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21주일 주보

 

“첫영성체”

 첫영성체란 처음으로 영성체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아무에게나 성체를 영해 주지 않고, 성체 안에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나이에 있는 사람에게만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어른들은 최소 6개월의 예비자 교리를 통해서만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해 주고, 어린이들은 초등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첫영성체 교리를 통해서 성체를 영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합니다. 첫영성체를 하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이 바로 성체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어린이들은 믿을 교리를 배우고, 기도문을 외우고, 부모님과 함께 기도를 하게 합니다. 기도를 해야 믿음이 생겨나고, 믿음이 생겨나야 성체 안에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믿을 수 있고, 그 믿음이 있어야 만이 첫 고백성사를 정성을 다해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체를 영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믿음이니 이 믿음을 키우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혼자 기도해서는 어려우니 부모님께서 도와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첫영성체를 한 후에도 부모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체가 맛은 없습니다. 밀떡입니다. 하지만 우리 눈에, 우리 혀에는 밀떡이지만 그 안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성체를 영할 때, 영한 다음에 내 행동이 변한다면 첫 영성체한 어린이들도 더욱 굳게 믿게 될 것입니다. 헛된 믿음이 아니라 참된 믿음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고백성사와 영성체

1. 고백성사

1.성사를 보고자 할 경우, 미사에 일찍 나와, 성체 앞에 앉아서 그동안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모두 나를 합리화 시키거나, 유혹에서 오는 것들입니다.



고백성사 노래

죄를짓고 더러워지면 고백성사 보지요 성찰하고 통회하고 정개하고 고백

나의 주님 나의 주님 저의 죄를 용서해 고백성사 보고나면 두손 모아 보속해.

알면서도 고백안하면 죄를보태 나와요 이밖에 에 대죄 덮어 고백하면 안되요

나의 주님 나의 주님 저의 죄를 용서해  솔찍하게 고백하면 모든죄가 사라져



그런데 성찰을 해야 만이 자신의 모습이 보입니다. 죄가 없다고 말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이며, 죄가 없다고 말하는 자는 자기 양심을 돌아보지 못하는 자입니다

“주일미사 빠졌습니다.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하여도 통회하오니 사해주소서.”라고 고백을 하면 다시 죄를 짓고 나오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죄를 안 지을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는데 숨길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십계명에 근거해서, 내 모습을 돌아보아야 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내 양심에 비추어 내 모습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내 모습이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3. 고백소에 들어가서 자기 차례가 되면 무릎을 꿇고 고백을 합니다. 고해소 창의 문이 열려야만이 자기 차례가 됩니다.

성호경

②신부는 죄인에게 강복하소서. 나의 범한 모든 죄를 전능하신 하느님과 신부께 고백합니다.

 고백한지 (  )달 됩니다.

③ (고백) 저는….. 

(다 고백한 다음에)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하여도 통회하오니 사해주소서.

④ 사제의 훈계와 보속

사죄경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성자의 수난과 부활로 세상을 구원하시고, 죄를 용서하려고 성령을 보내주셨으니, 교회를 통하여 이 교우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

아멘. 하느님 감사합니다.(하고 고해소 밖으로 나와서 보속을 한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나를 깨끗하게 하고, 다시금 은총 지위에 있게 합니다. 안경이 흙탕물에 더러워졌다면 그 안경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안경이 빨간색 물감으로 덮여 있다면 밖은 온통 빨간색으로 보일 것입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나를 깨끗하게 하고, 깨끗해진 내 영적인 눈은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깨끗해진 내 마음은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줍니다.



2. 영성체

사제가 성체를 들고 “그리스도의 몸”하면 나는 “아멘”이라고 응답하고 두 손에 성체를 받습니다. “아멘”은 하얀 밀떡이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나의 주님의 몸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으면 성체를 모시는 것이 두렵지가 않습니다. 성체를 모시고도 다른 생각을 하고, 즉시 분심에 빠지기도 합니다. 대통령과 악수를 한 사람은 그 손을 자랑합니다. 나는 예수님의 몸을 만졌고, 예수님의 몸을 모신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은 기쁨에 넘쳐야 합니다. 비록 합당하지는 못하지만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면서 기뻐 뛰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체 안에 계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카테고리: jubonara, 나해 21-30주일, 연중시기(나해), 주보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연중 제 21주일 주보에 1개의 응답

  1. 관리자 님의 말:

    감실

    성당에 들어가면 거룩함과 엄숙함을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은 감실 때문입니다. 감실 안에서는 성체가 모셔져 있습니다. 성체를 모신 그릇을 성합이라고 하는데, 신자들에게 성체를 분배한 후에 남은 성체를 성합에 담에 감실에 모십니다. 감실 안에는 먼저 바닥에 성체포를 깔려져 있고 그 위에 성체가 담긴 성합을 모십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성체는 그 안전을 위해 집안에 모셨으나 4, 5세기경부터 성체를 성당에 모셔 두는 관습이 생겨 8세기에는 제단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1215년 제4차 라테란(Lateran) 공의회에서 이를 확정시키고 1918년 교회법으로 의무화되었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는 감실을 견고한 금속으로 정교하게 만들어 안전하게 잠글 수 있도록 했으며 적절하게 장식하여 성체의 위엄을 나타나게 하였습니다. 또한 미사 후에 감실에 성체를 모셔 두는 첫째 주목적은 병자들에게 영성체를 시켜 주는 데에 있고 2차적 목적은 미사 외에도 영성체를 시켜 주며 그리고 신자들로 하여금 성체조배를 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흠숭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크게 만들고 또 성체를 많이 모실 필요 없이 제대 중앙이나 제대 옆 등 성당의 적절한 장소에 위치하게 했으며 성당 안에 단 하나의 감실만을 두게 하였습니다. 감실 앞에는 성체를 모셔 둔 것을 알리고 성체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작은 램프(성체불)를 켜 두도록 하였습니다. 신자들은 감실 앞에 지나갈 때 깊은 절을 함으로써 존경을 표시해야 합니다.

  2. 관리자 님의 말: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자들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에 관하여 하신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투덜거렸습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6,60)

    이 투덜거림을 통해서 제자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다음의 세 가지 틀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으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첫째, 그들은 예수님을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되신 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둘째,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오해까지 하고 있습니다.

    셋째, 그들은 예수님을 모세보다 못하신 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대하며, 자신들의 수준으로 예수님을 대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오늘의 나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나는 성체 성사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 얼마나 확신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요, 하느님이심을 확고하게 믿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확신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신하는 척,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척 하고 있는 모습이 내 모습일 수 있습니다.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해서 그 말씀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했다 해서 하느님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당당하게 말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말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음도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아버지가 자녀가 신앙에서 발걸음을 돌리는 것을 보고 그래!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겠지!”라고 생각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녀가 신앙을 완전히 거부하자 아버지는 탄식했습니다. “! 너무 늦었구나. 좀 더 일찍 신앙을 권면해서 바른 길로 잡아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믿고 있는 신앙을 자녀들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주변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예수님께 마음을 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내 머리로 이해하려고 할 때, 나는 어느 순간 예수님보다 윗자리를 차지하고 예수님을 내려다보려고 할 것입니다. 성체성사의 신비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하면 믿을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보고 맛보고 만져 봐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알 수 없지만 믿음만으로도 든든한 것입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마음을 열면 믿을 수 있습니다. 믿으면 보이게 되고, 믿으면 이해하게 됩니다. 세 가지 틀을 내려놓고 예수님께로 나아갑시다.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3. 관리자 님의 말: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6,67)

    많은 제자들이 불신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그러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돌아갈 곳은 없습니다. 그리고 없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6,67)라고 물으셨을 때는 슬펐을 것입니다.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 사도는 멋진 신앙을 고백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6,68)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셨는데,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 가겠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고 있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자신만이 그렇게 믿는 것이 아님을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6,69)라는 말씀을 통해 고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강림 이후에 예수님을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고, 주님을 결코 떠날 수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결국 성당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 안에 머물며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예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떠나려는 사람들은 표시가 납니다.

    첫째, 신앙생활보다는 친교와 관계에 관심이 없습니다. 둘째, 의무적으로 주일을 지키다보니 몸은 성당에 와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셋째, 봉사에는 관심이 없고, 봉사자들의 활동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하려고 합니다. 넷째,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경우에는 소극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다양한 말들을 만들어 내거나 전하게 됩니다. 다섯째, 하느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습니다. 여섯째, 참 많은 핑계를 대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을 살아가야 합니다. 알고 있는 대로 살아가고, 믿고 있는 대로 살아가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더더욱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주님을 떠나려는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주님의 마음을 전해줄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 가겠습니까? 우리가 생명의 양식인 주님을 두고,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 가겠습니까?

  4. 관리자 님의 말:

    영성체는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양식을 주시기 위해 몸소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6,56)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시나이 산에서의 계약을 상기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으시고자 원하셨던 계약의 조건을 이스라엘 백성이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한 후 모세는 희생 제물로 바쳐졌던 황소의 피를 받아, 반은 제단 위에 붓고(주님을 대신하는 제단), 반은 이스라엘 백성 위에 뿌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계약의 성립을 표현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몸과 피는 이스라엘 조상들이 맺었던 계약이나, 이스라엘 조상들이 먹었던 빵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몸과 피는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6,53)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살과 피는 바로 성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당신을 담으셨습니다. 우리 눈에는 빵과 포도주만 보이지만,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 안에 예수님께서 계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눈이 없다면 밀떡과 포도주밖에는 안 보일 것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6,57)

    사실 예수님과 일치하는 사람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성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오신 주님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맡깁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일을 하실 수 있던 힘은 바로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힘은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성체를 영한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갑니다. 그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힘을 쓰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닭인 줄 알고 독수리를 두려워하고 있는 닭장 안의 독수리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빵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은 만나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몸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하고 사제가 성체를 들어 올리면 나는 아멘하고 응답합니다. 이것은 성체 안에 예수님께서 계심을 굳게 믿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멘하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렇게 믿음을 고백하고 성체를 받아서 모시고 주님과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시작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5. 관리자 님의 말:

    아내와 남편(에페5,21-33)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여 한 몸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둘은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고, 남편은 그리스도께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가정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교회 안에서도 서로 사랑하고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1. 주님께 순종하듯 그렇게 순종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권위는 사랑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그 엄청난 섬김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 모든 주권과 영광을 드리며 살아갑니다.

    배우자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배우자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존재로 대할 때 배우자에 대한 모든 사랑과 존경은 신앙생활의 연장이 됩니다. 그렇게 가정 안에서 하느님의 선물에 대한 감사와 존경과 순종이 넘쳐나게 되면 교회 공동체 안에서 공적으로 찬미와 영광을 드릴 때는 더더욱 큰 사랑을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온전히 그리스도께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것과 같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에페5,23-24)

     

    또한 배우자가 자신에게 순종한다하여 종처럼 그렇게 함부로 대하고, 학대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따르고 있기에 자신에게 순종하는 배우자를 위해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가정의 권리요 의무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혼인을 성사로 축성하신 것입니다.

     

    2.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5,25-33)

    아내가 주님께 순종하듯 그렇게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과 같이 남편들도 그렇게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5,25)

    둘째,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시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물으셨습니다. 그렇게 당신 뜻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셨습니다. 남편들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고, 아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아내를 어떻게 섬겨야 할지를 하느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르침을 청할 때 부드럽게 대답하시며 가르쳐 주셨듯이 배우자의 질문에 부드럽게 대해야 합니다. 아내를 사랑하기 위해 기도하였고, 아내를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그것은 부드러움과 사랑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남편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얼마만큼 사랑하느냐는 이웃을 얼마만큼 사랑하느냐로 드러납니다.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는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러므로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워한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성장과 성숙과 생존을 위해서 노력합니다. 내가 나에게 이렇게 하고 있다면 나의 배우자에게도 그렇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아내는 남편과 별개의 존재가 아닙니다. 무도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아내가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이고, 아내가 학대를 당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학대를 당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이고, 아내의 기쁨은 주님의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아내와 남편은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한 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에페5,31)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주님 몸의 지체들입니다. 손이 발을 향하여 너는 손이 아니니 필요 없다.”라고 말할 수 없고, 발이 손을 향하여 너는 발이 아니니 소용없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귀한 자녀이고, 주님 몸의 지체들입니다. 한 사람의 기쁨이 모두의 기쁨이고, 한 사람의 고통이 모두의 고통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성사로 결합된 것이 혼인입니다. 그리고 이 혼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그렇게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하고, 교회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순종하듯 그렇게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6. 관리자 님의 말:

    마음이 떠난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요한6,61) 하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떠나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마음이 떠나니까 보고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믿지 못하고 투덜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볼 수 있는 눈이 없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들어도 들을 수 없는 귀를 가졌기에,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귀에 거슬렸던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요한6,61)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숨은 생각까지도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양식이심을 고백하기를 거부하고,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요한6,62)

    믿지 못하는 이들이 부활과 승천을 체험한다면 그들은 어떻게 할까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이들이 살아계신 예수님을 체험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못 믿겠소.”라고 말할까요? 그래서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반문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어야 합니다. 믿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요구하시면서 육적인 생각이 아니라 영적인 생각을 요구하십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요한6,62)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을 받아들이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이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는 사람들이고, 이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기도하는 이들입니다. 영적으로 참되게 기도하기에 눈앞에 펼쳐진 하느님의 구원을 볼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고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지혜와 자신의 지식만을 가지고 판단하고 이해하려 한다면 결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없기에 생명으로부터는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로 내어주실 당신의 몸과 피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듣는 청중들은 그것을 육적인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사람의 살과 피를 먹는 것으로만 생각을 합니다. 사람을 잡아먹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양식으로 주시는 성체(살과 피)는 나의 살과 피와 전혀 다릅니다. 성분은 같지만 서로 다른 흑연과 다이아몬드처럼 그렇게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열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믿으면 됩니다. 믿으면 이해할 수 있고,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요한6,64)

    영적인 삶과 육적인 삶은 다릅니다. 삶이 다르기에 표현되는 것도 다릅니다. 행동은 자신의 생각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삶의 발자국들은 믿음의 발자국과도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내딛고 있는 곳에 자신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 행동은 믿음을 드러내고 있을까요? 아니면 불신을 드러내고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세상적인 것에 의해 판단하거나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 나라를 생각하며 영적인 것에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 불신의 마음이 믿음의 마음으로 바뀌고,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마음들이 주님을 향해 하나로 합쳐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요한6,65)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무리 아버지가 엄하시다 하더라도 자녀가 무엇인가를 한다고 할 때 끝까지 말리시지는 않습니다. 나중에는 잘 해보라고 격려를 해주십니다. 부르심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어떤 자격이 있어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한다고 할 때(사제나 수도자, 평신도, 기타 성소) 그분께서는 말리지 않으십니다. “그래? 그럼 한번 열심히 해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마음이 있다면 그분께서는 이끌어 주십니다. 아버지의 허락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믿음의 생활을 하고 싶어 할 때 하느님께서는 힘을 주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내가 온전히 나를 맡기고 믿음의 은혜를 찾으려 한다면 아버지께서는 나를 이끌어 주십니다. 아버지의 허락은 나의 마음을 전제로 합니다. 억지로 끌고 가시지는 않으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끝까지 존중해 주시는 분, 그분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마음만 있다면 예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만 있다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이끄심에 온전히 맡기지 못하는 것이며, 마음이 없기 때문에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던 그 자체가 하느님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셨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떠나면서 예수님을 탓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의 무딘 마음과 어리석은 머리를 탓해야 합니다. 신앙인들이 성당을 떠날 때는 하느님 때문에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때문에 떠납니다. 알아주지 않아서 떠나고, 상처받았다고 떠나고, 다른 일이 바쁘다고 떠나고…, 결국 하느님 때문에 성당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때문에 성당을 떠나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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