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22주일 주보

 

“순교자 성월”

 9월은 순교자 성월입니다. 순교라는 것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신 분들을 “순교자”라고 하고, 순교를 통해서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을 증거 했기에 “증거자”라고 합니다. 교회에서는 9월 한 달을 순교자들을 기억하면서 그분들의 신앙을 본받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본받고자 성지순례나 순교자의 밤 등을 통하여 신심을 키웁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마태 5,11-12)

 사랑을 하게 되면 다른 모든 것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다른 모든 것들을 하찮게 여깁니다. 세상의 역사 안에서 사랑 때문에 버려진 많은 왕위와 재물과 목숨들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사랑 안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순교자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아낌없이 바쳤던 것입니다. 비록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고, 온갖 사악한 말을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까지도 기뻐했습니다. 사랑에 눈멀었기 때문입니다.





 간추린 한국 교회사

1. 한국의 천주교 전래

보통의 경우, 복음이 전해지게 되는 것은 선교사들에 의해서입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선교사들에 의해서 천주교가 전파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로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서양의 학술서적들이 북경을 오가던 사절단에 의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 마태오 리치의 한문 교리서인 ‘천주실의’가 그 당시 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진리에 목마른 젊은 실학자들이 처음에는 하나의 학문으로 그것을 연구하다가 차츰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교리를 연구하던 몇몇 남인학자들은 마침 동지사가 북경을 방문하는 기회를 이승훈을 사절단의 일원으로 파견시켜 교리를 더욱 깊이 배워오도록 합니다.



이승훈은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1784년에 세례를 받고 서울로 돌아와 이벽(세례자 요한),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 등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천주교는 뿌리를 내리게 되고, 이제 이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게 됩니다.



2. 가성직제도

1786년부터 조선의 초대교회 지도급 인사들은 북경의 교회제도를 본 따서 주교직과 사제직을 맡아 교회의 발전을 도모하였습니다. 이 가성직 제도는 2년간 계속되다가 차츰 그 타당성에 대한 의심이 생겨 북경 주교님께 문의하게 됩니다. 북경의 주교님은 이 가성직 제도를 금지시켰습니다. 이에 조선 교회는 성직자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이처럼 조선 천주교회는 처음부터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찾아 나선 조선인 스스로에 의해서 설립되었습니다.



3. 성직자 영입운동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천주교는 하나의 종교로서 받아들여졌고, 신자들의 모음도 잦아졌습니다. 그러자 조정의 탄압이 시작되었고 계속되는 탄압 속에서도 신자들은 북경의 주교에게 성직자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결과 1794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여 활약하다 1801년 체포되어 순교하게 됩니다. .



4. 조선 교구 설정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다음 조선 교회는 33년간 성직자 없이 지내면서 계속 성직자 영입을 위해 노력하고 교회부흥운동을 펴나가게 됩니다. 이 노력의 결실로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 소주교를 초대 주교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주교는 조선 입국을 시도하다 도중에서 병사하였습니다.



그 후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불란서인인 모방, 샤스땅 신부, 그리고 소주교의 후임인 범주교가 차례로 입국하여 사목활동을 전개합니다. <계속>



5. 지금 나의 모습은?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 발전을 위해서 힘썼던 초대 교회의 신앙인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바라봅시다. ①내가 과연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가? ② 교리서적을 탐독하거나,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있는가?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았기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고, 더 나아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까지 바쳤던 신앙의 선조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입으로만 고백하는 신앙이 아니라, 머리로만 알아듣는 신앙이 아니라, 온 삶으로 고백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신앙인이라면 신앙인이라는 증거를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으로 내 신앙을 증거 할 수 있겠습니까?

이 글은 카테고리: jubonara, 나해 21-30주일, 연중시기(나해), 주보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연중 제 22주일 주보에 1개의 응답

  1. 관리자 님의 말:

    유다인들의 정결례 규정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해서 꼬투리를 잡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는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마르7,2)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기회는 이때다!”하면서 시비를 걸려고 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조상들의 규정을 잘 따르고 있었기에, 그들의 눈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바라보니 불결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7,5)하며 제자들을 조롱하고, 스승으로서의 예수님의 자질을 의심했던 것입니다.

     

    첫째, 유다인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는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어 정결례를 행했습니다(마르7,3).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는 것은 율법학자들에게 있어서는 인정할 수 없는 범죄요, 조상들의 전통을 위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마르7,4). 시장에서는 죄인이나 이방인의 상인과의 접촉을 통하여 더러워질 위험이 컸기에, 시장에서 돌아오면 큰 그릇에다 팔을 팔꿈치까지 담궈서 정결례를 행했습니다. 물이 귀한 지방에서는 이런 정결례를 거행하기가 어려웠지만,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런 정결례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가령 4마일(6.4키로)을 걸을지라도 고생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셋째,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마르7,4)입니다. 가정에서 쓰는 그릇을 깨끗하게 하는 규정은 나무 또는 쇠붙이 잔, 접시에 한정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부정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질그릇은 부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규정들은 좀 더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기 위한 율법의 해석으로서 율법학자들에 의해 결정된 것이지 모세의 율법은 아니었습니다. , 만지는 음식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모든 식사에 앞서서 손을 씻어 깨끗이 한다는 규정은 모든 유다인이 인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 대부분은 이 규정에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레위기 11장 이하에는 정결과 부정에 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러나 손을 씻는 일에 대한 규정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들에게만 국한된 것이며, 일반인들의 사생활을 규제하는 규정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에 기록되지 않은 규정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사제들이 하도록 명령된 행위를 모든 유다인들에게 지키게 하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생각에 크게 반발하고 대립하였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조상들의 규정을 잘 따르고 있었기에, 그들의 눈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바라보니 불결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7,5)하며 제자들을 조롱하고, 스승으로서의 예수님의 자질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2. 관리자 님의 말:

    정결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정결례를 가지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죄인으로 단정하고, 예수님께 시비를 걸어오자 이사야 예언자의 말로서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르7,6)

    즉 입술로는 하느님을 공경하고 있지만 마음은 하느님께로부터 멀리 떠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며 공경한다고 입으로 말은 하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다는 것입니다. 손을 씻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고, 씻은 손으로 혼자만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 밥을 먹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 중요합니다. 포장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포장지 안에 담겨 있는 선물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고 가르친다고 하면서 이들은 형식에만 집착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보기에는 일반 백성들은 모두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대충 밥 먹고 일하러 나가야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정결례 규정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밥을 먹고 다시 그 힘으로 일을 하는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더욱 기쁜 일 아니겠습니까?

     

    이어서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빌려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말씀해 주십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마르7,7)

    백성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백성의 지도자라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야지 사람들의 규정을 지켜야 할 교리로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르치는 규정들을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르쳐서는 안 되고, 사람들의 규정이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가르치면 어느 순간 말로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마음은 떠나가게 만들어 버립니다.

     

    가끔은 본질적인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함께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이 모여서 함께 전례를 거행한다면, 하느님 백성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전례를 거행하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강조하다보면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전례의 경건성도 떨어뜨립니다. 귀한 시간을 내어 귀한 전례에 참례하여, 귀한 은총을 받고, 귀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인간적인 것들이 작용하여 그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미사 중에 잡담을 하거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 옆에 있는 이가 미사에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미사 중 강론이 복음과 동떨어진 이야기라면 경건하게 미사에 참례하기 어렵고, 공지사항 시간에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을 장황하게 이야기하게 될 경우에는 미사 중 받은 은혜를 모두 잊어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형식적인 모습과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고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7,8)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공격적으로 들릴 것이고, 구약 자체도 공격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다교를 부정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의 사고는 하느님 말씀보다는 조상들의 전통 위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때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음식은 깨끗합니다. 유다인들이 정한 규정들은 인간들의 규정들일 뿐,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은 아닙니다. 마카베오서에서 보면 돼지고기를 먹기보다는 죽음을 택한 늙은 엘르아잘의 영웅적인 정신이나 일곱 아이를 둔 어머니의 순교 이야기에서 음식은 먹음으로써 부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을 먹음으로써 하느님을 배교하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었기에 목숨을 걸고 먹지 않겠다고 거절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음식은 감사하게 먹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거나 부정하게 하는 것은 물질이나 음식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요빠에서 베드로 앞에 여러 가지 짐승을 담은 보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먹으라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베드로는 두려워한 나머지 자기는 더러운 것을 먹은 일이 없다고 외칩니다(사도10,14). 보통 유다인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깨끗함과 더러움은 사물에 붙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사고방식을 배격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깨끗함과 더러움의 근원은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나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고, 나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어떻게 수행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특히 생각과 말과 행위가 나를 어떻게 더럽히는지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은 내가 나를 부정하게 만들고, 불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들을 알려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내 안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나에게서 나오는 더러움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마르7,21-22)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나온다고 가르치십니다. 온갖 악한 생각과 악한 행동은 음식이나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있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면 결국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볼 수가 없고, 다른 이들에게 상처와 아픈 마음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잘못과 부정함은 내 안에서가 아니라 상대방에게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보지 못하고, 내가 하느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내 안에서 나오는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 가지 악한 행동들과 생각들을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더럽혀 지는 것입니다.

     

     

  3. 관리자 님의 말: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의 말씀을 듣고서 그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이 사랑할 때, 실천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야고보는 인내의 열매를 통해서 의로움을 실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것을 알아 두십시오. 모든 사람이 듣기는 빨리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 사람의 분노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현하지 못합니다.”(야고1,19-20)

    인내의 열매를 맺은 이들은 자신 안에서 터져 나오려는 분노를 조절할 줄 압니다. 부당하거나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 누구나 속에서는 분노가 터져 나옵니다. 그러나 인내의 열매를 맺은 이들은 그 분노의 화산의 입구를 기도와 자비와 의탁이라는 무거운 돌로 눌러 놓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내와 의로움으로 자신의 감정을 통제한 이들은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고 공손하게 하느님의 귀한 자녀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을 다 벗어 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야고1,21) 라고 말씀하십니다.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들어야 합니다. 내가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 방식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할 때는 내가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해 나가는 것입니다.

    또한 신심은 하느님을 향하는 마음을 가짐으로써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려는 신앙인의 자세를 말합니다. 그래서 신심을 가진 이들은 하느님만을 향하려 하며, 그리스도만을 온전히 따르려 합니다. 그리고 희생과 봉사, 기도와 신심생활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스스로 신심이 깊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아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 사람의 신심은 헛된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야고1,26-27)

     

    나의 신심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귀한 자녀인 내가 하느님의 자녀답게 인내하며 의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께 영광 드리는 내가 되어 봅시다.

     

  4. 관리자 님의 말:

    순교

    순교란 하느님을 위해서, 믿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순교란 단순히 신앙을 증거 또는 증언만을 뜻함이 아니라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신앙의 증거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적 순교는 엄밀히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첫째, 실제로 죽음을 당해야 합니다. 둘째, 그 죽음이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진리를 증오하는 자에 의하여 초래되어야 합니다. 셋째, 그 죽음을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진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교회가 순교를 성스럽고 거룩하고 고귀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순교가 그 무엇보다도 분명하고 명확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이며, 예수님을 닮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순교자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교자가 자신에게 모진 고문을 가하고, 생명을 빼앗아 가지만 예수님께서 폭력으로 저항하지 않으신 것처럼, 순교자들도 박해자들에게 저항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고통과 생명까지도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했기에 교회는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본받고 그분들의 신앙을 높이 기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인은 언제나 순교할 준비를 갖추고 살아야 합니다. 특히, 순교자 성월 동안에는 선조들의 순교정신을 본받고 생활하면서 신앙 쇄신의 계기로 삼고자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순교자들은 갑자기 체포되어 모두가 단 칼 아래에서 영웅적으로 순교하신 것은 아닙니다. 모진 시련과 고문과 배교의 유혹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죽음까지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끊임없이 기도했고, 늘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련하고 단련해야 만이 위기의 순간에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우리의 순교자들도 일생을 두고 순교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살아왔기에 순교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오로지 마음을 주님께로만 향했기에 어떤 일이 주어져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순교자들은 매 순간순간을 순교하는 마음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순교정신을 늘 마음에 품고 있었기에 그들이 체포되거나 혹은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야비하고 폭력적인 관리들 앞에서도 비폭력과 무저항으로 당당하게 순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순교자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지만 신앙의 자유를 한껏 누리며 서로 친교를 나누고 사도시대의 초대 공동체의 모습으로 살아왔습니다. 박해가 크면 클수록 신자가 증가하는 놀라운 사실은 순교자들의 삶의 자세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여 순교자들의 삶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순교정신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기억하며, 일상 삶 안에서 언제나 주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 봅시다.

  5. 관리자 님의 말:

    오늘날의 순교 정신

    우리나라의 순교자들은 여러 가지 수많은 덕행과 선행을 실천하였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웃과의 사랑입니다. 극도의 가난 속에서 살면서도 가난한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내어줄 수 있었던 분들이 바로 우리들의 순교자이십니다. 그리고 받아들임입니다. 불의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주님을 위해서는 받아들임의 삶을 살아왔고, 하느님을 원망하는 기색이나 추호의 불평도 없었으며, 오히려 그러한 환경에 처할수록 교우들끼리 서로 돕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갔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수많은 덕행과 선행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돕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사랑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불평불만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멋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의로움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가정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덕행과 선행, 사랑과 격려,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환경과 가족구성원들을 받아들임은현대의 순교정신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이 그러하셨듯이, 우리보다 먼저 신앙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따랐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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