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권 제 2장 원로원이 민주주의로 복귀하기로 결정했으나 군인들은 군주제를 고수하고자 한 것에 대하여, 또한 가이우스의 부인과 딸의 죽음과 가이우스의 도덕성에 대하여

 


제 2 장



원로원이 민주주의로 복귀하기로 결정했으나 군인들은 군주제를 고수하고자 한 것에 대하여, 또한 가이우스의 부인과 딸의 죽음과 가이우스의 도덕성에 대하여



1. 병사들이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글라우디오(Claudius)를 황제로 선출하다



 글라우디오가 자신의 집에서 갑자기 납치되었을 당시의 정세는 이러하였다.[㈜ 병행구, 전쟁. 2권. 11 : 1-5(204-214)에서는 더 간단하게 글라우디오의 즉위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병사들은 회의를 열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서로 의논하였다. 그들은 민주주의 제도로는 그러한 거대한 제국을 통제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비록 민주주의가 성공한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별다른 이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반면에 어느 누군가가 권좌(權座)를 장악하더라도 정권을 수립하는데 기여하지 못하는자신들에게는 계속적으로 해가 될 소지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문제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을 때 글라우디오를 황제로 추대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글라우디오는 고인(古人)의 숙부였으며, 그의 조상의 고귀함과 학습에 대한 학문적인 헌신이 있어서[㈜ 혹은 \”자기자신의 신중한 교욱에 있어서.\” 참). 글라우디오가 소년기부터 문학에 열중했으며 자신의 업적의 일부를 출간했다는 것을 지적한 수에토니우스의 \’글라우디오 3.\’] 그를 능가하는 인물이 원로원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그가 일단 황제로 옹립되면 글라우디오는 그들에게 일상적인 특권으로 보상하며 선물로써 보답해 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러한 계획을 세우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이렇게 하여 글라우디오가 병사들에 의해 납치되었던 것이다. 한편 그나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Gnaeus Sentius Saturninus)는[㈜ 참). 전쟁. 2권. 11 : 1(205). 41년에 집정관이었으며 가장 가능성 있어 보이는 것은 주후 4년에 동일한 이름을 지닌 집정관의 아들이었을 것이다.] 글라우디오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겉으로는 마지 못해 하면서도실제로는 권좌를 수락하여 권좌에 올랐다. 그는 원로원에 서서조금도 굽히지 않고 자유스러운 귀족들에게 어울리는 다음과 같은 권고조의 연설을 하였다.



 2. 원로원에서 행한 센티우스(Sentius)의 연설



 \”로마인들이여! 지금까지 일찍이 없었던 너무나도 뜻밖의 사건을 우리가 접하였기에 믿어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유의 존엄성을 향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지 말할 수 없으며 누가 그 선물을 차지할는지는 전적으로 신의 처분에 달려있지만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자유를 소유하는 것은 심지어 소유하고 있다가 박탈당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쁨입니다. 실제로 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단 한시간만이라도 전에 풍성하게 누렸던 법의 통치를 받으면서 자유롭게살아가는 것에 만족합니다. 나는 이후에 태어났으므로 이전 자유의 시대를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현재의 자유에탐욕스러울 정도로 몰두하고 있으므로 나는 자유의 시대에 태어나서 양육받은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최근 이시점에서 우리로 하여금 자유의 맛을 알도록 자유의 한모금을 주는 신들만큼 영예를 누리기에 족합니다. 나는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보장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나 자유의 날이 단 하루라 하더라도 보다 젊은 우리들에게는 충분한것으로 여겨지는 반면에 장성한 늙은이에게는 한 세대로 여겨질것입니다. 보다 나이 든 사람들이 자유를 향유한 어떤 경험을 가지고 돌아가셨다면 젊은이들에게 덕의 본질[㈜ 혹은 \”조직.\”] 속에 있는 교훈,즉 우리를 있게 한 조상들의 영광을[㈜ 본문이 수정됨. 허드슨(Hudson)의 수정을 채택한 포스트교수(prof. Post)는 \”우리를 있게 한 조상들이 세운 행운이 덕에 관한 교훈\”을 제의한다.] 가르쳐 줄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이러한 현재의 시간을 가지고 있으므로 덕스럽게 사는 것보다 더 유익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덕으로만 인류를 위한 자유의 길을 숙고해 볼수 있으며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전통으로부터 과거의 역사를 알았지만, 나는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독재가 얼마나국가에 해를 끼치는 가를 알았습니다. 현명한 법이 아니라 통치자의 성난 변덕에 문제를 맡기는 한 독재는 모든 덕을 저해하고고 상한 분위기로부터 자유를 박탈하고 아첨과 공포를 조장합니다. 가이사 율리우스(Julius Caesar)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법과 질서를 무시함으로써 정부의 전복을 야기하고 정의 위에 군림하여 사실상 권력욕의 노예가 된 후로 이 도시가 당한 불행은말로 다할 수 없이 불행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모든황제들도 이에 뒤질세라 우리의 유산을 폐지하고 우리 국민들사이에 여전히 남아있는 고결함을 허용하지 않으려고 서로 다투듯 경쟁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허위의 인간 사회가 자신들의 안전에 기여하며, 덕에 있어서 탁월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의 영예를 삭감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진멸(盡滅)을 공포하는 것이 최상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독재자는 많이 있었으며 그들의 행적에 있어서 눈에 띄는 압제는 참을 수없을 정도였지만 오늘 죽은 가이우스(Gaius)황제는 다른 모든황제들보다 많은 불법으로 우리의 눈을 못뜨게 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동족 뿐만 아니라 그의 친척과 친구들에게도 만행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모든 독재자와 같이 가이우스황제도 부당하게 복수하기에 급급한 사람들로부터 침해를 받은사람들보다 더 큰 해악을 끼쳤고 그들에게 보다 큰 불행을 가함으로써 사람들과 신들에 동일하게 대항하는 야만인과 같이 광포하였습니다. 독재자들은 심지어 불법으로 탈취한 더러운 이익에만족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재산과 아내의 강탈로 인해 야기된슬픔을 즐기는 것을 더 큰 낙으로 삼았습니다. 독재자들은 적과함께 그들의 전 가족을 철저히 괴롭힘으로써 전반적인 일을 완수하고자 합니다. 독재자들에게는 자유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이적인 것입니다. 자신들이 당한 모든 불행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사람들 조차도 독재자로부터 어떤 호의를 끌어내는 것이 그들에게는 불가능합니다. 독재자들은 어떤 이들에게 행했던 악의폐단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고통받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불행을 사소한 것인양 관대하게 잊어버린다 할지라도 독재자들은 자신들의 행적을 의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독재자들은 적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한 미심쩍은 적으로부터 어떤안전도 확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의 악을 스스로 제거하고 한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가 책임을지는 그런 정부를 만들어야 합니다. 모든 정치 형태 가운데서도이러한 정치 형태가 훌륭하게 통치되는 번영한 도시의 명성뿐만아니라 현재의 충성과 장래의 적대적인 음모로부터 벗어날 수있도록 가장 잘 보증해 줄 것입니다. 이제 그대들의 의무는 공동이익을 위하여 정중한 제안을 하는 것이거나[㈜ Thackeray의 수정은 다음과 같다: \”너는 이제 그 도시의 복구가 적합하게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준비해야만 한다. 실제로 그렇게 함으로써 공동의 복지로 이끌 것이다.] 만일 제안된 어떤 조처가 그대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반대의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반대의 입장에는 어떤 위험도 따르지 않습니다.왜냐하면 그가 로마에 끼친 어떤 해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을뿐만 아니라 제안한 사람들을 제거하려는 유일한 권력을 지닌독재자가 더 이상 없기 때문입니다. 독재는 나태함에 의해서 그리고 독재자가 바라는 바에 이의를 제거하지 못하는 것에 의해서[㈜ 여러 사본들에서는 \”어떤 혁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태에 의해서\”로 표기됨.] 조장되어 집니다. 인간들은 평화의 단맛에 흠뻑 빠져 있어서 정복당한 죄수처럼 살아가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치우할 수 없는 재난을 겪거나 우리 이웃의 재난을 모독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극도의 타락과 함께 살해된다 하더라도 참지 않으면안되는 것은 용감한 사람들처럼 죽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첫 임무는 독재자들을 제거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높은 영예를 수여하는 것입니다. 특히 카시우스 카이레아(Cassius Chaerea)에게 그렇게 해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의 도움을 받아서 이 사람은 그의 계획과 행동으로 자유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유인이 된 이상 독재치하에서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계획을 실행하고 위험을 무릅쓴카이레아를 잊지 않고 지지하는 것과 자유의 시대에 그에게 영예를 돌리는 일이 우리의 자발적인 행위가 되도록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자유 시민이 은인에게 보답하는 것은 아주 고상한 행위입니다. 카이레아는 가이사 율리우스(Julius Caesar)의살해자인 카시우스와 브루투스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국가에서 일어난 선동의 불길과 내란에 신선한 생명을 불어 넣어준 반면에 카시우스 카이레아는 독재자를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야기된 공포로부터 그 도시를 구출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3. 집정관이 암호명을 \”자유(liberty)로 하다



 이것이 참석한 원로원 의원들과 기사단 단원들이 우러나서 승인한 센티우스(Sentius)의 연설이다. 이 때에 트레벨리우스 막시무스(Trebellius Maximus)가[㈜ 타키투스의 \’연대기\’.xiv : 46에는 퀸투스 블루시우스(Quintus Volusius)와 (그를 경멸한) 섹스티우스 아프리카누스(Sextus Africanus)와 함께 골(Gaul)의 세금을 할당시킨 사람으로 나온다. 그는 56년에 집정관(consul suffectus)이었다.] 급히 일어나서는 가이우스(Gaius)의 상이 새겨진 돌로 된 센티우스의 반지를 빼서 내동댕이 쳤다. 트레벨리우스가 생각했던 대로 센티우스는 자신의 연설과 행동에 너무 도취된 나머지 자신의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 반지의 상은 박살났다. 이제 밤이 되자 카이레아는 집정관들에게 암호를 무엇으로 할지를 물었고, 그들은 \”자유\”라고 하였다. 이것은 놀랄 만한 일이었고그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집정관에게서 그러한 암호를 받은 것이 민주주의가 폐기된 지 100년만에[㈜ 율리우스 가이사가 최초 지정관의 직에 오른 주전 59년부터 가이우스 암살 연대인 주후 41년까지.]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도시가 독재자들의 지배를 받기 전에는 군대를 통솔했던 사람들이 바로 집정관들이었다. 암호를 받은 카이레아는 원로원 편에 가담한 병사들에게그 암호를 주었다. 황제의 통치를 면하는 것은 독재보다 더 영예스러운 것으로 간주했던 4개 연대의[㈜ 병행구인 전쟁. 2권. 11 : 1(205)에는 3개의 보병대가 있었다고 함. 그 당시 보병대의 병력은 500명에서 600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4개의 보병대의 총수는 2000명에서 2400명의 병력으로 추정될 수 있다.] 병사들이 있었다. 이 병사들은 그들의 근무지로 떠났다. 이즈음 백성들도 철수하였으며 그들은 자치 정부를 수립하여 더 이상 황제의 통치를 받지 않았으므로 기뻐하였고 희망과 자부심으로 충일하였다. 카이레아는 백성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전부였던 것이다.



 4. 가이우스(Gaius)의 아내와 그 딸의 살해



 카이레아는 가이우스(Gaius)의 딸과 아내가 아직 생존해 있으며 전 가족이 그와 함께 파멸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들 중 아직 살아남은 자들이 있다는 것은 로마의 법에 대한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여하튼 카이레아는 그 일을 완전하게 해결할것을 결심하였고 가이우스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 있었다. 따라서 그는 군단 사령관들 중의 한명이 율리우스 루푸스(JuliusLupus)를[㈜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수에토니우스는 그를 집정관 호위병의 백부장으로 부르지만 (\’Calig. 59\’) 슈타인(Stein)의 \”iulius,\” no. 327, Pauly-Wissowa, x, 1917, p.663에 따르면 이것은 정확하지 않다.] 급파하여 가이우스의 아내와 딸을 처형하게 하였다. 그들은 루푸스가 클레멘스(Clemens)의 친척이었기 때문에독재자 살해에 가담함으로 그의 무용(武勇)으로 시민들의 칭송을 받으며 전반적인 음모를 계획했던 공모자가 될 수 있도록 이러한 임무를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공모자들의 일부는 가이우스의 아내를 제거하자는[㈜ 문자적으로는 \”~에 대하여 대담하라는.\”] 제안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수많은 재난으로 로마를 고갈시키고 시민들의 고상한 요소들을 파멸시켰던 것은 가이우스의 마음대로 한 것이지그녀가 충고하여 그렇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런 결과들에 대한 정책과 가이우스의 악한 행위에 대한 비난의 책임을 전적으로 그녀에게 돌렸다. 그들은 그녀가 가이우스를 꾀어 그녀에 대한 그의 정열을 높이려는 흥분제를 그에게 주입하는 방법으로 그를 미치게 했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그들이 비난했던 그녀는 로마와 로마에 속한 나라들에 수많은 불행을 가져온 주범이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도움을 조금이라도 주려고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반대한 사람들을설득하지 못하여 루푸스가 파견되었다. 그는 그 임무를 늦추거나또는 자신을 파견한 사람들을 위하여 적절한 시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루푸스는 공공이익을 위해 수행된 행위로 어떤 비난도 받지 않으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루푸스가 궁중에 들어갔을 때 고인(古人)에게 정중하게 선사되는 어떤 증정물도 받지 못한 채 죽은 남편이 시신 옆에 엎드려져 있는 가이우스의 아내 카이소니아(Caesonia)를 발견하였다. 그녀는 전신(全身)이 가이우스의 상처에서 흘러 나오는 피로 물들어 있었고깊은 비탄에 빠져 있었으며 딸은 그녀의 곁에 있었다. 카이소니아가 종종 되풀이해서 말한 예언을 가이우스가 믿지 않아 이런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느냐고 가이우스를 원망하는 푸념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카이소니아가 말한 내용에 관하여 그 당시에는 견해가 분분하였다. 반복해서 그 말을 들었던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에 각자의 비중을 두어 비슷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어떤 이들은 그녀의 말이 백성들에 대한 잔인함과 야만스러움을 버리고 온유와 절제로 통치할 것과 그리고 제 성미대로하여 그들의 손에 자신의 파멸을 맡기지 않도록 하라고 가이우스에게 경고했다는 말로 들었다고하는 반면에 어떤 이들은 반역의 음모에 관한 어떤 소문이 들리면, 그녀가 가이우스에게 지체하지 않고 음모에 관련된 자들을 죄가 있든 없든 간에 즉시 처단하여 어떤 위험으로부터 모면하자고 가이우스에게 청원하였음에도 가이우스가 너무 유순하게 대처하여 그녀가 그 결과를예언했을 때 철저히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고 가이우스를 비난하는 말로 들었다. 이것이 카이소니아의 말이었고 그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내렸던 판단이었다. 카이소니아는 루푸스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눈물과 비탄을 지닌 채 좀 더 가까이 오라고 루푸스에 명하면서 가이우스의 시신을 가리켰다. 그러나 카이소니아는 루푸스가모종의 무거운 결단을 하였으며 그러한 행위는 자신이 원하지않는 것이라는 것을 내색하지 않고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녀는 루푸스가 다가오는 목적을 직감하고삶의 희망을 명백히 상실한 사람들에게나 있을 공포의 절규를외치면서, 또한 그들이 왕가의 몰락을 위해 의도했던[㈜ 문자적으로는 \”그들을 위해 의도했던.\” 즉 그들은 가이우스, 그의 아내와 그의 딸이다.] 극의 마지막 역할에 대해 지체하지 말 것을 그에게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루푸스의 손에 기꺼이 죽어갔고 그녀의 젊은 딸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수에토니우스의 \’Calig. 58\’에서는 가이우스가 살해된 그 때에 그의 아내 카이소니아(Caesonia)는 백부장에 의해 칼로 찔려 살해되었고, 그의 딸은 머리를 벽에 세게 부딪쳤다. 디오의. 1ix. 29. 7에서는 가이우스의 아내와 딸이 즉시 살해되었다고만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루푸스는 서둘러서 카이레아와 다른 사람들에게 이 일을 보고하였다.



  5. 가이우스(Gaius)의 성품과 업적



 이것이 로마 황제로 즉위한지 4년 8개월을 넘기지 못한 가이우스의 종국이었다.[㈜ 병행구인 전쟁. 2권. 11 : 1(204)에서와 마찬가지임. 수에토니우스의 \’칼리굴라 59\’에서는 3년 10개월 8일간을 통치했다고 기록함. 디오의 1ix. 30. 1에서는 3년 9개월 28일을 지속했다고 기록함.] 가이우스는황제가 되기 전부터 사악해질 대로 사악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며, 쾌락의 노예였고, 중상을좋아하는 자였으며, 위협에 시달린 나머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다루었다. 그는 폭압적으로 다루거나 사적인아량을 베풀기 위한 한가지 목적으로 권력에 집착하였다. 또한그는 살육과 부정으로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이것이 그가 이루려고 한 목적이었고 종교나 율법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가이우스 황제는 군중들의 아첨을 좋아하였으며 율법이 수치스러운 것으로 비난하는 것과 율법이 법칙으로 규정한 모든것을 오히려 덕스러운 위업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우정에 관심이 없었으며 아무리 친밀하고 고귀하다 할지라도 자신을 화나게한 사람에 대해서는 사소한 문제를 빌미로 처벌하곤 하였다. 그는 의롭게 사는 모든 사람을 적대자로 간주하였다. 만일 그가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자신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에 대해서는 절대로 관용을 베풀지 아니하였다. 그러한 성품으로 인해그는 자신의 누이와[㈜ 율리아 드루실라(Julia Drusilla). 37년에 가이우스를 계승하여 38년에 죽었다.그녀는 계속해서 카시우스 롱기누스(Cassius Longinus)와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Aemilius Lepidus)와 혼인하였다. 참). 고대. 15권. 11 : 4(406)과 1 : 1(7). 가이우스가 그녀와 근친상간을 했다는 추문은 필로, 세네카, 그리고 타키투스에 의해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수에토니우스의 \’칼리굴라 24\’와 디오의 1ix. 3. 6에는 그의 누이들인 3명과 근친상간이 있었다고 한다.] 성관계를 가졌는데 가이우스의 이 행동이 시민들로 하여금 그를 더욱 더 강렬하게 증오하게 한 원인이되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그러한 행위로 인해 시민들은 가이우스를 불신하고 증오하게 되었다. 애굽으로부터 온 곡물 운송선의 정박지인 레기움(Rhegium)과 시실리(Sic-ily) 가까이에 조성된 항구를 제외하고는 그 당시나 미래에 유익을 끼치기 위해 건조된 것으로 특기할 만한 어떤 공사나 번영도없었다.[㈜ 플리니의 \’박물학\'(hist. Nat) iv. 4. 10-5.13(수에토니우스의 \’Suet. Calig. 21\’과 마찬가지임)는 가이우스가 착수한 커다란 상업적 이익이 있는 하나의 계획, 즉 고린도의해협을 가로지르는 운하의 건설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완수되지 못했다.] 이러한 항구건조는 확실히 아주 큰 공사였으며 항해에 아주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 공사는 완공되지 않았으며늦게 진척되어 반밖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가이우스 황제가 쓸데없는 일에 큰 관심을 쏟고 자기 자신을 제외한 어떤 사람에게도 이득이 되지 못하는 쾌락에 돈을 낭비함으로써[㈜ 디오의 1ix. 4. 5는 또한 가이우스가 가장 낭비했다고 주장한다. 수에토니우스의 \’칼리굴라 37\’은 그의 사치품 목록을 열거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는 값비싼 진주를 식초에 녹여서 마셨고 손님들에게 금으로 된 빵과 고기를 대접하였다. 따라서 그는 일년도 되지 못하여 디베료가 축적한 2,800,000,000세스테르케스(sesterces)를 써버렸다.] 나타난 결과였다. 그런가 하면 그는 최상의 웅변가였으며[㈜ 참). 디오의 1ix. 19. 3 ; \”가이우스는 항상 모든 웅변가를 능가할 것을 요구하였다.\”] 헬라어와 라틴어에도 조예가 깊어서 시를 지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오랜 준비를 거쳐 작성했던 연설에 즉흥적으로 회답할 수 있었고 큰 문제로 논쟁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어느누구보다도 복종시키는 설득력이 강하였다. 이러한 모든 것은천부적인 적성과 부단한 연습을 통한 노력에 기인한 것이었다.디베료 황제의 자손인 가이우스 황제는 전임(前任)인 디베료 황제가 웅변에 있어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는데 현저히 성공하였기 때문에 자신을 강제하여 연습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가이우스 황제는 자신의 친척이자 총사령관인 한 사람의 명령에따라서 그런 고상한 일에 애착을 가졌다. 그리하여 가이우스 황제는 그 당대 시민들 중에 최고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습을 통한 그러한 이점으로도 그의 권력 상승이 가져온 타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할필요가 없을 정도로 권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중용의 덕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처음에는 보다 고상한 일을 위한교육과 명성 때문에 가이우스 황제는 모든 점에서 존경할 만한 사람들의 우정을 깊게 하기 위하여 다소 노력하였다. 그러나 결국그의 지나친 잔인함 때문에 그들의 이전 충정은 사라졌고 증오심이 점점 더 격렬해져서 그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지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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