3) 디베료에게 가이우스가 황제가 되는 기회를 잡지 못하는 것은 그가 바이아이 만(the Gulf of Baiae)을 말을 타고 건너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확언한, 점성가인 드라실루스(Thrayllus)의 예언을 실행하기 위해서라는 세 가지 이유이다. 수에토니우스는 마지막의 이유를 그의 할아버지로부터 들었다고 말하는데, 그의 할아버지는 그것은 칼리굴라가 믿고 있는 조정의 신하에 의해서 말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세네카(Seneca)는 \”De Brev. Vitae\’ 18. 5~6에서 요세푸스처럼, 그것은 가이우스의 미친 성질의 한 예로서 7일 또는 8일 동안의 음식만을 가지고 있는 때에, 가이우스는 뱃놀이하는 다리를 만들고 제국의 자원들을 즐겼다고 한다. 디오 카시우스(1ix. 17. 1~3)와 수에토니우스는 이 이야기를 주후 39년 이전의 일로 생각하는 반면에 요세푸스와 세네카는 이 이야기를 분명하게 가이우스 통치의 마지막 몇 달 동안에 일어난 일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불일치가 그 전체의 사건이 날조된 이야기라는 추측을 위한 근거를 주지는 않는다.] 건너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은 신이기 때문에 그런식으로 여행을 해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그는 헬라 신전을[㈜ 디오 카시우스는, 1ix. 28. 1에서, 가이우스는 밀레토스의 사람들(Milesians)이 아폴로신(Apollo)을 위해서 지었던 크고 아름다운 성전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를 원했다고 전한다.] 남김없이 약탈하고 그 성전에 있던 그림, 조각, 헌납된 제물들 모두를 자기에게로 가지고 오도록 했다. 아름다운 물건이 아름다운장소에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은 잘못된 일이며 로마가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헬라에서 약탈해 온 것으로 그의 왕궁과 정원과 그가 거주하는 이달리야 여러 곳을 치장했다. 그는 올림피아에서 헬라 사람들이 숭배했던 제우스(Zeus)를 로마로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주후 40년. 참). 디오 카시우스는 1ix. 28. 3에서 가이우스는 쥬피터가 자기 앞에서 카피톨리네(Capitoline)를 차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 비난을 했으며, 마침내 팔라티네(Palatine)위에 또 하나의 성전을 짓고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을 자기의 모습을 닮은 것으로 다시 만들어서 그 성전으로 옮겨오라고 제안했다고 말한다. 그 신상의 이동은 수에토니우스의 \’Calig\’. 22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그 신상은 그들이 올림피안(Olympian)라고 불렀으며 아덴의 조각가 피디아tm(Phidias)가 만든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만큼은 성취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상(像)을 만든 작가인 피디아스가 제우스 상을 가져가려고 온 멤미우스 레굴루스(Memmius Regu-lus)에게[㈜ 31년에는 집정관이었고 후에는 모에시아(Moesia), 마게도냐(Macedonia), 그리고 아가야(Achaia)의 통치자였던, 푸블리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Publius Memmius Regulus)이다. 타키투스의 \’연대기\’ xiv. 47에 따르면, 네로가 병에 걸렸고 그의 아첨꾼들이 만약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국은 끝이 날 것이라고 말할 때 네로는 말하기를 제국은 아직도 한 명의 재원, 즉 멤미우스 레굴루스(Memmius Regulus)를 가지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말하기를 그 작품을 옮기게 되면 손상을 입게 될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멤미우스는 그러한 말을 듣고 또 어떤경이적인 사건 때문에[㈜ 디오 카시우스는(1ix. 28. 3) 그 신상을 운송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배는 천둥번개에 의해서 산산조각이 났으며 그 신상의 받침대를 잡으려는 것처럼 접근할 때마다 큰 웃음이 들렸다고 전한다.] 그 상을 옮기는 것을 포기하고 황제에게 명령을 실천할 수 없음을 설명하는 편지를 보냈다.[㈜ 발췌문은 mhv(not)를 생략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믿을 수 있는 것을 넘어서 있는\”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요세푸스가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결국 그는 죽음을 당할 위기에 놓였으나 그 사이에 가이우스 황제가 죽는 바람에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참). 가이우스의 명령을 어긴 페트로니우스(Pertonius)가 황제의 죽음에 의해서 비슷하게 구출되었던 일<고대. 18권. 8 :9(305)>을 참조하라. 디오 카시우스는 그 신상이 이동될 수 없는 이유를 들은 후에 신상에 대해서 협박을 하면서 새로운 자신의 신상을 세우라고 말했다.]



2. [가이우스의 광기서린 난폭성의 실례]



 가이우스의 광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보자. 그는 한 딸을 낳자 그를 카피톨(Capitol) 신전으로[㈜ 쥬피터 카피톨리누스(Jupiter Capitolinus)의 성전.] 데려가서 그 상(像)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수에토니우스(\’Calig\’. 25)에 따르면, 가이우스가 그의 자녀들의 성장과 교육을 지도하도록 부른 미네르바(Minerva)의 무릎에 자기의 딸을 마지막으로 놓기 전에 그는 자신의 딸인 율리아 드루실라(Julia Drusilla)를 모든 여신들의 성전으로 데리고 갔다. 디오 카시우스(1ix. 28. 7)는 가이우스가 그의 딸을 쥬피터의 무릎 위에 놓았으며, 그녀를 미네르바가 양육하도록 맡기었는데 그녀를 쥬피터의 무릎 위에 놓은 것은 그녀가 쥬피터의 자녀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말하기를 \”너는 나의 딸이면서 동시에 제우스의딸이기도 하다\”라고 하며 그녀에게 두 명의 아버지를 지목했다,그러나 두 아버지 중에 누가 더 큰 자인지는 의문으로 남아있다.그런 그의 행동을 보고도 세상 사람은 참아야 했다. 가이우스는또한 종들이 그들의 주인에게 항거하고 비난하는 것을 인정했다.[㈜ 니이제(Niese)의 교정안이다. \”~에게 맡겼다\”, \”깨우려고 시도했다\”라고 변형될 수도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는데 황제에게 만족이나 어떤 정보를 가져오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글라우디오의 종인 폴리데우케스는 글라우디오에게 대항하여 비난할 일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때 가이우스는 그의 숙부인글라우디오를 없애버리기 위한 기회를 얻고자 그 재판하는 곳까지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일은 그의 기대를 어긋나게 했다. 이처럼 그는 모든 사람등을 중상모략가로 만들어 이를 이용하였으며 주인에 대한 종들의 힘을 높여 주었다. 그래서 그를 살해하려는 음모가 많이 생기게 되었다. 음모를 꾸미는 어떤 사람은 그들이 받은 피해에 대해서 분노하며 복수를 하려고 했고 또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그로부터 재난을 당하기 전에 그 후환을 없애기 위해 그를 살해할 계획을 했던 것이다. 그를 죽이는 것은모든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도 중요할 뿐 아니라 유대가 멸망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원했던 것이다. 이런상황에서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곧 패망할지도 모르는 유대나라로서는 매우 다행스런 일이었다. 나는 그를 살해하려는 음모에 대해서 좀더 정확하게 설명하려고 한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특별한 동기는 하느님의 능력이 그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참). 고대. 18권. 8 :9(306).] 또불행한 환경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평안을 줄 것이고 선한 것이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냉정함을 주며 덕으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은 곧 멸망gks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정신 차리도록 교훈을 해 줄 것이다.



  3. 가이우스에 대한 세가지 음모



 그를 죽이려는 세가지 음모가 있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훌륭한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베리아(Iberia)의 코르도바(C-ordova) 출신인 아밀리우스 레굴루스(Aemilius Regulus)는 한조직의 지도자였는데 자기의 동료에 의해서든지 아니면 자기가직접 하든지 가이우스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두 번째는군단(military tribune)[㈜ 수에토니우스(\’Calig\’, 56)에 따르면 그는 친위 경비대의 지휘관이었다.]의 지휘자인 카시우스 카이레아(Cas-sius Chaerea)가 지도자로 있는 조직이었으며 세 번째는 안니우스 비니키아누스(Annius Vinicianus)로[㈜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이 이름에 있어서 많은 혼동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비니키아누스(Vinicianus)와 마르쿠스 비니키우스(Marcus Vinicius)에 대해서 미누키아누스((Minucianus)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고대. 18권. 4 : 5(102)로부터 확실한데 그곳에서는 필사본을 비슷하게 미누키아노스(Minoukianov\”)라고 되어 있으며, 이것은 비니키우스(Vinicius)를 의미한다.(타키투스의 \’연대기\’ vi. 15를 참조하라. 니이제의 3권, 사본들에서의 서문에도 이렇게 되어 있다). 여기에서, 필사본에는 미누키아누스라고 되어 있지만 디오 카시우스(1x. 15. 1)로부터는 그것은 비니키아누스를 의미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비니키아누스는 32년에 반역죄로 디베료에 의해서 고소되었으며(타키투스의 \’연대기\’ vi. 9), Arval Brethren의 한 명이었다. 그는 글라우디오(Claudius)에 대한 음모가 성공하지 못한 후 42년에 자신의 생명을 끊었다.] 그도 폭군 가이우스를 없애려는데 가담했다. 그들이 가이우스를 미워하는 이유에대해서는 다음과 같다. 레굴루스는 황제가 저지르는 불의한 일에 대해서 증오와 분노를 느꼈다. 그는 본래부터 자유분방한 사람이었고 그 음모를 비밀로 유지하기 위해서 몸을 던지기조차한 사람이었다. 어쨌든 그는 친구들에게 그의 계획을 이야기하고 동조자를 구했다. 비니키아누스는[㈜ 사본들에는 미누키아누스(Minucianus)로 되어 있다. 참). 고대. 19권. 1 : 5(18) 각주 27.] 그의 절친한 친구요 훌륭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 \”몇몇의 다른 시민들과 함께\”라는 것은 의미가 약한 것 같다.] 황제에게 무고하게 살해를 당한 레피두스(Lepidus)의[㈜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M. Aemilius Lepidus)이다. 참). 고대. 19권. 2 : 4(49). 세네카(Seneca)는 서신 4. 7에서 가이우스는 지휘관인 덱스터(Dexter)에게 그의 목을 내놓으라고 그에게 명령했다고 전한다. 그가 가이우스의 사촌이었다는 발스돈(Balsdon)의 제안(p.42)을 지지할 증거는 없으나, 그는 가이우스의 동생인 드루실라(Drusilla)와 결혼했다(디오 카시우스의 책 1ix. 11. 1과 22. 6). 가이우스가 죽은 후에(38년), 칼리굴라는 그의 계승자로서 레피두스를 선택했다(디오 카시우스의 책 1ix. 22. 7). 몇 명의 기록자(수에토니우스의 Calig. 24, 디오카시우스의 책. 1ix. 22. 6, 타키투스의 \’연대기\’ xiv. 2)는 아그리피나(Agrippina)와 그의 간통죄를 언급한다. 가이우스의 여동생(Livilla)처럼, 가이우스에 대한 음모(수에토니우스, \’Calig\’. 24, \’Claud\’. 9)에 그와 가이툴리쿠스(Gaetulicus)는 함께 참여했다. 그는 39년에 죽음을 당했다.] 원수를 갚기 위해 그 음모에 가담했다. 또한가지 이유는 황제가 다시 분노를 폭발하면 자기 자신도 위험하다는 생각에서 황제를 없앨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것은 예외없이 죽음을 담보로 한 분노였다. 카이레아(Chaerea)는 가이우스 때문에 무력하게 불명예를 당하느니[㈜ 수에토니우스(\’Calig\’. 56)는 가이우스가 계속해서 여러해 동안 함께 한 카이레아 (Chaerea)를 그의 소문난 유유부단 때문에 비웃었다고 말한다.] 가이우스를 제거하는음모를 꾸미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매일황제와 함께 있어 늘 위험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를 제거하려는 사람의 편에 서게 된 것이다.[㈜ 수정된 본문이다. \”그는 가이우스의 그의 우정과 그를 시중드는 것에 대한 매일의 위험은 자유로운 사람에게는 부적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세사람은 자기들의 음모가 황제의 폭력을 바라보고만 있었던 모든 사람과 가이우스를제거함으로써 위험을 피해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 앞에서 일반적으로 함께 고려가 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로마와 제국을 보호하겠다는 음모에 가담했을 때 그들의노력에 의해서 그렇게 선한 것을 할 수 있다는 자긍심도 갖게 되었다. 카이레아는 특별히 더 열성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더 좋은명성을 얻기 위해서이고 또 한가지 이유는 그가 호민관(trib-une)이었기 때문에 가이우스에게 더 쉽게 접근하여 그를 죽일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4. 전차 경기장에서 보여준 가이우스의 야만성



 이때 전차 경기가 있었다. 이 경기는 로마인들이 열광적으로구경하기를 좋아하는 그런 경기였다. 경기장에는 많은 군중들이모여서 황제에게 자신들의 원하는 바를 요구하기도 했다. 탄원자들이 많지 않을 경우에 황제는 요구가 없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늘 대중적으로 요구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군중들은 조세와 세금을 감면해 달라고 필사적으로 가이우스에게 탄원했다.[㈜ 수에토니우스는(\’Calig. 40), 칼리굴라 아래서는 세금을 내지 않고는 상품이나 봉사를 받는 것은 없었다고 언급한다. 새로운 조세 규정이 구두로 선포되었다. 백성들이 그에게 문서로 된 조세 규정을 알려 달라고 탄원하면 그는 동의를 한다. 그러나 그는 그 규정들을 아주 비좁은 장소에 써붙이거나 작은 글씨를 써서 백성들로 하여금 그 법을 몰라서 벌금을 내도록 만들었다. 참). 또한 디오 카시우스 1ix. 11.] 그러나 황제는 그들의 요구에 무관심했으며 군중들은 더욱 큰 소리로 외쳐댔다. 황제는 군중들 가운데 사람들을 보내어큰 소리로 외쳐대는 사람들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병사들은 황제의 명대로 많은 사람을 처형하였다.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 군중들은 그들의 아우성을 멈추고그들의 요구가 죽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보고 자제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카이레아의 결심을 더욱 확고하게 했으며 하루빨리 그의 야만성을 막아야겠다 생각하고 가이우스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몇 번 기회를 포착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망설이곤 했다. 그는 황제를 죽이는 일을 더 이상 망설여서는 안된다 생각하고 가장 좋은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가 기회를 엿보는 것은 폭력을 쓰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의 계획을 확실하게 실행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다.



 5. 세금 징수관으로 임명받은 카이레아가 가이우스에게 모욕을 받다



 카이레아는 가이우스와 오랫동안 함께 있었지만[㈜ 필사본에는 \”그는 군인이었었다.\” 또는 \”그는 그의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다\”라고 되어 있다.] 그의 행동에 늘 싫증을 내고 있었다.[㈜ \”카이레아(Chaerea)는 가이우스와의 관계에서 어떤 기쁨도 발견하지 못했다\”로 다른 사본에는 나온다.] 가이우스는 카이레아를 강제로 세금을 징수하거나 왕궁 국고에 들어갈 세금 혹은 납부 기일이 늦어 두배가 된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세금 징수관으로 임명했다. 카이레아는 황제의 명령에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소신대로 그일을 처리했는데 그는 세금 수탈로 고통당하는 백성들에게 연민의 감정을 갖고 사정을 봐 주곤 했다. 이때 카이레아가 세금징수를 잘하지 못하자 화가난 가이우스는 여자처럼 약한 놈이라고 비난했다. 더구나 가이우스는 다른 면에도 카이레아에게 모욕을 주었는데, 그날의 당직으로서 카이레아가 암호를 요구했을 때 가이우스는 그에게 추잡하고 외설적인 의미가 담긴 여성적인 단어를 주었다.[㈜ 수에토니우스(\’Calig\’. 56)와 세네카(\’De Const. Sap.\’ 18. 3)는 카이레아가 암호를 요구하려고 했을때 칼리굴라는 그에게 \”프리아푸스\”(Priapus) 또는 \”비너스\” (Venus)를 주었다고 말한다.] 디오 카시우스(1ix. 29. 2)는 가이우스가 남자들 중에 가장 용감한 카이레아와 한 매춘부를 습관적으로 부르고, 그에게 \”Love\”, 또는 \”비너스\”(Venus)와 같은 암호를 주었다고 말한다.

 가이우스는 카이레아 자신의 개인적인 특성에서 그런 모욕적인 말을 한 것이다. 즉 카이레아는 종종 여자 옷을 입고 가발을 쓰고 다른 모조품 등으로 여성적인 외모를 갖추고 있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의 모습에서 그러한 비웃음을 당하고 나니 카이레아는 화가 난 것이다. 카이레아는 자신을 화나게 만든 암호를 받을 때마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어야 하는데 그것을 전해받은 사람들에게도 조롱을 받았다.그가 황제에게 받은 그 암호를 그들에게 가지고 갈 때마다 그들은 카이레아 앞에서 농담을 하곤했다. 그래서 카이레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가이우스를 죽일 음모에 큰 용기를 얻게 된 것이다.

 원로원 가운데 폼페디우스(Pompedius)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폼페디우스(Pompedius)의 고소에 대한 비슷한 언급은 디오 카시우스(1ix. 26. 4) 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그는 폼포니우스(Pomponius)로 불리우며 티미디우스(Timidius)는 이름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고 단지 한 친구로 불리우고 있다. 쉬타인(Stein)의 \”Timidius\”, Pauly- Wissowa, 2. Reihe, vi, 1936, p.1256에서 언급된 것과 같이, 폼페디우스를 원로원 의원인 폼페이우스 페누스(Pompeius Pennus)와 동일시하려는 시도(세네카, \’De Ben\’, ii. 12. 1~2)는 권장하기에는 어렵다.] 그는 로마제국의 여러 관직을 거친 에비구레오학파(Epi-curian)로서[㈜ 세계주의(Cosmopolitanism)와 개인의 행복을 선포하는 에피큐리아주의(Epicureanism)는 그의 지지자들에게 최대한의 개인의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서 정치적인 출세를 피하라고 가르쳤다. 드비트(N.W.De Witt)의 \’Epicaesar)암살 후 주전 44년에 에피큐리아주의자인 아티쿠스(Atticus)에게 한 키케로(Cicero)의 말을 인용 (p.87)한다. \”너는 에피쿠루스(Epicurus)에 대해서 말하고 나에게 \’정치로부터 멀리하라\'(mhv politeuvesqai)\”고 경고한다(키케로 \’Ad Att.\’ xiv. 20.5).] 조용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때 폼페디우스는 그의 정적인 티미디우스(Timidius)에 의해서 고소를 당했는데 폼페디우스가 황제를 비나했다는 것이다.[㈜ 디오 카시우스(1ix. 26. 4)는 폼포니우스(즉, 폼페디우스)가 가이우스에 대해서 실제로 음모를 한 것에 대해서 고소를 받았다고 말한다.] 티미디우스는 퀸틸리아(Quintilia)를 이 사건의 증인으로 세웠는데 그녀는 뛰어난 미모 때문에 폼페디우스와 다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있던 여자였다. 이 가난한 여인은 그 재판이 잘못된 것인 줄 알고 사랑하는 사람인 폼페디우스의 운명을 좌우하는 증인으로 자신이 나선 것에 대해 매우 분개했고 티미디우스의 요구를 거절했다.

 퀸틸리아가 자기의 뜻대로 해주지 않자 티미디우스는 그녀를 고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이우스는 매우 분노하면서 카이레아에게 한시도 지체말고 곧 그녀를 고문하라고 명령했다. 가이우스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나 고문하는 일에는 카이레아에게 맡겼다. 왜냐하면 카이레아는 약골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면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잔인하게 그 일을 해 줄 것이라고 가이우스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퀸틸리아는 고문대로 가면서 낮은 목소리로 그 음모에 대해 말하면서 카이레아에게 냉정하게 자신을 고문해 달라고 말했다. 카이레아는 황제의 권위에 눌려 마지 못해 그녀를 잔인하게 고문했다. 그는 만신창이가된 그녀를 황제에게 데리고 갔다. 황제는 퀸틸리아의 모습에 만족을 하고 그녀의 고통스러운 모습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녀와 폼페디우스를 놓아주고 그녀가 받은 극심한 고통을 위로하는뜻에서 돈을 주어 보냈다.[㈜ 디오 카시우스(1ix. 26. 4)와 수에토니우스(\’Calig\’. 16)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가이우스는 고상한 행동에 대해서는 그가 장려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심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후원자의 죄에 대해서 침묵한 한 해방노예 여인-그는 그녀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에게 800,000세스터스(로마 화페의 단위-역자주)를 수여했다.]



 6. 카이레아가 클래멘스, 파피니우스와 함께 공모하다



이러한 사건은 카이레아를 매우 고통스럽게 했는데 가이우스에 의해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위로해야할 자신이 오히려 그들에게슬픔을 안겨주었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이 괴로웠던 것이다.[㈜ 역자는 허드슨(Hudson)의 수정안을 받아들였다. 필사본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위로를 받아야 할 가이우스에 의해서 조차도 그가(고문에 대한)죄인인 것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이러한 것들은 그것들이 관계되는 한, 죄의 책임을 지고 있는 카이레아(Chaerea)를 매우 낙심케했다.\” 페터슨 교수에 의해서 제안된 본문(w\” aivtion을 생략하고 aujtoi\’\”를  aujtw\’로 바꾸었음)은 다음을 의미한다. \”그것들이 그에게 책임이 있는 한, 그가 사람들(위로를 받아야 할 가이우스에게까지도)에 의해 비난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은 카이레아를 매우 낙심시켰다.] 카이레아는 집정관이던 클레멘스(Clemens)[㈜ 황제 티투스(Titus)의 양아버지인 아레키누스 클레멘스(M. Arrecinus Clemens) 이다(Suet. \’Tit.\’4) 타키투스는 \’Hist\’. iv. 68에서 70년에 무키아누스(Mucianus)는 아레키누스 클레멘스(Arrecinus Clemens)를 \”칼리굴라의 통치 때에 그의 아버지는 자기 직책의 의무를 잘 수행했다는 것을 말하면서\” 친위 경비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와 자기와 같은호민관이던 파피니우스(Papinius)에게[㈜ 마티유-헤르만(Mathieu-Hermann)은, 이 파피니우스(Papinius)는 아마도 칼리굴라의 명령에 의해서 살해된 섹스투스 파피니우스(Sextus Papinius)와 친척일 것이라고 제안한다.] 다음과 같이 말했다.\”클레멘스, 우리는 황제의 신변을 보호하는 일에 대해서는 실패하지 않았네. 갖은 노력으로 황제의 통치에 대항하는 사람들을잡아 죽이고 황제마저 불쌍히 여길 정도로 잔인하게 고문을 가했네. 우리는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던가.\” 클레멘스는 아무말없었지만 그가 황제의 명령에 따른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이었던가를 그의 표정에서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클레멘스는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황제의 광기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일을삼갔다. 클레멘스의 의중을 파악한 카이레아는 용기를 내어폭군 황제 치하에서 로마와 모든 지역이 얼마나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계속해서 카이레아는 말했다.

 \”그러한 모든 불행에 대해서 황제가 책임져야 하지만 사실을옳게 판단하는 사람들은 로마인과 모든 백성들에게 고문을 가하며 만행을 저지른 사람은 바로 나와 여기있는 파피니우스 그리고 자네라고 생각하고 있네. 우리가 단순히 황제의 명령에 순종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황제의 정책에 따랐다고 하는 것일세. 왜냐하면 우리가 황제의 만행을 그치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가 하고 있는 일에 동의해서 그의 사신처럼 행동하고 황제의 군대로서 공적으로 행하고 그의 경호원으로서 그를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세. 그 군대는 로마 정부와시민의 자유를 보호하지 않고 백성들의 몸과 마음을 종으로 만드는 황제를 보호하고 있다는 말일세. 우리는 백성들이 매일매 시간 고문당하면서 흘리는 피로 우리 자신을 더럽히고 있고, 우리는 언젠가 황제가 보낸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고문하고 죽일지는 모르는 그 때까지 이 일을 해야 하네. 황제가 이런 일에 우리를 고용하는 것은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의심해서 일세. 특히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질때 우리도 그와 같은 꼴을 당해야 하네. 가이우스는 정의에 기초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행하기 때문에 그의 분노는 계속될 것일세. 우리가 황제의 목표물이기 때문에[㈜ 또는 \”우리는 그의 스파이로서 그에게 보내질 것이다.\”] 우리가 백성들의 안전과 독립을 지켜주어야 하며 동시에 우리도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야 하네.\”



 7. 이 음모에 사비누스가 합세하다



 클레멘스는 카이레아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카이레아에게 그이야기가 퍼져나가지 않도록 입조심하라고 부탁했다. \”만일 우리의 거사가 성공하기 전에 그 음모가 새어나간다면 우리 모두는살아남기 힘드니 조심하도록 하게. 그리고 좋은 기회가 와서 우리를 돕게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적당한 때를 기다려 보세. 나는 나이가 들어서 그러한 모험에 참여하기가 어렵네. 그러나 자네가 계획하고 나에게 말한 그 일보다 더한 것을 말한다면 바로 이것일세. 어떤 사람이라도 그것보다 더 명예스러운 것을 할 수는 없을것일세.\” 그 말을 하고 나서 클레멘스는 그가 들었던 것과 또 그것에 반응했던 자신을 다시 곰곰히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카이레아는 자기와 같은 호민관이면서도 현 정부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자유를 사랑하는 코르넬리우스 사비누스(CoreneliusSabinus)를[㈜ 수에토니우스의 \’Calig\’. 58에서는 카이레아가 가이우스를 첫 번째로 친 후에 황제의 가슴을 찌른 지휘관으로 언급되어 있다. 수에토니우스의 \’Calig\’. 56.과 58과 디오 카시우스(1ix. 29. 1)는 그와 카이레아를 음모를 이끈 두 사람으로 여긴다. 그들은 비록 실패했었지만 가이우스에 대한 이전의 음모에 관계했으며 가이우스는 그들이 서로 싸우도록 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그들을 서로에게 비난했다고 수에토니우스는 진술한다(\’Calig\’. 56).] 급히 찾아갔다. 그는 그가 계획하고 있는 일을 빨리 진행시키기를 원하고 또 그들의 계획이 클레멘스에 의해 발설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서두르게 된 것이다. 또한 그의 설명에 의하면 일을 늦추고 연기하는 것은 결국 정부에 이롭게 되기 때문이다.[㈜ 본문에는 다음의 단어들의 말놀이(words play)가 나온다 uperbolav\”(\”미루다\”, 문자적으로는 \”초과하다\”)와 uperballomevnwn(\”대단한\”, \”엄청난\”).]



8. 비니키아누스를 방문하는 사비누스



 사비누스는 그 이야기를 듣고 매우 기뻐했다. 그도 역시 카이레아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도 마음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 일에 동참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않고 침묵해 온 것이다. 이제 그는 그가 말한 것을 함께 이야기하며 생각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하게된 것이다. 사비누스는 용기를 얻고 카이레아에게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독촉했다. 그들은 함께 비니키아누스(Vinicianus)를[㈜ 필사본(이 단원에서의 이 부분과 이후에 나오는 부분)에는 미누키아누스(Minucianus)로 되어 있다. 참). 고대. 19권. 1 : 5(18)각주 28.] 찾아갔다. 비니키아누스는 정직한 사람이었고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는데 레피두스(Lepidus)의 죽음 때문에[㈜ 참). 고대. 19권. 1 : 5(20).] 가이우스로부터 의심을 받고 있었다. 왜냐하면 비니키아누스와 레피두스는 매우 절친한 친구사이였기 때문에 비니키아누스는 자기에게도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여 매우 두려워하던 때였다.[㈜ 포스트(Post)교수는 마지막 구절인 kai; deivmati…auton은 위치가 잘못되었고 그것은 suggenh\’에 걸리도록 놓아야 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그러면 그 의미는 \’그 세 사람은 그들 스스로 그들의 두려움으로 인해 연합되었다\’라는 것이 될 것이다.] 이처럼 가이우스는 그의광기를 염려하는 모든 고관들에게 공포의 근원이 되었다. 그들은 서로 일의 상태를 알고 염려했다. 그러나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가이우스에 대한 증오의 마음들을 마음놓고 털어놓지는 못했다. 다른 방법으로 그들은 서로 가이우스에 대한 미움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때 황제는 레피두스를 처형하여 그들의 우의를 중단시킨 것이다.



 9. [카이레아가 비니키아누스를 모의에 가담하도록 설득하다]



 비니키아누스와 카이레아는 만나서 정중한 인사를 나누었다.그들이 전에 함께 만났을 때는 주로 비니키아누스에게[㈜ 필사본에는 미누키아누스(Minucianus)로 되어 있다. 참). 고대. 19권. 1 : 5(18) 각주 28.] 우선권을 주었는데 이는 비니키아누스가 더 높은 지위를 갖은 데다가 로마의 귀족이었으며 또한 모든 면에서 특히 토론에 참석했을 때는[㈜ 또는 \”그는 토론을 시작할 것처럼 보였으므로\”라고 할 수 있다. 변형된 기골은 그 다음의 문장을 이렇게 만든다. \”미누키아누스(즉, 비니키아누스)는 대화를 시작하기위해 카이레아에게…라고 물었다.\”] 더 좋은 평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니키아누스는 만나자마자 카이레아에게 황제에게 받은 암호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카이레아가 황제로부터 암호를 받을 때 모욕을 받았다는 소문이 로마시에 퍼져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이레아는 비니키아누스가[㈜ 또는 \”그는 토론을 시작할 것처럼 보였으므로\”라고 할 수 있다. 변형된 기록은 그 다음의 문장을 이렇게 만든다. \”미누키아누스(즉, 비니키아누스)는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 카이레아에게…라고 물었다.\”] 자신을 신뢰해서 그러한 질문을 한 줄 알고 기쁘게 알려주고 나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당신은 나를 위해서 \’자유\’라는 암호를 주시오. 나에게 힘을 주어 나를 일깨워 주어서 고맙소. 당신이 이 일에 동의해 준다면 나에게 그것보다 더 좋은 말이없소. 우리는 회의를 하기 전에 벌써 마음을 모아 결론을 내린것이오. 나에게는 칼 한자루 밖에 없소. 이 한가지 만으로도 우리에겐 충분하오. 그 일을 시작합시다. 당신이 지도자가 되어주시오. 그리고 당신이 선택하는 곳으로 나를 보내시오. 내가 당신의 도움과 협조를 힘입어 최선을 다하겠소.[㈜ \”그렇지 않으며, 나는 앞장을 서겠습니다\”로 변형될 수 있다.] 한가지 일에 우리의 온 마음을 쏟으면 더 이상 무기는 필요없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오.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지만 나는 이 일을 위해 몸을 던지겠소. 내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것을 생각할 여유도 없소. 나는 우리나라가 자유가 없어지고 훌륭한 법이 폐지되는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소. 가이우스가 살아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재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오. 우리의 생각이 같은 것을 보니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된 것이 분명하오. 나를 버리지 말고 도와주시오.\”



10. [비니키아누스가 카이레아를 지지하다]



 비니키아누스는[㈜ 필사본에는 미누키아누스로 되어 있다. 참). 고대. 19권. 1 : 5(18) 각주28.] 카이레아의 간절한 이야기를 듣고 따뜻하게 대해 주었우며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비니키아누스는 카이레아를 칭찬해 주면서 포옹하고는 성공하기를 기원하면서 헤어졌다. 그들은 이렇게 서로를 확인한 후에 카이레아가 집에 돌아왔을 때 많은 군중들이 그에게 격려하기 위해서 다음과같은 말을 했다. \”그 거사를 빨리 실행에 옮겨 하늘이 주시는 도움을 받으라.\” 처음에는 함께 공모했던 사람 중 한 사람이 배반해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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