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를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비유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나아오는 어느 누구도 차별대우 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시자(작은아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큰 아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주님께서는 죄인을 단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죄인들과 함께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백성의 목자들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백성들을 돌보기 위해서는 죄인들과 함께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시는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예수님께서는 탕자의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려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이를 사랑하시지만 죄인의 회개를 더더욱 원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탕자의 비유는 두 형제를 선인과 악인으로 구분하려는 의도를 지닌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선하심과 사랑을 알리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은 두 아들(회개한 죄인,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 아버지와 함께 기쁨을 나누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죄인들까지도 받아들여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고, 더 나아가 모두 아버지의 마음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2.1. 죄인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께 투덜거리는 백성의 지도자들
예수님께서는 세상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구원을 갈망하던 이들은 모두 주님께로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루카15,1)하고 투덜거렸습니다.
선한 사람 아흔 아홉도 중요하지만 죄인 하나의 회개를 원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예수님께서는 전하시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죄인과 함께 있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잃었던 양 한 마리의 비유와 잃었던 은전의 비유와 그리고 오늘 복음의 돌아온 탕자를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비유를 드십니다.
2.2. 돌아온 탕자를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비유
① 재산을 요구하는 작은 아들
어떤 사람에게 아들 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루카15,12)하고 아버지께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중동 지방의 사람들에게 한 신부님이 탕자의 비유를 들면서 이렇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당신네 마을에서 이제까지 누군가가 그와 같은 요구를 한 적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런 요구를 할 수는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만약에 어느 누군가가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당연히 그의 아버지는 그를 때렸을 것입니다.”
“왜지요?”
“그의 요구는 한 마디로 자기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다는 그런 뜻이니까요.”
아버지의 재산은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그것을 통해서 편안함을 누릴 권리가 당연히 있습니다. 모든 수익은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물려주는 것이 바로 유산입니다. 그 유산은 부모가 돌아가셔야 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라는 것은 “아버지, 아버지가 죽지 않아서 아버지의 재산을 쓸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를 기다렸지만 돌아가시지 않으니, 나중에 저에게 돌아올 몫을 미리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그렇게 모욕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들을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아도 부모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자녀들이 있습니다. 부모에게는 관심이 없고, 부모의 재산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가정을 파괴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또 재산 때문에 자녀들이 갈라서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②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나는 작은 아들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은 작은 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습니다. 그는 아버지 곁에서 행복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꿈을 막고 있다고 생각을 했고, 그렇게 아버지를 떠난 것입니다. 그는 먼 고장에서 자신의 꿈을 펼쳐보고 싶었습니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루카15,13)는 말씀처럼 그는 그곳에서 자기 멋대로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방탕한 생활의 끝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파산과 거지꼴입니다.
③ 빈털터리가 된 탕자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루카15,14), 즉 흥청망청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였을 즈음에 설상가상으로 그 고장에는 심한 기근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벌지 않은 재산이었기에 더욱 쉽게 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거지꼴이 되었을 때, 그는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 이방인을 반길 사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돈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친구들이 탕자의 돈을 보고 그를 반겼고, 탕자는 그들이 자신의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돈이 떨어져 버린 그에게 남아있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탕자는 이제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일은 “돼지를 치는 일”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돼지를 불결한 동물이라고 생각을 했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인이 돼지를 친다는 것은 더 이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 떨어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④ 비참함
부잣집 작은 아들이 거짓된 자유를 찾아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 방탕한 생활을 했고, 마침내 거지가 되었습니다. 가장 비참한 처지로 떨어져 돼지를 치게 되었는데,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루카15,16) 그것조차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받은 수입으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것입니다.
⑤ 비참함 속에서 정신 차린 탕자
비참한 처지에 떨어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탕자는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루카15,17)하며 자신의 처지를 보게 되고,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후회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께 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려 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루카15,18-19) 똥줄이 타야 기도가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에게 절박한 상황이 닥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탕자가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자신은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절망 속에서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가 진정으로 행복한 시기임을 아버지를 떠나와서 알게 된 것입니다. 시편에서 “정녕 당신 앞뜰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습니다. 저의 하느님 집 문간에 서 있기가 악인의 천막 안에 살기보다 더 좋습니다.”(시편 84,11) 라고 노래하는 것처럼, 탕자는 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아버지께로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몰랐고, 예수님의 사랑을 몰랐기에 스스로 목을 맸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돌아왔습니다. 생명을 택했습니다. 나도 이런 처지에 자주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해야 할 것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비록 죄 중에 있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임을 깨닫고, 용서를 청하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타지에서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이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거나, 집에 갈 때는 “용돈이 떨어졌을 때”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전화를 드리면 부모님은 반가워하시고, 또 용돈도 듬뿍 보내주십니다. 자녀들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바로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주고도 혹시 덜 주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분이 바로 부모님이십니다. 그것밖에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하시는 분이 바로 부모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보다 헤아릴 수 없는 만큼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하느님 아버지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⑥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
비참한 처지에서 탕자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는 아들을 보았습니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루카15,20)는 것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알아보았다는 것이고, 언제나 늘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배은망덕한 아들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시편 137편에서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 버리리라. 6 내가 만일 너를 생각 않는다면 내가 만일 예루살렘을 내 가장 큰 기쁨 위에 두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리리라.”(시편137,5-6)라고 노래하는 것처럼, 아버지는 아들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학수고대. 아버지는 매일 아들을 기 다리고 있었습니다. 대전의 전민동 성당 외벽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이 부조로 되어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웬 기린을 그려놨냐고 말을 한다고 합니다. 작가는 아버지의 목을 기린의 목처럼 그렇게 길게 그려놓았습니다. 아마도 작가는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그런데 정말 기린처럼 보이긴 합니다.^*^).
⑦ 탕자의 고백
아들은 아버지에게 잘못을 고백합니다.“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카15,21) 아들은 이렇게 아버지께 용서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자격이 있어서 아들이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어떤 조건을 걸고 아들로 받아들이는 아버지도 없습니다. 아들은 비록 아버지에게 조건이 있을지언정, 아버지는 아들에게 조건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자격이 있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조건을 붙이시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나아오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반겨 주십니다.
⑧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가슴에 큰 못을 박고 집을 떠났다가 거지꼴로 돌아와 용서를 청한 아들이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것만을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것만을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습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루카15,22) 비록 잘못했지만 아버지는 사랑으로 안아 주십니다.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가장 좋은 옷”은 위대한 인물만이 입을 수 있는 것으로 발목까지 내려오는 길이의 넓은 값진 옷을 의미합니다. 또한 반지는 특별한 권위와 명예의 표시입니다. 신발은 자유인의 표시입니다. 종들은 맨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 주는 것”은 “아들을 용서하고 아들에게 본래의 권리와 지위를 다시 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⑨ 아버지의 기쁨
이제 기쁨의 잔치가 시작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는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명령합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15,23-24)
이 말씀을 가지고 묵상 나누기를 하는데 어느 형제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송아지가 되어 보았습니다. 송아지는 탕자 덕분에 죽게 되었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이와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잔치를 위해 내가 희생되는 것은 좋지만 시간이 지나고 탕자의 배에 기름기가 끼면 또 나갈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죽어야 하는가…, 어차피 저 탕자는 또 나갈 사람 같아 보이는데…,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십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⑪ 화가 난 큰아들
들에 나가 있던 큰아들이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루카15,27) 그러자 큰 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속상할 만도 합니다. 가족이 필요 없다고 뛰쳐나간 동생은 형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동생을 위해서 잔치까지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형이 동생을 사랑했다면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동생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아무리 가족이 필요 없다고 떠나버린 동생이라 할지라도, 더 나아가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거지꼴로 돌아왔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사랑한다면 다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⑫ 아버지와 큰아들
큰아들이 화가 나서 집안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자 아버지가 나와서 큰아들을 타이릅니다. 지금 돌아온 이가 바로 너의 동생이라고, 그리고 네가 내 아들인 것처럼, 그도 내 아들이라고…, 하지만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큰아들은 이제 자신이 서운했던 감정을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루카15,29) 이 불평을 통해서 큰 아들은 아버지를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주인처럼 섬기고 있었고, 아버지를 두려워하며 염소새끼 하나 잡아먹지 못하는 그런 종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를 비난합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15,30) 큰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생을 향해서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아버지의 아들, 그래서 “저 아들”(루카15,30)로 부릅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더 나아가 큰 아들은 아버지의 행동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큰 아들이고, 아버지의 모든 재산은 바로 그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두 자신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동생을 받아들인 아버지의 행동 때문에 자존감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⑬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옹졸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큰 아들에게 자신의 진심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따뜻하게 큰아들을 부릅니다.“얘야,”(루카15,31) 그리고 큰아들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15,31) 그리고 “너의 저 아우”(루카15,32)라는 말씀을 통해서 탕자가 형의 동생임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기뻐하며 잔치를 벌려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일러줍니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15,32)
이렇게 아버지는 큰 아들이 바로 아버지의 소중한 아들임을 드러내며, 거지꼴로 돌아온 동생이 바로 큰 아들의 아우임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그 동생이 죽었다가 살아났음을 알려 줍니다. 형을 버리고, 아버지를 버리고 죽음의 길로 향했지만, 이제 다시 돌아와 생명의 길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버지는 기뻐하고 있음을 알립니다.
2.4. 세리들과 죄인들의 회개를 기뻐해야 하는 백성의 지도자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은 백성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가르치고, 백성들이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목자의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죄인들이 회개하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까지 비난을 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한 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아버지와 철없던 작은 아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고 동생을 인정하지 않는 큰 아들의 이야기 안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자신들이 큰아들과 같은 모습임을 인정하고,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동생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지도자로서의 삶이고, 백성들의 목자로서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비난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예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2.5.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나의 삶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 또한 아버지와 같은 마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① 아버지의 가슴에 비수를 꽂으며 재산을 달라는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준 아버지. ② 그럼에도 불구하고“언제나 돌아오려나?” 하며, 늘 학수고대 하며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 ③ 거지꼴로 돌아온 아들에게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으며, 질책하지도 않으셨던 아버지. ④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 주며, 신발을 신겨 주신 아버지, ⑤ 그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며 잔치를 벌려주신 아버지. ⑥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큰 아들의 마음에 사랑을 호소하는 아버지. 이런 아버지의 모습으로 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 돌보며, 하느님 나라를 향해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