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권 제 4장 27년을 다스린 알렉산더 얀네우스의 행적에 대하여

 


제 4 장



 27년을 다스린 알렉산더 얀네우스의 행적에 대하여



1. 알렉산더 얀네우스 〔주전 104 – 78년〕



 아리스토불루스 아내는[㈜ 고대.13권. 12 : 1(320)에 나오는 살리나(Salina), 혹은 알렉산드라(Alexandra). 요세푸스가 이처럼 명백히 말하지 않았지만, 왕위 외에도 그녀는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와 결혼을 굳게 다짐했던 것이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계속적인 통치에 관하여는 전쟁. 1권. 5 : 1(107)을 보라.] 옥에 갇힌 왕의 동생들을 풀어주고, 그중 제일 연장자이며 다른 형제들보다 성품이 온건한 알렉산더(Alexander)를 남편의 뒤를 잇는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는왕권을 쥐게 되자 왕위를 노리던 자신의 형제들 중 하나를 처형했다. 그러나 나머지 형제들은 공무에 간섭하지도 않고 조용한 삶을 원했으므로[㈜ 혹은 \”사랑했던.\”] 그들은 보살펴 주었다.



2. 알렉산더의 초기 전투들



 그런데 라티루스 (Lathyrus)라고 불리며 아소키스 (Asochis)라는 도시를 차지했던 톨레미(Ptolemy)와 알렉산더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알렉산더는 실로 상당히 많은 적군들을 죽였으나 승리는 오히려 톨레미에게 기울어졌다. 그러나 톨레미는 자신의 어머니 클레오파트라(Cleopatra)에게 쫓기게 되어 애굽으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구브로(Cyprus). 그는 클레오파트라에 의해 애굽의 왕위로부터 폐위당한 후 이곳에서 통치하였다.] 피신했다. 알렉산더는 가다라 (Gadars)를 포위하여 함락시켰다. 그리고 아마두스(Amathus)도 장악했는데 이곳은 요단강(Jordan) 주위에 있던 모든 요새들 중에서 가장 강한 요새였으며, 제노(Zeno)의 아들 데오도루스(Theodours)가 소유한가장 값비싼 재물들이 있었던 곳이다.

 이 소식을 듣고 데오도루스는 알렉산더에게로 진격하여 알렉산더의 소유물과 더불어 자신에게 속해 있던 재물을 되찾았다.그리고 10,000명이나 되는 유대인을 죽였다. 그러나 알렉산더는이런 피해를 곧 수습하고는 바다 쪽으로 공격을 바꿔 라피아(Raphia)와 가사(Gaza), 그리고 안테돈(Anthedon)을 장악했는데 이 안테돈은 후에 헤롯 왕에 의해 아그리피아스(Agrippias)라고[㈜ 전쟁. 1권. 21 : 8 (416)을 보라(이곳에서는 아그립페이온(Agrippeion) 으로 나와 있다.)] 불리우게 되었다.



 3. 〔알렉산더의 이스라엘 영토 회복〕



 그런데 알렉산더가 이러한 지역들을 식민지로 삼은 직후 유대인들은 절기를 맞이하여 알렉산더에 반대하는 소요를 일으켰다. 일반적으로 이런 절기 때에 소요가 일어나곤 했었지만 만일비시디아(Pisidia)와 길리기아(Cilicia)의 원군이 알렉산더를돕지 않았더라면 음모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알렉산더는 수리아인들에 대해서는 유대국과의 뿌리깊은 적대감이 있었으므로 수리아인을 용병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알렉산더가 6,000명도 넘는 반란자들을 죽이고 나서 아라비아(Arabia)를 침략해서는 길르앗(Galaad)과 모압(Moab)을 포함해서 아라비아를 정복하고 이들에게 공물 헌납을 명령하고는 한번 더 아마두스(Amathus)로 돌아왔다. 알렉산더가 큰 승리를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란 데오도루스는 아마두스 요새가 버려져있는 것을 발견하고 요새를 공격하여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4.〔국내에서 유대인들이 알렉산더에 대해 반란을 일으킴〕



 알렉산더는 다음으로 아라비아의 왕 오베다스(Obedas)를 공격하였다. 오베다스는 이에 대응하여 골란(Gaulane) 근처에 병사를 매복시키고 계략을 꾸몄다. 알렉산더의 군대는 깊은 골짜기에 운집해 있다가 낙타부대에 의해 대파되었다. 알렉산더는간신히 홀로 예루살렘으로 도망쳐 달아났으나 오히려 이것이 전에 그를 미워했던 많은 사람들을 격분시키는 계기가 되어 소요가 일어났던 것이며, 알렉산더가 당한 커다란 패배가 그 원인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소요를 일으킨 자들을 제압했다.

 알렉산더는 대여섯 번의 전투에서 6년 동안 50,000명도 넘는유대인들을 죽였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이 승리에 전혀 기뻐할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의 왕국을 갉아먹는 꼴이 되기때문이었다. 마침내 그는 싸움을 중지하고 타협을 위해 신하들과 이 문제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일관성없는 정책과 변덕스러운 행위로 인해 반란자들은 더욱더 알렉산더를 미워하게 되었다. 이에 왕은 반란자들에게 자신을 왜 그토록 미워하느냐고 묻자 반란자들이 말하기를 왕이 죽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이것이 그토록 자신들에게 잔인하게 행했던 왕과 화해할 수있기 위하여 반란자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으며 왕이 죽더라도누그러뜨릴 수 없을 정도로 분노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동시에반란자들은 \’준비되지 않는 자(the Unready)\’라는[㈜ 수리아의 왕인 데메트리우스Ⅲ세 : 여기에서는 \”시기를 놓친\”이라고 나와 있지만 다른 곳에 보면 그의 별명이 Eukairos, 즉 \”시기 적절한\”이었다.] 별명을 지닌 데메트리우스(Demetrius)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데메트리우스는 커다란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들의 요청에 응락하고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세겜(Shechem)근처에서 유대인들과 합세하였다.



5. 〔데메트리우스가 연합군을 형성하여 알렉산더를 대적 함〕



 기병 3,000명과 보병 14,000명 규모의 데메트리우스가 거느린연합군은 알렉산더와 마주쳤다. 알렉산더는 용병으로 기용한1,000명의 기병과 8,000명의 보병을 갖고 맞싸웠으며, 그는 그밖에도 아직도 그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10,000명의 유대인들도거느리고 있었다.[㈜ 고대. 13권. 14 : 1(377)에 나와 있는 숫자와 다르다. 거기에는 데메트리우스가 기병 3,000과 보병 40,000을 지니고 있었으며, 알렉산더는 6,200명의 외국인 용병과 약 20,000여명의 유대인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전투를 개시하기 전에 알렉산더와 데메트리우스 두 왕은 상대편 병사들이 이탈하도록 서로 선무(宣撫)를하였다. 데메트리우스는 알렉산더가 기용한 용병들이 알렉산더를 떠나게 하려는 계략을 폈고 이에 맞서 알렉산더는 데메트리우스편에 가담한 유대인들로 하여금 데메트리우스를 떠나게 하려는 계략을 폈다. 그러나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자기 편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아 결국 그들 사이에 접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전투로 싸움을 종결지었다. 이 전투에서 비록 알렉산더의 용병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워 커다란 전과를 올렸으나 승리는데메트리우스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전투의 결과는 양측의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비록 데메트리우스가 승리자였으나 데메트리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자들이 계속 데메트리우스에게 붙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6,000명의 유대인들이 알렉산더가 불리해져서 산으로 도망하게 된 것을 불쌍히 여겨 데메트리우스쪽에서 알렉산더 편으로 돌아서 버렸던 것이다. 데메트리우스로서는 이 사태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알렉산더가 다시 자기를 필적할 만큼 힘을 갖게 되었고 모든 유대인이 알렉산더에게로 넘어가리라 생각하고는 유대를 떠나 돌아가 버렸다.



6. 〔분노한 알렉산더의 만행〕



 그러나 나머지 유대인 대다수는 외국의 원군이 물러갔음에도 알렉산더에게 대적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알렉산더에게계속 대적했으므로 알렉산더는 그들 중 많은 사람을 죽였으며,그 나머지를 베메셀리스(Bemeselis)라는[㈜ 고대. 13권. 14 : 2(380)에는 Bethome로 나와있다.] 도시로 쫓아버렸다.그렇게 그는 그 도시를 점령한 후 포로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왔다. 알렉산더는 분노가 지나쳐서 불경건할 정도로 이성을 잃고 야만스런 행위를 하게 되었는데, 도시 한복판에서 800명을 십자가에 매달도록 명령했으며 그들의 부인과 자식들의 목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베어버렸다. 그리고 알렉산더는 자신의 후궁들과 누워서 희희낙낙 하면서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 모습을본 백성들은 깊은 충격에 빠졌다. 그리하여 알렉산더를 반대하는 8,000명이 바로 그날 밤 유대를 떠나 망명하기 시작해 알렉산더가 죽은 후에야 그치게 되었다. 알렉산더는 마침내 이런 잔학한 학정으로 자신의 왕국을 겨우 평정시킬 수 있었고 계속된 싸움을 간신히 그칠 수 있었다.



7. 알렉산더의 최후의 전투



 그런데 디오니시우스(Dionysius)라고도 불리는 안티오쿠스(Antiochus)가 또 다시 분쟁의 원인이[㈜ 안티오쿠스 ?세 디오니수스, 약 기원전 86-85년경. 기원전 64년에 수리아가 로마에 합병되기 이전 셀류키드 왕가의 마지막 왕은 사실상 안티오쿠스 ?세 아시아티쿠스(Antiochus ? Asiatichus)였다(Beven, Houses of Seleucus,k ii : 266이하).] 되었다. 이 사람은 데메트리우스의 형제로서 셀류키드 왕가(the Seleucid line)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인물이었다. 알렉산더는 이 안티오쿠스를 두려워하여 그를 생포하기 위해 그가 아리비아를 치기 위해 진격할 즈음 안티파트리스(Antipatris) 능선에서 욥바(Joppa) 해변에 이르는 길목 요소 요소에 깊은 참호를 파 놓고 이 참호 앞에 높은 벽을 세운 다음 갑작스런 습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목재로 된 망대를 건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안티오쿠스를 저지할 수 없었는데 이는 안티오쿠스가 망대를 불태우고 참호를 허물면서 진군의 고삐를 늦추기 않았기 때문이다. 아라비아로 진격하는 요로에 참호를 파고 자신을 괴롭혔던 알렉산더에 대한 보복은 일단 뒤로 미루고 안티오쿠스는 아랍을 향해 진격을 계속하였다.

 한편 아라비아의 왕은 적과 전투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후퇴하여 매복해 있다가 갑자기 10,000명의 정예 기병들을 포위하고 혼란에 빠진 안티오쿠스의 군대를 기습하도록 하였다. 이에 쌍방간에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안티오쿠스의 군대는 아라비아인들의 기습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지만 안티오쿠스가 죽지만 않았더라면 끝까지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안티오쿠스가 위험스럽게도 자신의 군대의 맨 앞에서 싸우다 전사해 버리자 그의 군대는 사기를 잃고 전투하거나 도망하다가 거의 죽고 말았으며, 겨우 살아남은 병사들도 가나(Cana)라는 마을로 패주하였으나 양식이 부족하여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망하고 말았다.



8. 〔알렉산더의 죽음〕



 안티오쿠스가 죽을 때 멘나이우스(Mennaeus)의 아들 톨레미(Ptolemy)를 미워한 다메섹(Damascus)의 주민들이 아레타스를 찾아가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고, 그를 코엘레수리아(Coelesyria)의 왕으로 세웠다.[㈜ 톨레미는 칼키스와 코엘레수리아의 왕이었다(주전약 85~40년). 아레타스는 나바타이아 아람의 왕이었다.] 왕이 된 아레타스는 유대를 침략하여 알렉산더를 패배시켰다. 그러나 후에 상호협약을 맺고 철수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펠라(Pella)를 장악한 후 데오도루스(Theodorus)의 보물을 가지려는 사욕에 눈이 어두워 거라사(Gerasa)로 다시 진격해 들어갔다.[㈜ 참).전쟁. 1권. 4 : 2(86).]

 그는 3중(三中) 벽으로 수비대를 봉쇄하여 전투 없이 거라사를 손에 넣었다. 그는 또한 골란을 정복하고 셀류키아(Sel-eucia)와 \”안티오쿠스의 계곡\”이라고 불리는 곳도 장악하였다.그 곳의 통치자였던 데메트리우스(Demetrius)를 과오에 대한책임을 물어 그 자리에서 해고시켜 버렸다. 이렇게 하여 3년간의 원정을 마감한 알렉산더는 유대로 귀환하였다. 그가 이와 같은 전과를 세우고 귀환하자 백성들은 환호하며 그를 환영하였다.

 그러나 전쟁에서 해방되어 모처럼만의 휴식에 채 젖어들기도전에 이번에는 질병의 고통이 그를 괴롭혔다. 학질에 걸려 고통을 당하던 알렉산더는 다시 전쟁을 치르는 것이 이 고통에서 벗어나 예전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결국그는 힘에 벅찬 무리한 진군을 감행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재촉하였다. 아무튼 그는 이리하여 시련과 소요가 끊이지 않은 가운데 27년을 통치하고 자신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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